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구, 현대차그룹 사옥 앞 농성장 수차례 철거하려다 못하고 방치…
주민 불편 민원 매달 100여건 쇄도…뒤늦게 물품 등 압수, 전격 철거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이민경
서울 서초구 현대차그룹 사옥 앞에 설치된 불법 농성 천막이 10년 만에 철거됐다. 서초구청은 지난 15일 행정대집행으로 현대차그룹 앞 불법 천막을 철거했다고 21일 밝혔다. 10년 동안 구청은 수차례 철거를 시도했지만, 바로 재설치되거나 실패했다. 하지만 이번엔 천막과 관련 물품을 모두 압수했고, 기습 설치를 막기 위한 야간 기동반을 편성했다고 한다. 10년 만에야 천막이 철거되면서 “그동안 공권력이 불법에 지나치게 관대했던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현대차그룹 사옥 앞에는 지난 2013년 10월부터 천막이 설치돼 있었다. 박모(62)씨는 기아 판매 대리점 대표와의 갈등으로 용역 계약이 해지됐는데, 박씨는 기아 측에 자신을 복직시켜 달라고 주장하며 천막을 설치했다. 이번 행정대집행은 지난 15일 오후 3시에 시행됐다. 서초구청 공무원들은 인도 위 천막 고정 핀을 뽑아내고, 내부 집기를 들어냈다. 이날 천막 2개, 현수막 19개는 물론 위험 물품인 휘발유, 부탄가스가 압수됐다. 박씨와 그를 지지하는 관계자들은 지난 20일 오후 10시쯤 간이 텐트를 기습 설치하려 했다가 서초구 직원들에게 적발돼 무산됐다고 한다.
지난 2013년 10월부터 서울 서초구 현대차그룹 사옥 앞에 설치돼 있었던 불법 천막. 박모(62)씨는 기아 대리점과의 용역 계약이 해지되자 기아차 측에 자신을 복직시켜 달라며 천막을 설치했다. 지난 15일 서초구가 행정대집행으로 이 천막을 철거하기까지 10년 가까이 걸렸다. /독자 제공
서초구청이 불법 천막을 10년 만에 철거한 건 주민 피해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박씨는 천막 농성을 하면서 집회 신고를 했다고 한다. 신고 시간 동안엔 현대차 사옥 앞 점용 허가를 받은 셈인데, 서초구청은 신고된 경우라도 현장에 참석자가 한 명이라도 없으면 실제 집회로 볼 수 없다는 법원 판례를 참고해 이번 철거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집회 신고를 해놨지만 박씨는 현장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사실상 집회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간 점유도 안 된다는 취지다. 불법 천막 관련 인근 주민 민원만 한 달에 100건 이상 접수됐다고 한다. 구청 관계자는 “표현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무고한 시민에게 피해를 줘선 안 된다”며 “눈과 귀를 막고 살아온 시민의 입장에서 조치를 하게 됐다”고 했다.
대기업 앞에서 장기 농성을 벌이는 건 이곳만이 아니다.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는 매일 장송곡 릴레이 집회가 열리고 있다. 10여 년째 이어진 이 집회는 승합차에 부착된 앰프를 통해 장송곡을 틀면서, 현수막을 펼쳐 놓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수차례 집회 주체가 바뀌었는데, 올해 3월부터는 삼성의료원과 의료분쟁 중인 A씨가 집회를 하고 있다. 이번 달 초 “딸아이가 농성장 인근 유치원에 다니는데, 장송곡을 흥얼거리는 것을 보고 심장이 내려앉았다”며 “불법 집회를 당장 막아 달라”는 민원이 인근 주민으로부터 접수됐다고 한다.
서초구 하이트진로 사옥 앞에서도 10년 가까이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하이트진로에서 부당 영업 행위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B씨는 인도에 트럭을 대고 현수막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집회를 해왔다. 서초구 관계자는 “B씨가 인도에 주차한 트럭의 바퀴 아래에 돌을 괴어놓고, 주민들의 인도 통행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에 불법의 소지가 있다”고 했다. 서초구는 현대차 사옥 앞과 마찬가지로 다른 불법 농성장도 철거에 착수할 계획이다.
서울 종로구 KT 사옥 앞에서는 부당 해고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C씨가 수년간 현수막을 내걸고 노숙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2010년 쇠사슬을 들고 상급자를 폭행해 회사에서 해고됐는데, 10여 차례 소송에서 모두 패소했지만 농성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집회 장소 천막 설치는 집회가 이뤄지고 있는 기간과 장소에서만 허용해야 한다고 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천막을 집회 중 일시적으로 설치하는 게 아니라 1년, 10년 장기간 둔다면 집회의 본래 목적과는 무관하다고 볼 여지가 있고, 계속 두기 위해서는 별도의 허가가 필요하다”며 “불법이 당연시되면 법의 의미가 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적극적인 조처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