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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부산수필문학상 심사평
권대근/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부산수필문학상 -송명화
수필은 새가 하나의 세계인 알을 깨고 태어나듯이 인습과 고정관념을 깨고 태어난 새로운 세계의 열림이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의 열림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예전부터 있어 온 세계, 기성품으로 가득 찬 인습의 세계, 타인의 가치가 규범으로 옭아매고 있는 타인의 땅에 태어난 것이다. 타고난 개성을 바탕으로 새로 탄생하기를 원한다면 낡은 인습과 타인들의 가치로 뭉쳐진 알을 깨지 않으면 안 된다. 기성품의 세계에서의 바람은 질서와 떳떳함과 맑은 세계로, 남의 가치에 맞춘 또 다른 기성품으로의 삶이다. 이 기성품 세계의 맞은편에는 또 다른 세계의 삶이 있다. 수필 <아마릴리스>는 바로 다른 세계의 삶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송명화 작가가 오랫동안 관찰하면서 키워온 ‘아마릴리스’ 꽃에 대한 수필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수필정신과 맞닿아있어 신선감을 준다. 무엇보다도 전이의 미학을 통한 문학성 견인해내기에 성공한 작품이라, 부산수필문학상 수상작으로 손색이 없다.
어느 한 부분도 비장함이 묻어나지 않는 데가 없지만, “윤여정은 아마조네스의 전사다. 이혼의 상처를 오롯이 받아들이고 아이들을 안았다. 유명인이기에 그녀의 힘든 가정사를 사람들은 대체로 알고 있었다. 한때는 쉽게 어둠의 그림자를 벗어 내리라 생각지 못해 안쓰러워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빈 줄기 속에 쓰디쓴 눈물과 아픈 모정과 수많은 대본을 쟁여 넣고 우뚝 서서 세상을 바라보았다. 가열한 삶에서 구한 내공으로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진중하면서도 재치 있게 말했다. “나를 바깥으로 내몰았던 아이들 덕분에 이 자리에 섰습니다.” 무슨 배역이든 맡아 생계를 책임지려 했던 그녀의 시간들이 든든한 지지대가 되어 무지개다리를 놓는다. 땀과 눈물이 양팔저울의 눈금을 영으로 만들기도 힘들었을 텐데 이제 그녀의 트로피가 땀에 얹혔다. 그녀가 받은 갈채는 세상과 전투를 벌이는 어머니들에게 나누는 비타민이라 해도 될까.“한 대목은 이 작품의 백미를 보여준다. 주체적 여인이고자 한다면, 유교적, 남성중심적 세상과의 전투는 여성의 운명이 아닌가.
수상작 <아마릴리스>를 쓴 송명화 작가는 실수로 아마릴리스를 ‘아마조네스’로 인지한 데서 전사의 이미지를 건져내고, ‘릴리스’를 해방을 뜻하는 영어단어 release로 풀어내었다. 이 수필의 최고 압권은 이 부분이 주는 네오필리아가 아닐까. 그리고 그녀는 아마릴리스를 ‘얽매임을 끊고 자신의 의지로 선다’는 뜻으로 읽어낸다. 의미화해 놓고 보니, ‘날씬하게 뻗어 나온 여섯 개의 수술대와 하나의 암술대가 장엄하게’ 보인다고 하면서 윤여정의 이미지를 잘 소화하고 있다. 아마릴리스 꽃잎에서 나팔소리를 스캔하고, 진격의 신호로 읽어내고, 윤여정의 삶에 워킹맘으로서의 자신의 고되었던 삶도 전사 이미지에 포개어, 궁극적으로는 미의식으로 독자를 설득해야 하는 데 성공했다. 작가는 연상과 상상을 위한 전략을 수립해서 수필텍스트를 철학적 인식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미적 향수의 대상으로 만는 것이다. 미학적으로 전자와 후자가 조화롭게 융화될 때 가능하다는 점에서 미의식의 창조가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 수필은 미적 울림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배우 윤여정과 자연 아마릴리스, 여성의 문제를 통찰하는 미적 사유의 예술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준 데서 문학적 성취가 빛난다.
수필로서의 성공적 요인은 메타포라는 문학적 원리를 사용하여 수필의 구조와 전개를 짜나간 데 있다. 변용, 전이 치환의 미학은 감동의 바로미터다. 이 작품의 쾌미는 중층구조를 갖는 문학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심층차원에서 획득한 제재의 성찰결과를 감동적인 이야기질서로 표층차원에서 이중구조화한 부분에서 맛볼 수 있다. 한국현대수필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문제는 제재의 통찰 결과를 미적인 이야기로 이중구조화, x축과 y축으로 이원화하는 이야기 배열작업에 대한 무관심인데, 송명화 작가는 이야기의 미적 배열을 통해 독자를 감동의 세계로 이끄는 디자이너다. ‘회자되는 꽃말인 ‘눈부신 아름다움’ 말이다. 외관에 초점을 둔 것이겠지만, 화려한 화판 속에 깃든 정신의 아름다움을 조준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소심한 여성성은 버려도 좋다. 그냥 ‘꽃’이다. ‘제3의 젠더’다. “아마릴리스, 너의 별명은 여전사꽃, 꽃말은 당당함이야.”라는 결말부의 이런 변용미학은 송명화 수필의 의미구조 생성원리일 뿐만 아니라, 주제를 형상화하는 미적 원리라는 점에서 창작의 핵심 부분을 차지한다.
주제와 구조가 튼실할 뿐만 아니라 예술적 울림을 생성하도록 주제의식을 형상화하는 면에서도 모자람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송명화 수필의 문학적 울림은 이야기의 감동을 구조화하는 방법과 그러한 이야기 구조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서술전략이 긴밀한 상호관계 속에서 작동한다. 작가는 작품을 쓸 때마다 산고의 고통을 겪는다는 의미다. 송명화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기성품의 세계가 아닌 또 다른 세계, 즉 어두운 세상을 낯선 인식으로 열어젖히는 열린 작가다. 사회의식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녀의 수필은 하나 같이 독자에게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게 바르게 살아가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실로 우리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진지한 성찰을 안겨준다. 이처럼 진지하게 우리네 삶의 본질을 천착해 보인 작품이 있었던가. <아마릴리스>는 진정으로 우리가 읽고 싶은 수필들이라 감동을 준다. 이는 그녀가 세상을 향해 눈과 귀 그리고 가슴을 열어놓고 제 물상의 발신음을 듣는 열린 마음의 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송명화의 수필 세계는 내용과 형식의 완벽한 조화를 그 특징으로 하며 비평의 렌즈를 번뜩이면서 작가 자신이 직접 네거리로 뛰어나가 여성의 문제를 목이 터지게 외치는 그런 지성의 세계다. 송명화는 같은 시대의 대다수 여성수필가들과 달리 인식을 통한 수필 쓰기가 창작의 바탕을 이루면서 탄탄한 자기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녀의 수필 속에서 부드러운 감성과 예리한 지성이 교직되고 있음을 발견하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중화 구조를 통해 작가는 나름의 개성적 색깔을 문학적 형상화로 축성한다. 때로는 소시민적 일상을 수필적 제재로 활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경우라도 결코 단순한 소품으로 그치는 경우란 드물다. 하동 화개장터에서 산 ‘아마릴리스’ 구근 한 톨을 ‘다시 보기’를 통해 정교하게 형상화하였다. 20여 년 간 <에세이문예> 주간으로 줄곧 주목받는 본격수필을 써왔다는 측면에서 그녀는 한국수필을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한 명으로 부산수필문학상을 수상한 데 대해 진심으로 축하하며, 더욱 더 좋은 글로 독자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바란다.
아마릴리스, 아마조네스
송명화
누가 여성을 꽃이라 했던가. 손바닥만 한 꽃이라니. 씩씩한 아름다움이다. 화개장터에서 데려온 주먹만 한 구근 하나에 이렇게 큰 세계가 숨어있을지 몰랐다. 달포 넘게 애를 태우더니 드디어 꽃대 끝에 사방으로 커다란 나팔형 꽃을 세 개나 피웠다. 화피갈래 속을 들여다본다. 화판 아래쪽에서 뻗쳐 나온 삐침무늬가 빨간 치마폭에 대필로 친 댓잎마냥 거침이 없다. 파죽지세다.
그 기운에 압도된 까닭일까. 말실수를 하였다. 단체톡에 올린 사진을 보고 이름을 묻는 친구에게 ‘아마조네스’라고 알려주고 폰을 닫았던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무의식에 억압되었던 것이 부지불식간에 드러나 버린 것이라는데 그래도 의외의 연상이다. 아마조네스라니? 한 손에 무기를 들고 용감히 다른 손을 내민 여전사의 이미지를 그려보니 한 사람이 떠올랐다. 아카데미 시상식 무대에서 트로피를 들고 온몸으로 박수갈채를 받던 사람, 윤여정 배우다. 그녀는 세상 사람들을 설득하러 나선 장수 같았다. 코로나 때문에 소외감에 절어있던 국민들에게 함박웃음을 전리품으로 안겼다.
아마조네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성 무사족의 이름이다. 그들은 수렵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숭배하며, 부족을 지키기 위해 무술을 익혔다. 활을 쏘고 창을 던질 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한쪽 가슴을 누르고, 다른 쪽으로 아이를 먹여 길렀다. 다른 종족의 사내들이 하는 역할을 도맡았으되 그들에게 있어 어미의 자리는 포기할 수도, 누구에게 대여할 수도 없는 고귀한 소명이었다. 역사가의 상상에 의지해 각색된 부분도 많겠지만, 그 부족의 여인들은 꽃이자, 벌이자, 농부였으며, 그 시대의 알파걸이었다.
그런 아마릴리스가 여든을 바라보는 할머니라면 생뚱맞지 않은가. 한껏 뻗쳐낸 긴 꽃대 끝에는 미모로 한자리하는 젊은 여배우가 더 어울린다 할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꽃줄기의 단호한 색깔과 꺼칠한 구근의 모습을 보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실 양파보다 나을 게 없는 몰골이었다. 검보랏빛 껍질은 터덜거렸고, 버짐 핀 까까머리에 돋은 볼록한 혹 탓에 다른 것을 골라 봐도 별 수 없지 않았었나. 작고 강마른 할머니가 시상대 앞에 섰다. 단순한 검정드레스에 흰 머리카락을 단정히 올려 튼 모습이 화려함이나 우아함, 또는 섹시함이라는 콘셉트를 잡은 대부분의 여배우들과 확연히 달랐다. 환한 웃음을 입은 그녀에겐 은발과 얼굴주름이 보석이 되고 향수가 되었다. 덧칠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그녀의 내면을 더 잘 볼 수 있었다.
“저는 경쟁을 싫어합니다. 다섯 후보들은 각자 다른 영화에서의 수상자입니다. 우리는 각기 다른 역을 연기했잖아요.” 겹겹 내피 속에서 고이 갈무리한 지혜가 그녀의 말에 실려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최고는 없다, 최중이 필요하다.’, ‘대본은 먹고 살아야 하는 내게 성경이었다.’는 그녀의 말을 나는 공책에 적어 놓았다. 그녀가 쏘아올린 화살이 세상을 돌고 돌아 나의 아마릴리스 꽃 속에 내려앉고, 나팔소리처럼 쟁쟁 울리고 있다. 생명을 키우기 위해 쉼 없이 영양을 빨아들여 구근을 살찌우는 노력 끝에 꽃을 피우고,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를 거침없이 보낸다.
아니라고 세상을 향해 외치는 것은 윤여정의 내공을 짐작하게 한다. ‘자신의 역할’에서 ‘자신’을 지울 수는 없다. 어차피 혼자 태어나 세상은 혼자 갈 수밖에 없지만 순간마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어 저마다 가진 강렬한 색채를 섞고 문지르고 덜어내어 조화로운 세상을 엮어낸다. 하기에 ‘자신’은 더욱 소중하다. 자칫 잃어버린다면 자신의 역할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기도, 자신의 색깔을 찾기도 어려울 터이니.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란 ‘자신’에 속한 것이 아니어야 함을 알았기에 그녀는 애당초 밖에서 반짝이는 것을 얻으려 하지 않았다. 마음속의 금강석을 찾고 다듬었다. ‘자신’을 지켜내었다.
아마릴리스는 남미가 원산지다. 스페인어로 ama는 여자 가장을 뜻한다. -ryllis가 가지는 뜻은 알 수 없으나 나는 영어의 release를 떠올린다. 아마릴리스, ‘여성 가장의 해방’이라. 얽매임을 끊고 자신의 의지로 선다는 뜻으로 읽는다. 그러고 보니 날씬하게 뻗어 나온 여섯 개의 수술대와 하나의 암술대가 장엄하기까지 하다. 어머니의 자리다. 수술과 암술은 중매자를 기다린다. 꽃이 달릴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밀어 올린 꽃대는 날이 갈수록 심지를 죌 것이다. 튼실한 열매가 들어설 자리도 준비되었다. 애증의 그림자도, 욕심의 찌꺼기도 비워낸 그 자리에 들어서는 것이 무엇이든 슬기롭게 다독일 자신이 생겨서일까. 그녀는 편안해 보였다.
윤여정은 아마조네스의 전사다. 이혼의 상처를 오롯이 받아들이고 아이들을 안았다. 유명인이기에 그녀의 힘든 가정사를 사람들은 대체로 알고 있었다. 한때는 쉽게 어둠의 그림자를 벗어 내리라 생각지 못해 안쓰러워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빈 줄기 속에 쓰디쓴 눈물과 아픈 모정과 수많은 대본을 쟁여 넣고 우뚝 서서 세상을 바라보았다. 가열한 삶에서 구한 내공으로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진중하면서도 재치 있게 말했다. “나를 바깥으로 내몰았던 아이들 덕분에 이 자리에 섰습니다.” 무슨 배역이든 맡아 생계를 책임지려 했던 그녀의 시간들이 든든한 지지대가 되어 무지개다리를 놓는다. 땀과 눈물이 양팔저울의 눈금을 영으로 만들기도 힘들었을 텐데 이제 그녀의 트로피가 땀에 얹혔다. 그녀가 받은 갈채는 세상과 전투를 벌이는 어머니들에게 나누는 비타민이라 해도 될까.
아마릴리스 꽃잎이 바람에 잘게 흔들린다. 나팔소리를 스캔한다. 진격의 신호인가. 힘내라는 격려인가. 아니면 어찌 살았소, 잘 살았소 묻는 존재론적 의문부호인가. 나도 치열한 워킹맘이었다.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발에 바퀴를 달고 살았다. 일인다역을 맡은 내게 알람은 수시로 나를 재촉했다. 논바닥에 조금 남은 습기를 갈무리하며 아끼고 아껴 내 땅을 다져나갈 때 미래는 어떨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칡과 등나무가 되어 만들어낸 불협화음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시간 우물의 바닥을 박박 긁어대며 동동거렸던 그 순간들이 소중하지만, 혼자라는 낱말에 익숙해진 아들을 향한 미안함이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다. 이젠 아쉬움도 내 삶의 일부인 것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살아내었으니 되었다.
공허한 날개옷을 벗겨주고 싶다. 회자되는 꽃말인 ‘눈부신 아름다움’ 말이다. 외관에 초점을 둔 것이겠지만, 화려한 화판 속에 깃든 정신의 아름다움을 조준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소심한 여성성은 버려도 좋다. 그냥 ‘꽃’이다. ‘제3의 젠더’다.
“아마릴리스, 너의 별명은 여전사꽃, 꽃말은 당당함이야.”
작명의 기쁨을 즐기는 내게 이 경이로운 식물은 네 번째 꽃봉오리를 쏘아 올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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