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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7:1-5 여호와여 내 하나님이여 : 칼빈
부당한 중상모략에 짓눌려 있는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억울함을 변호하시고 보호해 주실 것을 요청하면서 자신이 무고한 사실을 하나님의 보호에 위임하고 있습니다.
먼저 다윗은 자신의 양심이 자기 혐의로 돌려대는 악이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고소하지 않는다고 강경하게 주장합니다.
두 번째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자들에게 심판을 행사하는 일이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 있는가 하는 점을 보여줍니다.
세 번째로 자신의 마음에 확신을 불어넣는 뜻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를 신중하게 숙고하면서 신의 약속들을 자기 앞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넷째로 다윗은 마치 자기 마음의 소원을 이루었다는 듯이 자기 원수들의 우매와 헛된 노력을 조롱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면서 자신에 대한 그들의 모든 노력이 스스로의 파멸을 조래하고야 말 것을 확신합니다.
1. 본 시편의 표제는 "다윗의 식가욘 베냐민인 구시의 말에 대하여 여호와께 한 노래"입니다.
식가욘(Shiggaion)이라는 단어는 유대 주석가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되지 않습니다.
혹자는 그것이 악기를 뜻한다 하고 혹자는 그것이 노래의 곡조가 아닌가 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다윗이 본 시편을 노래하고자 한 곡조의 처음부분으로 상상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 히브리어를 '환희'나 '기쁨'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 견해가 우리에게는 가장 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곧 그것을 마치 사포의 시체(詩體)나 팔류스 시체(Phaleucian verse)와 같은 일정한 멜로디나 노래의 종류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본 시는 '구시의 말' 에 따라서 작성된 것으로 이야기됩니다.
이 '말' 을 흔히 '일' 이나 '업무'로 보지만 우리는 이 해설에 따를 수 없습니다.
'문제'나 '일' 대신 '말'을 사용하는 것이 유대 사회의 일반 언어 형식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인정하지만 다윗은 곧이어 자신이 무고하게 어떤 죄악에 대한 혐의를 받고 있다는 점을 밝힙니다.
시편 7 편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이 여기서 사울의 친척 중 한 사람인 구시 장본인이었거나 아니면 그의 혐의나 중상모략 자체를 두고 언급하고 있는 사실이 틀림없는 것으로 봅니다.
여기서 어떤 허구적인 명칭으로 사울이 이야기되고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견해는 충분한 중론(重論)의 뒷받침을 받지 못합니다.
그들은 다윗이 사울을 직접 말하지 않은 것은 왕을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물론 다윗이 거룩하게 기름 부음받은 자들을 정중하게 여겼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다른 곳에서는 사울을 가혹하게 묘사하면서 이름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 점을 생각하면 다윗이 여기서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생각으로 다윗은 여기서 자기에게 어떤 죄악을 거짓으로 뒤집어씌움으로서 자신의 증오를 받는 악한 고소자의 고유명사를 비유없이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물론 이 사람은 이런 일을 하도록 왕에게 매수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또 왕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자발적으로 다윗을 고소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다윗은 마치 그가 자신의 장인되는 왕에게 배은망덕하고 배신적인 사람이었던 것처럼 무척 중상모략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사울이 베냐민 지파에 속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사람이 그가 아니라 그와 동일한 지파 사람으로서 무고하게 다윗을 고소한 사람의 친척 가운데 한 사람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2. 본문 1-2절은 "(1) 여호와여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2) 건져낼 자 없으면 저희가 사자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입니다.
본 시편의 처음에 다윗은 자기에게 원수가 많다는 점을 말합니다.
둘째 절에 가서는 단수 명사로 특정한 사람을 지목합니다.
물론 자기에게 화를 품고 있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다윗은 모든 박해자들에게서 구출되기를 원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으로서는 마치 관솔불과 같이 타오르는 왕의 사악한 횡포가 무고한 자신을 상대로 전체 백성의 증오를 불붙여 놓았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다윗은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을 지목해서 규탄하는 붓을 휘두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처음 구절에서 다윗은 자기 입장에 대한 참상, 곧 자신이 박해받는 자라는 점을 묘사합니다.
둘째 구절에서 다윗은 자기가 당한 재난의 근원이나 원인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시편 7 편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혹은 "내가 주를 믿사오니" 라는 말씀에는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나오는 동사는 히브리어에서 과거 시제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직역하면 '주님을 내가 신뢰했습니다'이지만 히브리어에서는 한 시제가 다른 시제로 취급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주님을 내가 신뢰하오니' 라는 식의 현재 시제로 번역하는 편을 택합니다.
그리고 사실 거기에는 계속적인 행동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다윗은 자신과 지금 무관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두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고통받을 때 한결같이 품고 있던 믿음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가 역경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품고 믿음을 계속 지켜 간다면 그것은 우리의 신앙에 대한 순수하고 의심할 여지없는 증거입니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역시 신앙의 열쇠가 우리에게 자비의 문을 열지 못할 경우 그의 문은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 닫혀지고 만다는 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가리켜 '자신의 하나님' 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쓸데없는 말의 중복이 아닙니다.
다윗은 이 명칭을 자기 앞의 방파제로 세워놓고 숱한 시험의 파도가 자신의 신앙을 집어삼키지 못하도록 그 시험 풍파를 물리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구절에서 다윗은 '사자' 라는 비유법을 써서 사울의 잔인성을 더욱 강력하게 부각시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도움을 베풀어주실 것을 유도합니다.
어쩌면 다윗은 자신의 불쌍한 양을 이리의 울부짖는 입으로부터 구출하는 것이 '자신'의 특수한 임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3. 본문 3-4절은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것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4)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 무고히 빼앗았거든" 입니다.
4절에 대한 칼빈의 번역은 "나와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나를 부해한 자를 까닭 없이 구출하지 않았거든" 입니다.
1) 본문 3절 초반은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것을 행하였거나" 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도록 유도하는 뜻에서 자신이 부당하고 아무런 죄책도 없이 성가심을 받고 있다는 점을 들어 항변합니다.
시편 7 편
자신의 항변을 더욱더 강조하는 뜻에서 다윗은 저주의 기원문을 사용합니다.
만약에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비난을 달게 받겠노라는 점을 밝힙니다.
모든 사람들이 거의 만장일치로 자기를 비난하는 죄악과 자신이 전혀 무관하지 않다면 제아무리 무서운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점을 제의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의 정직성을 심문해 올 경우 조금도 흠이 없는 것으로 판명될 것이라는 조건 밑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자신의 모범을 통해서 우리도 하나님의 도움을 청할 때에는 우리 자신의 소원이 올바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가 양심의 확신을 가질 것을 첫째 요건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을 옳지 못한 서원의 변호자와 보호자로 내세운다면 그것은 더없이 그분께 누를 끼치는 노릇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라는 대명사를 사용함으로서 다윗은 자신이 당시 널리 알려져 있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시가 제기한 중상모략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갖다 붙이는 거짓보고와 불의한 판단에 따라서 정죄받고 있으며 이 땅에서 피난처를 전혀 찾을 수 없게 되자 다윗으로서는 하나님의 심판대로 달려 나가서 자신의 양심을 하늘 법정 앞에서 지키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이것은 모든 경건한 자들이 자신들에게 전가되는 중상모략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심판만으로 만족하기 위한 행동이므로 본받아야 할 모범입니다.
2) 다윗은 다음으로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라고 말씀함으로서 자신이 아무런 죄악도 범하지 않았다는 점을 더욱 더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3) 그리고 넷째 절에 가서 다윗은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 뜻에서 두 가지 특수한 사건을 언급합니다.
그것은 먼저 다윗이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다음은 다윗이 아무 이유없이 자기를 해치고자 한 자신의 모든 원수들에게 선을 베풀려고 애썼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4절을 '혹 내가 나와 화평하던 어떤 사람에게 해를 끼쳤다거나 아무 이유없이 나를 박해한 그 부당한 사람들을 오히려 돕지 않는다면.......'으로 설명합니다.
다윗은 마치 통치권에 대한 야망에 못이겨 사울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려 했거나 자신의 충성의 맹세를 통해서 자신이 속박을 받고 있는 왕에게 올무를 놓으려 한 것처럼 거의 모든 사람의 증오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 첫 부분에서 자신이 그런 추잡한 중상모략과 무관하다는 점을 밝힙니다.
시편 7 편
다윗이 사울을 "화친한 자"로 부르는 이유는 어쩌면 그의 왕권의 위엄 때문에 그의 신분이 마땅히 성결하고 어떤 위험으로부터 보전되어야 하고 그 결과 그를 상대로 무슨 적대적인 시도를 한다는 것은 불법적인 결과가 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삼간 사람이고 우리에게 친절한 행동을 보여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가 단 한가지 경우에 있어서도 그에게 해를 끼친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불평할 수 있지 않느냐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허나 세상의 말은 다윗이 평화의 때에 큰 소동으로 전쟁을 유발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 명백하게 드러나는 구절은 다윗 자신이 하나님의 인정하심으로 만족하는 한 다른 곳에서는 아무데서나 위로를 받을 수 없었지만 이 한가지 사실에서 오는 위로로 만족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4) 제 4절의 둘째 구절에서 다윗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선한 사람일 뿐 만 아니라 악인들에게도 친구가 되었으며 잔인하게 자기에게 해를 끼친 원수들에게까지 어떠한 보복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에게 도움을 베풀기까지 했다는 점을 밝힙니다.
착한 사람들과 평화로운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그 자체는 거기에 악인들을 참을성 있게 용납하는 자제와 온유가 곁들여지지 않는다면 별로 뛰어난 덕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신이 받은 상처를 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 악을 갚고자 노력한다면 그는 새로 태어나 성화 된 본성으로부터 오는 아름다운 기품 가운데 한가지 면을 보여주며 이로서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의 일원으로 입증하는 셈입니다 이러한 온유는 양자의 영에게서만 나오는 것입니다.
(할라츠)를 우리는 '구출하다'로 번역하나 여기서는 '구별하다' '구분하다' 입니다.
따라서 혹자는 이 의미를 상통하게 하려고 무슨 단어를 보충하는 것을 피하려는 뜻에서 '혹 내가 나의 박해자들에게 도움을 베풀지 않으려고 나 자신을 그들로부터 위축시킨다면' 이라는 식으로 번역합니다.
하지만 이 동사를 '구출하다' 또는 '위험으로부터 건져낸다'는 뜻으로 보는 해석이 보다 더 일반적으로 승인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구별하다' 또는 '따로 떼어놓다'라는 구절이 우리들이 안전하게 보관하고자 하는 것에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에 자주 생략되고 있는 '않다'(not)를 보충해야 됩니다.
4. 본문 5절은 "원수로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고 내 영광을 진토에 떨어뜨리게 하소서" 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무슨 죄든 유죄로 판명되면 어떤 무서운 처벌도 감수할것을 자청합니다
시편 7 편
이것은 다윗이 자신의 정직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뛰어난 증거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이런 종류의 선한 양심을 바칠 수 있다면 그분의 손길은 더욱더 재빠르게 즉각적인 도움을 펼쳐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은 우리에게 자극을 주어 화를 내며 우리가 손해를 입도록 합니다.
그럴 때에 복수심으로 불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에는 부적당한 자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우리 자신의 초조감은 온갖 기도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먼저 다윗은 원수들이 '자기 영혼을 좇아 자기 생명을 땅바닥에 딩굴리고 던져버리는' 그들에게 내맡기고 있다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다음으로 다윗은 공중 앞에 나타내어 그들의 조롱의 대상이 되며 자신이 죽은 뒤에도 영원한 수모를 받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혹자는 우리가 '영광'으로 번역하는 (크보드)라는 단어를 '생명'으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영혼, 생명, 영광'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광'을 그의 기억이나 평판으로 보는 것이 이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했다고 봅니다.
이렇게 되면 다윗으로서는 '내 원수로 하여금 나를 파멸시킬 뿐 아니라 나를 죽인 뒤에도 더없이 수치스러운 어조로 나를 비방하므로 그 결과 내 명예가 진흙구덩이 속에 묻혀버리게 해주소서' 라는 식으로 말씀한 셈이 됩니다.
시편 7 편
시7:6-11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다윗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신 대로 자신의 억울한 것을 하나님께서 신원해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 확신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심판주이신 사실에 두었습니다(6-10).
다윗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뜻을 따라서 자신의 억울함을 판단해 주실 것으로 알았습니다. 바로 그분이 온 인류의 심판주이신 하나님이신 것을 확신합니다.
온 인류를 심판하시는 이가 그 심판주의 선하신 뜻을 따라 한 개인의 문제를 판단해 주시지 않으랴.
그러므로 다윗은 '나를 판단하소서' 하였고(8절), '나의 방패는 .... 하나님께 있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1. 본문 6절은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하셨나이다" 입니다.
1)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의 화를 자기 원수들의 횡포와 대조시킵니다.
우리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될 때 동일한 방법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악인들이 우리에게 살기가 등등하여 분노와 횡포를 터뜨리며 덤벼들 때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는 것이 옳습니다.
불신자들이 우리를 파괴하려는 힘에 못지 않은 열성과 능력이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를 실제로 보호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실 것을 간청해야 옳습니다.
'일어나신다'는 단어는 '심판의 자리에 오르신다, 또는 대항할 준비를 갖추다'는 말씀의 비유적 표현으로 그 말씀이 여기에서 하나님께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도움을 지체하실 경우에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주무시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도 조금 뒤에 주께서 '깨어날 것'을 간청합니다.
온 사방으로 그처럼 숱한 고통과 압박을 받고 있는 한 개인에게 아무런 도움을 베풀지 않는다는 것은 혹시 하나님께서 망각의 잠이나 주무시지 않는가 하는 문제에 부딪쳤던 것처럼 보입니다.
2) 본 구절의 마지막에 가서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택정하신 것과 일치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간구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편 7 편
그 말씀이 우리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지켜야 할 마땅한 원칙입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요한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듯이(요일5:14) 우리의 청원을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명령에 집착함으로서 우리의 마음이 제멋대로 무모하게 우리가 소원하고 기도해야 할 범위 이상으로 빗나가는 일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지 않는다면 결코 신앙으로 기도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다윗은 올바른 기도를 위해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부합하도록 합니다.
이 단편의 의도는 '주여 내가 야심이나 어리석은 열정 또는 타락한 욕망에 이끌려 무분별하게 나의 육신에 기쁨이 되는 것을 모조리 주님께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옵니다 다만 나를 지도하고 또 내가 안전하게 의지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밝은 빛일 뿐이옵니다' 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한 뜻에 따라서 그를 장차 왕으로 삼으려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으로 선택하신 사람의 권리를 방어하고 지탱하는 것은 자신의 소관사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말은 '내가 야인으로 비천한 처지에서 아주 만족하고 있을 때 나를 왕이라는 영광스러운 지위로 구별해 주신 것은 주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나와 전쟁을 벌임으로서 주의 뜻을 좌절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는 사울과 그의 측근들에게 대항해서 나의 이 명분을 유지하려는 것은 주의 소관사항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나 같습니다.
우리가 '주는 깨어나소서'로 번역한 (우라)는 타동사로서 다윗의 권리를 '세운다' 또는 '확립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의미의 전체를 요약하면 다윗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신뢰하면서 자기의 구원을 위해 그분의 손길을 뻗쳐주실 것을 간청하고 있는 내용으로 집약됩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셔서 부양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기를 바란다면 이 한계를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경계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2. 본문 7절은 "민족들의 집회로 주를 두르게 하시고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입니다.
혹자는 이것을 오직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국한시킵니다.
이 말씀은 다윗이 자신이 왕위에 오를 때 산산이 흩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백성들을 순수하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들로 재결합하도록 노력하겠다는 점을 약속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시편 7 편
사울의 통치 하에서는 종교가 소홀히 여겨졌습니다.
또 너무나 무절제한 악의 종자들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주석가들이 보는 의미는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왕으로 세우시는 날, 주께로부터 비열하게 멀어져 갔던 모든 백성들이 방황하고 무질서한 길에서 돌이켜 주께 예배를 드리러 돌아올 것이고 그 결과 주께서 그들 가운데 계셔서 그들을 지배하신다는 점을 깨달아 그들의 유일한 왕으로 경배할 것입니다' 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많은 민족과 관련된 단어로 보고 싶습니다.
다윗은 여기서 온 세상에 소문이 자자하게 퍼질 자신의 구원에서 오는 효과를 아주 확대해서 말합니다.
곧 다윗은 '주여 주께서 나로 하여금 평화로운 왕국을 차지하게 하시는 날 그것은 나 개인의 은택이 될 뿐만 아니라 많은 민족들에게 공통된 교훈이 되어 그들로 하여금 공의의 심판을 시인하도록 가르칠 것이고 그 결과 그들이 주의 심판대로 자신들의 눈길을 향할 것입니다'라는 식으로 언급했습니다.
다윗은 여기서 왕이 엄숙하게 집회를 주재할 때 민족들이 그의 주위에 빙 둘러싸는 습관을 빗대어 말합니다.
이와 같은 뜻에서 다윗은 이 말씀을 당분간 잠잠하고 침묵을 지키시던 하나님께서 혼연히 일어나실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한두 민족이 아니라 전체 민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대할 것이라는 점을 덧붙입니다.
"그 위의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 라는 말씀에는 비록 한 사람에게만 관심을 갖을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온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을 무서워하고 존중하게 된다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대조가 담겨있습니다.
3. 본문 8절은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 입니다.
1) 이 장은 앞 구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다윗은 앞에서 하나님께서 만민의 심판자로 모습을 드러낼 것을 간구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는 만민을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의 특수한 직무라는 점을 확실하게 용인된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판단하소서' 로 번역된 미래 시제에는 계속적인 행동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미래 시제로 된 문장의 일반적인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다윗은 여기서 한 민족만을 말하지 않고 모든 민족을 포함시켜서 말합니다.
시편 7 편
다윗은 하나님을 온 세상의 심판주로서 인정하면서 곧이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서원과 권리를 유지해 주실 것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 역시 버림을 받고 핍박을 받는 상황에 처할 때마다 이 사실을 명심하고 즉시 하나님은 이 세상의 통치자이시므로 그 자신을 부정할 정도로 자신의 임무를 포기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기서 비록 연속적인 재난이 우리를 엄습한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위로의 물줄기가 터져 넘쳐 흐릅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무죄를 변호해 주실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많은 민족을 다스리는 분께서 한 개인을 소홀히 다루신다는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정당한 추론의 원칙에 위배됩니다.
이 세상의 심판관들에게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에게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곧 그들에게 있어서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하나님께는 개인의 관심을 돌보는 것을 소홀히 할 정도로 큰 공무(公務)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2) 다윗은 다시 '자신의 정직'을 제시함으로서 위선자들처럼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주장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겉모양으로 취급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명분이 잘못되었을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거나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라는 예상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문제를 심판에 회부하지 말아주실 것을 기원하면서 여기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진실함을 자랑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 명료합니다.
곧 여기서 취급되고 있는 주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전체 생활에 대한 평가를 요구하실 때 거기에 대해서 그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 것이 아니라 그는 자신을 자기 원수들과 비교하면서 그들과 비교할 때에 자신이 좀더 의롭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도들 각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각자는 자신의 공로에 따라서 정렬되며 자신의 영적 기질을 심문 받는 입장에서는 문제가 전적으로 다릅니다.
그때 성도가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성소는 하나님의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7 편
4. 본문 9절은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맨 먼저 하나님께서 자기 원수들의 악의를 제지하시고 그것을 멈추게 해주실 것을 간구하였습니다.
여기서 그가 당한 고통이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아주 무서운 저주로 생각하면서 (감마르)라는 히브리어를 다르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 단어를 '중지하다' 또는 '끝내다' 로 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것을 '중단하게 만들다' 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파멸시키다' 또는 '소멸하다'와 같은 내용입니다.
따라서 그들 이야기대로라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이 꾀하고 있는 해악이 자기들 머리에 떨어지게 만들어 주실 것을 기원하고 있는 셈입니다.
곧 '악인들의 사악이 그들을 소멸하게 하소서' 라는 식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 견해는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통을 종결지어 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으로 보는 전자의 해석이 더 간단한 것 같습니다.
따라서 여기에 상응하는 기도는 '의로운 자들을 가리켜 보이소서' 또는 '그를 일으켜 세워주소서' 라는 기도가 따릅니다.
'가리켜 보여주소서' 를 택하든지 '세워주소서' 를 택하든지 별로 상관은 없습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부당하게 학대받고 있는 의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그들을 치켜세워 주심으로서 그들이 그 무수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계속 살고 있다는 점을 온 천하에 보여주소서 하는 내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기 때문이다'
히브리어의 접속사를 여기서 왜냐하면(for)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한 것은 다윗이 이 문장을 자기의 기도를 강조하는 뜻에서 이유로 덧붙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여기서 세 번째로 자신이 선한 양심의 증거를 확신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온다는 점을 밝힙니다.
하지만 다윗이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표현은 앞에 나온 것과 좀 다른 데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외적인 행동을 통해서 무죄를 보여줄 뿐 아니라 자기 마음의 은밀한 생각에 이르기까지 순수성을 갖추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심히 괴롭기에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시험하도록 강요한 것이 됩니다
다윗은 항간에 유포된 중상모략의 주모자인 원수들의 오만과 허풍을 자신의 확신과 대조시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시편 7 편
그리고 그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이 사람들을 속이려고 사용했던 그리고 그것이 성공할 경우 만족해 할 듯한 거짓되며 기만적인 핑계를 박탈하려는 뜻에서였는지도 모릅니다.
다윗은 악인들이 비록 세상이 보는 앞에서는 승리를 구가하고 대중의 박수갈채를 받을는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모습을 드러내야 할 사람들이므로 그들이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멀지 않은 장래에 하나님 보좌의 심판대 앞에서는 그들의 직위가 무엇이든지 간에 드러나지 않을 것이 있을까?
혹은 그들의 행동이 뭐 그렇게 요란하단 말인가 하는 식의 질문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의 순수함 어느 정도였는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뿐입니다.
5. 본문 10절은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입니다
다윗이 종종 기도에 명상을 뒤섞어서 자신에게 참된 확신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주 다급하게 하나님께 달려나가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열정의 기도가 새 힘을 얻지 못한다면 당장 식어버리거나 시들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이 처음 시작한 헌신과 동일한 마음의 열정으로 계속 기도하려는 뜻에서 신앙에 있어서 더없이 평범한 사실들을 자기 머릿속에 상기시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의 신앙을 북돋아서 보강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므로 자기가 하나님의 보호아래서 전적으로 안전하다는 점을 밝힙니다.
여기서 다윗의 만족스런 양심의 증거가 있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다윗이 단순히 '의로운 자를' 이 아니라 "마음이 정직한 자를" 로 말하는 것을 볼 때 그는 앞에서 언급된 '마음과 생각'에 대한 은밀한 탐구를 주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6. 본문 11절은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의로운 자들을 ....... 심판하십니다 - 칼빈)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 으로도 읽습니다.
물론 단어 그 자체는 이런 의미도 인정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먼저 독법대로 읽어야 뜻이 더 완전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따르고 있습니다.
시편 7 편
이것은 많은 신학자들의 인준을 더 많이 받고 있는 견해일 뿐만 아니라 다윗이 여기서 취급하고 있는 문제와 더 잘 어울립니다.
사울과 그의 하수인들이 중상모략적인 보고를 통해서 다윗에게 전반적인 편견을 뒤집어 씌울 정도로 그들의 악한 의도에 있어서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 결과 자신이 거의 전체 백성에게 정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거룩한 사람은 이 세상이 제아무리 얽히고 섦혀서 범벅이 된다 하더라고 하나님께서는 의인들과 악인들을 쉽게 가려낼 수 있다는 이 한가지 동기로부터 자신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인간들의 거짓된 심판으로부터 결코 속아 넘어가는 일이 없으신 하나님께 상소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날마다 장기간에 걸쳐서 자신의 처벌을 연기하고 있음을 보고 있는데도 어떻게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날마다 심판하는' 분으로 묘사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성경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칭송하는 것은 더없이 당연한 일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가운데 당장 자기 심판을 행사하지 않으신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의인들과 악인들을 분간하고 계시다는 아주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칠 수 없다는 사실은 단 하루도 쉴새없이 세상이 제아무리 혼란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재판관의 임무를 결코 중단하지 않고 계속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통치를 보면 인상을 쓰지 않을 수 없는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의 참으심이 승인하거나 묵인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명백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안심하고 날마다 하나님께 달려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7 편
시7:12-17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다윗은 확실히 억울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어떠함을 말합니다(11-16). 하나님은 인류가 당하는 억울한 일을 묵과하시지 않습니다. 그는 반드시 벌하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느 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아야 할 억울한 일인지에 대하여는 사람이 얼른 분변하기 어렵습니다. 혹시 어떤 사람이 억울한 것 같은 일을 당했을지라도 사실상 그 내막으로 말하면 그것이 그의 마땅히 받을 환난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만 확실히 아십니다.
만일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주께서는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에 있어서 그 가해자(加害者)를 심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1. 본문 12-13절은 "(12)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13) 죽일 기계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 만든 살은 화전이로다" 입니다.
1) 이 구절은 대개 두 가지로 설명됩니다.
그 의미는 만약에 다윗의 원수들은 자신에 대한 그들의 악한 의도를 고집하지만 그들의 완고한 악이 받아 마땅한 저주가 이미 그들에게 선고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둘째 구절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보충합니다.
'그가 돌이키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칼을 날카롭게 하실 것이다'라는 식입니다.
이것은 만약에 우리 원수가 회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을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해 완전무장을 갖추실 것이라고 다윗이 언급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런 뜻으로 이해한다면 셋째 구절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무장을 갖추도록 준비시키는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고 곧 불신자들이 모든 종류의 해악을 잉태한 가운데 악을 낳으려고 산고를 치르다가 마침내는 기만과 거짓을 낳음으로서 하나님께 정면으로 도전하는 결과가 되어 그와 전쟁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무장을 갖추는 이유로밖에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구절을 계속적인 문장으로 읽는 해석이 더 정확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들마저도 시편 작가의 의도를 완전하게 제시하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신에 대항하는 원수들의 무시무시한 시도를 열거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더 높게 평가하고 설명하려 했었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시편 7 편
이 악한 사람들이 강력한 군대의 힘으로 보강되고 풍부한 물자를 공여받는 가운데 그를 섬멸하겠다는 작정으로 겁 없이 맹렬하게 덤벼드는 판국에 누가 그에게 모든 것이 끝장났다고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말 속에는 일종의 냉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그들이 자기를 죽일까봐 겁난 척할 뿐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내 원수가 자기 뜻을 바꾸지 않거나 자신의 횡포와 힘을 다른 방향으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그의 손에서 멸망하는 것을 막아줄 수 있겠는가? 그에게는 무기가 얼마든지 넉넉하며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나를 죽이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고 하는 내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2) 그러나 다윗이 특별히 지목해서 말하는 사람은 사울 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가 만든 것은 핍박하는 자에게 합당한 화살"이라는 말을 합니다.
다윗을 파멸시키려고 죽을 힘을 다하는 하수인들이 사울 편에 많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선지자의 의도는 막대한 위험 속에서 자기를 건져내 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데 있었습니다.
'그가 돌이키지 않더라도'라는 말씀에서 '돌이킴'은 다윗의 원수의 회개와 개심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의미 있는 목표의 변화를 뜻하는 것으로 이것은 마치 '내 원수는 자신의 환상을 좇아 무엇이든 행할 수 있다' 는 식으로 이야기된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예상을 뒤엎고 뒤따른 갑작스런 변화가 얼마나 경이적이었는가 하는 점이 더욱더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사울이 '자기 활에 맞아 죽는 죽음의 도구를 준비했다' 는 말에는 그가 추구한 것이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쏜 자를 죽이기로 단단히 결심했다는 뜻이 포함됩니다.
혹자는 우리가 '박해자들' 이라고 번역하는 (둘레킴)을 '화살들'로 봄으로서 그것을 '불타는'것으로 번역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그런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택한 번역이 더 적합할 것입니다.
다윗이 단 한 사람뿐 아니라 큰 무리를 무서워할 이유가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사울이 강력한 무리의 사람들을 시켜 이 불쌍한 망명객을 추격하고 박해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2. 본문 14절은"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입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위험이 얼마나 크고 거대한 것이었는가 하는 점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사울의 주제넘고 어리석은 흉계와 그의 막강한 음모 태세를 조롱하면서 그 모든 것이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고 말았다는 점을 밝혀줍니다.
시편 7 편
'보라' 라는 지시 부사를 써서 그 신비를 더욱더 강조합니다.
이것은 자기 편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가 드러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보라' 고 그는 말합니다. '그가 심술을 잉태했기 때문에 산고를 겪은 뒤에도 사악을 낳았으나' 마침내 남은 것이 허무한 바람뿐인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대와 예상을 좌절시키셨으며 이 모든 악한 시도를 타파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법과 심술은 사울이 다윗에게 부과하려 했던 모든 횡포와 격정에 대한 대명사로 사용됩니다.
혹자는 '낳으려고 해산의 고통을 치르다' 가 '잉태' 라는 말의 앞에 나오는 것을 두고 순서가 뒤바뀐 것으로 생각하지만 우리는 이 말을 '보라 그가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 사악을 낳을 것은 그가 이미 심술을 잉태했기 때문이다. 그가 오랜 동안에 걸쳐서 나의 파멸을 획책했기 때문에 그는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그 기도를 수행할 것이라' 라는 식으로 설명한다면 순서가 그대로 잘 맞는다고 봅니다. 다윗은 뒤이어 '그가 거짓을 낳았도다' 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이것은 사울의 기대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말로서 이것은 불신자들의 악행의 결과가 건방진 음모와 일치하지 않을 때 이사야가 그들이 "낳은 것은 바람 같아서"(사26:18)로 이야기한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이 은밀하게 우리의 파멸을 계획하는 것을 볼 때마다 우리는 그들이 스스로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점과 그들이 스스로를 속이고 있으므로 그들이 마음 속에 계획하는 것을 성취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흉계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그들이 그 흉계 때문에 낙심하고 있다는 점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참을성 있게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순종하는 정신으로 견뎌내야 할 것입니다.
3. 본문 15-16절은 "(15)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16) 그 잔해는 자기 머리로 돌아오고 그 포학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입니다.
다윗은 그들의 악한 계획이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경이적인 섭리에 그 결과가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 정반대로 되고 말았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는 먼저 '웅덩이와 구덩이'라는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여 이 사실을 진술하고 있으며 다음으로 동일한 내용을 비유를 사용하지 않고 간단하게 '남에게 품은 해악이 그것을 고안해 낸 사람의 머리로 돌아갔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구덩이를 판 사람이 거기에 빠져버린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악하고 교활한 사람들이 자기들이 남을 잡으려고 설치해 놓은 올무와 덫에 걸려들거나 남의 파멸을 음모한 자들이 자신들의 꾀에 걸려 넘어지는 경우를 두고 사용한 말입니다. 이 가르침은 두 가지 용도가 있습니다.
시편 7 편
첫째 우리의 원수들이 제아무리 계략에 뛰어나고 해악을 끼칠 온갖 수단을 가지고 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한 대로 마침내는 그들이 스스로 자기 칼에 망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은밀한 손길과 지시에 의해서 무고한 사람들에게 내리려고 획책하는 자들의 악을 그들 자신의 머리 위에 떨어지게 하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둘째 만약에 언제든지 우리의 이웃에게 무슨 해를 끼치거나 무슨 악이든 범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면 이 인과 응보라는 공의의 법칙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웅덩이를 파놓는 자는 스스로 거기에 빠져들고 만다는 원칙이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서 자주 시행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각자는 자신의 행복과 안녕을 생각하듯이 남에게 제아무리 사소한 해라도 끼치지 않으려는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4. 본문 17절은 "내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종들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의도가 그들로 찬양의 제물을 드리게 하는데 있으므로 다윗은 그가 받은 구원을 감사한 마음으로 시인할 것을 약속합니다.
그와 동시에 자기를 사망으로부터 건져주시고 보존해 주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이 명백하고 틀림없는 일임을 확증합니다.
만약에 다윗이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보존될 수 없다는 점을 확신하지 못했더라면 그는 진실로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나님께 자신의 구원에 대한 찬송을 돌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의 구원자에게 마땅히 감사한 마음을 표현할 것을 약속할 뿐 아니라 그가 전체 시편에서 노래하고 있는 내용처럼 그가 생명을 찾은 것은 사울이 그의 생명을 취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라는 점을 단 한마디로 확증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의 의"란 하나님께서 자기 종들의 생명을 방어하고 보존하심에 있어서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를 우리들이 보지 못하게 그 자신의 마음 속 가장 은밀한 구석에 숨겨두시는 것이 아니라 악인들이 제아무리 우리에게 싸움을 걸어오고 우리를 박해한다 하여도 우리를 모든 부당한 횡포로부터 방어해 주시고 우리를 압박으로부터 구출해 주시며 안전하게 보존해 주실 때 그것이 우리의 은택이 된다는 점을 보여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