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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을 앞두고 있는 전기수 그레고리오 신학생의 묘역 |
ⓒ 광주가톨릭평화방송 |
이장을 앞두고 있는 고광규 베드로 신학생의 묘역 |
ⓒ 광주가톨릭평화방송 |
고광규 베드로 신학생 묘역을 이장하는 모습 |
ⓒ 광주가톨릭평화방송 |
전기수 그레고리오 신학생 묘역을 이장하는 모습 |
ⓒ 광주가톨릭평화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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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가톨릭평화방송 |
ⓒ 광주가톨릭평화방송 |
미사에 앞서 요한수도회와 살레시오수도회 묘역에 있던 전기수 그레고리오 신학생과 일반 묘역에 묻혀 있던
고광규 베드로 신학생의 묘에 대해 재단법인 광주구천주교공원묘원 광주지역 담당인 고재경 신부에 의해 면례(緬禮)예식(※무덤을 옮겨서 다시 장례를 지내는 예절)에 이어 본격적인 개장 작업이 진행됐습니다.
근현대 신앙의 증인 순교자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와 함께 지난 2015년
7월3일 교황청 시성성으로부터 ‘장애없음’ 교령을 받고 예비 심사가 시작돼 시복시성 절차를 밟고 있는 두 신학생의 묘역 개장 작업에는 조선대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김윤신 교수와 광주가톨릭대에서 교회사를 강의하는 최용감 신부가 입회했습니다.
또 가족과 친지, 그리고 신자들과 취재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엄숙하고 정성스럽게 수습된 두 신학생의 유골은
교구 성직자 묘역으로 옮겨졌습니다.
나주 출신인 전기수 그레고리오 신학생은 서울 가톨릭대학교에 진학해 수학하던 중 1950년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고향으로 돌아오던 길에 9월25일 전주에서 공산당에 붙잡혀 이튿날인 9월26일 전주 예수병원 방공호 굴에서 28살의 나이에 순교했습니다.
또 목포에서 태어난 고광규 베드로 신학생은 역시 서울 가톨릭대학교에 진학해 수학하던 중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고향으로 오던 중 전기수 신학생과 함께 9월25일 공산당에 붙잡혀 이튿날 같은 장소에서 25살의 나이로 순교했습니다.
순교자 현양 미사를 주례한 옥현진 총대리 주교는 강론에서 “순교자성월에 전기수 그레고리오 선배님과 고광
규 베드로 선배님을 성직자 묘역에 모시게 됨을 많이 늦었지만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두 분은 1950년 9월26일 전주 예수병원 뒷산 방공호에서 공산당에 의해 피살되신 것으로 증언과 기록
을 통해 알려져 왔다”며 “선배님들의 순교자적인 삶은 가족들 안에서 성소의 꿈으로 완성돼 교구의 고재영 신부님과 전영 신부님이 사제 성소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을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영광의 월계관을 쓰셨지만 세상의 영광을 찾
았던 사람들은 감옥에 가거나 자신을 해치는 상황에 놓여 있게 되었음을 자주 목도하게 된다”며 “하느님 뜻 안에 머물며 살아가셨던 두 분의 삶은 칭송받을 만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옥 주교는 끝으로 “순수한 신앙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으셨던 두 분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으셨
으리 믿으며 우리들 역시 하느님 뜻 안에 머물며 순교자들의 삶을 본받으며 살아가길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전기수 그레고리오 신학생의 조카인 전대건(아오스딩)씨는 “너무 어려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5살 때 삼
촌과 장난을 치다 마루에서 떨어져 이마에 흉터가 남았던 기억이 있다”며 “많은 교우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고 또 그대로 살도록 노력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또 전기수 신학생과 어린 시절 한집에 살았던 조카 전정숙(마리나)씨는 “8살때 한집에 함께 살면서 ‘서울삼
촌’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있다”며 “어린 시절 자신에게 성가도 가르쳐 주고 본당에서 첫 영성체 교육을 해주시던 삼촌의 모습이 선하다”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고광규 베드로 신학생의 조카인 고재철씨는 “묘역 이장을 계기로 이제 마음이 포근해지는 느낌이다”며 “앞
으로 신자들이 많이 와서 기도해주는 것만으로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묘역 이장 작업을 끝까지 함께한 두 신학생의 조카인 고재영 신부와 전영 신부도 “사제 생활을 하면서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아야하는 이유는 있는 것 같다”며 “순교자성월에 오늘 함께한 참석자들뿐만 아니라 교구 전체가 열심히 살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말했습니다.
두 신학생의 묘역 이장 작업을 준비한 고재경 신부는 “그동안 두분이 신학생 신분으로 계셨기 때문에 성직
자 묘역에 안장되지 못했는데 최근 시복시성이 청원되면서 이분들의 시복시성을 위해서는 많은 신자들의 기도가 필요하다고 여겨 이곳으로 모셨다”며 “앞으로 참배객들을 위해 두분 순교자들이 살아오신 역사를 일대기로 별도로 제작해 묘역 앞에 설치할 계획이다”고 말했습니다.
고 신부는 특히, “묘역을 옮기면서 엄격한 교회법적인 절차를 거치도록 돼 있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로
부터 충분한 조언을 듣고 이장 작업을 진행했다”며 “묘역 조성이 순조롭게 이뤄질 수 있도록 함께 마음을 보태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다”고 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