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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증인
(계 11: 1-13)
= 성령의 사역론 =
요 약
본문은 한 영혼을 구원하사 온전케 하시는 성령의 이중적인 사역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즉 두 증인의 능력적 활동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승천 후 대 변혁의 현상 등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구조와 같은 것으로 성령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개인적으로 적용시키심을 보여준다.
즉 두 증인과 두 선지자는 동일하신 성령이시지만 두 증인은 성령의 은사적인 역사를, 두 선지자는 성령의 중생 성화 등의 역사를 각각 나타내고 있다.
설 명
<성령론>
1. 성령 역사의 3양태
① 중생 먼저 → 은사 나중 (말씀 강조)
② 은사 먼저 → 중생 나중 (본문 경우)
③ 중생과 = 은사 균형적 성장 (노아 홍수, 표준 모델)
2. 두 수준의 성도
① 성전과 제단 안 (거룩한 성도)
② 성전 밖 마당 (아직 이방인의 삶을 사는 자)
3. 짓밟힘을 받는 기간
마흔 두 달 = 삼 년 반
삼 년 반 후에는 회복될 것을 암시
(객) 공생애 상징, (주) 성령의 준비적 사역을 통해서
4. 적용하시는 성령
① 공생애적인 표적 - 신앙 갖도록(3-6절)
② 죽으심에 연합시킴 - 옛 것은 죽고(7-10절)
③ 사심에 적용시킴 - 새 사람으로 살고(11절)
④ 높아지심에 적용시킴 -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심(12절)
⑤ 성령 보내심 - 심령 대변혁(13절)
(본 문)
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4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5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6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11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12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 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13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 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계 11:1-13)
(강 해)
이제 여섯째 천사의 나팔에서 세 번째 삽경인 “두 증인”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이 부분이 7년 대 환난에서 전 삼년 반 때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기간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또 다시 사역을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문자적 이해는 그 분야의 전문가에 맡기고 신령한 측면에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은 요한계시록을 대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 가장 기쁨이 넘쳤던 본문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본문은 성령께서 개인에게 임하여 어떻게 그에게 믿음을 주시며 나아가 그에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삶과 그의 높이 되심에 연합시켜 거룩한 성화의 신앙으로 이끌어 가시는가를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말씀 드리기 전에 성령의 사역은 약 세 가지의 형태가 있습니다.
하나는 영혼의 중생에서 시작하여 육체에 은사를 입는 방향으로 가는 경우와, 하나는 은사부터 받고 그 후에야 말씀을 깨달아 영혼이 중생하고 성화를 향하여 가는 형태와, 그리고 하나는 두 가지가 균형적으로 성장해 가는 경우입니다. 이런 현상은 교회가 기도나 말씀 중 어느 편을 더 강조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대체로 기도를 강조하면 은사 부분이 앞서고 말씀을 강조하면 영의 생명적인 부분이 더 앞섭니다. 그런데 본문은 불신자 상태에서 구원을 받아 성화해 가는 즉 은사가 먼저 임한 후에 예수 복음을 깨달아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두 번째의 경우입니다.
본문의 구조는 두 증인의 능력적 활동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승천 후 대 변혁의 현상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구조로 보면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구조와 같습니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볼 때 요한 기록할 당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사심과 높이 되심은 이미 끝난 상황이고 성령강림의 오순절도 지난 지 수십 년이 된 상황이요, 지금 우리들의 관점에서 보면 성령께서 강림하신지 2000년이 된 시점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또 다시 그리스도에게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본문대로라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같은 현상이 반복되어야 하는데 과연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개인적으로 적용시키심입니다. 그 증거가 두 증인 혹은 두 선지자입니다. 둘은 증거의 수로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증거하심이 그의 본분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여러 가지 이적을 통해서 개인에게 믿음을 주시고 또 은혜를 주사 그리스도를 주로 믿게 하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그리스도와 승천함을 믿음 안에서 경험케 하시고 강한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거룩한 삶에 도달하도록 하십니다.
이 사건을 성령 사역적인 측면에서 보면 먼저 성령의 외적사역으로 시작하여 표적을 통해 그리스도를 구주로 알게 하신 후 이제는 내적인 역사로 들어가 구주를 믿어 생명을 얻게 하시며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적으로 연합하므로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장성하도록 하시는 그 일련의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외부에서 시작된 성령의 역사가 결국 죄인의 심령을 두드려 내적인 생명의 역사로 전환되어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련의 구원의 서정입니다.
먼저, 구원의 서정은 불신자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1-2절에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했습니다.
여기 1절의 하나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은 이미 예수 믿어 거룩함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여기 성전은 성소를 일컫고 제단은 희생의 제물이 드려지는 제사장 뜰입니다.
그러므로 성소는 하나님과 온전한 영적 교통 상태를 제단은 자기의 죄악을 척결함을 나타냅니다. 이 곳은 제사장이 두 곳을 오가며 봉사했던 곳으로 이미 구원받고 거룩하심을 입은 영에 속한 성도를 지칭합니다.
그런데 지팡이와 같은 갈대로 이 경배자들을 척량합니다.
여기 지팡이는 양을 치는 것이요, 갈대는 잣대로서 성경을 예표합니다. 즉 이것을 주며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라고 한 것은 실재로 그 신앙을 재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 이 말씀이 암시하듯 이미 잴 수 있을 만큼 장성하여 상당한 분량에 이른 성도들임을 암시합니다. 그러니까 이미 과정을 거친 자들이므로 본 사건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척량하는 내용만 언급될 뿐입니다. 다만 그들이 등장함은 불신자들을 구원하사 이와 같은 아름다운 신자로 만드시겠다는 암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흔 두 달 동안 되어지는 일과 관계된 사람은 성전 밖 마당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곳은 일명 이방인의 뜰로 불려지는 곳입니다. 이곳도 성전 구역으로 이방인이 올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신령한 측면에서 이 부류들은 만세 전에 택함은 받았으나 아직 예수를 자기의 생명의 구주로 믿는 수준에 이르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전혀 구원받지 않은 자연상태에서부터 성화 그리고 장차는 영화에 이르도록 인도하십니다.
다음은, 그들이 불신앙에서 졸업할 때가 언제인지 보여줍니다.
2절에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했습니다.
여기 마흔 두 달은 한 달을 30일로 계산하여 3년 반입니다. 이 기간 동안 이방인들에게 짓밟힘을 받음입니다. 그러나 3년 반이 지나면 이방인의 짓밟힘에서 완전히 해방을 얻을 것이라는 힌트입니다. 물론 그 동안은 이방인에게 짓밟힘을 받습니다.
그리고 여기 이방인이란 역사적으로는 실재로 하나님을 모독했던 원수 국가들이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아직 불신자 속의 예수를 부인하는 속성을 뜻합니다. 그들은 이 불신앙에 붙잡혀서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3년 반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하나님께서 불신앙을 척결하여 주시므로 불신앙의 시대를 마감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3년 반 동안의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럼, 3년 반의 때에 있을 성령의 구체적인 사역은 무엇입니까?
1.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공생애적인 표적의 사역입니다.
3절-6절에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했습니다.
이것을 성령의 외적인 사역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외적 사역이란 은사를 통해 기사와 이적으로 표적을 주어 택한 자를 계몽시키사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사역입니다. 이 은사란 교회를 통한 은혜이기도 하고 성령 은사를 통한 표적이기도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목자로 오셔서 공생애 3년 반 동안 이 사역을 하셨습니다.
즉 온갖 기사와 이적을 나타내시고 가르치심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확신시키셨습니다. 요 20: 30-31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제자들은 3년 반 동안 주님이 하신 일을 보면서 연방 저가 뉘시기에 라는 의문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할 때는 이미 공생애 후반기였습니다.
그런데 현재도 이 사역을 성령께서 대행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기 두 증인이란 성령을 뜻함이요, 1260일이란 문자적인 기간이라기 보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공생애적인 역사를 대행하사 예수가 과연 뉘신가 하게 하사 구주로 알게 하시는 현재적 역사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여러 체험들을 허락하시는 목적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동일한 기간일지라도 1260일, 마흔 두 달, 삼 년 반 등의 표현이 있는 것은 동일한 사건에 나타난 여러 현상을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가령 마흔 두 달이라는 표현은 박해와 관련되어 그 기간에 나타나는 간헐적인 박해의 현상을, 혹은 1260일이라는 용어는 대개 양육에 관련되어 그 양육이 섬세하고 지속적임을, 그리고 한 때 두 때 반 때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큰 틀을 암시합니다.
특히 두 증인 두 선지자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 등 둘이라는 2수가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데 2는 증거의 수로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성령 사역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요 16: 13-15에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4절에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 라고 했는데 이는 슥 4: 3의 배경으로, 감람나무는 기름을 생산하는 나무요, 촛대는 그 기름을 태워 불을 밝히는 것으로 이는 성령 은사의 두 방향을 묘사합니다. 즉 두 감람나무는 성령의 은사를, 두 촛대는 촛대가 상징하는 대로 교회에 주신 주께서 세우신 주의 종들을 뜻합니다. 즉 성령께서는 신비한 은사와 교회의 직분자들을 내셔서 불신자들을 온전한 믿음에 서도록 주관 혹은 객관 즉 안팎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5절에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했습니다. 이 구절이 암시하는 바는 분명 해하려는 세력이 있음과, 해하려 하는 그 순간이 그 세력이 죽는 때라는 점입니다.
이처럼 불신자의 마음에 온갖 처리 받기 위해 불신앙이 드러나지만 성령께서 그 때마다 소멸하시는 사역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들에게서 잘못된 속성이 나타나지만 그 때마다 주님은 적절한 대응으로 그것을 처리하셨습니다.
그리고 6절을 보면 엘리야적인 사역과 모세적인 사역이 나타납니다.
이 구절을 보고 두 사람이 역사의 종말에 나타날 것이라고들 하지만 여기에 엘리야적인 사역과 모세적인 사역이 나타났을 뿐 그들의 이름이 열거된 적은 없습니다.
혹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결국은 그 능력과 심령을 가진 세례요한이었듯 엘리야와 모세와 같은 권능을 가진 말세의 종들이 대거 나타나 재림을 대비시킬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역사적 종말론의 관점에서는 추측 가능한 주장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죄인의 심령에 오늘도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선지자나 율법의 사역은 메시야를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이 사역을 지금 이 시간에도 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오지 못하게 한 엘리야적인 성령의 사역이란 예수 없이는 사는 심령의 갈급함을 깨닫게 하심이요, 권세로서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는 모세적인 성령의 사역 역시 구주 예수 없이는 살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시는 전초적인 역사로서 세상에 대한 깨달음을 주심입니다.
이 사역을 10절에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했다고 묘사합니다.
이 부분은 출애굽기 열 재앙 강해 시에 구체적으로 다룬바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앞에 나오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허무나 어떤 슬픔이나 억울함 혹은 커다란 문제를 당하고 감당할 수 없어 함을 봅니다. 그들은 그 영문을 모르지만 이 모든 것이 다 불신앙을 졸업시키기 위한 전초적인 외적인 역사입니다. 그래서 두 손을 들고 예수 앞에 나오게 됩니다.
그럼, 증거의 사역이 마친 후에 하실 일은 무엇입니까?
1.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시키심입니다.
7-10절에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했습니다.
여기 무저갱의 짐승이 두 증인을 죽였는데 이는 과거에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음을 연상시키는 대목입니다.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황충 재앙에서 밝힌 대로 죄입니다. 이것을 성령의 사역에 적용했을 때 난해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죽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죄를 범하면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라고 설명함도 합당치 않습니다.
그래서 계시록의 묵시문학적인 특징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령의 외적인 사역이 점점 내적인 생명적인 사역으로 전환하시는 과정을 시사합니다. 이 때 성령의 역사하심도 그 양상이 많이 달라집니다. 가령 전에는 예수를 알게 하시려고 표적이 많았지만 이제는 표적적인 이적은 거의 사라지고 내면적인 사역으로 진행됩니다. 그렇다고 은사적 사역이 끝난 것은 아니고 내면적인 사역의 전환을 강조한 것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10절에 두 증인의 이름이 두 선지자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연속적인 사건이요 문자적으로는 동의어이지만 죽기 전후의 부르는 이름이 다릅니다. 이렇게 다른 것은 성령의 외적인 사역이 내적인 사역으로 전환했음을 보여줍니다. 이 전환의 분기점은 생명적으로 거듭나는 중생입니다.
그리고 8절에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했습니다. 여기 비유적인 설명을 사중으로 하고 있음을 보아 이 장소가 영적임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앞에서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재현하셨듯 이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재현시키십니다. 달리 설명하면 성령께서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연합을 경험케 하심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예수 안에서 되어진 일을 실재로 경험케 하심입니다.
그리고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 목도하고 장사를 못하게 했습니다.
여기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는 바벨론이나 메대 파사처럼 한 통치 아래 다양한 민족과 문화적 구성을 가리켰듯 좁은 의미에서 생각과 성품과 사상과 마음 등의 전 인격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사흘의 3은 완전수요, 반은 보충수이며,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 목도하고 장사하지 못하게 함은 죄에 대하여 온전히 죽기 전에는 자기를 장사하려 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완악한 속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내가 예수 안에서 이미 죽었고(롬 6: 10,11) 실재적 경험에서도 은혜로 상당히 죽었으면서도 늘 나를 내려놓지 못하는 우리들의 자아의 상태의 완악함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두 선지자의 죽음을 축하했는데 이는 옛 사람의 죽음이 진행될수록 점점 가속화되는 그 심령의 기쁨을 묘사함입니다. 그리고 서로 예물을 보냈는데 이는 에스더서에 볼 수 있듯이 한 공동체가 극도의 위기에서 온전한 승리를 경험할 때 그 기쁨 속에 나타나는 하나됨의 현상입니다. 이처럼 내가 죄에 대해 죽어질 때 성령께서 우리 인격 안에 충만하사 내적인 갈등이 사라지고 평안과 기쁨과 승리와 복락을 경험케 하시는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어지는 이 은혜야말로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리고 땅에 거하는 자란 육신에 속했던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땅에 거하는 자들을 어떻게 괴롭혔다는 것인가? 두 증인이 한 일은 모세의 이적과 엘리야의 이적이요, 이 두 이적이 의미하는 대로 하나님의 은혜에 목말라하는 현상과 세상에 대한 절망으로 예수 없이는 살 수 없는 마음을 조성하심을 그렇게 표현함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예수를 구주로 믿게 되었고 나아가 죄에 대하여 죽어졌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2. 또 그리스도의 사심에 적용시키십니다.
11절에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했습니다.
여기 삼 일 반 후란 내가 죄에 대하여 죽은 후를 가리킵니다.
그 때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 다시 살아났는데 생기란 아담을 창조하실 때를 연상시키는 것으로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을 때 영적으로 다시 산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살아나자 즉시 발로 일어설 수 있었다는 것은 생기가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은혜임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딤후2:11-12에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만큼 산다는 사실을 깊이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구경하는 자들이란 마음속의 온갖 의심과 방관과 소극적이거나 조롱하거나 반대하는 의식 혹은 그런 류의 잠재의식 등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새롭게 깨어나 이것들은 훌훌 털어 버리고 근신하며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새 마음이 주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구경하는 자들이 변화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구경하는 자들이 살아난 두 선지자를 보고 크게 두려워합니다. 이는 마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울의 마음에 일대 변혁이 일어난 것처럼 우리의 심령이 부활 생명으로 새롭게 될 때 나를 사로잡고 있던 온갖 의심과 방관과 소극적인 의식들이 사라지고 적극적인 경건한 마음이 조성됨입니다.
3. 이제는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에 적용시키십니다.
12절에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 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했습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성도들에게 이제는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을 적용하셔서 하늘에 속한 자의 삶이 되게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 하늘로부터 난 큰 음성이 나면서 이리로 올라 오라 하심은 참으로 장하다는 아버지의 칭찬과 아울러 성도의 승리의 개가임과 나아가 하늘에 속한 삶이란 참으로 크고 영광되며 놀라운 것임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과연 이곳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충만한 곳이며 승리와 영광과 복락과 권능과 존귀와 영생과 왕권과 소망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이 자리는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그 공효를 우리가 함께 누리는 곳으로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이 넘치는 곳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승천이야말로 구속사의 찬란한 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안에서 천국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은 날마다 찬양할 제목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시제인 이미와 아직의 미완성의 긴장관계 속에 우리가 처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안에서 이미 이루어졌고 현재 성령 안에서 경험하고 있으며 장차 온전히 경험할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형으로 쓰인 예는 엡 2: 5-8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리고 과거 현재 및 미래형으로는 골 3: 1-3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구름을 타고 올라갑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시고 승천하심과 같습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과정을 놀라울 만큼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키십니다. 어릴 때 하나님께 소망을 구했더니 눈앞에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과정이 전개되면서 그 뒤를 따라가라고 하신 말씀이 선합니다. 그러니까 이미 예수 안에서 하늘의 보좌에 앉혀진 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것을 믿음으로 적용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도 앞에서와 같이 저희 원수들이 구경을 합니다.
즉 우리가 하늘에 속한 삶을 맛본다 할지라도 아직도 우리 안에는 죽어야 할 원수의 속성이 남아 있다는 힌트입니다. 이 원수는 아직도 하나님의 주권에 전적으로 순복하지 않고 자행자지하고 자만하고 교만하려는 아직 남은 자아입니다. 우리는 초대교인들처럼 온전히 나를 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복음 전하는 가운데 이르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승천 이후에 전개되는 다음의 과정을 알아야 합니다.
4. 그리스도의 성령 보내심을 적용시키십니다.
13절에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 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했습니다.
이렇듯 두 증인이 승천하면서 지상에 나타난 현상은 크나 큰 지진이었습니다.
우리 심령 속에 일어나는 큰 지진 현상이란 심령의 변혁을 암시하는 것으로 성령의 충만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셨듯 이제 성령께서 그 과정을 우리에게 적용하시는데 그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이 지진에 죽은 자가 칠 천이었습니다.
칠 천이라는 숫자는 7에 1,000을 곱한 수로서 7은 사역이나 속성의 완전수요, 1,000은 만수 10을 세 번 곱한 수로서 충만수입니다. 그러니까 인격적인 속성 전체를 가리킵니다. 이 인격적 속성은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로서 나누어지는데 칠 천이 부정적으로 쓰일 때는 죽여야 할 죄악의 속성이요, 긍정적으로 쓰일 때는 엘리야에게 다른 신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칠 천을 남기셨다고 했듯이 변치 않는 우리 안의 신령한 속성인 성령의 열매가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의 속성의 죽음은 곧 신령한 속성의 부여를 암시합니다.
그래서 칠 천의 죽고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이처럼 성령께서 심령을 장악하시므로 죄악으로 충만했던 것들은 사라지고 성령의 열매들로 충만케 되어 하나님만 영화롭게 하는 성화의 시점에 이르렀음을 암시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일곱째 인의 수준에서 불어지는 복음의 나팔들의 결과입니다. 참으로 복음의 나팔이 울려 퍼질 때 심령에는 변화의 지진이 나타납니다.
잠 30: 21-23에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종이 임금 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회질서파괴, 경제질서파괴, 윤리질서파괴, 양심질서파괴 등을 보여주는데 이런 일이 있게 될 때 사람들은 모두가 개탄을 하고 견딜 수 없어 합니다.
이처럼 종이 임금 되듯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내가 주장하여 임금 노릇을 하지 않았는지, 미련(악)한 자가 배부르듯 죄 가운데 살면서도 영적 빈곤조차 느끼지 못하지는 않는지,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가듯 그리스도의 신부라 하면서 아직도 세상을 사랑하지는 않는지, 계집종이 주인을 미혹하여 주모를 몰아내고 안방을 차지하듯 육신이 마음 중심을 차지하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되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참으로 개탄할 일이라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영이 임하면 모두가 마음이 진동하여 가슴 치며 회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종합하는 마음으로 그 동안 성령께서 하신 적용 과정을 회고해 보면 먼저 예수님의 공생애적인 표적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구원받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적용시켜 죄에 대하여는 죽은 성결의 사람이 되게 하시며, 나아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적용시켜 하나님과 의에 대하여 산 의롭고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하시고, 나아가 그리스도의 승천을 적용시켜 하늘의 특권과 보배로움을 누리게 하시며, 이제는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성령 강림이 있었듯 각인에게 적용시켜 온전히 성령 충만을 경험케 하사 변화시키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전 2: 12에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의 적용하심으로 우리 인격이 이렇게 온전케 되길 원하십니다.
<결론>
이 시간 우리의 사명의 막중함을 깊이 깨닫습니다.
그 동안 성령께서 구원의 서정을 이루시는 역사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이 과정을 성령께서 적용시키시고 계신다는 사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 시간에도 성령께서는 외적으로 내적으로 인생을 변화시키시고 계십니다.
이 귀한 역사하심이 더욱 나타나 내가 변화되고 모두가 구원받고 변화되는 역사가 있도록 더욱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