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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문명탐원: 요, 순, 우 시대(프로그램 원고)1
中华文明探源:寻找尧、舜、禹时代(节目文稿)1
소스: 이페어케이
라벨 : 유명한 갑골문자 결승기사의 홍황시대 이리두유적에서 출토된 동서 녹송석 그 패식은 보기 드문 채색도기이다. 분류:신석기문화, 상고문화
사회자:왕루샹
이것은 문명의 근원에 대한 재고문이다.
도사, 이리두는 고대시대 생존의 흔적을 남긴다.
은상 이상의 역사는 행적이 있는지 없는지
선사전의 전설은 또 새로운 해독이 있을까?
중화문명 탐사원사업----요, 순, 우 시대 찾기
PART1:
나들이1: 19세기 마지막 해, 하남 안양 작은 마을의 작은 마을에서 의외로 무늬가 새겨진 흰 뼈를 발견한 농민 이성(李成)은 옴을 치료하는 데 신기한 효능을 보였고, 그는 현지에서 수매한 다량의 백골정을 들고 약국에 가서 팔다가 좋은 약재를 만난 줄 알았다.훗날 유명한 김석학자 왕이영(王의영)의 눈에 띄어 수십 년에 걸쳐 천백 번의 발굴과 연구를 거쳐 호탕한 은상의 시대가 펼쳐질 줄은 물론 예상하지 못했다.바로 갑골문의 발견과 그 후의 은허유적 발굴로 인해 지금까지 중국 최초의 왕조가 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이후 상전하(商前夏)에 대해서는 이 중국 역사문헌에 기록된 제1조대(第一代)의 물음표가 무수히 따라다녔다.샤상저우(夏商周) 단대(斷代) 공사도 있었고, 이번 중화문명 탐사 사업도 있었다.다만 황제의 5천년 중화문명에 비하면 역사 소급은 훨씬 조용하고 내성적이었다.
앵커: 왕소장님 안녕.
게스트:안녕?
사회자: 몇 번째 중국 고고학소장인데?
게스트:나는 8대째다.
앵커: 제8대 소장.
앵커: 고고학 사업은 우리 바깥사람들에게 특히나 언론에는 비밀스러운 일이며, 언론과 대중의 시야에 들어온 것도 두 개의 큰 공사와 연관이 있을 수 있고, 하나는 하상주 단대 공사이고, 또 하나는 중화민족탐원공사인데, 이것은 우리가 아직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아.이 공정은 당신이 지금 맡고 있는 것이다.
게스트 : 네, 저희 탐원사업은 사실 하상주 단대공사 이후 국가적으로 지원되는 두 번째 대형 다학과의 종합연구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는데, 단대공사와는 많이 달라.
앵커: 교차하는 것도 있을 텐데, 시간이 비슷하지.
게스트 : 네, 하상주단대 프로젝트는 주로 연대를 연구하는데요, 우리는 당연히 연대를 기초로 하고 또 연대를 기초로 하여 방면을 연구해야 해. 왜냐하면 한 연대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도 연구해야 하고, 생산의 발전, 기후, 환경의 변화, 그리고 사회의 구조도 연구해야 해. 문명사회가 언제 형성되는지,
사회자 문명 자체에 대한 정의도 포함돼.
게스트: 문명의 정의, 문명의 상징이 무엇이고 문명사회에 어느 정도 들어가고 있는지, 그래서 역사의 고고학이라든가, 예를 들어 문학이라든가, 역사소설가, 여러 방면의 사람들이 개입하고 있다든가, 어쩌면 문명, 고대 문명의 기원, 발전, 나아가 쇠락이라는 과제가 이렇게 많은 학자들을 끌어들이거나, 이렇게 긴 세월 동안 관심을 끄는 과제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어.
해설1: 중화문명탐원사업은 중국사회과학원 고대문명연구센터가 주도해 2000년 시작됐다.2004년에는 4년에 걸친 사전연구를 바탕으로 탐사 1단계 연구 범위를 기원전 2500년부터 기원전 1500년까지 중원지역으로 확정했다.
게스트 : 왜 중원지역이 먼저인지 우리도 비판을 받았는데 중원중심론으로 다시 돌아가서 재탕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하지만 사실은 내가 아까 말씀드렸듯이 문명기원 연구는 아주 복잡하고 다방면에 걸쳐서 솔직히 말해서 장악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고, 중원지역에서는 첫번째로 고고학이 쌓은 시간이 길어서 1921년부터 발굴하고 고고학 문화야 고고학 발전의 단서기도 하고요.그리고 또 하나, 여름, 상, 서주 왕조의 중심지, 특히 고고학적으로 파악이 가능하고 그렇지 않으면 한번에 7천년, 8천년, 즉 다음의 연결고리를 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런 이유에서 첫번째는 중원지역이다.또 다른 연대의 범위는 우리가 여름과 여름 이전의 것으로 결정하였다.간, 그 후 기원전 250이 결정되었다.0년에서 기원전 1500년까지천 년, 천 년은 어떤 개념에 해당하는 것인가.하왕조이후의 상대의 초년은 앞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기본적으로 문헌전설에 나오는 요순우라는 시기다.
해설2 중화문명의 기원에 대한 소급은 오랫동안 거대한 자기장을 닮아 왔고 수많은 전문적이고 비전문적인 사람들을 감동시켰다.1899년 갑골문의 등장으로 옛사람들이 매듭짓고 기억하던 홍황시대가 완전히 막을 내렸다.1928년, 더 많은 갑골을 찾기 위해 시작된 은허 탐사는 10년 간의 고난을 딛고 거대한 상왕조의 모습을 기적처럼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게스트: 은허의 발굴로 인해 사마천의 《사기》의 《은본기》에서 이 왕의 세습이 이루어졌는데, 이 갑골문 출토과 거의 맞아떨어졌으므로, 은허 발굴이라던지, 갑골문의 발견이라던지 사기의 《은본기》가 믿을 만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마찬가지로, 이 사로에 의하면, 예를 들면 사골문의 발굴이라던지, 사마천의 《사기》보다 훨씬 앞서서 중국 왕조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해설 3: 20세기 중엽에 저명한 사학자 판원란 선생은 죽서기년(竹書紀年)의 전설과 사기의 기록에 근거하여 하대를 중국 역사상 최초의 왕조로 지정하였다.그러나 역사적 고증이 없어 하왕조의 존재 여부에 대한 학계의 의구심은 여전하다.1959년 중국고고연구소 서욱생 선생이 하남 언사 경내 낙수남안의 마을 2리마리의 남쪽에서 대형 고대 유적을 발견하여 이리두유적이라 명명하였다.
게스트: 이 2리 유적이 발견된 것은 첫째 400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의 유적지였고, 둘째로 여러 개의 궁궐이 발견되었고, 그 다음에는 높은 등급의 묘지, 최초의 청동용기, 심지어는 도로의 바퀴자국, 차를 이용한 흔적 등등 이 유적이 결코 일반적인 등급이 아님을 알 수 있어.
앵커: 일반 취락지가 아니어.
게스트 : 일반 취락지가 아니라 1차 규모가 커서 인구가 많고, 그 다음에 건축이랑, 고등급 무덤이랑 등등 아름다운 수공업 제품들이 모여있는데 사치품, 사치품, 이런 것들이 가능하면 도성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회자:왕소장님,이거하남 언사2리머리구.
게스트 : 이 궤짝은 유적 2리에서 출토된 것이다.
사회자:도기랑 청동기랑 옥기랑.옥석기
게스트: 중국이 지금 발견할 수 있는 연대기 최초의 청동용기다.용기
사회자:이거 유명한 그 터키석 그 팻말인데,두개 있는 것 같아.
게스트:지금까지 6점이 발견되었는데요,그것은 실제로 청동으로 되어있고,그리고 청동표면에 터키석이 박혀있는데,이곳은 구멍이 있고,코가 있어.
사회자:뭐 하나 꿰매주는 거겠지.
게스트 : 보통 사람의 가슴에서 출토되기 때문에 가슴에 꿰매진 옥기가 아닐까 생각해.
앵커:그건 수백개의 터키석이 박혀있을거야.각 조각마다 미리 디자인해서 만든대로 갈아놓았어.
게스트: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모서리가 있어.
앵커: 호가 나오는 곳, 안호 바깥 호가 잘 맞아야지.
게스트: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기본적으로 동물의 이미지인데 복잡도가 달라서 그게 가장 복잡해.
앵커:크기는?
게스트:크기는 비슷하지만 귀족 무덤에서만 출토돼.
해설4. 두리유적 중 풍부하고 정교한 토기, 옥기, 청동기 외에도 고고학자들이 대형 궁궐터를 발견하고, 이를 재빨리 하조와 연관짓고, 나아가서 바로 여기가 바로 전설적인 하왕조의 도성이라고 의심하고 있어?
게스트 : 원래는 이리두 유적이 모두 하,하대라고 생각되었는데, 상대보다 첫번째 도성이기 때문이다.
앵커: 언사님. 그 옆에 언사상성 유적이 멀지 않아.그것보다 훨씬 이르다.
게스트: 그리고 언사상성은 그 다음에 축성되었기 때문에 하대의 도성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이번 탐사원 공사의 연대학적인 연구를 통해 이 두리유적이 기원전 2000년에서 기원전 1500년, 1600년, 이렇게 사오백년이라는 인식이 흔들렸는데요, 이번 연대는 측정이야. 이리유적들의 연대가 기원전 1750년에서 기원전 1500년, 바로 서기 50년 전이라고 해.
앵커: 여름을 넘어 아침까지.
게스트: 맞아, 맞아. 그렇기 때문에 지금 2리지는 글자가 부족해서 아직 확신이 안들지만, 그 가능성이 가장 이른 도시라는 증거는 유적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어.
PART2:
해설 5: 현재 이리두에서 발견된 유적은 174곳. 이는 예년에 비해 세 배나 많은 양으로 지금까지 중국 최초의 궁성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더욱 고무적이다.총면적 10만㎡에 폭 10m에서 20m의 도로가 둘러싸고 있고, 성문에는 문루(門樓)가 있고, 그 안에 사합원(四合院) 구조의 궁궐건물들이 많이 세워져 있고, 동서상채(東西对称房)는 대칭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뜰이 앞뒤로 이어져 층을 이루며 들어서 있다.
게스트: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언사상성에서 내가 발굴을 했으니까요.이것들은 우리가 발굴을 해서 상대 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하왕조 때 이미 있었던 것들인데, 이 중축선들이야 좌우대칭도 있고, 앞과 뒤의 대칭도 있고, 안뜰도 있고, 이런 것들이 사실은 중국 고대의 궁중제도, 궁궐제도의 한 전형인데, 자금성,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중축선이 있으면 좌우대칭이 되고, 그 다음에.
사회자:마당에 많이 들어가서,밀어주고,맞추고,궁성,도성,황성,다층으로 둘러쌓여있어.
게스트 : 이런 게 하대 후반기엔 벌써 있었네. 우리는 생각한다.
사회자: 즉, 도성에 대한 이러한 건축이념과 한 가지 제도는 하왕조 후기에 이미 정해져 있고, 이후 역대 왕조가 계승해 온 것이다.
게스트: 맞아.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 이렇게 하왕조를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적어도 이리마리의 유적이 대표하고 있는 이 형태는 한 나라의 형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나라, 예를 들면 이 나라의 형태, 예를 들어 전설이나 문헌에 하의 중심지역, 그리고 그 연대는 상전에 여름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했어?
해설 6 《사기•샤모토기》를 다시 한번 훑어보니, 고고학자들은 이곳의 모든 것이 사마천의 서술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기원전 2070년 대우의 아들 계(啓)가 부업을 계승하여 세습왕조를 창업하고, 전후 470년에 걸쳐 중화 제1조 시대의 서적을 완성하였다.그 해의 흥망성쇠는 오늘날 우리가 출토하는 잘 알려지지 않은 귀중한 유물에서 그 해의 흔적을 희미하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앵커: 이게 헛간이야.
게스트:그 유적 2리에서 출토된 터키석 용이다.
앵커: 2004년, 내 '중국 종횡무진'이라는 프로그램이 처음 언론에 발표되었는데, 이 용은 2리 끝에 있는 그 궁전이다.
게스트 : 이리두 끝에 있는 하층 궁궐의 저 정원가에서는 몇 개의 무덤 중 한 곳에서 이것이 출토되었고, 그 정원에 있는 이 무덤은 보통 신분이 아닌 사람들이 그 궁전의 정원 옆에 묻었다고 해야 하는데, 출토될 때는 이 사람의 오른쪽, 상반신 옆에 놓여있어.
길이가 64cm, 64cm인 이 조각은 2000여 점의 터키석 조각에 박혀있다고 해서 세어쩌면 세어보셨을 겁니다.이건 머리, 머리로는 콧대, 코, 코는 녹송석, 안구는 옥으로 만든 건데, 이건 머리 모양, 그리고 이건 귀, 이쪽은 하나, 이쪽은 하나, 표현은 하나, 나는 콧수염이라던지, 아니면 앞발이라던지, 뭐 그런게, 머리는.이거.
사회자:이 옆에는 머리가 있을 거야.이 옆에는 뭔가 다른 게 있어.
게스트:무엇이 붙어 있나.
게스트:그리고 마름모꼴인 이걸 보세요,마름모꼴 장식이야.
앵커:바로 용갑이야.마름모꼴의 과거
게스트 : 평면이 아니라 부풀어 오른 것으로 보였는데, 이 가방을 포함해서 평면이 아닌 입체적인 느낌이 들었어.
게스트 : 공정이 복잡해서 궁성 남쪽의 녹송석 공방에서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해.
사회자:녹송석은 색깔이 너무 예뻐서 옥기보다 더 인기가 있었던 것 같아.
게스트 : 등급이 높아야 하대 이리두 머리일 때쯤이면 터키석은 등급이 가장 높은 물건이다.
해설 7: 용이 나타나 이리의 특별한 지위를 재확인시켰지만 이 두 마리의 유적이 샤 왕조가 있는 곳으로 확정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게스트: 이게 고고학의 특징이고 고고학이 가장 실증적인데 여름의 경우 이런 글자가 나오지 않는 한 확실한 증거라고 할 수 없어.그래서 우리가 꿈을 꾸는 것은, 언젠가 이 궁성의 어느 궁궐 안에서 발견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원이 발견한 것은, 산시의 주원이 주인의 고향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갑골문을 발견한 것이 궁궐의 어느 한 구석진 집에서 갑골이 나왔기 때문이다.주나라 때 갑골문이 나왔다.그래서 우리는 믿는다.
앵커:네,못 파냈어.
게스트: 예를 들면 하절기 같은 때는 문자가 있는 게 틀림없고 문자가 있는게 틀림없어.왜냐하면 하남 무양에 가호 유적이 있는데, 가호 유적은 지금으로부터 8천년 정도 전의 마을인데, 이 촌락 가운데에 우리가 묘장에서 발견한 거북이 등껍데기, 거북의 복갑, 바로 배에 새겨진 갑, 그 글귀를 새긴 것이 놀랍기 때문이다.상대의 갑골문자를 닮았다면, 이 갑골편, 예를 들어, 어느 유적이 나왔다고 하지 않으면 은허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말하듯이 8천년 전이야.
앵커: 은허보다 오륙천년이나 앞섰네.5천 년 전이야
게스트:그러니까 은허의 갑골문은 이제 굉장히 긴 발전이 있을 것 같은데요,그 문자는 상대말기에 상당히 발달했으니까,지금은 여름에 문자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실 문자의 기원이야.하지만 오늘은 좀 더 이른 문자를 발견할 단서가 없어.자호라는 문자를 제시해 주셨으면 좋겠어.좀 더 이른 시기의 의존에서 찾아봐야겠네요.구하러 가다.
트레일러 2: 호탕한 여름나들이 유적 2리 발굴에서 드러났다.샤 왕조의 존재는 이미 의심의 여지가 없다.사마천의 기록은 다시 한 번 현실의 기적과도 일치한다.그래서 역사는 피할 수 없이 진행되었고, 사람들은 《사기》에 나오는 상고 전설을 바라보며 어느 날, 요순우 시대에 진실이 인정되어, 선양, 치수의 전설들이 하상처럼 고고학 연구 분야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시작했어.
해설8: 상고전설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사기(史記)》에 따르면 요제가 재위할 때 황하수(黃江水)에 빈번히 걸려 치수임무가 덕재(德才)를 겸비한 우(大)에게 넘어갔고, 치수(治水) 과정에서 여러 신(神)들의 협조를 받아 세 번 집을 비운 뒤 집으로 들어오지 않아 곤란한 일을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오늘날의 황하의 제방에서는 아직도 그가 그 해의 웅장한 물 조각상을 볼 수 있고 만인의 존경을 받을 수 있을 정도다.
게스트: 문헌전설이 요순우 시절이구나, 홍수야, 그리고 이거 이렇게 적혀있는데, 우치수야, 집 세 번 지나고 안 들어오니 등등 이렇게 사실 중요한 게 뭐냐면, 요순우 시절에는 4300년에서 4000년 정도 걸렸지, 그 중에서도 실제로 황하천뿐 아니라 중국의 황하천에서 실제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야.이런 기후가 이상한 시기가 있다.예를 들어보면 하남신밀시에 있는 신新유적지, 신砦유적은 기원전 1800년경이라고 해. 그러니까 3800년경 우리는 하대초년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하대초기라고 하는 시기인데, 하대중기이기도 하고, 이리보다 조금 앞서서 이 유적은요, 예를 들어 쌍시강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하상이 25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데, 지금은 이 유적이 홍수로 범람한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됐어.이는 홍수가 25m까지 치솟아 당시 유적을 수몰시켰다는 징후다.
사회자:그럼, 고문 중간에 기록된 홍수가 났을 때 회산이 서로 인접해 있었다면, 방금 말씀드린 바로는 20여m 높이가 거의 회산이 서로 인접해 있는 것이다.
게스트:네,그래서 이건 고고학적 증거인데,
해설9: 요순우 시절의 진정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고고학자들은 신砦유적보다 훨씬 오래된 하남 등봉왕성강유적을 추가로 측량하였고, 유적 일원에서 전국시대 기와를 발견하였고, 그 위에는 '양성'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이 유적이 있는 지역이 전설의 '우도양성'과 흡사하다는 징후가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게스트: 70년대 발견되어서 다들 들떠있지만 성 면적만 보면 1만㎡에 100 곱하기란 어떤 개념인지, 2리 유적의 한 궁궐만한 크기야.너무 작다
사회자:이렇게 작은 곳에서 천하를 호령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아.
게스트 : 그럴 수 없어.이번 탐원사업에서 우리가 했던 것인데,이 유적이 얼마나 큰지,그 결과 중요한 발견은,만 미터짜리 성을 가진 도시가 단지 성 일부인 30만 평방미터의 큰 도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자:그럼 커.
게스트 : 그럼 중원지역은 굉장히 크겠네요, 근데 이건 지금 초보적인 작업이기 때문에 성안에도 흙을 다지고 있지만, 미처 하지 못했고, 적어도 연대는 이 신참보다 이른, 그러니까 하남 용산문화 말기에 해당되는 것인데, 연대는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인 2000년 경이었고, 규모도 그렇고, 위치가 양성에 있어서 우도 양성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사회자:고사 전설과 중간에 있는 이 우도 양성이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게스트:대단히 해봐.한 쌍 한 쌍을 이루다
해설10 사마천의 하에 대한 기록은 대우(大宇)에서 시작한다.요순우의 전설도 현실에서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산시성 양분도사 유적은 2리 유적 발굴에 더해 하나의 진실이었던 요순우시대를 탐구하고 깨우기 위해 고고학자들의 시야에 들어오게 돼.
PART3:
해설11: 1970년대 말 고사전설에 따르면 고고학자들은 요행사의 중심지인 산시성 남부를 목표로 하고 있다.이번 탐사까지 중과원 고고학연구소는 최근 몇 년간 양분도사 터에서 계획된 중점 타파를 진행했다.
게스트 : 도사 유적의 경우 우리가 발견한 성 두 개, 그리고 큰 성의 작은 성.
약 4300년 전 1000m 곱하기 580m, 58만 m², 높은 등급의 사람들이 거주하며 주변은 일반 귀족, 다른 곳은 일반 주민, 묘지는 성 밖에 세워졌다가 280만 m², 이것이 1800m 곱하기 1500m라는 도사의 평면적 안내도였다.성 한가운데서. 그리고 그 근처에는 창고, 대형 움이 모여 있는 지역이 있어.
앵커: 이 굴은 큰 성에 있는 굴인데, 큰 성에 있는 거고, 초기 묘지에 있는 거 옮겼어.초기 묘지는 거주지로 바뀌었다.생활 지역이나 다른 지역
게스트:거주할 것도 없고, 거주할 사람도 없고, 보통 이 일대에 거주하고, 그 다음에 묘지, 대성 때 묘지, 이 대형 묘지, 중소형 묘지, 이게 관상대야.
앵커:이것이 바로 타르산이다.
게스트 : 네, 이 일대는 아직 크게 발굴되지 않았지만 석기 반제품이 발견되었는데 석기 한 공방일 수도 있고, 일반 사람들이 거주할 수도 있어. 중기에는 고급귀족, 일반귀족, 일반주민, 그리고 창고지역, 묘지, 제사를 지내는 곳이 생산되는 곳일 수도 있어.
해설 12: 이런 의심스러운 작업장 주변에서 고고학팀은 지금까지 보기 드문 채화토기를 발견했다.이런 정교한 공예는 일반인의 사용기준이 아닌 것이 분명한데, 과연 이 영지의 주인은 누구일까?왕이냐, 장이냐? 한순간 판단하기 어렵다.발굴이 진척됨에 따라 무덤 속에서 이어지는 발견은 고고학 대원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게스트: 발굴 당시 우리는 1만 여명의 무덤을 발굴해서 1,000기, 1,000기의 대형 묘가 9기나 발굴되었는데요, 예를 들어 큰 무덤마다 용반이 하나씩 있었어. 예를 들어 직경 50, 60센티미터로 추정되는 용을 굴착하고, 용을 그려서 혀, 신자처럼 토해냈고, 대형 묘지마다 하나씩만 있고, 큰 무덤마다 단 한 개밖에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
앵커:나는 원래 하나뿐인 줄 알았는데 큰 무덤마다 하나씩 갖고 있어.
게스트:대묘당 하나씩
사회자:왕소장님,이것들은 모두 도사터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게스트 : 네, 도사 초기 묘지에서 출토됐어.이것처럼 어제 소개된 이른바 용반이라 불리는데, 아홉 개의 큰 무덤이 한 개의 무덤 중 한 점, 모두 이만한 크기야.
게스트:크기도 비슷하고 문양도 원반인 용인데 사실 우리가 얘기하는 용 모양과는 조금 달라.
앵커: 뱀이랑 좀 더 가까워.
게스트: 네, 왜냐하면 일반적인 묘장에서도 나온다면 다른 이야기지만, 큰 무덤에서만 나왔고, 또 한 묘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등급의 신원을 나타내는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앵커: 분명 일종의 신분표시일 뿐 아니라 상당히 높은 신분표시일 것이다.
게스트 : 네.
사회자:그리고 그 신분은 몇 대들 사이에서 비슷한 직책이었나봐.
게스트 : 아홉 기의 무덤은 동시기가 아니기 때문에 아버지도 계시고, 애비도 계시고, 손주님도 계시고, 아들뻘이 그런 전통이 있어.
사회자:내가 감히 짐작할지도 모르겠지만,그때 소위 용족의 휘장이란 걸까요?
게스트: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게스트 : 토기로 만든 이 모서리가 또 있는데, 아주 높아.각 무덤마다 한 점씩 있고, 또 이 돌도 있다.다, 돌로 만든 납작한 다, 두드릴 수 있는, 모서리와 다는 것이 달려있는 것은, 예를 들면 무슨 의식을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또 이것들은 큰 무덤에서만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 무덤의 주인이 그냥 보통 부자가 아니라 군사적인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돼.
해설13: 앉아서 토론할 때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을 면밀히 분석한다.이곳에서 출토된 도사 소성에는 많은 유군이 있었다권력의 상징이 되는 문화재는 도사 시절 이미 계급분화가 일어나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돼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그래서 한 번 더 생각해보면, 과연 거기에는 어떤 상황이 왔고, 왕의 존재는 있었을까?국가 개념은 이미 있는 것일까.고고학자 앞에 놓인 것은 여전히 커다란 물음표였다.
게스트: 280만㎡의 큰 도시라는 게 우리의 상상을 초월해.읽으면 남북 1800m, 동서 15다.폭 10여m에 달하는 대규모 성곽은 상당한 인력을 동원하고 오랜 기간 동안 쌓아야 한다.
사회자<EMJ_PHL>사회조직이 어느 정도 돼야 큰 공사를 할 수 있다는 거야.
게스트: 네, 그 자체가 권력강화를 보여주는 하나의 징표야.
해설14: 심층 발굴에서 고고학자들은 성벽의 다지기층을 분석, 검사했다.아주 빠르게, 그들은 바로 일치성을 얻었다.결론적으로, 이곳은 궁궐식 건물이어야 해.
게스트:이 궁전은 아주 정교하고 아름다워.유적에서 출토된 것을 발견했는데,물론이야.흙으로 칠한 벽이라, 흙으로 만든 표면을 오로지여러 가지 문식을 만들다.
사회자:벌써 장식이 있어.무늬가르네.
게스트:그리고 나서 흰 벽지를 발라서 하얀색으로 변하는 것,여러 가지 무늬 장식,그리고하나는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이고, 이것과는 물론이다건물 하나 하나가 다 파괴되어서 우리가 이 훼손된 절벽들을 보고 복원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이 건물, 바로 이 각화벽피와 함께 출토된 것으로 도자기로 만든 이 건축자재는 한 면은 거칠지만 한 면은 매우 매끄럽고, 문양도 있고, 장식도 있고, 이런 것들이 사실은 전국 진한 이후에 궁궐에서 많이 쓰였던 기와와 아주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사회자:진(秦)벽돌한와(漢瓦), 진(秦)벽돌한와(漢瓦)는 여러 해 전제가 되어야 한다고 해.
게스트: 맞아, 진, 벽돌, 한와, 예를 들면, 원래는 진, 한와, 벽돌, 종진이 있었어.기와를 대필한 것은 한대 때 시작해서 서주에 있다시기에는 기와가 많이 발견되었는데도 높은 등급의 규격이고, 상대에는 아주 소량의 징후가 발견되었지만 4100년 전에 기와가 발견되었다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고, 수량이 많고, 종류가 많다는 것은 나중에 기와로 장식된 것과 비슷한 구조물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들이 바로 그 당시 최고의 통치자였을 것이다.
해설15: 이런 결과는 고고학자들을 흥분시킨다.커다란 궁전에정교한 기와 조각과 함께, 그들은 더욱 높은 기대를 갖게 되었다.그러면 분명히 2리보다 앞서서 바로 요순의 도읍지였을까요?이들은 앞서 발견한 도문장과 신속하게 연락을 취했다.
도사 유적은 도기에 도문이 있고, 붓과 같은 것을 써서 그런 부호가 아니어.글씨가 아니라 필기체 같다.
앵커:토편 위에 머리글자가 있는 것 같은데 빨간색 물감으로 칠했어.
게스트:네,네,그리고 다른 두 글자가 있는데,그 중에 한 글자는 어떤 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해.능히 요라고 할 수 있는 자는, 어떤 학자들은 또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만나지만 문화의 문자는 갑골문자와 일목요연하며 기본적으로 일맥상통한다.
게스트:그게 바로 우리가 말하는 이 문화문자 있는 이 등주전자야. 삐딱하게 봐.그리고 나서.삐죽삐죽, 이 글자는요, 이 기호라든지자자야, 갑골문의 문자와, 금문을 포함한 문자는 똑같다.
사회자:그리고 이건 분명히 갈기나 털 같은 걸레로 쓴 게 분명해.여러 가지 그릇 중에서 패턴을 발견하는 것이 많을 것이다.단, 문자나 부호의 발견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게스트:더 적은 것,더 적었어.모두 무덤에 함께 묻혔지만, 유적지였기 때문이다.출토된 유적은 보통 비교적 산산조각이 나.이것도 사실 수십 조각으로 찢어진 다음에 우리가 백 개 이상의 천 조각 중에서 골라서 맞히고 복원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사회자:그 요라는 여기 없어.
게스트:요의 글자의 요, 요의 글자는 이것의 뒷면에 있어.
앵커: 뒷면, 이거 하나야.여기, 이쪽, 밑에.
게스트:근데,야오야,말하기 힘들지.윗부분은 둥글고 가운데는 가로로, 아래쪽은 둥글다.하나야.
앵커:누락이 너무 많고,누락이 너무 많아서 좀.
게스트 : 그래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어.
타운홀 3: 고서에 기재되어 있고, 상고 시대에는 요의 현명함이 눈에 띄기 때문에 그의 정원 안에 있다.예를 들면, 상서로운 식물이 많이 자란다.그 꼬투리는 계단 틈새로 자라서 매달 초하루에 열매를 맺기 시작하여 하루에 한 개씩 열다섯 개에 달한다고 한다.15년이 지난 후 매일 한 장씩 떨어진다.월말이 되면 콩꼬투리가 막 다 떨어져 나간다.보름달의 경우 29일만 지나면 마지막 콩꼬투리가 시들해져 신기하다.이에 제요는 그것을 달력본으로 삼고 전갱이라고 불렀어.만일 이 일기장이 실제로 존재하고 현재의 누군가에게 우연히 주워졌다면상고 시대의 모든 전설이 술술 풀렸다.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졌고, 도사를 떠나지 못한 채 도사의 잇단, 산발적인 발견 속에서 요순우 시대의 그림자를 찾아야만 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