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소설 [세포와 풍경화]; 지금까지의 개요
금요소설 [세포와 풍경화]는 장편연작소설 [왜옥동네의 전설]의 (전설-2)에 해당하는 소설입니다. (전설 1,2,3)은 이야기의 순서가 아닙니다. 그저 집필 순서가 그렇다는 것일 뿐 내용상 선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전설은 어느 것을 먼저 읽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한 가지만 선택해서 읽어주셔도 괜찮습니다.(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며 집필하고 있습니다.^^)
1회부터 14회까지는 프롤로그로서 이 소설이 어떻게 집필하게 되었는가 하는 집필 동기를 표명하는 형식입니다. 이 소설의 화자요, 작가로 자처하는 황윤호는 1941년생으로 그가 50대 중반쯤 되던, 그러니까 1990년대 중반 쯤, 어느 날 옛날 한 이웃에 살던 사람들 중 같은 교회에 다니던 분들과 함께 그 옛날 어린 시절 다니던 그 교회에서 회동합니다. 거기서 옛날 일을 회상합니다.
이 소설에서 세 가정이 일제 말기 해방되기 직전 일본에서 살던 때로부터 해방이 되어 귀국하게 되는 장면이 15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황현식과 심박동의 가정
현식(1910년생)은 강원도 울진(현재는 경북)이 고향인데, 도일할 당시 나이가 불과 스물아홉밖에 안되었으나 자기보다 두 살 맏이인 아내 후포댁과 사이에 맏이 황준호를 비롯하여 5남매(2남3녀)를 두었고 아내는 또 한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습니다.
1938년 가족을 두고 단신으로 야하타 제철소가 조선인 인부를 모집한다고 해서 도일합니다. 대 가족을 손바닥만한 산밭뙈기만 바라보고 살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심박동(1906년생)은 대구가 고향인데 도일할 당시 33세로 아내 예천댁(1908년생)와 사이에 맏아들 심문모를 비롯하여 4남매(1남3녀)를 두고 있었는데 그 아내 역시 또 한 아이를 배고 있었습니다. 그 역시 1938년 야하타제철소 인부로 지원해 갔다가 거기서 현식을 만나 운명을 같이하는 형제와 같은 사이가 됩니다.
1940년부턴가 조선에는 강제 징용이 실시가 되어 두 사람이 일하고 있는 제철소 부설 벽돌공장에 징용되어 온 인부들이 배치되어 들어옵니다. 그러자 두 사람 모두 그들을 거느리는 작업조장이 됩니다. 작업조장이 되자 살림하는 조장들은 기숙사 생활을 벗어나 영외(공장 울타리 밖) 거주가 허용됩니다. 그래서 일본인 총각조장들은 서둘러 장가를 가서 영외생활을 했는데, 이들은 고향의 가족들을 불러들여 영외 생활을 시작합니다.
두 가정은 공동으로 낡고 좁은 일본 나가야 집을 한 채 마련하여 두 개의 방을 하나씩 차지하여 대가족이 공동생활을 합니다. 잉태한 아이들이 태어나서 두 집 자녀들만 11명이 됩니다. 그 비좁은 곳에서 15 식구가 복작거리며 사는 모습은 상상에 맡깁니다. 그러나 해마다 자녀가 늘어서 귀국할 때는 두 가정이 모두 자녀를 더 낳아서 현식과 후포댁은 3남5녀의 8남매를, 박동과 예천댁은 2남3녀 5남매로 두 가정의 자녀들만 13명이 됩니다.
준호(1929년생)와 문모(1928년생)는 제철소 부설 4년제 공업학교에 입학했다. 문모가 한 해 먼저 입학해서 해방되던 해(1945) 봄에 졸업해서 제철소 초급 기술자로 입사했고, 준호는 4학년이 됩니다. 재학중에 이들은 학교에서 의무로 교육하는 애국 무술체육으로서 유도와 검도 중 택일하는데 두 사람 모두 검도를 택해서 익혔습니다. 문모는 졸업직전에 2단을 땄지만, 준호는 전쟁 말기여서 승단대회 자체가 시행되지 못해 승단 기회를 놓지고 초단만 인정된 상태로 해방이 되자 가족과 함께 귀국하게 됩니다. 귀국할 때 문모와 준호는 각각 열여덟과 열일곱이 되어 있었습니다. 해방이 되어 두 가족이 함께 3개월 쯤 지나서야 두 가족 모두 대구로 귀국했습니다.
현식네 가족은 고향이 울진이지만 고향으로 가지 않고, 박동의 고향이면서, 아우 황현준이 자리 잡은 대구로 따라 들어옵니다. 그러나 그 가족의 거처가 없어서 칠성동 귀국동포들 집단 거소로 마련된 소위 해방골목의 주민이 됩니다. (이상 1945년 연말까지 현재)
황현준(1915)은 일본 동경에서 사립대 전문부를 마치고 몇 년 아르바이트 생활 끝에 형 현식이 야하타 입사할 무렵 그도 일본 유수한 신문사에 입사했습니다. 입사 2년 뒤(1940) 남득순(1921)과 결혼했습니다. 결혼해서 지방 파견 때 형(현식)이 살고 있는 야하타에서 가까운 모지 지국을 지원해서 갔습니다. 결혼 이듬해 아들 윤호(전호/다코)를 낳자 남방 전선인 샴(지금 태국) 지역 종군 기자 생활을 거의 반년 가까이 치렀습니다. 1944년 연말, 아내가 둘째 아기를 해산하기 위해 친정 대구로 윤호를 데리고 귀국했습니다. 귀국하자 바로 딸을 낳았으나 새해가 되자 윤호 외삼촌이 결혼하게 되어 그때까지 계속 머물기로 하여 현준에게 연락을 하니 그도 처남의 결혼과 자녀 생산을 빙자하여 반도 출장을 얻어냅니다. 일단 귀국하자 독일의 패망소식을 듣게 되고, 일본은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아는 터라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반도 근무를 지망해서 허락받습니다.(이상 1945년 5월 무렵 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