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뜰 무렵 밀밭에서 수확하는 사람
1889년 9월 초, 캔버스에 유채
테오에게...
나날이 기력이 회복되고 있어서, 이제는 힘이 넘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젤 앞에서 작업을 열심히 하기 위해 헤라클레스가 될 필요는 없겠지.
이 편지는 그림을 그리다 지쳐서 쉬는 틈틈이 조금씩 쓰고 있다. 그림은 아주 잘 진행되고 있다. 요즘은 아프기 며칠 전에 시작한 그림 '수확하는 사람'을 완성하느라 전력을 다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노란색을 띠는 이 그림은 아주 두껍게 칠했는데, 소재는 아름답고 단순하다. 수확하느라 뙤약볕에서 온 힘을 다해 일하고 있는 흐릿한 인물에서 나는 죽음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그건 그가 베어들이는 말이 바로 인류인지도 모른다는 의미에서다. 그러므로 전에 그렸던 '씨 뿌리는 사람'과는 반대되는 그림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죽음 속에 슬픔은 없다. 태양이 모든 것을 순수한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환한 대낮에 발생한 죽음 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지낸다. 지금 그리는 그림은 중간에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새 캔버스에 한번 더 그릴 생각이다. 아, 나는 다시 새로운 광명의 마력에 홀린 것 같다.
이곳에서 앞으로 몇 달 더 지낼지, 다른 곳으로 옮길지 잘 모르겠다. 발작이 일어난다면 웃어넘길 일이 아닌데다가 오랜 기간 지속될 수도 있기 때문에 너나 다른 사람 입장에서 보면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다.
사랑하는 동생아, 지금도 그림을 그리다 다시 너에게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무엇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림을 그리고 있다. 과거 어느 때보다 작업에 대한 열의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이 회복을 도와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들라크루아는 "난 이도 다 빠져버리고 숨도 제대로 못 쉴 때가 되어서야 그림을 발견했다"고 말했는데, 어쩌면 그 연장선상에 있는 어떤 일이 나에게도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내 슬픈 병도 아주 느리긴 하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쉼없이 열의를 갖고 작업하게 해주거든. 어쩌면 천천히 오래 일한다는 게 숨은 열쇠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그것에 대해 뭘 알겠니? 단지 그리 나쁘지 않은 한두 점의 그림을 진행중이니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하나는 노란색 밀을 수확하는 농부의 그림이고, 또 하나는 20인전에 낼 환한 배경의 초상화다. 물론 20인전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그때까지 나를 기억하고 있다면 말이다. 사실 나 자신은 어떻게 되든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나에 대한 걸 다 잊어버리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지.
요즘은 내가 아프기 때문에 너무 괴로워해서는 안 된다고, 그리고 화가라는 초라한 직업을 흔들림 없이 유지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건강을 위해 정신병원에 좀더 머물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피가로>에서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그도 가끔 끔찍한 발작을 유발하던 신경질환으로 고통받았는데, 그 때문에 결국은 슬프게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어떻게 하겠니? 치료할 방법이 없는데.
편지가 너무 길어지는구나. 결국 이 모든 일이 지나고 나서 생각하는 것이지만, 파리에 있을 때의 어중간한 상태보다는 이렇게 확실하게 아픈 쪽이 더 나은 것 같다. 너도 이곳에서 막 완성한 환한 바탕의 자화상을 옆에 두고 본다면, 그때보다 지금이 더 건강해 보인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나는 훨씬 더 건강해졌다.
드디어 '수확하는 사람'이 끝났다. 이 그림은 네가 집에 보관할 그림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자연에 대한 위대한 책처럼 이 그림도 죽음의 이미지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내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이제 막 미소를 지으려는 순간'이다. 보라색 선으로 그려진 언덕 외에는 모두 창백한 노란색이거나 황금빛을 띤 노란색이다. 병실 철창을 통해 내다본 풍경이 그렇다는 게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 희망이 뭔지 아니? 가정이 너에게 의미하는 것이, 나에게 흙, 풀, 노란 밀, 농부 등 저연이 갖는 의미와 같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너에게 가정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할 이유가 될 뿐 아니라, 필요할 때는 너를 위로하고 회복시켜 주는 것이기를 바란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탁하는데, 너무 일에 찌들지 말고 너 자신을 돌봐라. 너희 부부 모두 말이다. 아마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1889년 9월 5일 ~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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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뜰 무렵 밀밭에서 수확하는 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