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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역사] 발표자료 조선 전기 왕조- '병자호란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태백산맥 모둠)
양정아 추천 0 조회 241 09.10.11 22:52 댓글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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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10.16 00:01

    첫댓글 병자호란을 통해 인조와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비교함으로써 중립적인 자세를 강조했던 태백산맥조의 발표를 들으며 한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과연 그 당시에는 중립외교가 말 그대로 중립적인 자세였을까? 그 당시에는 가히 혁명적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겼기에 반역까지 일어난 일인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중립’이라는 것에 대해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중립은 많은 경우 회색분자 혹은 박쥐와 같은 선택을 하게 만들거나 무관심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 09.10.14 21:38

    * 김모아 : 1)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비교함으로서 중립적인 자세를 강조했던 ->> * '서'를 '써'로 바꾸어야 하는 이유를 [우리말 바루기]에 밝히세요.

  • 09.10.16 00:13

    수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말 바루기]에 글을 올렸습니다.

  • 09.10.16 00:02

    우리는 선은 선이라 격려하고 악은 악이라 비판해야 합니다. 따라서 중립의 자세를 강조하실 때 그 의도는 한편에 치우친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씀이셨겠지만 제가 전술한 부분을 짚고 넘어가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논쟁이 있는 것은 자신의 입장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한 쪽의 입장에서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선과 악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09.10.14 22:18

    * 김모아 : 3) 비판해야합니다. -> * '야'를 뒷말과 띄어 써야 하는 이유를 [우리말 바루기]에 밝히세요.

  • 09.10.16 00:13

    수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말 바루기]에 글을 올렸습니다.

  • 09.10.16 00:02

    당시 사대부들은 명을 섬기는 것이 선이라고 여겼기에 반역을 꾀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어떻게 하면 선과 악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느 한 입장을 취하기 위해서는 논점의 본질을 직시하고 그것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09.10.14 21:39

    * 김모아 : 2) 판단 할 수 있을지 ->

  • 09.10.16 00:03

    수정하였습니다.

  • 09.10.17 13:03

    인조는 광해군이 중립외교로 잃은 대의명분을 문제 삼아 인조반정을 통해 정권을 잡았습니다. 인조가 왕이 될 때 당연히 중립외교의 목적을 알아야 했고 중립외교를 포기하고 친명배금 정책을 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했어야 했습니다. 인조가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함으로써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민족사의 수치러운 역사를 맞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리더의 자격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리더는 대의명분을 쫓을 때 어떤 일이 생길지 예상하는 식견이 필요합니다.

  • 09.10.14 22:45

    * 서휘양 : 그러면 왜 인조는 휘양이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은 식견을 가지지 못하였는지 말해 보도록 하세요. 1) 예상했어야 왕이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 예상했어야 했습니다. 2) 결국, 인조는 국제 정세를 읽지 못한 군주가 되었고 결국 결국 수치스러운 우리 민족의 역사 삼전도의 굴욕을 맞게 됩니다. ->> 인조가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함으로써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민족사의 수치러운 역사를 맞게 됩니다.

  • 09.10.17 13:07

    인조는 광해군이 중립외교 정책을 시행하자 명나라에 신의를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조반정을 일으켜 왕이 됐습니다. 왕이 된 후 인조는 금나라가 강대해 질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인조의 왕권이 정당성을 잃게 되므로 친명 배금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인조가 당시 국제 정세를 보는 식견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만든 정당성이라는 덫에 걸려 실용적인 정책을 펼 수 없었을 것입니다.

  • 09.10.17 13:07

    수정했습니다.

  • 09.10.14 18:02

    병자호란에 대해 배우기 전에 병자호란이 왜 일어났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인조가 시대정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입니다. 앞서 일어난 임진왜란도 비슷한 이유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미래에 대비하고 준비를 철저히 했다면 조선 역사에 있어 큰 상처를 남긴 이 왜란은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이 왜란을 겪고도 인식의 전환을 하지 않았기에 호란에도 대처하지 못하고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것입니다. 자신의 인식이 틀렸다면 그것을 바로잡는 자세도 필요한 것이지요.

  • 09.10.16 18:44

    인조는 앞서 광해군이 영리한 외교 정책을 펼친 것을 보고도 서인의 말을 좇아 향명배금의 정책을 취했습니다. 자신이 왕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준 서인 세력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던 겁니다. 정당하게 왕이 되지 못한 것에서부터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국제정세를 보는 안목이 없었고, 서인들의 말에 휘둘리는 약한 왕이었던 것입니다. 인조 자신의 능력이 부족했기에 인조는 시대정신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지요.

  • 09.10.14 18:02

    인조는 광해군과 달리 중립적인 자세보다는 '소신'에 치우친 외교 정책을 펴서 호란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지요. '중립'과 '소신'을 적절히 조화시켜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객관적이고 냉철한 사고를 함으로써 적절히 조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 09.10.14 22:44

    * 김진휘 : 진휘는 인조가 시대정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까닭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하여 밝히도록 하세요.

  • 09.10.16 18:44

    보완했습니다.^^

  • 09.10.15 11:58

    이번 발표의 주제는 '병자호란이 왜 일어났는가?'입니다. 인조의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상황 판단력은 뛰어나지 못했습니다. 사실 역사의 남을 만한 위인은 상황 판단력에 달렸다고 봅니다. 그런데 인조는 앞을 내다보지 못했기 때문에, '병자호란'이라는 단어가 지금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만약에 인조가 앞을 잘 내다보는 통찰력을 가졌으면, 그는 좋은 평가를 받았을 것입니다. 사실상 '병자호란'이라는 단어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좋은 통찰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통찰력을 갖는 것은 지도력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윤리교육과 인들로써 학생들을 잘 파악하고, 앞으로는 어떠한 문제

  • 09.12.13 18:11

    * 유대진 : 인조가 상황 판단력이 뛰어나지 못했고, 앞을 내다보지 못했던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대진을 말해 보도록 하세요 .1) 저는 여기서 사람이 그릇이 있다면, 좋은 통찰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지도력으로 이어지겠지요. ->> * 비문입니다.

  • 09.10.15 12:17

    아래 문장에 보충하였습니다. 또 수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교수님, 혹시... 띄어나지 -> 뛰어나지 가 아닐까요?... 아닐 수도 있는데... 아니면 아닌 거겠죠?...

  • 09.10.15 12:15

    가 임용고시에 출제될 것인가에 대해 좋은 통찰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조가 앞을 내다보지 못했던 제일 큰 이유는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금나라와의 관계까지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는 무난하게 일을 진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죠.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통해서, 저는 저 역시 타인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내 주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내가 내 주변 사람에게 잘 못해주고 있나?' 다시 한 번, 제가 공동체 안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사람이 인조였습니다.

  • 09.10.14 20:59

    병자호란은 임진왜란에 이어 우리 민족에게 위기임과 동시에 근대사회로 발전해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과정의 변화 속에서 우리의 대처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되지요. 위기를 기회의 발판으로 삼을 수도 있고, 위기를 멸망의 시작으로 잇는 일도 있습니다. 병자호란으로 말미암아 토지는 황폐화되고, 인구는 줄어들고 사회제도는 붕괴하는 혼란스러운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 09.10.14 20:59

    하지만,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듯이 해야 할 일을 찾아서 군제개혁을 통한 국방력을 강화하였던 것이나 무모한 강경책보다는 유연성이 있고 실리를 챙길 수가 있는 유화책이 대두하게 된 것을 보면 당시 조선사회의 큰 자극으로써 사회변화를 초래하고 근대화의 한발 다가간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변화하는 외부의 환경에 대한 유연한 대처력을 길러서 발전의 주춧돌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09.10.14 22:08

    * 양정아 : 1) 마무리 되었다는 -> 2) 세계최초의 기상관측비이다 ->> * 중요 사실 중에서

  • 작성자 09.10.15 00:12

    수정하였습니다^^

  • 09.10.14 22:44

    병자호란은 되풀이되서는 안되는 우리 민족의 위기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위기들을 되돌아 보며 그 위기가 왜 일어났고 어떻게 대처해나갔는가 하는 조상들의 지혜를 살펴 보아야겠습니다. 사람은 위기속에서 가장 진실한 모습을 보인다고 합니다. 역사도 그런 것 같습니다. 위기속에서 모습이 그 시대의 모습을 더 잘 알려준다고 생각합니다.

  • 09.10.14 22:44

    병자호란 시기에 인조는 광해군의 중립외교 대신 친명배금 정책을 폈고 그에 따른 결과로 병자호란이 일어납니다. 인조는 결국 삼전도에서 굴욕을 겪게 됩니다. 인식의 차이가 가져온 엄청난 차이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인조가 광해군처럼 중립적인 외교를 했어도 병자호란은 일어났을까요? 꼭 중립외교가 아니더라도 좀 더 조선다운 그 시대를 위한 정책으로 다른 역사를 가져올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저는 여기에서 '인식'의 중요성에 대해 주목하고 생각해보았습니다.

  • 09.10.14 23:37

    광해군의 외교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고 인조가 향명배금 정책을 폄으로써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이 부정적으로 기록된데 반해 인조의 향명배금 정책은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된 주요한 원인 임에도 긍정적으로 기록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승자의 역사만을 보지 않고 다양한 시선에서 패자의 역사도 보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민중의 역사입니다. 그 당시 무지몽매한 민중에게 정책이란 그저 먼일일 뿐이었겠지요. 하지만, 전쟁은 현실이었습니다.

  • 09.10.14 23:37

    백성의 고충을 듣고 어루만져주는 것이 군자의 도리인 듯이 후대의 우리도 그들의 역사를 돌아봐 주고, 재조명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 09.10.14 23:37

    병자호란은 역사적으로 아주 의미가 큰 사건입니다. 임진왜란과 더불어 명분을 추구하며 원리 원칙적으로 행동하는 양반들의 무능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기 때문이죠. 이러한 사건들은 사회적인 커다란 전환을 초래하게 됩니다. 이러한 전환은 문학작품까지 영향을 미쳐 『양반전』에 소재로 등장하게 되죠. 전쟁으로 혼란한 사회에서 조선 전기에 고상함만을 추구한 양반은 당장 돈이 없어 몰락하고, 재물을 축적한 상민들이 몰락한 양반의 족보를 사면서 점차 실용적으로 변합니다.

  • 09.10.14 23:37

    양반 자체 내에서의 자각과 실리를 추구하는 상민들의 양반사회 진출로 조선사회의 성격이 변하게 됩니다. 백성은 전쟁을 겪으며 의식이 성장하게 됩니다. 계속 이전 체제를 유지해서는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죠. 이렇게 생각한다면 병자호란은 백성의 위기의식을 일깨워 새로운 시대정신을 요구하도록 이바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쟁은 인간의 발전을 촉진합니다. 이러한 전쟁이 없었다면 조선사회는 계속 명분을 추구하며 원리 원칙적으로 행동하는 보수적인 사회로 남았겠지요.

  • 09.10.14 23:45

    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을 잘 확인 할 수 있는 것이 강홍립의 지휘로 나간 전투였다고 생각합니다. 후금의 미움을 사지도 않고, 명의 출병 요청을 거절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광해군의 외교 정책이 빛을 발했던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은 지금 현시대에도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단순히 친구 관계에서 싸움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한쪽 편만 든다면, 어느 쪽에도 유리한 상황을 가져다줄 수 없습니다. 그 시점에서는 매몰차다고 느낄 정도로 냉철한 판단을 하여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 중립적인 자세를 지녀야 내 생각의 관점도 다방면으로 넓어진다고 생각합니다.

  • 09.10.14 23:49

    우리가 선생님이 되었을 때 학생들 간의 다툼을 볼 수 있습니다. 선생님으로서 학생들의 싸움을 중립적인 입장에서 중재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한 쪽만 편들지 않고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학생들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중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09.10.14 23:54

    나는 병자호란이 발생하게 된 원인은 정통성을 중요시한 지도층의 ‘잘못된 아집’이라고 생각한다. 정통성을 지킨다는 서인 세력은 광해군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고 단순히 정실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정세에 어둡고 아직 준비가 안 된 인조를 왕위에 오르게 한다. 결국, 풍전등화인 조선의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의리를 지친다는 명분으로 주변 국가의 정세를 무시하고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철회하여 다시 친명 배금의 정책을 주장하던 서인 세력은 결국 청의 압박을 받게 된다. 청은 명을 압도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넓혀 중국 대부분의 영토를 차지한 막강한 나라로 성장하였다.

  • 09.10.14 23:54

    조선과 형제관계를 맺었던 청나라는 나라의 세력이 강해지자 조선에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고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꾸자고 독촉을 한다. 하지만, 보수적인 서인 세력은 자신들이 과거에 무시하였던 후금인 청의 요구를 거절한다. 인조와 서인세력의 안일한 태도는 병자호란을 발생시키는 원인을 제공한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굴욕을 통해서 전쟁을 중단된다. 단, 3개월의 짧은 전쟁이었지만 임진왜란으로 황폐화가 된 조선은 막심한 피해를 받는다. 이렇게 지도층들의 잘못된 아집은 쇠퇴만을 만든다. 지도층들은 자신들의 고집보다는 개방적인 사고를 통해서 실리적인 정책을 펼쳐야 한다.

  • 09.10.14 23:55

    우리가 어떠한 집단에 속하더라도 우리 또한 개방적인 사고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 집단의 생각에 젖어서 잘못된 집단주의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주변의 정세를 무시하고 독단적인 행보는 자신과 집단을 가둬두는 일에 불과하다.

  • 09.10.14 23:55

    병자호란을 통해 저는 인조와 광해군의 정책을 비교해보았습니다. 의리에 치우친 외교정책으로 결국 조선은 병자호란이라는 큰 아픔을 겪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병력 상황이나 경제 상황으로 볼 때 무리인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는 광해군과 같은 중립외교 정책이 필요하였습니다. 인조가 내세운 외교정책은 성리학을 너무 중시한 나머지 실리와 명분 사이에서 적절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지 못하였습니다.

  • 09.10.14 23:56

    현대 또한 국제관계가 매우 중요한 시기입니다. 갈수록 국제화 되고 세계화 되는 현대에 우리의 생각은 멈춰있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또한 한곳에 치우치지 않은 융통성있는 자세를 배워야합니다.

  • 09.12.13 18:13

    * 민경미 : 1) 국제화 되고 세계화 되는 -> 2) 멈춰있으면 안된다고 -> 3) 배워야합니다. ->

  • 09.10.15 00:08

    저는 저번 주 발표인 ‘삼별초의 대 몽고 항쟁’과 이번 병자호란(혹은 임진왜란까지 포함하여)을 전쟁 이후의 변화 측면에서 비교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선 고려는 원을 등에 업은 권문세족이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나라 전체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좇는 사람들이었죠. 그래서 고려는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반면 조선은 북벌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게 되지요. 북벌이 실패하고 난 후에도 청에 대한 적대감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이후 청을 본받아야 한다는 북학파가 등장하긴 하나 이들이 청의 것을 받아들이려는 이유는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이지 권문세족 같은 사욕의 추구와는 거리가 멀었지요.

  • 09.10.15 00:08

    그리고 호란 이후 조선의 모습을 보면 근대적인 면이 조금씩 성장하게 되기도 합니다. 어떻게 이런 차이가 나타났을까요? 고려는 항쟁을 주도한 무인세력이 몰락했고, 조선은 전쟁 이전의 지배세력인 반청세력이 유지되었습니다. 고려가 자주국가의 위치를 계속 유지하기는 하였지만 내부는 많이 약해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조선은 그 내부를 비교적 탄탄히 유지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점차 안정될 수 있었고 새로운 전성기를 열기도 하며 더 많은 발전의 모습을 보인 것이지요.

  • 09.10.15 00:09

    변화는 혼란을 낳고 또 혼란은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혼란스럽지 않도록 미리 대비하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그렇지 못했다면, 혼란스러워 되고 말았다면 어떤 태도를 보이는 것이 미래에 도움이 될지 두 경우를 함께 생각해보며 느낄 수 있었습니다.

  • 09.10.15 10:23

    광해군이 후대에 와서 인조보다 훨씬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결과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리라는 측면이 요즘의 세태와 궁합이 맞는 부분도 있지만, 광해군은 결과적으로 나라를 전쟁에서 벗어나게 했고, 인조는 나라를 전쟁으로 끌어들였죠. 특히 인조는 병자호란에서 패배함으로써 더욱 평가가 낮아진 면이 있지요. 역사는 승자를 위해 쓰인다는 말을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 09.10.15 21:01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우리가 어떠한 한쪽의 편에 설 수 없을 때, 어떠한 행동을 취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는 우리는 항상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양자 간의 충돌이 일어날 때, 어느 한 쪽의 편에만 설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친구끼리 싸움이 났을 때 중립적 입장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화해시키려 합니다. 싸움이 났을 때 한쪽 편만을 들어준다는 것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행동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실리적인 정책이었습니다.

  • 09.10.15 23:50

    병자호란은 시대를 읽지 못한 집권층의 무력한 모습을 보여준 단편적인 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의 원인은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의 정통성에 대한 집착에서 시작됐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스스로 소중화라 칭하며 한족을 숭상하고 이민족을 오랑캐라 배척하였습니다.

  • 09.10.15 23:59

    특히 정통성에 집착하는 우리나라의 성향은 삼국시대로부터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적자에 대한 집착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런 자신들만의 세계에 갇혀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외면한 결과는 병자호란으로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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