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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장
더 이상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석숭이 준비해둔 마차를 타고 서둘러 감숙성으로 가야 한다.
"서북쪽으로 가면 마차가 있다, 서둘러라."
남궁세우의 외침과 함께 모든 대원들이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백산의 시체밖에 찾지 못했지만 방법이 없다.
"어떤가, 아우."
혹여 백산이 걸어서 그곳까지 오지 않았을까 해서 묻는 말이었다. 혼자 힘으로 걸어왔다면 심각한 부상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폭발 때문에 날린 겁니다."
그러나 남궁세우의 입에선 팽무도가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단순한 폭발의 충격으로 날렸다는 것이다.
남궁세우의 생각이 맞았다. 폭발의 순간에 갈태독의 무공과 미처 배출되지 못하고 백산의 몸속에 남아 있던 광혈지옥비의 기운이 동시에 몸을 보호했던 것이다.
천하제일의 기운이 동시에 백산을 보호했지만 완전할 수가 없었다. 몸의 외부만 보호했을 뿐이지 그 나머지는 어찌 되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사부님, 형님에게 비도가 없습니다."
"뭐라고?"
팽무도의 얼굴이 절망적으로 변했다. 천목환이 없다면 살아도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
몸을 치료할 기운을 끌어들이는 게 비도인데 그게 없다는 말이 아닌가. 더구나 천목환은 백산의 생명이다.
정상적인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천목환을 풀어내면 죽는다 하였다.
'하늘이 백산을 버리는 것인가.'
어떠한 내기(內氣)도 받아들일 수 없는 백산의 몸이다. 그의 몸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내공을 몸 안으로 밀어 넣어야 하는데 그마저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래도 일단은 간다.'
"서둘러라!"
미리부터 절망할 필요가 없다. 하는 데까지 해보고 가는 데까지 가봐야 한다. 며느리 둘이 죽고 손녀딸이 죽고 아버지 같았던 갈태독이 죽었다.
더 이상 두려울 게 무에 있으랴. 다섯 대의 마차가 세워져 있는 곳에 도착한 광풍대원들이 재빨리 마차에 올라타고 출발했다.
"이럇! 이럇!"
두두두두! 두두두두!
뿌연 흙먼지를 날리며 다섯 대의 마차가 무섭게 질주해나가기 시작했다.
"산아! 정신 차리거라!"
팽무도가 백산의 몸을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그의 몸에 내기를 주입해보려 했으나 한 치도 스며들지 못했다.
백산의 몸은 처참했다. 사지는 멀쩡하게 붙어 있지만 온몸 전체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화기에 의해 부풀어 올랐던 물집이 터지며 진물이 흘러나오고, 그 자리가 다시 부풀어 오르는 과정이 반복되고 있었다.
과거 초리하에서 백무천의 공격을 받았던 조천영과 같은 증상이었다. 폭발에 의해 생긴 열기가 몸속으로 침투하여 빠져나가질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보……. 눈을 감지, 왜 눈을 뜨고 있어요."
소운이 눈물을 흘리며 백산의 머리를 껴안았다.
전부 타버리고 머리카락 한 올 남지 않았다. 아니, 머리마저도 진물이 흘러내려 사람의 머리인가 싶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자신과 마지막 밤을 보낼 때 끝까지 눈을 뜨고 쳐다보라 하였는데 언니들의 죽음에서도 그랬던 것이다.
엄청난 화마가 몰려왔을 터인데 눈을 감지 않고 그녀들의 마지막을 지켜본 모양이었다. 그리고 붉게 변한 눈, 광혈지안이 발휘된 눈빛인데도 그는 일어서지 못하고 있다.
차라리 정신을 잃고 있더라도 일어나서 움직일 것이지…….
사라랑! 사라랑!
"이 바보야……. 일어나란 말이야, 언니들의 반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왜 일어나지 못해!"
처절한 고함소리가 흘러나왔다. 불끈 쥐고 있는 백산의 양손에서 들려오는 애명환 소리.
마지막 순간에 그녀들의 손을 잡았던 것이다. 서로의 손을 잡고 마지막을 같이하려 했던 것이다.
어쩌면 저 펴지지 않는 그의 두 손에 언니들의 마지막 흔적이 있을 것이다. 두 언니의 마지막 흔적을 손에 쥐고 있을 것이다.
"소운아……."
남궁세우가 소운을 불렀다. 그녀의 심정을 왜 모르겠는가. 남편의 생환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했지만 두 언니와 소령이 죽었다.
그리고 사부였던 갈태독도……. 어쩌면 이미 저승으로 간 언니들보다 더 힘든 사람이 소운인 것이다.
"사부님!"
백산을 관에 넣기 위해 뚜껑을 열던 소살우가 그 안에 있는 것을 꺼내들었다. 금의위들이 입는 황색의 옷이었다. 석숭이 준비한 것이었다.
"아우!"
팽무도가 난감한 표정으로 남궁세우를 쳐다보았다. 석숭과 같이 장성 밖으로 황제를 마중 나가기 위해서라면 금의위 복장이 필요했을 터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오직 광풍대원들만 있지 않은가. 더구나 황제까지 시해당한 현 상황에서는 더욱 위험한 물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소린가."
"석대인에게 시간을 벌어주어야겠지요. 우리야 어차피 쫓기는 입장이니……."
본의 아니게 나라를 위해 일을 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지금 석숭으로서는 가장 경계해야 할 세력이 담운천일 것이다.
그런데 광풍대원들이 움직임으로 해서 담운천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릴 터이고, 그 사이에 석숭은 황실을 정비할 시간을 벌게 되는 것이다.
처음 석숭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일이 그리 흘러가고 있었다. 자신들이 얼마나 버텨주느냐에 따라서 백산은 물론이고 나라의 운명까지 결정짓는 그런 상황이…….
"전부 옷을 갈아입어라."
"어르신, 제가 산이의 몸을 한번 보겠습니다."
"그래, 자네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
오구의 말에 팽무도가 반색을 했다. 일행 중 유일하게 백산과 같은 내공심법을 익히고 있는 사람이 바로 오구 아닌가.
"산이의 몸속에 있는 화기(火氣)를 뽑아내야 해."
팽무도의 말을 듣고 있던 오구가 자신의 내공을 끌어올려 백산의 명문혈을 통해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제발 들어가라, 제발……. 성공이닷!'
오구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잠시 자신의 기운을 막아서는 것 같던 기운이 어느 순간 사그라졌던 것이다.
"허억!"
그러나 희열의 표정도 잠시, 백산의 몸속을 관찰하던 오구가 격렬한 신음을 토해냈다. 백산의 몸으로부터 엄청난 열기가 자신의 장심을 타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나갈 곳을 찾지 못해 백산의 피부를 뚫고 조금씩 새어나가던 기운이 오구의 내공에 의해 외부의 길이 생기자 그곳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움직였던 것이다.
"내기를 밖으로 내보내라. 그러다간 네 몸이 견디질 못한다."
팽무도의 외침에 정신을 가다듬은 오구가 모든 혈도를 열어 몸 안에 들어찼던 열기를 배출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마차 안이 뜨거운 기운으로 가득 찼다. 엄청난 광경이었다. 어찌 인간의 몸에서 저런 열기가 나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뜨거움이었다.
단지 열기가 빠져나가는 통로만 제공하고 있는 오구의 몸에서도 물집이 생겨나고 있었다.
"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긴 한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나는 오구의 얼굴에 물기가 비쳤다.
'이 녀석아, 그 몸을 해 가지고 죽질 못하고 있더냐.'
의원이 아니라서 자세한 상태는 알지 못하지만 백산의 몸속에 있는 열기는 인간으로서 견딜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내공으로 온몸을 보호하고 있는 자신조차 견딜 수 없는 뜨거움이 아닌가. 그런 몸을 가지고도 녀석은 죽지 않았다.
아니, 죽질 못하고 있다.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기에, 그 일을 하고자 하는 열망이 백산의 죽음을 막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부님, 여기 약과 이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건…… 회혼속명단(回魂速命丹)? 고맙네, 석대인."
비단으로 된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환약을 보며 남궁세우가 감격의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백산에게 가장 필요한 게 바로 이것이었다.
한 알만 복용해도 십여 일을 견딜 수 있다는 약이 바로 회혼속명단이다.
주로 의식을 잃고 스스로 음식물 섭취가 불가능한 환자에게 복용시키는 환단으로, 황실 같은 곳이 아니면 구경도 할 수 없는 귀중한 약이었다.
황실에서도 황제나 태자 등 황족만 복용하는 희귀한 약일진대 주머니 가득 들어 있다는 것은 황궁에 있는 약을 전부 보냈다는 의미이리라.
지금 가지고 있는 분량이면 적어도 몇 년은 버틸 수 있는 분량이 아닌가. 그리고 금의위 영반임을 증명하는 영패. 자신의 모든 것을 마차에 두고 갔던 것이다.
"소운아."
남궁세우가 주머니를 소운에게 내밀었다. 원래는 물에 녹여 먹여야 하지만 지금 이곳은 흔들리는 마차 안이기에 소운이 해야 했다.
남궁세우에게서 약주머니를 받아든 소운이 그중 하나를 꺼내 입 안에 넣고 잘게 부쉈다.
'백랑! 제발 정신을 차리세요.'
부어터져서 진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님의 입술에 입맞춤을 했다. 자신의 타액과 섞여 있는 그것을 조금씩 입 안으로 흘려 넣었다.
까칠해진 님의 입 안을 자신의 타액으로 적셔야만 한다. 눈물이 얼굴로 떨어지고 있는데도 님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오직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분노한 붉은 눈동자만이 마차의 천장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부님, 왔습니다."
추격자들이었다. 아직 산동성도 벗어나지 못했는데 벌써 덜미를 잡히고 만 것이다.
"얼마나 되느냐."
"백여 명 정도입니다."
일휘의 보고에 팽무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추격자들의 수가 너무 적었던 까닭이었다. 결코 광풍대원들의 상대가 될 수 없는 자들이었다.
이쪽의 무위를 모르는 자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초리하에서 살아간 무림인들은 대부분 광풍대원들의 무공 정도를 알고 있었다.
더구나 백무천은 한 팔이 잘리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역시 제갈세가답군요."
"무슨 말인가."
"우리를 강호공적으로 만들기 위한 기초 작업이지요."
남궁세우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마도 광풍대원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 자들을 선발해서 보냈을 것이다.
적은 인원을 보내서 그들이 살해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리라.
물론 소문을 낼 인원까지 전부 준비해서 보냈을 것이다. 그들의 죽음을 빌미로 광풍대원들을 공적화하려는 수가 빤히 들여다보였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다. 더구나 지금은 한밤중. 광풍대원들의 살행이 살아남기 위한 행동이라는 걸 알아줄 강호인들이 없다는 것 또한 문제였다.
공연히 강호인들을 살해하고 다니는 악인들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공적이지 않나. 일휘야, 전부 죽여라!"
살기 띤 얼굴의 팽무도가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고 기회가 있을 때 쫓는 자의 숫자를 한 명이라도 줄이고자 하는 생각뿐이었다.
어차피 제갈세가의 세상이 되었다. 그들이 모든 것을 쥐고 있는 이상, 변명도 항변도 통하지 않는 세상인 게다. 과거의 백살대처럼…….
"저기 보이는 역(驛)에서 말이나 바꾸세."
네 마리의 말이 끌고 있는 사두마차였지만 말들이 점점 지쳐가고 있는지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져 있었다.
석숭이 주고 간 금의위 영반의 명패로 말을 바꾸는 작업이 한창일 때, 일휘와 광풍대원은 무서운 속도로 뒤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야압!"
백여 명의 인물을 향해 몸을 날린 광풍대원들에게서 차가운 고함소리가 터져나오며 사방으로 붉은 기운이 휩쓸었다.
걸릴 게 없었다. 순식간에 천무맹 인물들이 차디찬 바닥으로 몸을 뉘었다.
"이거 너무 약하잖아."
의아한 얼굴의 일휘가 석두를 쳐다보았다. 일도(一刀)도 받아내지 못하는 자들이 추격대로 왔다는 게 이상했다.
이 정도의 자들이라면 굳이 도망갈 필요도 없을 것 같았기에 하는 말이었다.
"신경 쓰지 마, 가자!"
석두도 천무맹의 의도를 눈치 채고 있었지만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모두들 지쳐 있는데 약한 자들이 옴으로 해서 몸을 회복할 시간이 생긴 것이다.
물론 공적이야 되겠지만 모든 전력을 비축하고 있으면 쉽게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미 천무맹과 천마맹을 겪어보았다. 그들은 결코 광풍대원들의 상대가 될 수 없는 자들이었다.
단지 문제가 되는 것은 광풍대원들이 얼마나 체력을 회복하느냐 하는 게 관건일 뿐이었다.
"출발하자, 이랴!"
말을 전부 교체한 마차가 다시 전방을 향해 쏜살같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후로도 대여섯 번의 공격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간단하게 처리했다. 결코 광풍대원들을 위협할 만한 수준의 인물들은 없었다.
다만 황색이었던 옷이 다시 붉게 물들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광풍대원들의 피해는 전무했다.
"누구지?"
마차를 몰던 남궁세우가 흠칫한 표정을 지었다. 저 멀리 관도 위에 있는 한 인물을 보았던 것이다.
자신들이 가고 있는 마차의 중앙에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네놈은?"
상대를 확인한 남궁세우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며 온몸에서 살기를 흘려대기 시작했다.
마차가 다가갈수록 선명하게 드러나는 얼굴, 잿빛 가사장삼을 걸치고 있는 요몽이었다.
오늘의 모든 사건의 원흉인 요몽이 무릎을 꿇고 마차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얼굴로 네놈이 나타났단 말이냐. 그 어린것을 죽이고 네놈에게 가장 잘해주었던 그 애들까지 죽이고 무슨 낯으로 우리를 찾았더란 말이냐."
남궁세우에게서 엄청난 고함이 터져나왔다. 저놈 때문에, 소림의 승려라는 저놈 때문에, 자신들의 모든 꿈이 사라져버리지 않았는가.
그랬던 놈이 이제는 무릎을 꿇고 자신들 앞에 있다. 죽여도 시원찮을 그놈이.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이미……. 크흐흐흑!"
일행을 쳐다보던 요몽이 오열을 토해냈다. 자신이 몸을 던져 구했던 소령이었다. 비록 정신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고 하지만 거의 죽었다 살아났었다.
그 때문에 정신을 차렸는데, 그 소령이가 자신의 품에서 숨져 있었다. 연약한 아이를 추위 속에 방치한 채 몸을 날렸기에 동사해버렸던 것이다.
모두 그자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아버지가 되는 그 사람.
완전하게 풀려났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풀어준 것이라 여겼는데, 아니었다. 이들을 노리기 위해서 풀어준 척했을 뿐이었다.
"어이하여…… 어이하여 이런 비극이……."
요몽의 말을 듣고 있던 남궁세우가 한탄을 했다. 자신들보다 더한 처지에 있었던 사람이 요몽 스님이었다.
평생을 아버지란 인간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도구.
차라리 죽는 삶이 더 편할진대, 아버지의 옆에 있으면 죽을 자유조차도 얻지 못하는 사람이 그였다. 무엇을 위해 얼마나 더 영광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것을 전해주기 위해 기다렸습니다."
"아니, 천목환?"
놀랍게도 벽하곡에서 백산이 던져버린 천목환을 가지고 사라졌던 사람이 요몽이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아버지인 각인대사와 담운천이 절실하게 원하는 물건임을 알았고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다.
악마 같은 두 사람을 파멸시킬 수 있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물건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제갈수연의 뒤를 따랐다. 우연이었는지 모르지만 백산이 던진 그것들이 자신의 앞에 떨어졌고 곧바로 주워들고 몸을 날렸다.
제갈수연이 천목환을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였다.
"출발한다!"
요몽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남궁세우에게서 출발명령이 떨어졌다. 요몽도 피해자일 뿐이었다. 그를 죽인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싶었다.
그도 한으로만 뭉쳐진 사람인걸. 단지 인간의 야망이 만들어낸 희생자.
"왜 그냥 가시오니까! 저를 죽여주십시오! 저를 벌하란 말입니다!"
떠나가는 마차를 향해 울부짖었으나 누구 하나 돌아보지 않는다.
저들의 손에 죽어서 터질 듯한 분노를 조금이라도 삭이길 바랐으나 오히려 자신을 불쌍하게 여길 뿐이다.
"어쩌라고……. 날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꿈이길…….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 아니길 바랐지만 멀어지는 마차는 너무 선명하게 눈에 밟혔다.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낸 비극인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부디 부처님의 가호가…… 크윽!"
눈물을 흘리며 떠나는 일행을 향해 합장을 해 보인 요몽이 자신의 뒷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헤헤헤! 소령아, 나랑 같이 극락으로 가자. 소령아…… 소령아……."
자신의 뇌해혈을 완전하게 파괴하여 과거로 다시 돌아가는 게 그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완전한 백치 상태로 돌아갔지만 단 한 마디는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령이의 극락왕생.
어두운 현실에서 도망치는 방법이었고, 과거의 행복을 다시 되찾는 방법이었다.
한편.
요몽이 다시 과거로 돌아간 것을 알지 못하는 팽무도 일행은 백산에게 천목환을 채우고 그에게서 나타날 변화만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비가 붉게 변한 것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놈아! 안 깨어나는 거냐, 못 깨어나는 거냐."
팽무도가 백산의 가슴을 쳐대며 소리를 질렀다. 붉은 비도와 붉은 눈. 이미 백산의 상태는 광혈지안에 접어들었던 것이다.
천비가 피를 먹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마물(魔物)이 되어버렸다.
"세상을 없애버려도 좋으니 깨어나란 말이다."
"깨어나지 않는 거예요. 스스로 의식을 닫아버렸어요."
소운이 흐느끼며 팽무도를 쳐다보았다. 백산의 몸 상태는 조금씩 정상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 곳, 그의 머릿속만은 죽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막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방법으로 하는지 알 순 없지만 갈태독의 말에 의하면 가능하다 하였다. 무공에 의한 것이 아니기에, 스스로 깨어나지도 못한다.
단 한 가지, 무의식 상태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의지가 발현되어야 한다는데 그 계기가 문제였다.
어쩌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상태가 지금의 백산인 것이다.
"바보 같은 자식, 자신도 통제하지 못하는 놈이 누구를 지킨단 말이냐. 그깟 광혈지안이 뭐라고. 내 피라도 줄 테니 깨어나란 말이다."
"형님!"
백산의 팔목에서 붉은빛을 발하는 천비를 꺼내 자신의 심장을 찔러가는 팽무도의 행동을 말리며 남궁세우가 소리를 질렀다.
"기다려야 합니다. 산이가 자신을 이기고,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저 많은 놈들을 전부 어쩌란 말인가."
"와! 와아! 묵안혈마를 잡아라! 백살마대의 후예들이다!"
팽무도가 가리키는 곳에는 어느새 저리도 많아졌는지 수백의 무인들이 마차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몸에선 한결같이 진득할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수백의 죄 없는 무림인들을 살해한 묵안혈마 일당. 더욱 경악할 사실은 과거 오십 년 전의 강호제일 공적이었던 백살마대의 대주와 부대주의 제자들이라는 말이었다.
이미 제거되었다 여겼던 그들이 지금껏 살아 있었고 강호에 복수하기 위해 제자를 키웠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중원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더구나 벌써 수백 명의 무인들이 그들의 손에 의해서 죽어나가지 않았던가.
"이미 공적으로 선포된 게지요."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일이었기에 별반 새로울 것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공적선포만이 아니었다.
묵안혈마 일당을 잡는 무림인에게는 새로이 창설되는 제천맹(諸天盟)이란 단체의 중요자리가 보장된다는 공표가 있었던 것이다.
제천맹.
천무맹과 천마맹 양맹의 잔여인원을 합쳐서 새롭게 탄생한 단체로 맹주로는 제천신뇌 제갈수연이,
부맹주로는 정천무룡 백무천과 철마 지청인이 등극함으로써 새로운 무림질서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새롭게 창설된 단체라 많은 인재들이 필요하게 되었고, 묵안혈마 일당을 잡는 자로 국한시켜 인재를 선발한다고 하였다.
더구나 공적으로 선포된 자들이 황실의 금의위를 사칭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아서 완전한 표적이 되어버렸다.
황제가 살아 있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 명나라 황실은 권력을 잡기 위한 암투 때문에 민생치안에는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중앙 관리들과 각성에 있는 벼슬아치들 또한 다음 대의 황제가 누구일 것인가에 대해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터라
수백의 무인들이 떼거리로 몰려다니고 있음에도 누구 하나 눈길을 주지 않았다. 오랑캐의 침입만 아니라면 무림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으악! 커억!"
발 빠른 자들은 벌써 마차 근처까지 추격해왔는지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리도 시작하세."
팽무도와 남궁세우도 자신들의 검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언제까지 계속해야 할지 기약할 수 없지만 끝까지 가야만 한다.
마차를 몰고 있는 네 사람을 제외하곤 광풍대원을 비롯한 무욕인들까지 전부 나서서 마차를 향해 달려드는 적을 향해 도검을 휘둘렀다.
이미 피에 젖어 있던 금의가 다시 붉게 물들었고, 그들의 몸에서 떨어진 핏물이 마차 바닥을 적셔가기 시작했다.
"크아앙!"
"으아악! 적이다!"
마차 부근에서 한참 혈전을 벌이고 있던 그들의 귓가에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괴성이 들려오며 쫓아오던 무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광풍대원들의 눈에 엄청난 광경이 목격되었다.
다섯 명 정도 되어 보이는 괴인들이 마차를 향해 다가오면서 앞을 가로막는 무림인들을 무차별하게 격살해버리는 것이었다.
"형님!"
"그들이구먼……."
팽무도와 남궁세우의 얼굴이 침중하게 굳어졌다.
과거 자신들을 대주와 부대주라 불렀던 부하들, 오대세가의 후예들이 강시로 변해서 마차를 쫓아오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강시들의 출현으로 해서 뒤쫓던 무림인들이 한순간 주춤하며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의 오백 장 근처에서 달려오던 무림인들의 모습이 지금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가세! 우리의 형제들인데 직접 해결해야지. 계속 가거라. 뒤쫓아가마."
광풍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린 팽무도와 남궁세우가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말았다. 아버지와 형제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던 저들인데, 이번에는 대주와 부대주로 모시던 사람에 의해 다시 한 번 죽어야 한다.
무슨 운명을 타고났기에, 전생에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기에 이리 되었는지……. 그저 한스러울 뿐이었다.
"너희들은?"
"빨리 끝내고 가야지요."
의아한 눈으로 자신들을 쳐다보는 팽무도를 향해 장한수와 일휘, 그리고 석두가 다가왔다.
팽무도나 남궁세우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지금은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이 없기에 나선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처리하고 떠나야 하기에.
"좋다. 가장 빠른 방법으로 치고 간다. 일단 약점이 있는지 한번 찾아보고."
"크아앙!"
무서운 속도로 질주해오는 다섯 마리의 사혈마강시를 향해 동시에 뛰어들었다.
"혈극참!"
"섬전쾌!"
다섯 사람의 입에서 우렁찬 고함소리가 터지며 붉은 기운이 전방을 향해 몰아쳤다.
그러나.
카앙! 캉!
풍신개의 정보가 전혀 틀린 게 없었다. 검강, 도강을 이용한 공격이었음에도 강시들의 몸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단지 그들의 옷자락만 찢겨져 허공에 날릴 뿐이었다.
강시들의 약점을 찾기 위해 계속적으로 공격을 해보지만 검강지기에 의해서는 결코 잘리거나 하지 않았다.
지금 이곳에 와 있는 자들이 가장 약한 자들일 터인데, 이들의 약점조차 알아내지 못한다면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최선을 다했다.
"커엉!"
이성이란 게 없는 강시들임에도 도강과 검강에 의해 충격을 받았는지 괴이한 고함을 지르며 일행을 향해 돌진해들었다.
그러나 무작정 다가서는 게 아니었다. 과거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무공을 그대로 구사하며 달려드는 것이었다.
금강불괴의 몸을 가진 절정고수라 할 수 있었다. 몸놀림도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사혈마강시의 무서움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이야합!
일휘의 입에서 거친 고함이 터져나오고 붉은 혈운에 감싸인 그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검을 피하고 더 가까이 근접하여 강기에 휩싸인 발과 주먹을 강시의 온몸에다 박아 넣었다.
혈도부터 시작하여 온몸 구석구석에 강기가 실린 주먹을 먹였으나 전혀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다. 오히려 더욱 포악하게 달려들 뿐이었다.
"좋다, 탄(彈)에도 견디나 보자."
표정을 굳힌 일휘가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검을 피하며 위에서 아래로 힘차게 도를 휘둘렀다.
"카아악!"
"빌어먹을……."
일휘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흘러나왔다. 도강보다 한 단계 높은 탄의 경지에 의해 잘리기는 했지만 그 반탄력이 엄청났던 것이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야 쉽게 잘라낼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나머지 광풍대원들에게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쉴 틈 없이 움직이고 있는데 이런 강시의 공격까지 받게 되면 버텨낼 수 있을지 그게 걱정이었다.
더구나 이런 자들이 팔십 명이라 하였다. 광풍대원들과 비슷하거나 더 강한 자들이 아닌가.
"이 괴물 같은 것들이."
순간적으로 화가 난 일휘가 강시의 몸을 향해 도를 날려버렸다.
"가자!"
팽무도나 남궁세우의 심정도 일휘와 별반 다를 게 없는지 더욱 굳어진 표정으로 몸을 날렸다.
"결국 흩어져야 하는가."
강시 때문이었다. 강시들이야 무리를 해서라도 한꺼번에 해치울 수 있겠지만 무림인들의 추격이 끝나갈 무렵에 등장한다면 그때는 결코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추격자들을 분리시키는 게 더 유리할 성싶었다.
'아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야 한다. 개방이나 석대인에게서 소식이 올 거다.'
믿는 건 그들밖에 없었다.
개방은 몰라도, 석숭에게는 반드시 소식이 올 거라 여겼다. 지금의 상황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석숭이기에 무슨 조치를 취해놓았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차에 도착하니 개방으로부터 소식이 들어와 있었다. 섬서성의 한 성에 자신들이 타고 있는 마차와 똑같은 마차 서른 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석숭도 흩어지라는 말인 것이다. 지금 상태로는 적을 상대하기 힘들다는 판단을 한 것이리라.
"이쪽으로 와봐라."
일휘와 석두, 그리고 소살우를 마차로 불러들인 남궁세우가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먼저 남쪽인 복건성은 석두, 운남 쪽으로는 일휘, 황제의 군대가 오고 있는 달탄으로는 팽무도가, 그리고 자신은 감숙성으로 길을 잡는다는 것이다.
아마 적들이 노리는 곳은 감숙성과 달탄으로 가는 자신들이 될 터이고, 나머지 광풍대원들은 더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저는 어디로 갑니까."
자신만 갈 곳을 말해주지 않자 소살우가 남궁세우를 쳐다보며 물었다
첫댓글 잘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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