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6
1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2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3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4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5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6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임신부님 강론
대림 제2주일, 2021년 12월 5일, 인권주일, 루카3,1-6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루카3,4)
+찬미예수님
1995년에 출판된 홍세화씨의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라는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똘레랑스”(tolérance)라는 말을 접했습니다. 프랑스를 “똘레랑스의 사회”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프랑스인들 사이에 자신과 다른 사람의 종교나 신앙과 권리와 차이를 너그럽게 인정하는 마음의 관습이 있음을 뜻합니다.
똘레랑스를 우리말로 표현하면 관용이라고 할 수 있으며, 관용은 남의 허물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나보다 부족한 사람을 도와주고 돌봐주는 정신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각자의 개성을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의미입니다. 하찮아 보이는 사람이라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지 않고 동등한 마음으로 존중하자는 뜻입니다.
대림 제2주일은 인권주일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존재이며 인권은 인간이 인간다운 존엄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수적인 최소한의 기준입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합니다. 인권은 관용을 포함하고 이런 관용의 정신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마음입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어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을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을 보리라.”(루카3,4-6)
일제 식민지와 군사 독재문화를 경험한 기성세대는 ‘획일화, 집단성, 상명하복 체계의 계급성’에 익숙해져있습니다. “내편이나 네 편이냐의 편 가르기의 차별성,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으로 단정하는 획일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라고 말하는 무조건적인 복종과 폭력성의 계급화, 반공 아니면 모두 용공이라 몰아붙이면서 붉은 색 딱지 붙이기의 집단성” 등의 표현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사회는 상대방의 다른 점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게 하고 똘레랑스의 정신을 찾을 수 없습니다. 똘레랑스의 반대말이 앵똘레랑스(Intolerence)입니다. 불관용입니다. 불관용이 있는 곳엔 폭력과 차별 그리고 무시와, 편견이 지배합니다.
집 없는 억만장자 니콜라스 베르그루엔이 인간 역사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쳐왔는데도 사상가나 철학자를 기리는 상이 없다는 점에 착안해서 베르그루엔 철학상을 만들었습니다. 철학계의 노벨상이라고 합니다. “살아있는 소크라테스를 찾아라.”는 것입니다. 첫 시상자가 캐나다 맥길대 명예교수인 찰스 테일러 교수입니다. 그는 적합한 인정 (due recognition)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인류가 함께 지켜야 할 공통의 가치를 추구합니다. 한 집단이 우월성을 점유하고 다른 집단에 대해 힘으로 군림하는 태도를 거부합니다. 중요한 것은 상호 인정이고 수평적 존중을 통한 상호 공존의 지혜입니다. 이는 개인의 차원에서는 자기중심성을 초월하여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로 나아가려는 태도를 통해서이며, 집단의 차원에서는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내심을 갖고 상대를 경청하고 이해하려는 태도를 통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황창연 신부의 “삶 껴안기”책에서 “존중받아야할 권리와 존중해줘야 할 의무”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 황신부는 양반의 성이나 족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 자체로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하며 내가 존중받기를 원하면 다른 사람 또한 나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인식을 기본적으로 가져야 함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신앙의 선조들이 신앙 하나만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이유를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이들이 나이와 성별, 신분과 과거 행적을 뛰어넘어 그토록 결사적으로 신앙을 지켜낸 것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누구나 높고 낮음이 없이 평등하고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에 눈을 뜨고 만인이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아끼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200년전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상호존중 DNA”인데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200년 전 그때 천주학을 처음 접했던 선각자들은 만인이 저마다 자기 자신의 삶을 힘껏 껴안아 줄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단지 그것만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나눌 줄 아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마음을 합치기를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잊지 말아야할 최고의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돈이나 힘으로 만들어진 가짜 행복이나 혼자만 배부르면 된다는 이기주의가 아니라 관용, 나눔, 배려, 이해, 양보, 용서 같은 따뜻한 말들이 일상인 세상을 만들기 위해 뜻을 모아야 합니다.
주님의 오심을 깨어 준비하는 대림2주일은 인권 주일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에서 말하길 “인간의 기본권에서 모든 형태의 차별, 사회적이든 문화적이든 또는 성별, 인종, 피부색, 사회적 신분, 언어, 종교에서 기인하는 차별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극복되고 제거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차별 없는 세상, 평등한 세상, 서로 존중받는 세상을 이루는 것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안에 세상은 서로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연결고리 중의 하나가 차별받고 소외받고 무시당하면서 고리가 끊어지면 다 같이 차별받고 소외받고 무시당하는 아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나와 연결된 이 관용의 고리들이 서로를 평화롭게 받아들이고 아껴주고 사랑해주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필립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더 풍부해져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필립1,9-11)
서로를 받아들이는 관용의 정신으로 신앙의 삶에 합당한 열매를 맺읍시다. 그것이 오시는 주님의 길을 합당하게 마련하고 길을 내는 것입니다. 아멘
무태 성당 이민락 라우렌시오 신부
첫댓글 아멘 !!
아멘.
차별없는세상 평등한세상 서로존중받는 세상을 이루는것이 하느님나라입니다 너희는 주님의길을 마련하여라 아멘 감사합니다 !!
+ 찬미예수님
만인은 평등한 존재이니
누구나 높고 낮음이 없는 평등하고 존귀한 존재 라는것을 알고 ,
이 대림절 .
오시는 주님의 길을 바르게 준비하기 위해서
동등한 마음으로 남을 인정해 줄 줄 아는 상호 존중가운데 똘레랑스 정신으로 살 수 있기 위해서
" 너 자신을 알라 "고한
소크라테스 정신으로
살므로서 타인에 대한 관심읇 바르게 가질 수 있도록 먼저 자신을 바르게 알 수 있기를 기도 드려야 겠습니다.
아멘
신부님 오늘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