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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지식 백과 사전 스크랩 문화재 신라금관의 기원을 밝힌다
푸른날개(푸른샘) 추천 0 조회 327 13.06.26 17: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임재해교수의 강연내용)

신라금관의 기원을 밝힌다

 

 

 

 

신라는 금관 왕국이라고 할 만큼 일정한 양식의 금관이 경주 지역에 집중 분포되어 있는데도, 금관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시베리아의 철제 무관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여기 신라의 수도 경주에 있는 금관의 정체와 원형이 시베리아 초원지역 샤먼의 모자에 있다고 탄탄히 믿는 까닭이다. 그 결과 신라 김씨 왕실의 시조를 알타이족에서 찾는가 하면, 아예 신라 왕들을 무당 왕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5세기 신라 금관의 기원을 19세기 민속품인 시베리아 무관에서 찾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모순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연대기적 연구에 이력이 난 사학자들이 금관의 기원에 관한 한 연대기의 선후조차 무시한 채 후기 자료를 근거로 기원을 주장하는 당착에 빠져 있다. 그런데도 어느 누구 하나 이 결정적인 모순을 지적하지 않는다.

 

시베리아 샤먼의 모자는 금관도 왕관도 아니다. 철제 모자이자 무당의 관모라는 점에서 아무래도 금관의 기원설로 한계가 있다. 그런 한계를 의식한 탓인지 시베리아 기원설에 대한 아무런 성찰도 없이, 아프가니스탄이나 카자흐스탄, 또는 흑해 주변의 금관에서 원류를 찾는 연구들이 이어진다. 틸리아 테페 금관이나 이씩 금관, 사르마트 금관이 신라 금관의 원류라며 새 전래설을 제기한 것이다. 이 금관들 또한 재질의 동질성을 지닐 뿐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전파론을 입증할 만한 논거를 마련하기 어려운 것이다.

관모의 양식부터 신라 금관과 다른 데다가 역사적으로 400년 이상 차이가 날 뿐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이 지역과 경주 지역은 유라시아 대륙의 두 끝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시베리아 에네트족 무당모자                카자흐스탄 이씩고분 출토 모자

 

 

 

 

시베리아 샤머니즘 관련 유물들

 

 

유라시아 대륙의 두 극단에 있는 서로 다른 문화권의 금관을 두고 지리적 공백을 이어줄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전파론을 펴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이다. 전파론의 기본적인 준거인 계속의 준거조차 충족시킬 수 없는 까닭이다.

 

신라 금관의 고유한 양식은 한반도 안에서도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면서 일정한 분포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신라는 금관 왕국이며 경주는 금관의 수도로 규정해도 지나치지 않다. 더군다나 신라 금관은 고구려와 백제의 금관 양식과 다른 독창성을 지녔다.

 

고구려와 백제 금관도 독창적이다. 세 나라 금관의 독창성 때문에 한반도 내의 관모들도 특정 금관을 원형으로 설정하고 전파과정을 설명하는 일이 쉽지 않다. 실제로 그런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도 않았다.

중앙아시아 세 나라의 금관들 또한 어느 것이 원형인지 또는 어디서 전파되었는지 밝히는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같은 지역 같은 문화권에 있는 금관들조차 무엇이 원형인지 어디로 전파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동떨어져 있는 지역의 금관을 두고 영향을 받은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라 금관의 중앙아시아 원류설은 최소한의 논거조차 갖추지 못한 견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두 지역 금관들을 비교 분석해 보면 관모의 구조나 세움장식의 양식이 영향관계를 인정할 만한 동질성을 찾을 수 없다.

 

신라금관의 이중 구조-외관과 내관

 

 

신라 금관은 세움장식을 갖춘 겉관과 절풍 양식인 속관의 이중구조로 이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세움장식이 계림의 신성한 숲을 상징하는 나무 모양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리고 세움장식의 역사적 발전과정이 논리적 체계를 이루며 일목요연하게 포착되고 있다. 게다가 절풍 양식의 속관은 고조선 이래 우리 관모사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으며, 세움장식의 겉관은 신라 초기 김알지 신화의 계림을 상징하는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 금관의 모든 세움장식은 계림을 상징하는 신수를 양식화하여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김알지 신화의 세계관을 근거로 창출된 금관의 양식은 역사적 발전단계를 체계적으로 잘 보여준다.

계림의 신수를 나타내는 세움장식의 양식이 그 열쇠이다. 세움장식은 흔히 나뭇가지라고 하는 1) ‘곧은 줄기 곧은 가지’에서, 출자 모양 또는 직각수지형이라고 하는 2) ‘곧은 줄기 굽은 가지’, 사슴뿔 모양이라고 하는 3) ‘굽은 줄기 곧은 가지’ 양식으로 발전되어 왔다. 다시 말하면 1)의 기본형에서 2)의 가지 변이형, 3)의 줄기 변이형으로 변화 발전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세움장식의 가지 끝마다 나무의 자람점과 생명력을 상징하는 ‘움’이 봉긋하게 돋아 있고 신수에는 나뭇잎과 태아를 상징하는 달개와 곡옥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계림의 금궤도

 

 

그런데 금관의 기원을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찾는 학자들은 ‘굽은 줄기 곧은 가지’ 모양 세움장식을 사슴뿔이라고 한다. 그리고는 사슴뿔 한 쌍을 모자의 정수리에 부착해 놓은 시베리아 샤먼의 무관에서 신라 금관이 기원했다고 주장한다. 사슴뿔에 왜 새 순을 상징하는 ‘움’과 나뭇잎, 그리고 태아 모양이 달려 있을까. 기막힐 노릇이 아닌가.

더 기막힌 일은 줄기 변이형 세움장식이 사슴뿔이 아닌 것은 물론, 3)의 유형인 굽은 줄기 곧은 가지 양식은 신라 금관의 가장 후기에 나타난 양식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가장 후기에 만들어진 세움장식을 근거로 금관의 기원을 말하는 모순된 주장이 거듭되어도 학계에서 아무런 문제 제기가 없다.

 

시베리아 샤먼 기원설을 따르면, 무관의 사슴뿔을 본받아 가장 발전된 양식의 세움장식을 먼저 만들고, 이어서 기본형이자 초기형인 나무 모양의 세움장식을 만들었다고 하는 억지를 인정해야 한다. 그 동안 이런 억지 주장이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정설처럼 통용되어 왔다는 점이 더 문제이다.

 

더 심각한 일은 신라 금관을 왕이 생전에 쓴 왕관이 아니라 부장품으로 조잡하게 만든 장례용 데드마스크라는 주장이 일반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왕이 쓰는 의전용 관모와 얼굴을 가리는 가면조차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학계의 수준이다.

잘못된 연구 탓에 경주박물관 홈페이지에서는 금관의 설명을 사슴뿔에서부터 시작하고, 천마총 안에서는 안내자들이 금관을 주검의 얼굴을 덮어 가리는 데드마스크로 설명하고 있다. 정말 금관은 머리에 쓰는 관모가 아니라 얼굴을 가리는 가면인가? 신라인들의 창조적 문화유산인 금제 왕관을 시베리아 샤먼의 모자에서 원류를 찾는 것조차 모자라서, 이제는 아예 왕관 취급을 하지 않고 조잡한 부장품용 가면으로 격하시키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연구사에서 더 뼈아프게 성찰해야 할 문제는 이러한 기막힌 해석들조차 어느 하나 우리 학계의 독창적인 연구성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일본학자들이 주장해 온 북방문화 전래설과 주검에 사용된 부장품이라는 해석을 고스란히 존중하며 더 풍부한 논거로 부연 설명하는 데 만족하고 있는 수준이다.

당시의 식민사학은 우리 문화와 민족의 정체성을 부정하느라 북방문화 전래설과 북방민족 도래설을 펴는 데 골몰했다. 따라서 일본학자들은 구석기 시대를 부정하는 동시에 고조선의 역사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신라 금관을 비롯한 고대문화를 한결같이 시베리아 기원설로 묶어 두었다. 선사시대 암각화에서 현재의 굿 문화에 이르기까지 우리 학계는 그들의 주장을 답습하느라 시베리아 기원설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최근 연구는 시베리아 기원설에서 몽골기원설 또는 몽골경류설로 정교화 되거나 중앙아시아 기원설로 확대되고 있다. 고대문화는 어느 것이나 시베리아 샤머니즘과 유목문화가 문화적 원천인 것처럼 도래설과 전래설을 되풀이할 따름이다. 해외여행과 외국답사가 자유로워지자, 그 동안 제기되지 않았던 문화현상까지 몽골문화 기원설이나 바이칼 원류설을 새로 주창하는 경향까지 나타난다. 그러므로 21세기 한국학 일부는 여전히 식민시기 일본인들의 시베리아 기원설을 부처님 손바닥처럼 여기며 그 안에서 맴돌고 있는 셈이다.

자기 문화를 보고도 자기 문화인 줄 모르니, 일본이 역사왜곡을 하고 중국이 동북공정을 해도 학문적 대응 역량을 도무지 갖추지 못한다. 우리 스스로 우리 역사와 문화는 물론 민족적 혈연까지 북방의 여러 민족들과 초원지역 유목문화에 가져다 받치는 연구를 거듭하고 있는 처지가 아닌가.

이제라도 눈을 바로 뜨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 학문의 틀을 바꾸어야 한다. 역사와 문화를 보는 눈길을 바로잡아야 한다. 일제 강점기 이후 통념화된 교과서적 지식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식민사학의 패러다임을 무너뜨려야 우리 문화를 제대로 읽을 수 있다.

 

 

임재해교수.jpg

 

 

임재해(林在海)교수 약력

 

영남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안동대학교 국학부 및 대학원 민속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안동대학 박물관장, 한국학연구원장, 한국구비문학회장, 비교민속학회장, 한국민속학술단체연회회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등을 역임하고, 현재 전통마을 BK21 팀장, 안동문화지킴이 등의 일을 함께 하고 있다.
  
저서로는

<민속문화론>(문학과지성사, 1986) 

<설화작품의 현장론적 분석>(지식산업사, 1991)   

<한국민속과 오늘의 문화>(지식산업사, 1994)

<민속마을 하회여행>(도서출판 밀알, 1994)

<한국민속학과 현실인식>(집문당, 1997).
 <지역문화와 문화산업>(지식산업사, 2000).
 <지역문화, 그 진단과 처방>(지식산업사, 2002).
 <민속문화의 생태학적 인식>(도서출판 당대, 2002).
 <민속문화를 읽는 열쇠말>(민속원, 2004).
 <민족신화와 건국영웅들>(민속원, 2006). 
 <마을민속 조사연구 방법>(민속원, 2007). 
 <신라 금관의 기원을 찾는다>(지식산업사, 2008).
 <안동문화의 전통과 창조력>(민속원, 2010) 등 28 책이 있다.
     

편저로는

<한국의 민속예술>(문학과지성사, 1988).
<한국민속연구사>(지식산업사, 1994).
<한국민속사입문>(지식산업사, 1996).
<국학의 세계화와 국제적 제휴>(집문당, 1999).
<국보 하회탈 그 한국인의 얼굴>(민속원, 2005).
<고대에도 한류가 있었다>(지식산업사, 2007) 등  26 책이 있으며, 모두 3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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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평은 {新羅史學報} 14, 신라사학회, 2008, 319-328쪽에 수록된 것입니다.

김알지 건국신화 속에서 탄생한 신라금관 

                                       임재해, ≪신라 금관의 기원을 밝힌다≫

 

                                                                                                                     李 松 蘭

 

금관의 내관(속관 또는 모관이라고도 함)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신라 금관은 일반 대중뿐 아니라 학계에서도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고고학, 미술사, 역사 분야에서 많은 연구 성과들이 집대성 되어 있는 신라 금관에 대해 2008년에 주목할 만한 새로운 저서 2권이 출간되었다.

민속학자인 임재해 교수가 쓴 ≪신라 금관의 기원을 밝힌다≫와 복식 학자인 박선희 교수가 쓴 ≪우리 금관의 역사를 밝힌다≫가 바로 그것이다. 지식산업사에서 출판된 두 책 모두 북방에서 그 원류를 찾는 기존의 연구 성과를 과감히 탈피하여 신라 금관의 고유성을 고찰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임재해 교수의 ≪신라 금관의 기원을 밝힌다≫를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는 이 책의 서두에서 집필 목적을 네 가지로 서술하고 있다.

첫째는 근대기에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선행된 시베리아 무관의 기원설을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금관의 기원을 신라 문화 속에서 주체적으로 규명하고

둘째는 신라 금관이 부장용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왕관이라는 것을 규명하기 위한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밝혔다.

셋째는 금관의 쇠퇴시기를 기존의 의견과는 달리 진덕여왕의 재임시기인 7세기까지로 확장하고

넷째는 금관 연구를 매개로 전파설에 매몰된 민족 문화 기원론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함과 동시에, 시베리아의 종교적 직능자의 모자에서 유래하였다는 기존의 논지를 반박하고 건국신화인 김알지 신화와 연결하여 금관의 입식을 김알지 건국신화에 나오는 신성한 계림을 상징하기 위한 것임을 규명하겠다고 했다.

 

이 책은 그간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저자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한 내용들이 녹아 있다. 참고문헌에서 알 수 있듯이 본인의 전공인 민속학뿐 아니라 고고학, 미술사, 역사학 등 다양한 영역을 세세히 섭렵한 점도 돋보인다. 임교수의 비판과 같이 미술사의 시각에서 신라 금관의 기술적 계보를 외래문화에서 찾았던 필자가 과연 이 책의 서평의 적임자일지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민속학에 큰 획을 긋고 있는 임재해 교수의 책을 기회로 새로운 연구 방법론을 배우는 자세로 서평에 임하고자 한다.


금관총의 위치(일제시대 그림)


Ⅱ.
우리 신라 금관의 조형적 특수성과 아름다움을 알아차린 것은 외국학자들이었다.

금관이 처음 알려지게 된 것은 1921년 경주 노서리 봉황대 주변의 민가에서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발견된 금관총에서 금관이 발굴되면서부터이다. 이미 파괴되어 정식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금관이 발견되어 금관총이라 명명된 이 무덤의 보고서는 1924년 발간되었다. 1924년 금령총에서 그리고 1926년 서봉총에서 연달아 금관이 발견되면서 신라 금관의 존재가 세계에 알려졌다. 서양인으로 신라 금관을 주목한 분은 초대 국립박물관의 관장을 지내신 김재원 박사(1909~1990)를 사사한 바 있는 벨기에 켄트 대학의 헨체(C. Hentze) 교수이다.

그는 신라 금관의 사슴뿔을 샤만 관에 장식된 순록뿔에 비교하여 죽음을 맞은 귀족이나 왕족의 머리에 착용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신라 금관을 샤만 권위의 상징으로 이해한 그의 의견은 한국학계에서도 적극 수용되어 관에 장식된 나무와 사슴의 상징성과 관의 계통에 대한 연구들이 계속되었다.
특히 신라관을 북방 시베리아 관과 비교하는 관점은 마립간 시대를 연 김씨 집단의 계통을 북방 민족으로 해석하는 관점과도 연결되었다.

또한 마립간 시대의 묘제인 적석목곽분의 연원을 북방 시베리아의 쿠르간(Kurgan)묘에서 찾는 고고학적 성과와도 맞물려 있다. 고고학에서는 관을 비롯한 금속장식품을 지방통치와 관련된 유물로 보고 신라의 지배 영역과 관련하여 논의하기도 하였다.

 

이 글은 신라식 관이 경주 이외에 신라 영향권에 편입된 부산 복천동이나 대구 ? 경산 등의 변경 지대에서 출토되는 것에 주목하여 시기와 지역의 분포상을 분석하여 신라가 변경을 지배하는 방식의 차이를 해석한 것이다.
또한 금속공예의 측면에서 관의 조형적 기술적 계보를 찾는 연구들도 있다. 1979년 빅토르 사리아디니디(Victor Ivanovich Sarianidi)의 새로운 발굴성과를 입수하여 아프가니스탄 틸랴 테페(Tillya-tepe)의 수지형 관식과 신라관을 비교한 연구가 있다.

이 글에서는 금을 두드려서 얇은 판을 만든 다음 끌과 망치를 이용하여 나뭇가지 형태로 오리고 그 표면에 보요를 장식한 기술적 기법을 주목하였다. 이 글에서 지적된 기술적 계보는 3~4세기 요녕 지역 선비족의 보요관식과 고구려의 관식을 중간 연결 고리로 삼아 1세기의 틸랴 테페의 수지식 관과 5세기 신라관의 시공간을 해결하는 연구로도 확장되었다.

 

다른 한편 신라식 관으로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판단되는 황남대총 남분의 금동관 수하식을 구성하고 있는 금환연접 공심다면체(金環連接 空心多面體) 구슬은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 남조로 이어지는 기술적 계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여 신라 금공 기술의 계보가 북방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신라 금관의 용도에 대해서도 장송용과 의례용이라는 의견으로 크게 나뉜다.

헨체 교수를 비롯하여 일본의 하마다 세료(濱田靑陵), 마노메 쥰이치(馬目順日), 이한상 교수 등이 장례용 부장품이라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이와는 달리 지배자를 초자연적인 존재와 연결시키고 그 권력을 정당화시키려는 사회 통합적 기능을 수행한 특수의례인 시조묘 의례에 사용된 것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Ⅲ.
700쪽이나 되는 방대한 내용이 담긴 이 책은 모두 5부 23장 86절의 세부 항목으로 나누어져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금관 연구의 현실과 역사적 상황,

제2부는 금관 연구의 방법과 현장론적 문제인식,

제3부는 건국신화에서 찾는 신라 금관의 뿌리,

제4부 금관의 구조와 세움 장식 뜯어보기,

제5부는 전파론적 비교 연구와 금관 문제의 해석을 다루고 있다.

다소 같은 내용들이 중복된 감이 없지 않지만 중요한 논지들을 추리자면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먼저 신라관의 원류와 관련한 논지이다.

 

임교수는 기존의 의견들을 전면적으로 반박하며 신라 금관은 시베리아 무관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 우리나라 전통적인 관모인 절풍에서 발전한 것으로 주장하였다.

신라 금관은 세움 장식을 한 겉관과 절풍 양식을 한 속관의 이중 구조로 보며, 절풍형 속관은 고조선 이래의 전통적 모자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신라 금관과 시베리아 무관과의 차이점을 형태적으로 비교 분석하기도 하였고, 시베리아 유목민의 떠돌이 생활에 따라 신을 찾아 이계로 떠나는 시베리아 샤먼의 무속과 농경민의 정착 생활에 따라 이계의 신을 불러오는 우리 굿 문화와의 구조적 차이를 치밀히 분석하여 그 근거자료로 제시하였다.

 

임재해고수의 금관 장식물 의미 (서봉총금관)

 

다음으로는 신라관의 시작 시점과 도상의 해석 문제이다. 저자는 신라 금관이 눌지왕 때에 창안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신라에서 황금문화는 2세기부터 시작되었고 기존의 황금문화의 토대 아래 김알지의 후예이자 김씨 왕실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마립간의 시조인 눌지왕때 신라 금관이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박, 석, 김이 번갈아 왕위를 계승하였던 이사금 시대의 왕위를 바로 잡고 김씨계 왕권을 강화해 세습 왕조의 전통을 확립하기 위하여 김씨 시조인 김알지 신화와 계림국을 상징하는 것이 신라 금관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흔히 나무와 사슴뿔로 알려진 신라 금관의 입식은 신라의 국림인 계림의 신수이자 생명수를 상징하는 나무이며 영락은 나뭇잎으로, 곡옥은 태아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보주형으로 마무리된 입식의 끝 장식은 새싹을 상징하는 움 모양의 형상으로 이해하였다.

 

마지막으로 신라 금관의 하한문제이다. 이는 서봉총 금관의 연대와 관련이 있다. 김알지신화를 가장 완벽하게 재현한 금관으로는 새 장식이 첨가된 서봉총의 금관으로 이해했다.

서봉총 금관의 새장식은 아기 알지가 등장할 때 울었던 흰 닭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서봉총 금관을 가장 후기 양식으로 고찰하였다. 이는 서봉총 은합에 등장하는 연수를 고창국 국문태왕의 연호로 보아 624년으로 해석하여 나온 결과이다. 이 은합을 고창국이 가장 번성하였던 시기에 신라 진평왕에게 예물로 바친 것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이에 따라 서봉총의 묘주는 579년에서 632년까지 재위한 진평왕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그간 알려진 것과는 달리 금관의 하한 연대뿐 아니라 적석목곽분의 연대도 7세기까지 확장해야 한다는 의견을 펼쳤다.

 

저자는 서문에서 사무친 마음에서 우러나는 자문과 골똘한 궁리에서 빚어지는 자답이 논리적으로 용해되어야 올바른 학문의 길이 열린다고 하였다. 이러한 저자의 자세가 기존의 학문적 성과에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면서 신라 금관의 자생설을 펼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임교수의 논지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한 두 가지 의문이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먼저 신라 자생설의 중요한 논지인 신라 금관이 우리나라 전통의 모자인 절풍에서 유래하였고, 신라 금관이 속관과 겉관의 이중 구조로 되어있다고 파악한 점이다. 오랫동안 학계에서도 신라금관을 이중 구조로 파악하였다. 이는 최초로 발견된 금관총 금관이 오랫동안 외관인 대관(帶冠)과 속관인 모관(帽冠)이 결부되어 전시되었기 때문이다.

금관총에서는 외관이라고 부르는 대관은 피장자의 머리에서, 그리고 속관이라고 명칭하고 있는 모관은 부

장품으로 발견되었다.

이 두 형식이 관이 결합되어 한 세트를 이룬다고 생각한 것은 금관총 이전에 1920년 발굴된 경상남도 양산시에 위치한 부부총의 금동관을 모관과 대관을 결부하여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으로 반출되어 도쿄국립박물관에서 보관 중인 양산 부부총 금동관은 모관과 대관의 이중 구조로 결부하여 전시하였다. 양산 부부총 금동관은 신라와 가야의 접경 지점에 위치한 양산의 지리적 위치를 감안하여 신라 경주세력이 가야를 포섭하기 위한 의도로 해석되고 있다.
대관과 모관이 결부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한 것은 천마총과 황남대총의 발굴 성과에 힘입은 바 크다. 1973년과 1975년 4~6세기 김씨 왕조의 전용 묘역으로 알려진 대릉원에서 황남대총 남분과 천마총에서 모관은 부장곽과 부장품 수납부에서 발견된 반면 대관은 피장자가 착장한 채로 발견됨에 따라 모관과 대관은 같이 착장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여성의 묘로 알려진 황남대총 북분에서는 모관이 출토되지 않아 여성은 모관을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황남대총은 이제까지 발견된 바에 따르면 신라식관이 최초로 등장하는 무덤이라는 점에서 이곳에서의 대관과 모관의 착장 상황은 시사하는 점이 크다.

한편 논지와 관련하여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저자가 룡산리 7호분에서 출토된 일상문투조장신구를 절풍모로 보는데, 이와 다른 의견을 소개하고자 한다.

연주원문으로 공간을 구획하고 그 안에 삼족오가 투각되어 있는 이 장신구는 밑면이 일직선이다. 머리에 쓰기 위해서는 황남대총 남분의 은모(銀帽)나 천마총의 금모(金帽)와 같이 머리의 곡선에 따라 밑면이 재단되어야 할 것이다. 이 장신구는 두 점이 동시에 발견된 것을 참고하면 피장자의 머리를 고이는 베개 마구리 장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다음으로는 저자가 신라 금관의 완성형으로 판단하는 서봉총 금관의 묘주와 그 연대 문제이다.

필자는 현재 이 무덤을 진평왕의 무덤으로 보고 있으나, 고고학에서는 서봉총을 여성의 무덤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는 황남대총 북분이 여성의 묘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황남대총 북분의 장신구 착장 상황과 비교한 것이다. 황남대총 북분을 통해 여성 피장자는 환두대도를 착장하지 않으며 과대에 매달린 긴 수하식의 위치가 남성과 다르다는 사실도 도출되었다. 황남대총 북분에서도 모관(帽冠)이 출토되지 않았고, 필자도 확인했듯이 서봉총에서도 모관이 동반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하면 서봉총의 묘주는 여성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황남대총 북분 ? 서봉총 ? 황오리북분 ? 은령총 등의 여성묘에서 신라 금관이나 금동관이 출토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남는다.

이에 관해서는 ≪삼국사기≫ 제사조에 의하면 나매차차웅이 그의 매인 아노(阿老)에게 시조묘를 주재하게 했다는 기록을 주시하여 왕에 의해 나누어 받은 여성 왕족의 제사 주관권과 관련을 짓는 의견이 참고가 된다. 이는 김씨 왕족이 통치자로서의 기능이 강화되면서, 종교적 기능의 일부가 친족, 특히 왕실 여성들에 의해 수행되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Ⅳ.
임재해 교수의 ≪신라 금관의 기원을 밝힌다≫는 이후로 전개될 신라 금관의 연구 전망을 밝게 예시하는 책이다. 본격적인 학술서 수준의 연구로서 신라 금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는 저자의 방법론은 이 분야 연구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모든 학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고대의 유물에 대해서는 정답이 하나일 수가 없다. 결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독특한 시각으로 신라 금관의 비밀을 풀기 위해 다가가는 여정 자체가 학문의 진실과 관련이 있다.

저자는 그 누구보다도 진실된 마음으로 신라 금관의 비밀에 다다가기 위하여 열정적으로 고민하고 답을 내었다. 저자의 고민을 통해 서평자 역시 다른 시각으로 신라 금관을 보는 기회를 가졌다. 이 책이 바탕이 되어 신라 금관의 연구가 앞으로 한 단계 더 성숙해지기를 기대하며 서평자 역시 앞으로 많은 노력을 할 것을 다짐해본다. 더불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저자의 노력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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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단군학연구>> 18(단군학회, 2008), 397-497쪽에 실린 김태식 연합뉴스 학술전문기자의 서평입니다

 

                      임재해, 『신라 금관의 기원을 밝힌다』를 읽고
                                                                                           김태식 연합뉴스 학술전문 기자

 

 

 

Ⅰ. 바미얀 석불의 '자작나무 껍데기'
Ⅱ. 논파(論罷)하는 시베리아 기원설
Ⅲ. 북방을 구축(驅逐)한 신라
Ⅳ. 검증 혹은 논증을 기다리는 부분들


Ⅰ. 바미얀 석불의 '자작나무 껍데기'

2006년 11월 13일, 일본 동경 발 뉴스 중 하나로 그 이전 탈레반 정권이 파괴한 아프가니스탄 중부 바미얀 유적에 관한 새로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공동통신 보도를 인용한 이 기사에 의한즉 파괴된 동 · 서 대불 중 東大佛 잔해를 2005년 7월 회수하는 과정에서 5~6세기 무렵 문자로 쓰인 불경의 범어 원전 일부가 "부처 사리와 함께 천으로 싸인 상태"로 발견됐다는 것이다.

나아가 지름 1㎝가량 되는 흙으로 된 인장(印章)과 뱀, 귀가 달린 새 등의 동물 조각도 함께 발견된 점으로 미뤄 "불상 기증자가 사용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문제의 경전은 7세기의 당 구법승(求法僧)인 현장법사가 한역(漢譯)해 고대 한반도에 전래한 『연기경(緣起經)』의 원전일 가능성을 전문가들은 제기했다고 한다.

국내 보도에는 이 경문이 대불 건립 당시 불상 내부에 안치한 '태내경(胎內經)'일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하거니와, 요컨대 이 동대불에는 진신사리(사리불舍利佛)와 법신사리(경전經典)를 함께 복장(腹藏)으로 활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유네스코 협력기관과 국제기념물유적회의(ICOMOS)의 독일 조사단이 발견한 것을 일본 불교대학 마쓰다 가즈노부(松田和信) 교수가 해독한 결과 이 경전은 인도 북부로부터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지역에서 6~7세기 무렵에 사용한 '키르깃 바미얀 제1형문자'로 기록되었다. 나아가 이 때 발견한 경문은 석가모니가 수행승들에게 "너희들에게 연기(緣起)를 설명하겠으니 바르게 행하기를 바란다"고 말한 대목 등이라는 것이다.

이 뉴스에서 특히나 흥미로웠던 대목은 불경을 기록한 재료였다. 보도에 의하면 불전은 '자작나무 껍데기'에 썼다고 했다. 이렇게 옮긴 대목의 교도통신 원문이 무엇일까 몹시도 궁금했지만, 당시 나는 그에 대한 의문을 풀지 못했다. 혹여 '백화수피(白樺樹皮)'가 아닐까? 이를 '자작나무 껍데기'로 옮긴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도 해 보았으나, 지금이 시점까지 그 타당성 여부를 검증하지 못했다.

이 소식을 접한 매체가 일본의 뉴스통신사이며, 그 취재의 주요 발설원이 일본의 불교사가(佛敎史家)라는 점에서 흔히 자작나무를 지칭할 때 영어에서 사용하는 'birch bark'를 일본어로 옮겼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대신 이 보도를 접한 직후, 그리고 최근 나는 이런 궁금증이 다시일어 이 분야 전문가 몇 분에게 물어 해결을 시도했다.

먼저, 2008년 5월 현재 국립청주박물관장으로 재직 중이며 중앙아시아 미술사가 전공인 민병훈 박사에게는 "그쪽에 자작나무가 자라느냐"고 물었더니, "확실치는 않으나 못 본 듯한데, 내가 나무 전문가는 아니라 자신은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더불어 이 지역 불교미술사 전공인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이주형 교수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던졌더니, "2002년에 한 번 (바미얀 석불을) 가봤지만, 자작나무가 그 일대에 자생하는지 아닌지는 관심을 가지지 않아 모를뿐더러, 내가 나무에는 문외한이라 원하는 답변을 줄 수 없다"는 요지로 말을 했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덧붙이기를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 출토된 불경이(書寫 재료로) 'birch bark'를 사용한 사례는 많이 보고돼 있어 (바미얀 석불에서 그런 서사 재료가 발견되었다 해서)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고 했다.

이에 이번에는 아프가니스탄 일대의 자작나무 자생설을 최종 확인하기 위해 목재조직학자이면서 팔만대장경판이라든가 무령왕릉 출토 왕과 왕비의 관재를 비롯한 출토 고목재(古木材) 분석 분야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낸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에게 도움을 청했다. 익히 알려졌듯이 팔만대장경판 분석 결과를 토대로 그는 이 경판 主재료가 자작나무일 것이라는 믿음을 흔들었으며, 나아가 경주 천마총 출토 전마도장니(天馬圖障泥)를 비롯한 고대 한반도 각지 출토 소위 '백화수피(白樺樹皮)'가 우리가 생각하는 한대 고지성(寒帶 高地性) 수종인 자작나무가 아니라, 한반도 중남부 일대 각지에서도 흔히 만나는 산벗나무 계열일 가능성을 비록 조심스런 논조를 잃지는 않았으나, 매우 강한 암시를 담아 제기한 바 있다.

 

이런 그에게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 자작나무를 쉽게 구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그곳에 자작나무가 자생하는가를 물었던 것인데, 조금은 아쉽지만 그에게서 얻은 답변은 "그쪽 식생대는 어떻게 되는지 정보가 없다. 다만, 그쪽은 고산지대가 분포하므로 자작나무 껍질을 이용했을 가능성은 산벗나무 계열일 가능성보다는 크지 않을까 생각한다"는 요지였다.

내가 바미얀 유적을 답사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것이 위치한 곳이 아프가니스탄 중앙의 힌두쿠시 산맥 기슭이라 하니, 박 교수의 말마따나 이곳 고산지대에는 자작나무가 자라고, 그 껍질을 이용해 불경을 기록하는 재료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목재에는 문외한인 나로서는 다행히 조만간 실크로드 일대를 답사할 기회가 있을 듯 하고, 나아가 그 일환으로 천산산맥을 넘을 듯도 하므로, 그런 기회를 빌려 자작나무가 자생하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그에서 얻은 소득을 기초로 이 의문을 풀어보고자 다짐해 본다.

내가 이처럼 자작나무 혹은 백화수피(그것이 자작나무건 산벗나무건 관계없이)에 집착하는 까닭은

첫째, 그것이 서사(書寫) 재료라는 측면에서 문자문화를 논할 때, 남방의 패엽(貝葉)과 함께 인도 문화권과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며,

둘째, 천마도장니를 비롯해 고고학적 출토 성과를 볼 때, 그런 문화적 전통에서 고대 한반도 또한 결코 예외가 아니었으며,

셋째, 그렇기에 고대세계의 문화교류라는 측면에서 표지적인 상징 중 하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더불어 이 '백화수피'는 한반도 고대문화의 기원을 논할 때, 시베리아로 대표하는 소위 북방계 유래설을 뒷받침하는 근간 중 하나라는 사실에서 더욱 주목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이런 북방설은 백화수피를 자작나무로 단정하면서 그것이 유래한 출처를 저 머나먼 시베리아까지 찾아 가는 한편, 이를 주요한 근거로 들면서 "봐라. 자작나무가 북쪽에서 오지 않았느냐? 그러니 한반도 고대문화도 그 뿌리를 시베리아에서 찾아야 한다"는 역설로 발전한다.

 


 


이 자리가 그 타당성 여부를 논할 곳은 아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백화수피=자작나무' 설이 매우 허약한 토대 위에 가설한 가설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한국고대문화의 기원을 시베리아 북방에서 구하는 다른 위증들은 어떠한다? 고고학도도 아니요, 그렇다고 그와 쌍두마차 격인 미술사학도도 아닌 민속학도가 이에 대한 전복적(顚覆的) 붕괴를 시도했으니 근간 『신라 금관의 기원을 밝힌다』(지식산업사, 2008)가 그것이다.

Ⅱ. 논파(論罷)하는 시베리아 기원설

신국판 양장 700쪽에 달하는 이 거질 단행본을 통해 저자인 임재해 안동대 교수가 설파하고자 하는 주장 혹은 선언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거니와,

하나는 시베리아 기원설에 대한 부당함의 호소이며,

다른 하나는 그에 따른 한국문화의 한반도 자생설의 주창이라 할 수 있다.

 

이를 관통하기 위해 저자는 신라 금관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시베리아 기원설에 대한 비판은 비단 이 주인공에 그치지 않고 이참에 그에 대한 총설(總說)을 내세우고자 하는 의도는 강렬히 표출한다. 이는 특히 서문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며, 이를 발판으로 본문 곳곳에서도 이 총설적 선언은 녹아든다.

한국 문화유산계 종사자들이 심심찮게 하는 말 중 하나가 세계무대에 내 놓아도 통할 만큼 경쟁력을 갖춘 우리의 문화유산은 두 가지 뿐이라는 것이다.

두 점뿐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현재까지 모두 6점이 보고된 신라 금관이 그것이다. 그 타당성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이는 그만큼 신라 금관이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보기 힘든 독자적인 산물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 때문인지 그 유래를 찾는 움직임은 활발했다.

이와 관련해 지금까지 대세는 시베리아다. 18세기 이후 활발한 민속지 조사 등을 통해 보고된 시베리아 지역 샤먼들이 쓰는 관이 신라 금관을 닮았다 해서 그 뿌리를 아예 시베리아에서 구한 것이다.

한국어가 이른바 우랄-알타이어 계통이라는 통설에 착목한 언어학자나 고고미술사학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 기층문화의 대표격으로 무속을 내건 민속학계가 이른바 북방으로의 '엑소도스'를 주도하면서 "바이칼로, 바이칼로"를 외쳤다.

그런 점에서 그 주장의 타당성을 논하기 전에 우선 이번 단행본은 이와 같은 북방설 주창자들의 한 축인 한국민속학계에 속한 저자에게는 민속학계 주류에 대한 봉기라고도 할 수 있다. 내가 알기로 한국 무속의 원형을 여전히 시베리아에서 구하는 흐름이 주류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고작 근현대에 들어와서 발견되어 의미가 부여된 시베리아 지역 샤머니즘 사회의 연구 성과를 그대로 한반도 고대사회, 신라사회에 투영한다는 것은 모험이 아니라 차라리 '무모'라고해야 한다.

새삼스런 지적이긴 하지만 고고미술사 연구에서 편년 작업은 그 절반을 차지한다고 할 만큼 제작 연대 추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편년이 확립되지 않으면 21세기에 제작돼 깔린 서울 종로구청 앞 보도블록이 서기 200년 무렵 풍납토성 백제 전돌로 둔갑할 수 있다. 그럼에도 19세기 이후에나, 빨라도 18세기 이후에나 보고되기 시작한 시베리아 샤먼들의 철제 관을 그보다 천 수백 년 전에 제작돼 사용된 신라시대 금관의 뿌리로 간주하는 시대착오적인 기원 캐기 작업이 이뤄져 왔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이를 저자는 "너는 여기 있는데 나는 어디로 갔지"라며 다른 곳으로 달려 나가 자기를 찾아 나선 얼빠진 사람으로 비유하면서 "신라 금관의 기원 연구도 꼭 그 짝이다.

신라는 금관왕국이라 할 만큼 일정한 양식의 금관이 경주지역에 집중 분포되어 있는데도 금관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시베리아의 철제 무관(鐵製 巫冠)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고 비난한다. 그 결과 "신라김씨 왕실의 시조를 알타이족에서 찾는가 하면, 아예 신라왕들을 무당왕으로 취급하기도 한다"라고도 덧붙인다.

이런 지적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신라왕을 무당과 동일시하고자 하는 우뚝한 증좌(證左)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1층 역사관 중 무속 코너에는 주변 전시품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금빛 찬란한 신라시대 유물이 복판을 차지한다. 경주 서봉총 출토 신라 금관이 그것이다.

왜 이곳에다가 신라 금관을 전시했을까?

임 교수의 말마따나 신라왕을 무당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역새 신라 왕릉 중 하나로 시조 박혁거세에 이은 2대 남해왕을 지칭하는 왕릉인 차차웅(次次雄) 혹은 자충(慈充)에 대해 신라 성덕왕 시대에 한산주 도독(漢山州 都督)을 역임한 김대문(金大問)이 전하는 말, 즉, "(차차웅은) 方言에서 무당을 일컫는 말이다. 무당은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드는 까닭에 세상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공경하며 마침내 존장자(尊長者)를 일컬어 자충(慈充)이라 했다"는 언급과 결합한 '신라왕=무당' 설이 국립박물관 전시 배열에서 이런 모습으로 재현한 셈이다.

김대문은 결코 신라왕이 무당이라 하지 않았다.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드는 일이란 말할 것도 없이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받드는 일이다. 이 두 가지 일이 신라왕에게만 유별난 특징은 결코 아니다.

김대문의 의도는 이와 같은 권능을 지닌 왕을 지칭하는 데 신라 사람들이 무당을 지칭하는 용어를 빌려온 데 지나지 않음을 말한 것일 뿐이다. 물론 신라왕이건 아니건 그 권능과 역할이 무당과 근본에서 통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신라왕이 무당과 근본이 통한다면야 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실상 김대문이 말한 왕의 권능과 역할은 고려왕, 조선왕은 물론이려니와 진 시황제 이래 역대 모든 중국 황제, 그리고 일본 역대 천황도 예외일 수가 없다.

유독 신라왕만을 무당과 동격으로 취급하여 그 어떤 왕이 썼을 것으로 짐작되는 서봉총 출토 금관만을 무속 유물과 동렬로 놓아야 할 까닭은 없다.

신라 금관이 대표하는 한국문화 기원을 외부에서만 찾은 흐름을 저자는 더욱 톤을 높여가며 냉소로 발전하거니와, 이르기를 "(우리민족의 기원이) 시베리아에 없으면 알타이에 있고, 알타이에 없으면 몽골에 있고, 몽골에도 없으면 흉노에 있다. 흉노에도 없으면 또 다른 북방민족으로부터 연원을 찾아낸다. 북방에서 찾지 못하면 중앙아시아에서 찾고, 거기에도 없으면 남방에서 찾는다. 마침내 우리 문화의 남방기원설이 득세하기 시작한다"고 꼬집는다.

Ⅲ. 북방을 구축(驅逐)한 신라

그렇다면 이런 그가 찾은 신라 금관은 기원이 어디에 있는가? 여기 있는 나를 두고 엉뚱한 데 가서 그것을 찾는다고 요란을 떤다고 비판했으니, 이런 그에게 그 기원은 자연 한반도와 신라 자체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이번 단행본에서 신라 금관이 5세기 무렵 김알지 후손인 김씨왕조에서 출현한 사실을 주목하면서 김씨왕조가 그들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시조 김알지 신화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이 바로 금관이라고 주장한다.

 

아프가니스탄 금관

 

신라 금관 전공자가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듯이 현재까지 확인되는 고대 금관은 모두 10여 개 정도이며 이 중 절반 이상이 경주의 신라유적 출토품이다. 신라 금관과 견줄만한 것으로는 흑해, 아프가니스탄 등지의 발굴품이 있기는 하나 재로가 금이란 점만을 제외하고는 양식이 아주 이질적이다.

 

금관뿐만 아니라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凡 신라 문화권이 쏟아낸 금동관도 20여 점에 이른다. 이 대목을 주시하면서 저자는 "그러므로 신라는 세계적인 금관 종주국이자 금관 왕국이며 경주는 금관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런 금관 혹은 금동관 기원을 어떻게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시베리아 샤먼의 철제 무관(巫冠)에서 찾을 수 있느냐고 분통을 떠뜨리면서 "만일 신라 금관이 시베리아 무관에서 기원했다면, 시베리아 샤먼의 모자가 번쩍거리는 5세기의 금제 왕관이든지, 신라 금관이 19세기 이후의 소박한 철제 무관이든지 둘 가운데 하나는 참이라는 전제가 바탕이어야 하지만, 그러나 어느 것도 참일 수 없는 것이 부명한 데도 학자들은 이런 주장을 거듭하고, 최근에는 금관이 왕관이 아니라 조잡하게 만들어진 부장품으로서 주검의 얼굴을 가리는 데드 마스크라는 주장까지 한다"고 말한다.

이 데드 마스크 설은 신라 금관과 금동관을 포함한 장신구 연구에 투신하는 대전대 이한상 교수의 주장을 겨냥한다. 나아가 저자에 의하면 이러한 주장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의 견해들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다"고 한다. 이런 어투는 학문적인 비난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분통'이라 불러야 할 만큼 그의 어조는 격렬하다.

그에 의하면 금관의 세움장식은 기존 학계 다수설이 주장하는 '出'字나 사슴뿔 모양이 아니라 모두 다양한 형태의 나무를 표현한 것으로 김알지의 탄강지(誕降地)라고 김씨왕권이 주장한 경주 계림(鷄林)의 신수(神樹)를 형상화한 것이다. 따라서 금관 세움장식은 계림의 신성한 숲이라는 것이다.

 

이를 세술(詳述)하면 저자는 김알지 후손인 김씨왕조에서 금관이 출현한 '사실'을 바탕으로, 김씨왕조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시조 김알지 신화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여 왕관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금관의 세움장식은 계림의 신수(神樹)로 연결하는 '대담함'의 원천은 바로 이에서 비롯된다.
나아가 저자는 이번 책과 동시에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된 상명대 박선희 교수의 또 다른 신라 금관 연구서 『우리 금관의 역사를 밝힌다』에도 수록된 서봉총 금관의 진평왕 금관 설을 받아들여 신라 사회에서 금관이 제작되고 유통된 하한 연대를 7세기 중엽으로까지 확대하고자 한다.

 

김알지 탄강의 전설이 깃든 경주 계림

 

 

Ⅳ. 검증 혹은 논증을 기다리는 부분들

이런 주장을 담은 그의 책을 통독하면서 탄성을 지르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 이유는 그 상당 부분에서 나와 같은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분 있지 않은가? 나 또한 그와 비슷한 생각이지만, 그것을 꿰어낼 마뜩한 도구나 말, 혹은 표현이 없어 답답함만 호소하다가, 그런 답답함의 출구를 남이 대신 마련해 준 것 같은 기분 말이다.

 

이번 책에서 저자를 통해 나는 그런 기분을 곳곳에서 맛보면서 쾌재를 불렀다. 특히 시베리아 기원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에는 나 도한 단 한 군데서도 토를 달 수 없다.

다만 신라 금관 양식을 김씨왕권, 혹은 계림과 연결시킨 대목에는 언뜻 찬동할 수 없는 대목이 적지 않다. 내 보기엔 이 대목에 적지 않은 비약을 수반하는 듯하다. 간단히 말해 수긍하기 힘들었다는 뜻이다. 물론 내가 수긍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런 주장이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수긍하기 힘든 대목은 다른 사람 또한 수긍하기 힘들 것이라는 예상은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책을 보면서 신라 금관의 시베리아 기원설을 비판하는 부분과 그 자신이 그 대안으로 제시한 신라 자체 문화 속의 탄생설이라는 두 부분을 분리해 분책해 내 놓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이는 그 만큼 후자에 견주어 전자가 탁원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칫, 상대적으로 설득력이 덜한 후자로 인해 신라 금관에 대한 주옥 같은 언설이라 할 수 있는 전자가 가려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기존 학설을 깨지 않고 어떻게 남들을 깨우치는 독창적 연구를 할 수 있으며, 자신이 깨지지 않고서 스스로 깨닫는 창조적 연구로 나아갈 수 있는가"라는 저자의 자세는 어떤 경우에건 존중 받아야 한다.

 

 

※ 관련 이미지는 이해를 돕기 위하여 블로그 주인이 삽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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