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엄쉬엄 하다 보면 춘분이 다가와 봄 한가운데 든다. 낮과 밤이 같아지고 천지를 녹이는 봄비가 소리 없이 온다. 잠든 나무 흔들고 묵은 것을 날리는 꽃샘바람이 불고 또 분다. 꽃샘바람은 부드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꽃샘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는 옛말이 있을 만큼 매섭기도 하다. 봄이 오나보다 고개를 내밀다가 된서리를 맞는다.
계절은 쉼 없이 흘러 어느새 개구리알 깨어나 올챙이가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밭 정리를 하다 보면 아직도 겨울잠을 자고 있는 개구리가 눈에 띈다. 이놈들은 언제 깨어나 알을 낳으려나? 새벽이면 얼음 얼고 하얀 서리 덮이지만, 서릿발 이겨내고 봄은 오신다.
들에는 노란 꽃다지 꽃, 하얀 냉이 꽃이 차례로 피고지고, 양지에서는 양지꽃과 별꽃이, 물가에서는 머위꽃이 나비를 부른다. 산에는 생강나무 노란 꽃이, 마당에는 매화가 핀다. 원추리, 돌나물, 달래, 냉이, 망초 나물이 한창이고, 아이들은 신맛 찾아 수영을 뜯어 먹는다. 샘가에 가면 미나리가, 논둑에서는 머윗잎이 입맛을 돋운다. 틈틈이 나물을 해다 밥상에 봄 잔치를 차린다.
생강나무 활짝
원추리
두엄(퇴비)을 띄우기 좋을 때다. 두엄은 들꽃이 필 때 잘 뜬다. 무경운 농사를 해도 두엄이 필요한 곳이 있다. 고추, 토마토 같은 가지과 열매들이다. 수박, 참외 같은 여름과일이랑 배추, 무 같은 남새. 이것들을 특수작물이라 하는데, 거름 기운이 많이 필요하다. 못자리와 모종밭에도 필요하다. 그래서 한 차례 두엄을 띄운다.
두엄은 풀과 거름을 썩히는 게 아니다. 발효균의 힘을 빌어 잘 띄우는 발효식품이다. 사람이 먹는 김장김치나 고추장처럼, 땅에 좋은 걸 고루 섞어 띄운다. 길에서 낙엽을 모아오고, 닭장, 오리장, 사람 똥간을 비워 한 짐 낸다. 거기에 볏짚을 썰어 넣고, 왕겨 쌀겨 깻묵을 고루 뿌리고 물을 촉촉히 준 뒤 흙을 한 켜 덮는다.
이때 맹물도 좋지만, 쌀뜨물을 받아 그걸 발효시켜 넣거나 하수도 도랑을 쳐서 넣으면 더욱 좋다. 김장독에서 나온 김칫국물도 여기에 넣는다. 다시 검불, 똥오줌, 볏짚, 왕겨, 쌀겨를 켜켜로 사람 키만큼 쌓는다. 두엄자리를 만들어 놓으면 아이들도 어른도 기대 앉아 논다. 거기 앉으면 따뜻해서 기분이 좋다. 두엄 속 온도는 70도를 웃돌므로 그 속에서 오리알, 달걀이 익곤 한다. 열흘에 한 번 두엄을 뒤집어 고루 섞어 주고 신선한 공기가 섞이게 해 주면 한 달 지난 후 두엄이 향긋하게 발효된다.
봄 꽃 피면 퇴비를 만든다.
퇴비더미
춘분이 지나면 밭에 씨가 들어가기 시작한다. 감자가 맨 먼저 들어간다. 감자는 서늘한 기운을 좋아한다. 그래서 여름을 피해 봄과 가을 두 번 기를 수 있다. 봄 감자는 3월 말에 심어 하지에 거둔다. 지난해에도 감자 가운데 씨감자를 골라 겨우내 저장했다. 그걸 꺼내 심기는 하는데, 집에서 거둔 씨로 해서 잘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올해는 씨감자를 한 상자 신청해 놓았다. 우리 씨감자로 한 줄, 사온 씨감자로 한 줄. 이렇게 심으며 언젠가는 우리 씨만으로 농사지을 날을 기다린다.
여러해살이가 심겨진 밭을 둘러본다. 딸기밭은 김을 매고 거름을 주고. 도라지와 더덕 밭도 둘러본다. 3~4년 된 도라지를 캐서 좋은 건 먹고, 어리고 곧게 생긴 건 옮겨 심는다. 취와 파드득나물이 자라는 밭도 김을 매 준다. 밭에다 푸성귀를 심기엔 날이 아직 차다. 그래서 모종을 기르는 비닐집 한편에 봄배추, 양배추, 양상추, 봄무를 심는다. 이때 심으면 봄나물이 끝나서 먹을거리 궁한 보릿고개에 먹을 수 있다.
아직까지 미뤄둔 모종도 씨를 넣는다. 지금 심으면 5월 초에 서리가 걷힐 때까지 40일. 밭으로 나가기 딱 좋다. 토마토, 수박, 오이, 참외, 대파, 수세미, 호박……. 농사일이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논밭은 비어 있다. 논과 밭을 둘러보며 밭 정리하고 나물하고 있으면, 올해 여기다 무얼 심어야겠다는 계획도 떠오른다. 저녁밥을 먹으며 식구마다 자기 농사 계획을 이야기한다. 아래 밭에는 무슨 곡식이 알맞다는 둥, 산 뙈기밭은 합다랑이를 해, 말어 하면서. 콩밭은 배수로를 다시 파야 하겠지…….
올해는 논밭에 무얼 채울까. 지난해와 같은 것도 있고, 돌려가며 짓는 곡식도 많다. 땅 살이 좋은 곳에는 감자·땅콩·생강 같은 뿌리를, 마늘 양파 밭엔 뒷그루로 팥이나 김장거리. 거름기가 적고 단단한 밭에는 고구마를, 고추·토마토·가지·수박은 거름진 땅에 심어야 하지만 지난해 심은 자리는 피해야 하니 새로운 자리를 찾아본다.
밭마다 북쪽으로는 키가 큰 옥수수를 심어야지. 참깨는 물 빠짐이 좋은 밭에 심어야 하고, 넓은 콩밭 사이사이 수수와 기장. 밭둑 위로는 호박, 밭둑 아래 길로는 동부콩. 심고 거두는 차례도 생각해 한살이가 긴 작물은 밭 안쪽, 잔손질 많이 가는 작물은 길 좋은 데로. 이렇듯 땅 사정, 곡식 사정, 사람 사정을 일일이 헤아려 계획을 세운다. 지난해 아쉬웠던 곡식을 이번에는 넉넉히 농사해서 나눠먹어야겠다는 야무진 계획도 잡는다. 봄은 논밭에서 꿈꾸는 때다.
춘분(春分) 공부
태양이 정남에서 떠 정북으로 지며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 추분과 함께 천문학의 기준점이 되는 날이다. 춘분에는 나무에 물이 오르기 시작한다고 한다. 이맘때면 바람이 많이 분다. '꽃샘바람'이라고 하며 잠자는 나무를 흔들어 깨운다고도 한다. 들판에서는 거름을 담아내는 경운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초후에는 제비가 남쪽에서 날아오고
중후에는 우렛소리가 들려오며
말후에는 그해 처음으로 번개가 친다
[네이버 지식백과] 춘분 - 논밭에서 꿈을 꾸는 때 (농사꾼 장영란의 자연달력 제철밥상, 2011.6.3, 도서출판 들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