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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편
신라사 연구의 진전
제1장
전통시대의 신라사 편찬과 연구
제2장
신라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제1장
전통시대의 신라사 편찬과 연구
1. 신라사 편찬
2. 신라사 연구
1. 신라사 편찬
신라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은 신라 당대부터 있어 왔다.
진흥왕은 즉위 6년 즉 545년 7월 “국사”를 편찬하자는 이사부異斯夫의 건의를 받아들여 거칠부居柒夫에게 명하여 널리
선비들(文士)을 모아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하였다.
개인 역사가들도 나타났다.
김대문金大問은 『계림잡전鷄林雜傳』·『고승전高僧傳』·『화랑세기花郞世記』 등을 저술하였다.
그는 주로 신라의 역사, 전통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최치원崔致遠은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을 지었는데,
신라사 연표가 포함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의상義湘을 비롯한 여러 고승의 전기도 편찬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전왕조의 역사 정리가 이루어졌고, 이때 신라사도 다시 정리되었다.
고려 초에 편찬된 이른바 『구삼국사舊三國史』에서는 고구려사가 중시되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에 비해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신라사가 중시되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삼국사기』에서 제외되었던 역사적인 신이사神異事, 불교 신앙과 관련된 영험담靈驗談
등이 많이 수록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신라의 것들이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고려의 역사와 문화가 신라의 그것을 계승하였다는 인식을 배경으로 편찬된 것들이었다.
조선 초에는 『삼국사기』를 편년체로 재구성한 『동국사략東國史略』이 편찬되었다.
삼국 중 신라를 앞세우고,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였다.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서는, 『동국사략』과 달리 삼국을 대등하게 취급하되, 신라의 통일은 인정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이후 『동국통감東國通鑑』과 조선 후기 정통론의 관점에서 편찬된 여러 사서들에 영향을 주었다.
한편, 삼국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발해사를 중시하는 입장이 나타남에 따라 신라사 인식에도 변화가 있었다.
실학자들은 신라사에 대한 정리를 넘어 신라사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들은 신라의 지명, 제도, 사건 등을 고증하였다.
뿐만 아니라 관련 기록이나 역사적 상황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하였다.
특히 금석문을 이용한 연구가 돋보인다.
실학자들의 신라사 연구 중에는 오늘날의 연구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거나 학설사적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 다수 있다.
신라사 연구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삼국유사』와 신라 계승의식
이규보李奎報는 『구삼국사舊三國史』의 「동명왕본기東明王本紀」를 읽고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지었다.
그는 서문에서 김부식金富軾이 “국사를 중찬重撰”하면서 동명왕의 신이한 사적을 많이 생략했다고 하였다.
『구삼국사』는 고려 초 어느 시기에 전왕조사를 정리한 관찬 사서였다.
『구삼국사』에서는 고구려의 역사적 전통이 크게 부각되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자처하였는데, 특히 고려 초에 그러하였다.
외국에도 이 점을 강조하였다.
후당後唐에서는 태조 왕건을 책봉하면서, 그가 “주몽朱蒙의 상서로운 개국을 뒤따라 나라의 군장”이 되었다고 하였다.
서희徐熙는 고려가 신라 땅에서 일어났다는 요遼의 장수 소손녕蕭遜寧의 주장에 대해 고려가 고구려의 옛 땅에서
일어났으므로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고, 도읍도 평양에 두었다고 주장하였다.
『구삼국사』는 바로 이러한 시대에 만들어졌던 것이다.
단 서명書名에서 짐작 할 수 있듯이 여기에 발해사는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고구려 계승의식은 고려 초기에 강하게 추진되었던 북진정책과 짝하는 것이었다.
이는 고려가 북쪽으로 영역을 확대해 나가는 역사적 근거였던 것이다.
그런데 거란契丹의 요에 이어 여진女眞의 금金이 잇달아 세력을 떨치면서 북진은 사실상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고구려 계승의식도 자연히 현실적 힘을 잃고, 점차 관념적, 이상주의적인 것으로 변하게 되었다.
반면 신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식은 이전에 비해 높아졌다.
『삼국사기』는 이를 배경으로 편찬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연표의 고구려 항에서 궁예왕과 태조 왕건의 건국과 중요 사건들을 간략히 적었고, 직관지에서 고구려 관제를 언급한
후 이어서 궁예왕이 만든 관부와 관직 등을 소개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에 비해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건국, 고려의 성립 및 고려의 통일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에서 다루어졌다.
고려는 신라의영역과 주민을 계승한 국가였던 것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신라, 고구려, 백제 세 나라의 역사를 모두 본기로 다루어졌다.
분량을 보면 신라본기는 모두 12권인 데 비해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는 각각 10권과 6권이다.
문무왕 때까지가 7권, 그 이후가 5권이어서 본기에 있어서는 고구려사의 비중이 더 크다.
하지만 지와 열전에서는 크게 차이가 난다.
가령 직관지는 모두 3권인데, 고구려와 백제의 직관에 대해서는 맨 마지막 하권의 말미에서 잠깐 언급하였을 뿐이다.
열전은 모두 10권인데, 그 가운데 김유신전이 3권이며, 이밖에도 수록된 인물들 상당수가 신라인들이다.
이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재인식한 결과이며, 한편으로는 신라계승의식을 보다 확고히 하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삼국사기』 찬자들은 『계림잡전』·『화랑세기』, 김유신金庾信의 『행록行錄』 등을 편찬 자료로 이용하였다.
그들이 진흥왕 때 만들어진 『국사』를 참고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지만, ‘신라고기’를 인용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찬자들이 참고하였던 신라 자료들 중에는 지금 전하지 않는 것들이 적지 않다.
또 그들은 전해 오는 기록을 될 수 있는 한 그대로 전하려는 중국의 전통적 역사 서술 방법에 따라 『삼국사기』를 편찬
하였다.
이 점에서 『삼국사기』는 신라사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이다.
『삼국사기』 찬자들은 신라사와 관련한 중국 자료도 많이 이용하였다.
신라와 중국 여러 나라와의 관계에 대한 부분에서 특히 그러하였다.
그런데 중국 측 기록과 신라 측 기록이 서로 다를 경우에는 신라 측 기록을 중시하였다.
가령 『삼국사기』에는 나당전쟁 때에 여러 차례에 걸쳐 신라가 당군을 물리쳤던 기록이 전한다.
반면에 중국 정사에서는 당의 패배를 직접 언급한 기록을 찾을 수 없는데, 이는 사실을 숨기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에서도 『삼국사기』의 신라사 관련 기록이 갖는 사료적 가치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본래 자료집으로 편찬된 것이 아니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삼국사기』는 역사를 정치의 거울로 생각하는 입장에서 또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입각해
편찬된 역사서였다.
따라서 김부식을 비롯한 찬자들은 그에 맞는 범례를 두고, 사료를 선택하고, 문장을 고치기도 하였다.
예컨대 신라본기의 불교 관계 기사는 소략하다.
신라에는 자장慈藏, 원효元曉, 의상 등 이름난 승려들이 적지 않았지만 찬자들은 그들 중 누구의 전기도 열전에 싣지
않았다.
불교관계 기록이 유교적 도덕과 어긋나는 면이 있고, 또 정치의 교훈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에서 빼버렸던 것이다.
또, 이와 같은 입장에서 신이한 일은 빼버리거나 문장을 고치기도 하였다.
『삼국사기』 기록을 자료로 이용하는 신라사 연구자들은 항상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삼국사기』는 왕명에 의해 편찬된 관찬사서였다. 반면에 『삼국유사』는 승려 일연一然이 개인적으로 편찬한 사찬
사서이다.
『삼국유사』는 「왕력王曆」·「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
「피은避隱」·「효선孝善」 등 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왕력」과 「기이」는 일반사에 해당하고, 「흥법」 이하는 일종의 불교 문화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기이」에는 신화, 설화 등 신이한 일들이 많이 실려 있다.
또 「흥법」 이하에서는 『삼국사기』에서 중시되지 않았던 불교사를 전면적으로 다루었는데, 역시 신이한 사실들을
대거 수록하였다.
일연은 김부식의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반발하여 『삼국유사』를 지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왕력」에는 국왕과 직접 관련이 있는 기사가 주로 실려 있는데, 신라의 것이 가장 자세하다.
「기이」에 실려 있는 삼국 기록의 대부분도 신라와 관련된 것들이다.
신라사는 40조목인 데 비해 고구려사 1 조목, 백제사 4 조목(후백제 포함)에 불과하다.
불교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신라와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이처럼 일연이 신라사 위주로 『삼국유사』를 편찬하였던 것은 그가 접할 수 있었던 자료가 주로 신라 자료였기 때문
이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고려 이전의 왕조사로서 신라사를 중시하였던 일연의 입장도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김부식은 신라의 멸망을 논하면서 경순왕의 고려 귀부를 높이 평가하고, 신라 왕실의 외손인 현종이 왕위에 오른 후
모두 그 자손들이 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일연은 현종의 부 안종安宗이 신성왕후神聖王后 이씨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음을 언급하면서도 김부식의 사론에 따라
안종을 신라의 외손이라고 한 설을 따른다고 하였다.
이는 일연이 김부식과 마찬가지로 고려와 신라의 관계를 중시하였음을 알려 주며 동시에 『삼국유사』가 신라 계승
의식을 배경으로 편찬되었음을 보여 준다.
일연은 『삼국사기』에서 무시되었거나 소홀히 다루어졌던 신이사, 불교사를 다루었다.
이점에서 『삼국유사』는 자료적 가치가 높다.
뿐만 아니라 일반사의 면에서도 그러하다.
가령 「왕력」에 전하는 신라 국왕들의 계보 중에서 『삼국사기』에 전하는 것과 전혀 다르거나 그것을 보충해 주는
내용을 적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일연은 자료의 수집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그는 경순왕 김부를 상부尙父로 임명하는 「책상부고冊尙父誥」와 같은 공문서, 각종 사지寺誌 등 고문서를 자료로
이용하였다.
감산사甘山寺의 미륵보살상과 아미타불상의 조상기와 같은 금석문, 지역 노인의 구전口傳, 향전鄕傳과 같은 민간
전승도 활용하였다.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에 대한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유적 혹은 유물을 직접 답사하고 관찰한 결과에 의거한
부분도 있다.
이러한 일연의 노력은 마치 현대 역사가의 자료 수집 노력을 연상케 한다는 평을 받을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일연은 수집한 자료와 자신의 의견을 구별하여 서술하였다.
예컨대 신라의 불교 전래에 관해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을 인용하고, 「아도본비我道本碑」를 인용한 후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였다.
이어 「석담시전釋曇始傳」을 인용한 후에 다시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찬讚을 붙였다.
이는 자료와 편찬자의 의견을 구별하기 어려운 『삼국사기』의 서술 방식과는 다르거니와, 이로써 신라사 연구자들은
현재 전하지 않는 「아도본비」를 자료로 이용할 수 있다.
이 점에서도 『삼국유사』가 갖는 자료적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다만, 감산사의 불보살상 조상기와 같이 현존하는 자료와 『삼국유사』에 전하는 바를 대조를 해보면, 인용된 자료가
정확하지 않은 경우도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 전거가 모두 밝혀져 있는 것은 아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자료로 이용하는 신라사 연구자들은, 『삼국유사』가 본래 자료집으로 편찬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더불어, 이 점을 유념해야 한다.
『동국사략』·『삼국사절요』와 ‘신라정통론’, ‘통일신라론’1403년(태종 3) 권근權近, 이첨李詹 등은 『동국사략東國史略』
을 편찬하였는데, 단군 조선, 기자 조선, 위만 조선, 사군, 이부, 삼한, 삼국 순으로 고대사를 정리하였다.
삼한까지는 외기로 간략히 처리하고, 삼국의 역사를 주로 다루었다.
이 때문에 일명 『삼국사략三國史略』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삼국사기』를 편년체로 재정리한 것으로서 새로운 자료를 이용한 것은 아니다.
『동국사략』은 명분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편찬되었다.
이는 50여 개에 달하는 사론으로 나타났다.
찬자들은 명분론에 입각하여 역사적 사실을 수정하였다.
즉위년에 원년을 칭하였던 것을 모두 유년踰年 칭원으로 고쳐 썼다.
신라에서 사용하였던 연호는 싣지 않았다.
거서간居西干 등 신라의 고유 왕호는 왕으로 고치고, 세 여왕은 여주女主라고 낮추었다.
왕후는 왕비, 태자는 세자, 대사大赦는 유宥로 고쳤다.
『동국사략』에서는 신라의 왕은 그냥 왕이라고 쓰고, 고구려와 백제의 왕은 나라 이름을 왕명 앞에 부기하였다.
또 신라의 연기年紀 아래 신라, 고구려, 백제의 순으로 사건을 적었다.
삼국의 역사를 신라 중심으로 정리하였던 것인데, 권근은 그 이유를 신라가 삼국 중 가장 먼저 건국하였고 가장 늦게
멸망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는 ‘신라정통론’에 입각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동국사략』에서는 신라의삼국통일을 인정하고, 통일신라가 삼국을 계승하는 것으로 고대사를 체계화하였다.
이는 『삼국사기』 이래의 ‘통일신라론’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세조는 『삼국사기』와 『동국사략』을 수정, 보완하고, 여기에 고려의 역사를 합쳐 전왕조사를 종합적으로 정리하도록
하였다.
그 가운데 고대사 부분은 1476년(성종 7년) 『삼국사절요』로 완성되었다.
『동국사략』과 마찬가지로 단군조선에서 삼한까지의 역사를 외기에서 취급하고, 삼국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삼국사절요』의 찬자들은 ‘직서’를 원칙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유년칭원 대신 즉위년 칭원을 따랐다.
또 여왕은 그대로 왕이라고 하였고, 왕후, 태자, 대사 등도 그대로 적었다.
다만, 신라 고유 왕호는 모두 왕으로 개서하였다.
이는 찬자들이 삼국의 연기를 병렬하면서, 고구려와 백제는 왕이라고 하고, 신라만 고유 왕호를 사용하는 것이 어색하
다고 여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 신라의 연호를 삭제하였는데, 이는 명분에 어긋난다고 판단해서였다.
『동국사략』이 명분을 강조하는 성리학적 입장에서 편찬되었다면, 『삼국사절요』는 상대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중시
하는 입장에서 편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절요』의 찬자들은 삼국의 역사를 대등하게 다루었다.
신라와 고구려가 병존하기 시작한 서기전 37년(한漢 건소建昭 2년, 신라 시조 21년, 고구려 시조 고주몽 원년)부터
고구려가 망한 668년(당唐 총장總章 원년, 신라 문무왕 8년, 고구려 보장왕 27년)까지는 중국, 신라, 고구려, 백제의
순서로 연기年紀를 작은 글자 2행으로 썼다.
다만, 그 전후는 신라왕의 연기를 큰 글자로 앞에 쓰고, 중국 연기는 작은 글자 2행으로 그 뒤에 썼다.
후삼국시대에는 신라왕의 연기를 큰 글자로 앞에 쓰고, 중국과 후삼국의 연기는 작은 글자 2행으로 썼다.
『삼국사절요』의 찬자들은, 『동국사략』의 찬자들과 달리 삼국시대를 정통 국가가 없는 이른바 무통無統의 시대로
보고, ‘신라정통론’의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반면 ‘통일신라론’의 입장은 받아들였다.
한편, 『삼국사절요』의 기본 자료는 『삼국사기』와 『동국사략』이었다.
찬자들은 삼국 간의 중복 기사를 정리하고, 지와 열전의 기사를 적의하게 배치하였다.
또 『수이전殊異傳』·『이규보집』·『삼국유사』·『고려사』 지리지, 조선 초기에 편찬된 지리지 등에서 관련 자료를
찾아 수록하였다.
『수이전』으로부터는 탈해의 출신과 성장에 관한 기록, 당 태종이 보낸 모란 씨앗과 모란 그림에 대한 선덕왕의 풀이
등을 인용하였다.
유례왕 때 인관印觀과 서조署調의 면緜 매매와 그에 얽힌 설화, 진흥왕 때 화랑이었던 백운白雲과 연인 제후際厚의
사랑 그리고 이들을 도운 낭도 금천金闡의 일화 등은 현재로서는 『삼국사절요』에서만 찾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알지 못하는 별도의 전거에 의거한 서술로 보이는 예들도 있다.
가령 『삼국사기』 제사지에는 혜공왕 때 5묘廟를 처음으로 정하였
다고 하였고, 선덕왕 때에 사직단을 세웠다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절요』에는 이 사실들이 각각 776년(혜공왕 12)과 783년(선덕왕 4)의 일이라고 되어 있다.
또 몇몇 제장祭場의 위치가 『삼국사기』에 전하는 바와 다르다.
신라사 연구자들은 자료로서『삼국사절요』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동국통감』은 외기, 삼국기, 신라기, 고려기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삼국기에서는 서기전 57년 신라의 건국으로부터 668년(신라 문무왕 8, 고구려 보장왕 27)까지, 신라기에서는 669년(신라
문무왕 9)부터 935년(신라 경순왕 9, 후백제 견훤 44, 고려 태조 18)까지를 다루었다.
삼국기와 신라기는 『삼국사절요』의 내용에 사론을 더한 것으로 신라사와 관련한 새로운 자료는 찾을 수 없다.
『동국통감』의 찬자들은, 『삼국사절요』와 마찬가지로 삼국시대를 무통의 시대로 취급하였던 반면, ‘통일신라론’의
입장을 따랐다.
다만, 이와 관련하여 이전의 역사서들과는 달리 통일신라의 역사를 신라기로 독립시켜 다루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통일신라의 의의를 보다 더 중시한 결과였다고 보인다.
통일신라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발해사를 부수하여 취급하였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6세기에는 『동국통감』을 읽기 쉽게 축약한 『동국사략』이 여럿 만들어졌다.
그 가운데 하나인 박상朴祥의 『동국사략』은 『동국통감』을 충실히 따른 것으로 내용상 특별히 언급할 만한 것은 없다.
다만, 여러 차례 인쇄되었고, 조선시대 학자들이 가장 많이 읽은 동국의 역사서였다고 한다.
삼국이 통일신라, 고려로 연결된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유희령柳希齡의 『표제음주 동국사략標題音註 東國史略』은 앞에서 소개한 박상의『동국사략』과 마찬가지로, 『동국
통감』을 축약한 것이다.
본문 상단에 그 기사 내용을 밝히는 제목을 붙이고, 또 인명이나 국명 등 고유명사의 음을 주로 달았다.
그런데 유희령은 고구려, 백제, 신라 순으로 삼국의 역사를 다루었다.
이는 이전의 신라-고려의 계승을 염두에 두고, 신라사를 마지막에 다룬 것이었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삼국 중 신라가
가장 후진적이었음을 인식한 결과였다고 한다.
조선 후기 신라사 인식의 변화
『동국사략』 이래 ‘신라정통론’의 입장을 취한 사서들은 그 수가 많지 않았다.
오운吳澐의 『동사찬요東史纂要』(1606년, 선조 39년)는 권 1의 군왕기君王紀와 권2~7의 열전으로 구성되었다.
군왕기에서는 신라왕을 표제로 내세워 그 밑에 고구려·백제의 역사를 부기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열전에서는 신라 인물들을 다루었으며, 신라에서 충신열사가 많이 나왔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홍여하洪汝河가 1672년(현종 13)에 펴낸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은 『동국통감』 중 고려 이전의 역사를 주자
朱子의 강목체綱目體에 따라 고쳐 쓴 것이다.
위만에게 쫓겨난 기자의 후손이 마한 왕이 되었다고 하여 마한에 정통성을 부여하였다.
마한의 멸망까지는 신라, 고구려, 백제의 역사를 그에 부수하는 것으로 처리하였다.
그 이후에는 ‘신라정통론’의 입장에서 신라왕을 표제로 내세우고,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를 부기하였다.
669년(문무왕 9) 이후는 ‘신라기’로 처리하였다.
그는 신라를 정통으로 삼은 이유에 대해, 맨 처음 건국한 나라이고, 시조의 덕성이 훌륭하여 기자의 전통을 계승하였
으며, 삼국을 통일한 국가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신라정통론’의 영향력이 제한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통일신라론’은 널리 받아 들여졌다.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 이래 정통론에 입각해 편찬된 역사서들은 삼국시대를
무통의 시대로 보고, 669년(문무왕 9) 이후부터935년(태조 18)까지는 신라를 정통으로 인정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발해사를 전왕조사에서 제외하는 경향은 조선 후기에도 계속되었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의 범례에서 “발해는 우리 역사에 기록할 수 없는 것이나” 발해가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였고
신라와 이웃하였다는 점에서 『동국통감』에서 신라사에 부수하여 다루었는데, 자신도 그를 따른다고 밝혔다.
조선 후기에 정통론이 유행하면서 ‘통일신라론’은 그 입지가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신라정통론’, ‘통일신라론’과는 궤를 달리하는 신라사 인식도 나타났다.
한백겸韓百謙은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순으로 각국의 역사지리를 다루었다.
신경준申景濬도 이를 따랐다(『강계고疆界考』).
유형원柳馨遠은 『삼국사기』가 신라 위주로 편찬되었던 이유를,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하였고, 고려가 신라를
계승해서 신라인들이 남긴 서적을 이용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는 삼국의 역사지리를 고구려, 신라, 백제의 순서로 정리하였다(『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종래에는 『삼국사기』에 전하는 삼국의 건국 연대에 따라 신라, 고구려, 백제의 순서로 삼국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이와 달리 삼국의 건국연대를 인정하면서도 고구려를 앞세우고, 신라사를 뒤에 서술하는 경향이 나타났던 것
이다.
앞에서 소개한 유희령은 이러한 변화의 선구자였거니와, 이는 삼국의 건국과 발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결과였다고
보인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신라, 고구려, 백제의 순서로 삼국의 역사를 다루었다.
하지만 삼국 중 가장 먼저 건국한 국가는 고구려라고 파악하였다.
그는 현도군玄菟郡의 수현首縣이 고구려현이었다는 점에서 한漢 무제武帝가 고구려를 정복하고 세운 것이 현도군이
라고 보았다.
이에 고구려는 서기전 107년 이전에 이미 건국하였고, 주몽이 건국하였던 고구려는 그 경계 내에서 일어났거나 혹은
그것을 계승한 나라였다고 생각하였다.
반면, 신라의 건국과 발전은 삼국 중 가장 늦었다고 하였다. 건
국 후 영남 지방에 있었던 허다한 소국들을 평정하는데 수백 년이 걸렸고, 지증왕 때에 와서야 국호를 정했음 등을 그
증거로 들었다.
한치윤韓致奫도 주몽이 건국하기 전 이미 고구려가 존재하였다고 보았고, 신라는 후진적인 나라로 인식하였다.
이는 신라가 나라가 작아서 스스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지 못하였고, 문자가 없었으며, 백제의 통역을 거쳐 중국과
소통했다고 한 중국 측 기록에 주목한 결과였다.
그리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순서로 삼국사를 서술하였다(『해동역사海東繹史』).
한치윤의 뒤를 이어 『해동역사』의 「지리고」를 저술한 한진서韓鎭書는 고구려, 신라, 백제의 순으로 각국의 역사
지리를 정리하였다.
이 밖에 정약용丁若鏞은 바다를 통해 신라로 망명한 백제인이 신라의 왕이 되었고, 신라가 백제에 부용附庸하였다는
중국 기록에 따라 처음에는 신라가 백제의 부용국이었다고 보았다(『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조선 후기에 삼국 중 신라의 건국과 발전이 가장 늦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신라정통론’의 입지는 약화되었다.
또, 이때에 발해사를 전왕조사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한백겸은 『동국지리지』에서 고대사가 이원적으로 전개되었다고 파악하였다.
한강을 경계로 북쪽에는 조선으로부터 고구려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가 존재하였고, 남쪽에서는 삼한이 백제, 신라,
가야로 연결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발해사를 신라사가 아닌 고구려사에 붙여 다루었다.
이후 고구려사가 중시되면서 발해사에 대한 재인식 작업이 이루어졌다.
유득공柳得恭은 『발해고渤海考』를 쓰면서 고려에서 발해를 신라와 동등하게 다루어 남북국사를 썼어야 했다고
주장함으로써 ‘남북국시대론’을 제창하였다.
김정호金正浩는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이에 입각하여 고대사를 체계화하였다.
‘남북국시대론’은 ‘통일신라론’의 근간을 흔드는 획기적 발상이었다.
‘남북국시대론’은 근대 민족주의 사학자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고, 남북한 학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2. 신라사 연구 고증과 해석
신라사에 대한 연구는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삼국사기』 찬자들과 『삼국유사』 찬자인 일연의 고증을 그 예로 생각
할 수 있다.
특히 일연의 고증 가운데에는 오늘날의 신라사 연구자들이 참고할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조선 전기에 편찬된 신라사에서는 이러한 예를 찾기 어렵다.
신라사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던 것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었다.
실학자들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리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역사지리학적 이해의 단초는 한백겸의 『동국지리지』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삼국의 역사지리를 “국도國都”, “봉강封疆”, “형세形勢”와 “관방關防”이라는 새로운 분류 방식에 입각해 정리하였다.
한백겸은 신라가 통일 후 수도를 국토의 중앙으로 옮겨 사방의 국경을 통제하였더라면 고구려와 부여의 옛 땅까지 차지
할 수 있었을 것인데, (국토의) 한 귀퉁이에서 편안함을 취해 서북쪽의 영역을 방치하였기 때문에 이후 외적의 시달림을
받는 빌미를 제공하였다고 한탄하였다.
안정복은 이를 『동사강목』에서 신문왕 5년 조에 옮겨 적었다.
역사 변화의 원인을 유학적 가치관이 아닌 지리에서 찾았다는 점이 주목되거니와, 이와 관련하여 실학자들은 지명의
고증에 힘을 기울였다.
실학자들은 음사音似, 여러 기록의 상호 비교 등을 통해 지명을 고증하였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신경준은 『강계고』에서 음즙벌국音汁伐國의 “음집벌”과 음즙화현音汁火縣의 “음집화”가 같은 것임을 밝혔다.
신라의 지명의 ‘화火’는 뜻(훈)을 취하여 “불弗”, 혹은 ‘벌伐’로도 썼는데, “들野”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하였다.
안정복이 골벌국骨伐國의 “골벌”이 “골화骨火”라고 하였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동사강목』).
한진서는 『삼국사기』 김유신전에 고구려 왕이 마목현麻木峴과 죽령의 서쪽 및 북쪽 지역은 본래 고구려의 땅이라고
한 것과, 온달溫達이 “계립현鷄立峴과 죽령 서쪽 지역은 우리의 땅이다.”이라고 한 것에서 마목현은 계립현이라고
고증하였다.
또 그는 백제가 고구려와 모의해서 당항성棠項城을 탈취해 신라에서 당에 입조하는 길을 끊으려고 하였다는 중국
기록과 당시 신라가 당에 갈 때 남양부南陽府의 앞바다를 경유하였다는 사실에서 당항성은 남양 근처에서 찾아야 한
다고 보았다.
안산군安山郡은 신라의 장항구현獐項口縣인데, 당棠과 장獐의 음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당항은 안산 일 것으로 보았다
(이상 『해동역사』 「지리고」).
위의 예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실학자들의 지명 비정 중에는 현재에도 유효한 것들이 적지 않다.
실학자들은 사건이나 제도의 고증도 중시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추봉한 왕을 모두 갈문왕葛文王이라고 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에 더하여 이익李瀷은 이성異姓을 추존하였다고 하였고(『성호사설星湖僿說』), 안정복은 왕비의 부(장인)를 갈문왕
으로 삼았다고 하였다(『동사강목』).
황윤석黃胤錫은 갈문왕의 뜻을 “주근走斤”(死의 음)으로 풀이하였다(『이재유고頤齋遺稿』).
신라 갈문왕에 대한 기초적 지식은 실학자들에 힘입은 바 적지 않다.
실학자들 가운데 사실 고증의 면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업적을 남긴 역사가는 안정복이었다(이하 『동사강목』).
안정복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길선吉宣이 백제로 달아난 사건이 165년(아달라왕 12)의 일로 되어 있는 반면
백제본기에는 155년(개루왕28), 곧 아달라왕 2년의 일로 서로 달리 나온다는 점을 주목하였다.
그는 개루왕 28년 설을 좇아 아달라왕 2년에 길선이 백제에 망명하였다고 한 『동국통감』과 이를 따른 사서들을 비판
하였다.
안정복은 아달라왕 2년 설을 따를 경우 그로부터 10년 동안 두 나라가 한 번도 싸운 기록이 없다는 점이 납득하기 어렵
다고 보았다.
반면에 105년(파사왕 26) 백제가 사신을 보내 우호를 청한 이래 60년 동안 싸움이 없다가 아달라왕 12년부터 두 나라의
전쟁이 계속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길선이 백제에 망명한 때는 아달라왕 12년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하였는데, 수긍
할 만한 논리라고 생각한다.
안정복은 528년(법흥왕 15) 신라에서 비로소 불법을 시행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소지왕 때에 분수승焚修僧이 있었다는 기록, 또 자비왕, 소지왕 등의 왕호가 모두 불교에서 비롯된 왕호라는
점에 주목하여 불법은 전부터 있었으나 온 나라가 신봉한 것은 이때부터라고 보았다.
불교의 조기 수용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나 전래와 수용을 구별하여 생각하는 학자들이 참고할 만한 대목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선덕왕宣德王이 후사가 없이 죽자 여러 신하가 김주원金周元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마침 홍수가 나서 그는 알천閼川을 건너지 못해 궁성으로 들어가지 못했고, 이를 하늘의 뜻이라고 여긴 군신
들이 김경신金敬信을 왕으로 추대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안정복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선덕왕이 후사가 없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선덕왕의
모후인 정의태후貞懿太后의 교敎를 받들어 김주원을 왕으로 삼았는데, 상대등 김경신이 무리를 위협하고 먼저 입궁
하여 왕이라고 하였다는 기록을 주목하였다.
그리고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 옳은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오늘날의 연구자들도 김경신이 비정상적 방법으로 왕위에 올랐으리라는 점에는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고려 후기의 문인 최해崔瀣는 당 장경長慶(821~824) 초에 김운경金雲卿이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한 이후 합격자가 58명
이었으며, 오대五代 때에도 32명이었는데, 발해인 10여인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신라인이었다고 하였다.
안정복은 김운경의 뒤를 이어 김이어金夷魚와 김가기金可紀가 합격하였음을 밝혔다.
또 신라에서 당의 태학太學에 10년 기한으로 유학생을 파견하였으며, 도서 비용은 양국에서 부담하고, 숙식은 당의
홍려시鴻臚寺에서 제공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빈공과賓貢科 급제자 가운데 두드러지게 이름을 나타낸 자로 김운경 이외에도 최이정崔利貞, 김숙정金叔貞,
박계업朴季業, 김윤부金允夫, 김입지金立之, 박양지朴亮之, 이동李同, 최영崔霙, 김무선金茂先, 양영楊頴, 최환崔渙,
최광유崔匡裕, 최치원崔致遠, 최신지崔愼之, 김소유金紹游, 박인범朴仁範, 김악金渥, 최승우崔承祐, 김문울金文蔚
등을 들었다.
도당유학생에 대한 오늘날의 연구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치윤은 540여종의 외국 자료 가운데 ‘해동’ 관련 기사를 찾고, 그것으로 ‘해동’의 역사를 재구성한 『해동역사』를
지었다.
이것은 전왕조의 역사에 관한 세기世紀와 각종 문물제도에 대한 지志, 그리고 인물의 전기를 실은 고考로 구성되었다.
신라사 관련 기록은 「신라세기」(권10)를 비롯하여 여러 지와 고에 정리되어 있다.
한치윤은 중국 측 자료의 신라 관련 기록은 물론 종래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졌던 일본 측 자료의 관련 기록도
참고하였다.
가령 교빙지交聘志에서는 신라가 일본과 통교通交한 시말始末을 정리하면서 『일본서기日本書紀』, 『화한삼재도회
和漢三才圖會』,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일본풍토기日本風土記』, 『속일본기續日本記』(인용 순)에서
신라사와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 정리하였다.
단, 그가 외국의 관련 자료를 단순히 수집, 편집한 것은 아니었다.
잘못되었다고 판단되면 이를 바로잡거나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등 나름대로 고증을 가하였는데, 이 경우 『삼국사기』
등 우리 측 기록을 중시하였다.
한편, 실학자들은 사실을 합리적으로 이해 혹은 해석하려고 하였다.
유형원은“삼국이 처음 일어날 적부터 정치鼎峙의 형세를 이룬 것으로 생각하나, 실은 그렇지 않다”고 하고, 고구려는
처음 일어날 때 미약하였으나 점차 인근의 소국들을 병합하여 강대국이 되었고, 그 후 신라와 백제가 마찬가지의
과정을 밟아 결국 삼국이 정립하게 되었다고 파악하였다.
이는 삼국이 소국에서 출발하여 다른 소국들을 병합하면서 고대 국가로 성장하였다고 보는 오늘날 한국고대사연구자
들의 주장과 다를 바 없다.
안정복은 고구려현을 고증하면서 위에 든 유형원의 견해를 인용하였는데, 신라의 강역을 논하는 첫 부분에서 신라가
정복한 소국들의 명칭과 그 시기, 위치를 밝히고,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신라 강역의 변화를 제시하였다(『동사강목』).
신경준(『강계고』), 정약용(『아방강역고』), 한진서(『해동역사』 지리고) 등도 그러하였는데, 구체적 사실에 대해
서는 이견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신라가 소국으로부터 시작해서 점차 영역을 넓혀 갔다는 점에는 이론이 없었다.
안정복은 신화는 물론 설화, 전설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신화나 설화에 내포된 역사적 사실 내지는 의의를 알았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안정복은 합리적인 입장에서
그것을 해석하려고 하였다.
가령 그는 “신라에서 천사옥대를 만들었다”고 하고, 이어 “왕이 띠를 만들었는데, 금으로 새기고 옥으로 장식하였다”고
하였다.
또 만파식적에 대해서도 그것을 만들었다고 적었다.
안정복은 상제가 내려주었다는 천사옥대를 “사실을 신성화하여 세상 사람들을 우롱”하기 위한 조작이라고 보았고,
만파식적을 “일세의 인심을 놀라게 하고 이를 우롱하고 미혹케 하려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규정하였다(『동사강목』).
이러한 해석은 천사옥대나 만파식적의 설화가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현대 학자들의 해석
과 상통한다.
금석문 연구
이우李俁는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를 비롯하여 금석문 탁본 300여종을 수집하고, 각 탁본의 일부를 동일한 크기로 잘라
만든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를 만들었다(1668년, 현종 9).
그리고 금석문의 명칭, 찬자撰者, 서자書者, 건립연대, 소재지 등을 정리한 목록인 『대동금석록大東金石錄』을 첨부
하였다.
이는 이후 금석문 연구의 기초 자료로 이용되었다.
이익은 “『대동금석록』이 자못 누락됨이 없다.”고 평가하고, 신라의 여러 비와 비문을 소개하였다(『성호사설』).
신라 금석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홍양호洪良浩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두 차례 연행燕行을 통해 청의 고증학考證學을 접하였고, 경주부윤을 지냈다.
홍양호는 신라의 금석문을 수집하고, 내용을 고증하였다.
그는 「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에 왕을 따라온 관리들을 열거한 부분에 나오는 탁부喙部, 아간阿干, 대사大舍 등이
신라의 지명, 관호임을 지적하였다.
연대에 대해서는 “무자戊子 추팔월秋八月”은 568년(진흥왕 29)으로서 중국의 진陳 임해왕臨海王 2년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이를 통해 신라의 전성기에 그 영역이 넓었음과 말갈과의 경계를 알 수 있는데, 이로써 옛 역사에 빠진 것을
채울 수 있다고 하였다.
홍양호는 「문무왕릉비」의 서자書者가 대사 한눌유韓訥儒임을 밝히고, 몇 구절을 판독하여 제시하였다.
또 그 중 “섶을 쌓아 장사지내고(葬以積薪)”, “뼈를 부숴 큰 바다에 (뿌렸다)(碎骨鯨津)”의 구절을 들어 『삼국사기』에
문무왕을 화장해서 바다에 뿌렸다고 한 것이 사실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서구李書九의 집에 내려오던 금석첩에서「김각간비金角干碑」의 탁본 수 폭幅을 찾았다.
홍양호는 이것을 김유신의 비라고 생각하였지만 곧 보게 될 바와 같이 이는 김인문金仁問의 비로 보인다.
홍양호는 관리를 시켜 「무장사비鍪藏寺碑」의 편을 찾아내고, 탁본하였다.
그 서자는 신라의 한림翰林 김육진金陸珍인데, 김생金生으로 잘못 알려져 있음을 밝혔다.
또「태자사낭공대사비太子寺郞空大師碑」를 찾아 탁본하였다.
이 밖에도 홍양호는 부여의 평제탑平濟塔과 관련하여 나당의 백제 평정의 경위를 소개한 다음 찬자와 서자를 밝히고,
글씨를 논하였다(이상 『이계집耳溪集』).
홍양호의 뒤를 이어 신라 금석문 연구를 일보 진전시켰던 인물은 유득공이었다(『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그는 홍양호로부터 위에 나온 여러 비문의 탁본을 빌려 보았다고 한다.
유득공은 「황초령비」를 판독한 바를 제시하고, 비의 내용에 대한 홍양호의 견해를 소개한 다음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승려를 “도인道人”이라고 한 것은 중국 6 조朝의 풍습이라고 지적하고, “사문도인沙門道人”은 비의 글을 짓고, 글씨를
쓴撰書 자들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 비문이 순수할 당시에 지어진 것이므로 “진흥태왕眞興太王”은 호칭이지 시호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리고 당시(568년, 진흥왕 29)는 고구려가 강성하였던 때인데, 진흥왕이 어떻게 북쪽의 옥저 땅까지 영토를 넓혔는지
모르겠다고 하고, 이 사실이 『삼국사기』에 실려 있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문무왕릉비」에 대해서도 홍양호의 견해를 먼저 들고, 두 가지 문제를 제기 하였다.
우선 비문에 “투후秺侯의 하늘에 제사지내던 후손이 7대를 전하여(秺侯祭天之胤傳七葉)”이라고 한 구절은 왕실 세계
世系의 순서에 대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신라의 김씨가 김일제金日磾의 김씨인가 하는 의문을 표시하였다.
김일제는 흉노匈奴 휴도왕休屠王의 태자로서 한나라 곽거병霍去病의 흉노 토벌 때 포로가 되었고, 그 후 한무제에
의해 투후秺侯에 봉해졌던 인물이다.
유득공은 신라 김씨 왕족이 과연 흉노 왕족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표시하였던 것이다.
「문무왕릉비」의 “15대조 성△왕星△王은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十五代祖星△王降質圓穹)”라는 구절은 금궤에 든
어린 아이 알지와 관련될 것으로 추정하였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성△星△’은 성한星漢인데, 성한에 대해서는 김알지 혹은 그의 아들이라고 하는 세한勢漢(혹은
熱漢)으로 보는 설이 있고, 알지의 후손으로서 최초로 왕이 된 미추왕味鄒王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
성한과 알지의 관련성은 이미 유득공이 제시하였던 셈이다.
유득공은 「김각간비」에 대해서 50여 자만이 남아 있는데, 판독이 가능한 것은 “자손들에게 복을 주다(垂裕後昆)”,
“조서로 특진을 수여하니(詔授特進)” 정도에 불과하며, 김각간은 김유신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두 구절은 「김인문묘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각간비」는 「김인문묘비」인 듯하다.
유득공은, 홍양호도 그러하였지만, 이것을 김유신의 비로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무장사비」에 대해서는 신라 어느 왕비가 신라 어느 왕의 복을 빌기 위해 무장사에 가서 아미타불을 조성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고만 언급하였다.
조선 후기 금석학의 대가 김정희는 경주를 방문하여 금석문을 조사하였다.
무장사를 방문해서는 홍양호가 관리를 시켜 발견하였던 비편 외에 하단부의 비편을 새롭게 발견하였다.
그 때는 1817년(순조 17) 4월 29일이었는데, 그 경위를 비편에 새겨 놓았다.
김정희는 「문무왕릉비」도 조사하였는데, 그 하단을 선덕여왕릉 아래 신문왕릉 앞의 비석 받침에 꽂았더니 꼭 맞았
다고 한다.
이는 「문무왕릉비」가 본래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의 단서가 되었다.
훗날 그 조각들이 경주 시내에서 발견되었던 것과 관련해서는 김정희나 그 후 누군가가 그것들을 읍성 내 관아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그럴 듯하다.
김정희는 경주에 인공적으로 만든 산(造山)이라고 알려진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것들이 실은 왕릉임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태종무열왕릉 위에 네개의 큰 능은 진흥왕, 진지왕, 문성왕, 헌안왕의 능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 밖에 그는 창림사 터도 찾았는데, 아마도 김생이 썼다는 비를 찾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무너진 탑에서 나온 「무구정탑원기無垢淨塔願記」를 옮겨 적기도 하였다.
진흥왕순수비에 대한 김정희의 연구는 신라 금석문 연구 중 백미라고 할 수 있다(『완당전집阮堂全集』).
북한산 비봉碑峯의 정상부에 있는 비석이 진흥왕이 세운 옛 비석이라는 사실은 조선 후기 식자들 사이에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
김정희는 1816 년(순조 16) 김경연金敬淵과 함께 비봉에 올라 비의 글자를 확인하고 탁본하였으며, 이것이 진흥왕의
고비임을 확정하였다.
다음 해에는 조인영趙寅永과 함께 가서 68자를 살펴 정하고, 그 후에 2자를 더 얻었다.
그리고 탁본을 검토하여 “진흥태왕” 아래 4자를 “순수관경巡狩管境”으로 새롭게 판독하였다.
이로써 비봉의 고비가 진흥왕의 순수 사실을 전하고 있음이 밝혀졌거니와, 현장 답사, 탁본, 탁본의 검토, 역사적
사실의 추구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현대의 금석문 연구의 과정과 대동소이하였다.
김정희는 「황초령비」를 직접 조사하지는 못했다.
이에 대한 그의 연구는 탁본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272자(빈칸 포함)를 판독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최대한 그대로 옮겨 적어 비문의 상황을 그대로 전달하려고 하였다.
각 행의 시작과 끝을 그대로 옮겼고, 글자의 상태에 따라 온전한 글자, 불완전하게 남은 글자, 깎여 나가거나 마모된
글자, 본래 글자가 없는 빈 칸으로 구별하고 이를 그대로 옮겨 적었다.
유득공이「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의 석문을 남겼지만, 비문 전체를 현상 그대로 제시한 것은 김정희가
최초였다.
이어 그는 비의 위치와 현 상태, 크기, 비문의 행行과 글자의 수, 글자에 대한 고증, 비 머리의 형식 등을 정리하였다.
이상과 같은 일련의 작업은 오늘날 연구자들이 금석문을 정리하는 것과 거의 비슷하거니와, 이를 토대로 김정희는 20
여 항목에 걸쳐 비문 내용을 고증하고, 이설異說을 검토하였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만 소개하기로 한다.
『삼국사기』에는 지증왕부터 시호를 사용하였다고 하고(『삼국유사』에는 법흥왕 때부터였다고 나온다), 진흥왕도
시호라고 하였다.
김정희는 진흥왕이 세운 「황초령비」와 「북한산비」에 “진흥”이라고 나온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이를 근거로 그는 법흥, 진흥은 시호가 아니라 생존 시의 칭호였다고 보았다.
또 다른 증거로 신라와의 교섭 사실을 전하는 중국 사서에 “신라국왕 김진흥”, “신라왕 김진평” 등이 확인되고, 진평의
뒤를 이어 선덕이 왕이 되었다고 나온다는 점 등을 들었다.
이미 유득공이 같은 근거로 진흥이 시호가 아닌 당시의 왕호였다고 논한 바 있어 이로부터 영향을 받아 내린 결론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것은 여하튼 김정희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중국 기록에 “김춘추”라 하고 “김무열”이라고 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태종무열왕이 신라의 첫 시호였을 것으로 보았다.
지증왕 때 시호가 처음 사용되었다는 것은 지금도 일각에서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점에서 김정희의 문제 제기는 돋보이는 면이 있다.
김정희는 비문의 대등과 관련하여 『삼국사기』의 상대등 설치 기사를 인용하
고, 철부哲夫 이래 비담毗曇에 이르기까지의 상대등의 이름을 적었다.
그러고는 그 사망과 계승을 반드시 역사에 기록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상대등에 대한 김정희의 이해가 깊었음을 드러낸다.
『삼국사기』에서는 상대등을 역임하였던 인물들 거의 대부분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또 『삼국사기』에 상대등과 사대등仕大等 외에도 “진골대등眞骨大等”이 나오고, 비문에도 대등이 나온다는 점에
착목하여 신라에 대등의 관직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를 표했다.
이는 대등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 언급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대등에서 상대등이 분화되었다는 통설은, 비록 김정희가 이를 직접 언급하였던 것은 아니지만, 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정희의 「진흥왕순수비」 연구는 근대적 의미의 신라사 연구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고 평가를받는다.
(조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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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호, 2008, 「전통시대의 신라인식」, 『역사교육연구』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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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사연구』 62.
채미하, 2011, 「실학자들의 신라사 연구 방법과 그 해석」, 『한국고대사연구』 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