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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사람과 우리 인사하겠습니다. 하여튼 축복의 말씀을 좀 하셨으면 좋겠는데요. 축복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세 가지 인사를 동시에 옆에 날리겠습니다. 시작
축복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좀 슬픈 자료가 있어요. 2024년 자살자 수가 13년 만에 최고를 경신했습니다. 만 4872명 그런데 올해 2025년 상반기만 해도 이미 7천 명이 넘어섰습니다. 제가 이 사실을 여러분에게 알리려고 이 자료를 도입한 건 아니겠죠. 질문을 하나 하고 싶어서 여러분에게 이 자료를 도입했습니다.
그러면 2024년 아직 2025년은 분석이 안 됐으니까 2025년 자살자 중에 어느 연령대가 가장 높을까요?
격량기를 사는 그리고 학업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10대와 20대일까요?
아니면 이미 많이 살아서 인생에 대해서 별 미련이 없는 80대와 90대일까요?
조금 의외로 50대 자살률이 가장 높았습니다.
그럼 두 번째 자살률이 높은 연령대는 언제일까요?
이것도 조금 의외예요. 40대입니다. 청소년 자살률이 높다는 것은 우리가 아니까 더욱 청소년이 아닐까라는 저는 생각을 했거나 아니면 노년에 노년에 어떻든 삶의 환경이 어려워진 어른들이 많이 돌아가시지 않을까 이렇게 추측을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50대가 가장 높았고 그다음에 40대가 가장 높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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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4 50대는 가장 세상에서 활발하게 경제 활동을 하기 때문에 이 세대가 불안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주변에 4-50대가 있으면 좀 격려하시고 좀 이렇게 위로해 주셔야 돼요. 아마 여기에 앉아 있는 어른들이 자녀들이 아마 40~50대일 거고 또 저희 교회에 저와 연령대가 비슷한 분들이 많으니까 아마 많은 분들이 4 50대일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참 아이러니하게 이 시대에서 가장 많은 위로가 필요한 세대가 40대와 50대입니다.
제가 이렇게 여러분에게 관심을 좀 가지라고 권면하지만 실제로는 니가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이 잘 가지 않아요. 목회자들도 마찬가지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주변에 어떤 사람이 어렵다고 했을 때 우리가 정말 그 사람을 가족이나 친척처럼 아니면 정말 가까운 지인들처럼 우리가 대할 수 있느냐 못 대해요.
왜 그럴까요?
실상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로할 만큼 우리에게 힘이 없어요. 그러니까 위로할 생각은 하죠. 아 해야 되겠다 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정작 행동을 못하는 것은 우리가 누군가를 위로할 만한 힘이 우리에게 없어요. 심지어 자신도 위로하기가 버겁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자기로부터 위로를 받을 때 가장 큰 힘을 얻어요. 그러니까 내가 나 자신을 위로할 때 나 자신으로부터 가장 큰 위로를 내가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남을 위로할 힘이 우리에게 없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인 거예요. 하나님이 창조 때 온 우주 가운데 심어놓은 위로를 우리의 죄가 다 파괴해 버렸어요. 세상 사람들은 다르게 볼지 모르지만 저는 죄가 인간으로부터 위로를 빼앗아 갔다고 100% 확신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전에 세상은 무해한 세상이었어요. 그러니까 위로가 충만한 세상이었어요. 그냥 자연으로부터 오는 걸 먹기만 해도 온몸은 건강했고,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을 보는 것만으로 해도 위로가 돼서 굳이 위로나 주변에 사람들이 도움이 없어도 살 수 있는 무해한 환경이 아담과 하하가 범죄하기 전에 있었어요.
그런데 아담 노하의 범죄가 이 무예한 환경을 파괴해버린 것입니다. 범죄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위로를 다 빼앗아 간 거죠.
여러분 사람들이 삶을 놓는 순간이 언제일까요? 사람이 삶을 포기하는 순간이 언제일까요?
그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좋은 메시지를 줄 수 없을 때예요. 되도록 한 번쯤은
그래도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나는 괜찮은 남편이야. 나는 괜찮은 아내야.
이렇게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메시지를 줄 수 있으면 사람들은 살 수 있어요. 근데 자기에게 좋은 메시지를 줄 수 없으면 사람들은 죽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목사님이 저의 목양실을 방문했어요. 그러더니 자기가 본 목양실 중에 가장 파격적이라는 거예요. 자기는 살면서 이런 목양실을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아마 우리 교회 성도들도 한 10% 20% 정도는 제 목양실에 많으면 20% 정도 될 것 같아요. 목양실에 들어와 봤지 다른 분들은 들어올 생각도 안 하고 궁금도 안 하실 거예요.
일단 제방에는 대형 로스터기가 하나가 있습니다. 보통 교회 목사님들은 목회자가 이게 흑피를 뽑는 걸 교회가 싫어해서 교회 창고에 막 감춰놓고 뽑고 이렇게 하더라고요. 저희는 그런 분위기가 없어서 그런 생각을 가진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어떻든 저는 그냥 제 목양실에 두고 그 피를 볶아서 여러분이 주일날 드시는 그 머신 안에 늘 신선한 커피로 이렇게 채워 놓습니다.
그리고 제 방에는 그 외에 커피와 관련된 기구들이 잔뜩 있어요. 스프레소 머신도 있고 다양한 이 드립 도구들이 사이폰 이런 도구들이 잔뜩 제 안에 있습니다. 기타 2대하고 앰프가 있고요. 자전거도 한 대가 있고 낚싯대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미니 당구대도 하나 갖다 놨어요. 이사 가는 분한테 얻은 건데 이게 괜찮으면 학생들한테 좀 주려고 했더니 이 지지대가 너무 안 좋아서 한 번만 잘못 올라타고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아서 어쨌든 그냥 제 방에 두고 있습니다.
왜 이런 것들이 제 목양실에 있을까요?
제가 저 자신을 이거 좀 여유를 주기 위한 거예요. 어머니의 정신적인 심리적인 상태는 음식에 다 반영이 되고요. 남자들의 심리적인 상태는 회사에 다 반영이 돼요. 아이들의 심리 상태는 공부에 반영이 되고 목회자의 심리 상태는 목회에 반영이 됩니다.
저는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여유가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제가 제 삶을 다 이야기하지 않아서 그렇지 저는 정신적으로도 심각한 결함이 있을 만한 환경들이 제 주변에 늘 있었어요.
물질적으로는 여유가 있는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나마 군에서 군인으로 있을 때가 거기는 관사도 나오고 또 계급이 있으니까 월급도 그 당시는 많이 나와서 아마 그때가 제가 누린 최후의 금전적인 전성기가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저는 저 자신을 잘 위로할 줄 모르고 이제 학대를 한 거죠.
제가 사역을 잘 못하면 여러분을 비난하기 전에 저를 먼저 비난을 해요. 문제는 제가 성도들에게 비난받는 것보다 제가 제 자신을 비난할 때 훨씬 더 힘들다는 거예요. 제가 저 자신에게 좋은 메시지를 줄 수 없을 때가 가장 힘이 들어요. 저의 내면에 있는 저의 자아는 저에게 늘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과거형이에요.
너는 왜 그 정도밖에 못해? 너는 왜 그 모양이야? 그렇게 하니 실패하지
이런 안 좋은 문장으로 저는 늘 저 자신을 학대했어요. 문제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남도 비난하더라고요. 그러니까 내가 나를 위로하지 못하면 나는 남도 위로하지 못해요.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은 결국 남도 비난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긴 시간 동안 목회를 하면서 깨달은 게 내가 나를 내가 위로받지 못하면 참 위로를 성도들에게 줄 수 없구나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어떻든 주변의 환경으로부터 내가 위로를 받아야 좋은 위로를 성도들에게 줄 수 있구나라고라는 확신과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 자신에게 투자하는 시간을 조금 더 늘렸습니다. 그랬더니 최소한 저를 향한 많은 비난은 좀 멈춰졌어요. 그렇다고 제 인생이 막 송두리째 바뀌어진 건 아니지만 확실히 저에게 대해서 조금은 좋은 메시지를 주는 사람으로 바뀐 것은 확실합니다.
여러분 40~50대가 왜 자살률이 높을까요? 40~50대가 일단 자기가 자신을 위로하지 못해요. 위로받을 환경을 못 만들었어요. 또 하나 회사나 주변 환경이 그들을 위로하지 않아요. 성과를 계속 요구해요. 성과를 계속 저는 정말 가정이 건강하려고 하면 아버지나 어머니들이 자녀들에게 투자하는 돈의 한 10분의 1이라도 아니면 5분의 1이라도 본인들에게 투자하라고 권면하고 싶어요.
우리는 자신 자녀들을 위해서는 다 이렇게 올인하잖아요. 몇 천만이 들어가도 그거 다 쓰잖아요. 근데 정작 위로받을 자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물질은 공급하는 부모는 돼도 부모가 자녀에게 여유는 줄 수 없는 거예요.
여러분 그렇게 자란 자녀가 여유를 갖고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당연히 못 살죠. 어머니 아버지로부터는 물질은 받았지만 여유는 마음의 여유는 삶의 여유는 못 받았어요. 그래서 그렇게 자란 40 50대가 가장 자살률이 높은 것입니다.
아내는 낯선 곳이죠. 이렇게 경상도 자체에 사는 것도 처음이고 어떻든 낯선 곳에 이제 남편을 따라 사역을 왔어요. 제가 고민하다가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게 하자 이렇게 했을 때 좀 생뚱맞게 아내는 서예를 복구시를 되게 좋아했어요. 대학 때도 동아리에 소속돼 있고 그래서 여기 와서 중간에 좀 쉬는 시간이 있지만 긴 시간 동안 안에는 보통 새벽 기도를 7시에 마치고 아내가 올라오니까 7시에 마치면 올라와서 한 2시간 동안 매일 풋 글씨를 써요. 서예 학원을 다녀야 돼요. 지도를 받아야 되니까 학원비를 내야 되는 거죠. 학원비를 내고 집에서는 연습을 하고 감사하게도 아내가 잘 버텨주고 있어요. 그 내면이 제가 다 모르니까 장담은 할 수 없지만 제 생각엔 아마 거기에서 위로가 오지 않았을까 물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로 살아요.
근데 하나님이 오는 위로가 하나님의 세상에 다양한 것들을 통해서도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신 거잖아요. 음성으로만 말씀으로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문화로 우리를 하나님이 얼마든지 위로할 수 있는 분이시잖아요. 그래서 아마 잘 버티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서 피조물에게 있는 위로가 깨졌다는 거예요. 죄가 피조물에 있는 위로를 온전히 경험하지 못하게 한 거예요. 제가 하나님의 창조물로부터 오는 위로도 하게 했고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도 파괴해 버렸습니다. 인류가 범죄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로 충분히 살았을 거 우리의 내면은 풍성했을 것이고, 우리의 삶의 여유도 많았을 것이며, 인격은 잘 갖추어져서 서로가 충돌 없이 정말 천국과 같은 삶을 이 땅에서 살았을 거예요.
문제는 우리의 죄가 이 위로를 다 파괴했다는 거예요. 제가 인류에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위로를 빼앗아 간 겁니다. 그래서 위로받기도 어렵고 온전한 위로를 경험하기도 어렵고 위로를 전하기도 어려운 거예요.
소돔과 고모라는 도시에는 위로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도시는 하나님이 없는 동네였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을 거역하는 도시였고, 하나님을 부인하며 사는 도시였어요. 창세기 19장에 보면 소돔에서 이 소돔성을 찾아온 두 천사를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서 내어 달라고 해요.
왜요?
성적으로 그들을 유린하려고 그러니까 이성 간의 성행위가 아니라 동성 간의 성행위로 그들을 유린하려고 그들을 롯에게서 빼앗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죄가 있는 곳은 사람이 위로받을 수 없습니다. 죄가 넘치면 넘칠수록 사람은 파괴되고 유린당하는 곳이 돼요. 세상에 돈은 많아졌지만 여러분 더 많은 사람들이 학대받으며 살아가잖아요. 죄 때문인 거예요. 돈이 선진화가 영혼과 인간을 위로할 수 없어요.
근데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위로할 수 있다고 여겨요. 그래서 막 여행을 다녀요. 근데 문제는 이 여행을 가면 이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한 도시를 다 망하게 만들어요. 라오스의 어떤 도시를 그렇게 만들어버리고, 태국의 어떤 도시를 막 동양 서양인 다 몰려서 그렇게 만들어버리고,
여러분 우리는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 공간을 파괴하는 존재이지 누구를 위로하는 존재가 아니에요.
왜 그럴까요?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때문에 그렇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죄의 도시입니다. 창세기 13장 13절을 같이 한번 보겠습니다. 시작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이것을 공동 번역으로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런데 소돔 사람들은 야외께 못할 짓만 하는 아주 못된 사람들이었다.
여러분 사람이 왜 소돔이 사람이 위로받을 수 없는 도시가 됐냐면 하나님에 대해서도 악을 행하는 도시였기 때문인 거예요. 아무리 도시가 발전해도요. 하나님께 악을 행하는 도시는 그 사람 거기에 사는 백성들을 위로할 수 없어요. 소돔은 정말 가장 풍성하고 가장 멋있는 도시였어요.
근데 제가 그 도시를 완전히 다 파괴합니다. 위로받을 수 없는 도시로 만들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다 불타는 도시가 되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18장 20절입니다. 이것도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그러니까 소돔이 죄의 도시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소돔성에 왜 위로가 없느냐 심지어 거기에 찾아는 천사들까지도 성적으로 유린하려고 했느냐 바로 이 소돔이라는 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죄를 짓고 사람에 대해서도 죄를 짓는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악랄한 죄를 짓는 도시, 더러운 죄를 짓는 도시였어요. 죄가 도시 가운데 관영 안 그러니까 꽉 차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소돔으로 피해 간 롯도 위로받지 못했고, 소돔으로 간 두 천사들도 위로받지 못했어요.
한번 따라가겠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위로가 없습니다.
여러분 죄가 있으면 위로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 죄가 그 도시를 불태웠고, 그들의 삶도 완벽하게 파괴했습니다. 천사도 겁탈하려고 하는 무서운 도시였고, 자신들의 목숨이 달린 장인의 충고에도 농담으로 여기는 도시였어요. 그만큼 죄가 꽉 찬 도시였어요. 그래서 이 도시는 위로할 수 없는 도시가 됐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불타게 됩니다.
여러분 교회에 죄가 머물면 교회는 위로할 수 없는 교회가 됩니다. 오히려 영혼을 파괴하는 교회가 되죠. 그러니까 죄가 교회 안에 있으면 그 교회는 위로할 수 없는 교회가 돼요.
여러분 이 땅에 성도를 위로할 수 없는 교회가 많아요. 왜 그럴까요?
그 안에 죄가 있기 때문인 거죠. 가정도 마찬가지예요. 죄가 머무르고 있는 가정은 위로가 없는 가정이 돼요. 물질은 풍족할지 모르지만 위로는 없어요. 왜요?
죄가 그 가정의 위로를 빼앗아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죄가 가족을 파괴하고 파괴하게 됩니다. 가정이나 교회에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 거역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가정도 교회도 위로할 수 없는 곳이 된 것입니다. 소유는 많아졌지만 위로가 없는 것은 제가 공동체나 그 나라 가운데 있기 때문인 거예요.
여러분 정말 많은 사람들이 공황 장애와 관련된 약을 먹고 살아가요. 불면증 약은 이미 보편적이에요. 보편적 그럼 우리 성도들도 불면증 약을 먹었느냐 먹지 않았냐 따지면 정말 많은 숫자들이 불면증 약을 아마 먹었을 거예요.
여러분 왜 그럴까요?
왜 위료가 있어야 할 도시에 위료가 없고 왜 위료가 있어야 할 가정에 위료가 없고 왜 위료가 있어야 될 교회에 위로가 없을까요?
바로 죄 때문입니다. 특별히 회개하지 않는 죄가 있고 떠나지 않는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떠나지 못하고 있는 죄가 있어서 위로가 없는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얻고 싶은 진정한 위로는 우리가 언제 얻게 되느냐 우리가 죄와 싸울 때 얻게 되는 거예요. 내 안에 있는 죄와 우리 공동체 하는 죄와 우리가 싸울 때 우리 공동체도 위로할 수 있는 공동체로 바뀌고 우리 가정도 위로할 수 있는 가정으로 바뀌게 됩니다. 만약에 여러분과 제가 죄와 싸우기를 포기하면 위로는 사라집니다.
이런 거죠. 죄와 싸우면 위로가 생기고, 죄와 싸우지 않으면 위로가 사라지게 돼요. 인간은 하나님의 위로가 없으면 불안해지는 종교예요. 그러니까 존재적인 불안을 갖게 되는 존재가 인간이에요. 위로가 없으면 그러니까 이 불안을 해결하지 못하니까 더 강력한 자극을 추구합니다. 이제는 이 더 강력한 자극들은 우리를 위로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아무리 순간적인 강력한 자극을 우리가 경험해도 그 자극이 우리를 위로하지는 못한다는 겁니다. 오히려 더 강한 자극을 부를 뿐이에요.
약한 수준의 마약은 더 강력한 마약을 불러요. 그래서 결국 마약으로 인해서 인생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위로하고 싶어 하기도 하고 위로를 받고 싶어 하기도 해요. 결혼한 제조를 통해서도 위로받고 싶어 하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합니다.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도 위로받고 싶어 하고요. 친구와 이웃을 통해서도 위로받고 싶어 하고요. 취미나 여행이나 휴가를 통해서도 위로받고 싶어 합니다. 위로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들은 우리의 영혼을 위로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죄와 싸우지 않고는 영혼을 위로하는 위로를 우리는 경험할 수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의 삶에 있는 말씀을 어기는 것, 말씀을 위배하는 것과 싸우지 않고는 영혼의 위로는 얻을 수 없어요. 잠시 마음의 휴식, 평안은 우리가 잠깐 잠깐 누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혼의 평안함은 영혼의 위로는 누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 다윗의 시는 엄청난 위로의 능력을 가졌어요. 그래서 지금도 많은 찬양단이 다윗의 시로 곡을 붙여서 찬양을 해요.
근데 다윗이 범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다윗이 죄와 싸웠기 때문에 큰 실수를 했고 큰 범죄를 저질렀지만 그의 전 생애를 봤을 때 그는 죄와 싸우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그는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이 시를 지어서 지금까지 그 시로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위로를 받아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의 구절 이 두 가지인데 그중에 하나도 시편이에요. 너의 말씀은 곤란 중에 나의 위로였다. 이게 가장 좋아하는 말씀 중에 하나예요.
여러분 다윗이 자기의 죄와 싸웠기 때문인 것입니다. 비록 범죄했지만 철저하게 회개하는 모습으로 하나님과 싸웠습니다. 그래서 그의 시가 위로가 되었던 겁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없는 것 같아요. 죄와 싸우는 강단을 통해서 이 강단의 위로가 백성들에게 전달이 돼요. 죄와 싸우는 어머니의 기도의 자리로 가 자녀들에게 진정한 위로를 전달해요. 죄와 싸우는 아버지의 위로가 자녀들에게 진정한 위로를 줍니다. 죄와 싸우는 공동체에서 우리가 위로를 경험해요.
만약에 우리 교회에 와서 위로가 위로를 못 느낀다면 두 가지예요. 하나 일단 우리가 아직 죄와 싸우는 수준이 교회가 누군가를 위로할 만큼 아니거나 아니면 위로를 원하는 그 사람이 죄와 싸우지 않고 있거나 이 두 가지예요.
하나님은 죄와 싸우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에게 위로의 전달자로 그를 사용하십니다. 여러분과 제가 최악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것 위로가 아닌 위협을 당하면서 사는 것. 그것은 우리 가운데 죄가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그 죄와 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 위로 받으러 왔어요. 그런데 성도들이 막 공격을 해요. 여러분 이런 일들이 너무 흔해요. 우리 교회도 있겠죠. 근데 주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너무 흔한 일이에요. 위로받으러 왔는데 공격을 받아요.
왜 그럴까요?
그 공동체가 죄와 싸우지 않기 기도는 했겠죠. 근데 쟤와는 안 싸운 거죠. 열심히 봉사는 하죠. 죄와는 안 싸운 거예요. 회개는 말로 알 수 없는 평안을 우리에게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죄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죽을 때까지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죄가 있는 세상에 살아가고 죄의 속성을 가진 자로 우리는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제가 소돔과 고모라를 만들었고, 제가 파괴의 도시를 만들고 위로할 수 없는 도시를 만들고 위로할 수 없는 인간을 만든 거예요.
말씀드렸잖아요. 하나님의 창조물에는 위로가 담겨져 있어서 범죄 이전에 인류에게는 인류는 병도 들지 않았어요. 그 자연물에는 몸이 병들지 않는 위로가 담겨져 있고 대화 속에도 그렇고 피조물 속에도 그랬어요.
근데 제가 이 위로를 파괴해버린 거죠. 그래서 우리가 진정 얻고자 하는 위로를 못 얻게 했어요. 잃어버리게 한 거죠. 그럼 우리가 위로를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우리는 그 위로를 파괴한 죄와 다시 싸우는 거죠. 우리가 죄와 싸운다는 것은 에덴 동산을 다시 건립한다는 거예요. 파괴된 에덴 동산을 다시 지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워진다는 것 왜 중요할까요?
유로에 가까워진다는 거예요. 지금 이 시대로 비유한다면 우리가 왜 진리와 거리가 가까워야 될까요?
진정한 위로를 진리로부터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위로는 죄와 싸우는 공동체에게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죄와 싸우면 아버지 이상의 위로가 아버지에게 있어요.
목회자가 죄와 싸우면 목회자 이상의 위로가 있어요.
근데 우리에게 그런 위로가 있나요?
여러분 제가 떳떳해서 이 설교를 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죄가 없고 날마다 죄와 잘 싸워서 막 성들리고 위로를 준다 이런 제 마음으로 설교하는 게 아니에요.
어제 오후에 비구니죠. 니 니가 이렇게 중이라는 의미인데 이제 여성 여자 승려를 이제 비구니라고 그러잖아. 비구니 한 분을 우연치 않게 이렇게 교회 앞에서 이렇게 만났어요. 제가 교회 시간 되면 오시요. 그랬더니 아침에 오셨다가 가셨더라고요. 예배드리러 온 것 같지는 않고 저를 만나러 오셨는지 어쨌든 저는 이분과 어제 잠깐 대화하다가 이분이 이 말을 하는 거예요.
목사님 세상이 죄인이 되어 가고 있어요. 그런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저는 그런 용어를 쓰는 승려들을 별로 만나본 적이 없거든요. 제 기억에는 3명이에요. 3명. 제가 군목때 함께 훈련받았던 법사님, 동국대 출신 법사가 있었는데 거기도 비슷한 말을 했고, 또 제가 잠깐 어떻게 아는 한 분이 비슷한 말을 했어요. 그리고 이제 이분이 이제 세 번째인데
목사님 전 저 세상이 죄인이 되어 가요.
물론 그들의 구원의 개념과 이런 게 좀 차이는 있지만 어떻든 어떻든 승려도 승려도 완전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이치에 가깝구나 요지인 거죠.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거예요. 자기들은 구원을 줄 수 없대요. 업으로 평생 살게 하지 구원을 줄 수 없대요. 그리고 자기도 언젠간 교회로 돌아올 거래요.
여러분 기도의 자리는 어떤 자리냐 죄와 싸우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의 자리에 있자고 권면하는 거예요. 우리가 멀쩡하게 세상 가운데 막 있으면서 어떻게 우리가 죄와 싸울 수 없어요. 어떤 자리에서 싸울 수 있느냐 기도의 자리에서 싸울 수 있습니다.
한번 따라 합니다.
기도하는 교회에는 위로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힘든 교회를 위로하고 힘든 영혼을 위로하고 힘든 세대를 위로하는 것이 기도하는 교회에 있어요. 왜냐하면 기도하다 보면 제가 보여요. 느껴지고 내가 한 말이 잘못되었다고 깨달아지고 성령님께서 다 생각나게 하시니까 그래서 회개하게 돼요. 그래서 우리가 있어야 될 자리는 기도의 자리입니다.
제가 아는 서울의 한 교회 청년부가 몇 년 전까지 한 천 명 정도 나왔어요. 한 2년 그 정도 선일 거예요. 지금은 1500명이 넘었어요. 청년부가 출석 여부 재적 이게 아니고 출석이 그 교회에 있는 목회자조차도 왜 우리 청년부가 이렇게 풍한지 모르겠다고 자기도 신기하대요. 담임이 제가 좀 아시는 분인데 아는 분인데 담임이 그랬어 자기도 모르겠대. 왜 우리 청년부가 부흥하냐고 교육자의 때 묻는데 야 왜 청년부가 부흥하냐고 지금 이렇게 묻는대요.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 그 생각이 들더라고요. 부흥의 이유는 위로다. 이 교회에는 청년들을 위로하는 뭔가가 있다는 거예요. 위로가 있다. 그래서 청년들이 몰려든다. 여러분 사역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교회가 아무런 일이 없다고 해서 사람들이 성품이 좋다고 해서 위로받는 게 아닙니다. 죄와 싸우는 기도가 있어야 위로할 수 있는 교회가 되고 위로하는 성도가 되고 또 위로받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교회에 이런 위로가 있기를 어쩌면 여러분이 가장 원하는 듣고 싶은 설교는 아닐 수 있어요.
근데 제가 긴 시간 동안 제가 나이는 이제 50대 후반이지만 목회를 정말 길게 했잖아요. 20살부터 했으니까 긴 시간 동안 목회를 하면서 경험한 것이 그거예요. 좀 교회에 위로가 있었으면 좋겠다. 강단을 통해서도 위로가 이렇게 전달이 되고 성도들의 표정에서도 위로가 이렇게 주변에 전달이 되고 이런 위로가 있었으면 좋겠다.
여러분 제게 위로가 있어서 스님이 아니라 신부님하고 무당들 다 찾아오면 얼마나 좋겠어요.
일단은 먼저 제가 그렇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는 여러분에게 그런 위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권사님 이상의 권사님이 되십시오. 장로님 이상의 장로님이 되시고 안수 집사님 이상의 안수 집사님이 되십시오. 아버지 이상의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 이상의 어머니가 되세요. 되시려면 죄와 싸우셔야 돼요. 그리고 그 위로를 다음 세대가 누리며 살게 됩니다.
아무쪼록 이 재단에 그런 은혜가 있기를 그 은혜가 충만히 내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