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을 위한 변명
송요훈님
기자가 되면 경찰서 출입부터 합니다. 경찰서에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온갖 사건들이 들어옵니다. 그 사건들을 통해 기자들은 교과서 속의 세상이 아닌 ‘진짜’ 세상을 배웁니다.
저는 경찰서 출입을 꽤 오래 했습니다. 페북에 쓴 적이 있습니다만, 저를 기자로 만들어준 첫 스승은 아버지뻘 되는 늙은 형사였습니다. 그 형사가 무심결에 불쑥 내던진 '송 기자는 세상 공부를 더 해야겠네'라는 말이 호기심을 자극했고, 그렇게 진짜 세상에 눈을 떴으니까요.
민주화 이전의 경찰은 깡패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습니다. 욕하고 때리고 협박하고... 그게 수사의 기법이었습니다. 민주화는 경찰의 수사도 바꿔 놓았습니다. 반인권적 수사를 못하는 대신 과학수사가 발달했지요. 지금 우리 경찰의 수준은 웬만한 선진국 못지않다고 봅니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영화 <베테랑>에 나오는 명대사입니다. 강력팀 형사인 주인공 서도철의 대사죠. 월급도 많지 않고 권력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명예는 지키며 살자는 거죠.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에게 굽신거리며 살지는 말자는 거죠.
보통의 국민은 죄 짓지 않고 살아도 경찰이 부르면 괜히 쫄아듭니다. 경찰이 권력기관처럼 보이죠.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경찰은 검찰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 같습니다. 대통령 앞에서는 그보다 더하죠. 물로 대통령이 누구인가에 따라 다르지만. 민주적이고 탈권위적 정부일수록 경찰의 위상은 존중되었습니다.
윤석열 정권 들어 경찰의 위상은 다시 쪼그라드는 것 같습니다. 다시 과거로 퇴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경찰서장이 젊은 검사 앞에서 쩔쩔매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경찰은 검사 정권에 종속되어 절대복종하는 하부조직 같습니다.
발가벗겨진 채 경찰서 포토라인에 서야 했던 배우 이선균씨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누가 이선균을 포토라인에 세웠습니까? 누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까?
영화감독 봉준호, 가수겸 작곡가 윤종신 등 대중문화 예술인들이 배우 이선균을 죽음으로 몰고간 수사가 정당했는지,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우리나라의 대중문화 예술인들이 모두 나선 것 같습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건 이런 겁니다.
내사단계에서 왜 언론에 흘렸는지, 국과수의 정밀감정에서도 마약성분이 검출되지 않았는데도 또 공개적으로 소환하여 포토라인에 세워야 했는지, 철저하게 진상을 밝혀달라는 겁니다. 그것이 제2, 제3의 희생자가 나오는 걸 막는 유일한 길이라는 겁니다.
대중문화 예술인이라는 이유로 개인의 사생활을 부각하여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냐고 묻습니다. 혐의 사실과 동떨어진 사적 대화를 보도하는 것이 국민의 알권리를 위한 보도였는지, 공영방송 KBS가 그런 보도를 해야 했는지 묻습니다.
언론의 그러한 보도 역시 경찰로부터 흘러나온 것일 겁니다. 경찰을 오래 출입한 저의 경험으로 추측컨대, 내사단계에서 수사 정보를 언론에 흘리는 것이든 사적인 대화를 흘리는 것이든 유명 연예인을 포토라인에 세우는 것이든, 경찰은 그런 결정을 독자적으로 하지 못합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 대한 테러는 명백한 정치 테러이고 단독범행이든 배후가 있든 없든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인 정적을 제거하려던 암살 시도입니다. 그럼에도 경찰은 테러범에 대한 정보를 일체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범인은 범행동기를 묻는 기자들에게 경찰이 ‘변명문’이라고 이름 붙인 8쪽 분량의 ‘남기는 글’을 참고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확신범이라는 것이고, 자신이 누구이고 왜 그런 테러를 저질렀는지 숨길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경찰은 왜 그 ‘남기는 글’을 공개하지 않는 걸까요? 그 글에는 어떤 과정을 거쳐 범인의 정치적 신념이 형성되었는지, 누가 그에게 적개심과 분노와 증오를 불어넣었는지, 정파화된 언론의 보도가 어떤 방식으로 그를 세뇌했고, 누가 확증편향의 뇌관에 불을 붙였는지 나와있기 때문에 경찰이 공개하지 않고 있는 건 아닐까요?
공개하지 않는,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공개하지 못하는 그 결정도 경찰 자체의 결정은 아닐 겁니다. 정치적인 결정일 것이고, 경찰은 그 정치적인 결정을 거부하지 못하고 있는 걸 겁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경찰이 아니라 윤희근 경찰청장이 그러는 것이겠죠.
아주 오래 전에, 제가 초년병 기자 시절에 영화 <베테랑>에 나오는 주인공 형사 같은 경찰관들에게서 듣던 말이 생각납니다. 신망도 있고 경찰에 자부심도 있고 후배들 걱정도 많이 하던 선배인데 높은 자리 올라가더니 권력의 눈치나 보더라. 그런 일을 여러 번 겪으니 기대를 접게 되더라.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때 들었던 얘기가 다시 들리는 듯합니다. 지금 경찰 지도부는 경찰의 자존심, 경찰의 명예를 지키고 있습니까?
대한민국의 대중문화 예술인들이 모두 나서 한 목소리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누가 왜 배우 이선균을 죽음으로 몰고 갔는지. 경찰은 그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누가 왜 60대 노인을 정치 테러리스트로 만들었는지, 국민은 알권리가 있습니다. ‘남기는 글’을 포함하여 그에 대한 모든 정보를 공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또 다른 비극을 막을 수 있습니다. 지금도 어떤 정치인들과 어떤 언론은 세뇌로 판단이 마비된 30%의 국민을 향해 적개심과 증오의 바이러스를 살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