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인 1991년 ''Set Adrift On Memory Bliss''라는 곡으로 팝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형제 랩 듀오 피엠 돈(P. M. Dawn)이 10여년 만에 베스트 앨범을 발표했다. 멜로딕 팝과 랩이 퓨전된 혁신적인 랩 스타일을 창안해낸 피엠 돈은 비평과 흥행에서 모두 박수를 받은 몇 안 되는 랩 그룹이다. 이번 베스트 음반은 그간 발표했던 4장의 앨범과 1장의 사운드트랙에서 배출된 히트곡을 모아 놓은 것.
피엠 돈의 음악에는 천상의 느낌이 있다. 어떠한 음악이든 각기 고유의 분위기를 갖고 있으며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여기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한다. 가령, 어떤 이들은 <시네마천국>의 ''Love Theme''을 듣기만 하면 눈물을 흘리고 신파에 젖는다. 라디오헤드를 들으며 지독한 우울증을 앓기도 하고, 아바를 들을 때는 ''댄싱 퀸''이 된다. 그래서 그러한 반응을 체험한 이들은 그 ''효능''을 또 한번 맛보기 위해 다시금 그 때 그 음악을 찾아 듣는다.
그 중에서도 피엠 돈의 음악은 꽤 특별하다. 이들의 음악은 현실 인식을 투철하게 심어주거나 또 뭐 그리 가슴 서늘한 울림을 주는 음악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편에 있다. 현실을 잊게 만들고 다른 세상으로 인도하는 음악이다. 마치 신나는 해변 파티에서 정우성이 전지현에게만 ''Reality''를 틀어주는 모 CF 장면처럼. 그 때문에 그들의 음악을 듣노라면 어느덧 일상과 상념은 모두 사라지고 무아지경에 빠진다. 그림으로 치자면 풍경화나 초상화가 아니라 초현실주의 회화 정도?
이 랩 듀오의 음악은 한번 맛을 들이면 마치 마약에 빠진 것처럼 그 음악을 찾지 않으면 못 배기게 만드는 중독성을 지닌다. 그 이유는 독특한 음악 스타일에서 찾을 수 있다. 피엠 돈은 랩 그룹이지만 단순히 랩만을 쏟아내지 않는다. 이들의 랩 음악에는 부드럽고 달콤한 멜로디와 여러 겹 층이 진 것 같은 영묘한 사운드 질감이 수반된다. 이 점이 당시까지 거친 랩을 토해내던 이스트코스트 랩 그룹들과 가장 대별되는 점이다.
게다가 사이키델리아와 트립 합과도 연관이 있어 몽롱한 환각의 느낌마저 전한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곡이 불후의 명곡 ''Set Adrift On Memory Bliss''이다. 이러한 점들이 랩 마니아들보다 팝 팬들을 더욱 매료시켰으며, 이들의 곡은 여러 형태로 리믹스되어 댄스 플로어를 뜨겁게 달궜다. 음악 사이트 <올 뮤직 가이드>는 혁신적인 도회풍(urban) R&B를 창조해내며 힙 합과 매끄러운 ''70년대 소울 사이를 걸치고있는 그룹이라 설명하고 있다. 이와 함께 피엠 돈 사운드의 핵심을 이루는 다른 하나가 샘플링이다.
최근 들어 다른 뮤지션의 음악, 연주 또는 음성 등을 모방하는 샘플링 기법은 일반화되었다. 샘플링이란 각종 테크놀로지를 이용해서 과거의 음악을 믹스하고 콜라주해서 새로운 음악을 창조하는 장치를 말한다. 샘플링의 역사는 1987년 마스(M/A/R/R/S)의 ''Pump Up The Volume''이 영국 차트 1위의 스매시 히트를 기록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1986년 먼저 런 디엠시(RunD.M.C.)가 에어로스미스의 곡을 차용한 ''Walk This Way''을 발표했지만 그건 거의 리메이크 수준이었기 때문에 논외로 했다.
그런데 그저 무작정 남의 곡을 끌어다 쓴다 해서 모두 샘플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작가의 이데올로기와 창조성의 문제, 표현의 적법성 등 제반사항이 고려되어야만 비로소 진정성을 얻기 때문이다. 일례로, 영국 일렉트로니카 듀오 케이엘에프(KLF)는 여러 유명 뮤지션들의 곡들을 무차별 샘플링했는데, 이는 ''저작권 해방 전선''을 뜻하는 그룹명답게 기존 ''음악 산업의 전복''이라는 투철한 좌파적 신념이 투영된 것이었다.
앞서의 마스, 케이엘에프 그리고 드 라 소울(De La Soul) 같은 선각자들에 의해 정착된 샘플링 기법은 이후 랩과 힙 합, 록, 팝 등 다양한 분파에 걸쳐 골고루 영향을 미쳤다. 그들의 뒤를 잇는 샘플링의 대가가 바로 피엠 돈이다. 데뷔 때부터 줄곧 재즈, 소울,록,팝 등 여러 음악들을 가져다 샘플링 명곡을 주조해냄으로써 샘플링은 그들의 전매특허가 되었다. 차이가 있다면, 선배 뮤지션들이 다소 이념적인 측면을 실천하기 위해 샘플링을 했다면 피엠 돈은 무엇보다도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음악적 풍부함과 다양성을 위해 시도했다는 것 정도.
이번 베스트 음반에도 이들의 빛나는 샘플링 보석들이 여럿 수록되어 있다. <빌보드> 차트 싱글, R&B, 댄스 부문에서 모조리 1위를 휩쓴 ''Set Adrift On Memory Bliss''가 영국 뉴 웨이브 그룹 스팬다우 발레(Spandau Ballet)의 1983년도 히트곡 ''True''를 샘플링했다는 것쯤은 팝 상식으로 기억해 둘 만 하다. 2집의 히트곡 ''Looking Through Patient Eyes''는 조지 마이클의 ''Father Figure''를, ''The Ways Of The Wind''는 조니 미첼의 곡을 각각 차용한 것이다.
그 외에 데뷔 싱글 ''A Watcher''s Point Of View''부터 영화 <부메랑>에 삽입되기도 한 발라드 ''I''d Die Without You'', 프린스의 창법을 모방한 팝 넘버 ''Being So Not For You (I Had No Right)'' ''Faith In You'', 그리고 가장 최근 앨범인 4집 [Jesus Wept]에 수록된 ''Downtown Venus''까지 피엠 돈 음악의 정수만을 엄선해 수록해놓았다.
피엠 돈은 프린스 비(Prince Be), 디제이 미니트믹스(DJ Minutemix)의 두 형제로 이루어진 랩 그룹이다. 어릴 적 양부모에게 입양된 아픈 기억을 갖고 있지만 양아버지가 ''70년대 전설적인 흑인 펑크(funk) 그룹 쿨 앤 더 갱의 멤버였던 덕에 어려서부터 음악적 소양을 쌓을 수 있었다. 1989년 ''가장 어두운 시간에 빛이 나온다''는 뜻의 이름으로 팀을 결성한 이들은 2년 뒤 데뷔 앨범을 냈다.
퓨전 랩 스타 일과 놀라운 샘플링 실력으로 비평적 찬사를 받으며 이 듀오는 이후 1998년까지 총 4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했고 작년 여름 미국에서 이 베스트 앨범을 출시했다. 뒤늦게 국내에 발매되는 본작은 ''90년대를 수놓았던 피엠 돈의 자취를 더듬을 수 있는 소중한 음반이다. 마돈나의 앨범 제목을 빌자면, 피엠 돈의 ''완전무결한 모음집(Immaculate Collection)''이다. 요즘 같이 더운 여름날 피엠 돈이 안내하는 환상의 세계에 동참하는 것도 좋은 피서방법이 될 듯하다.
첫댓글 와~ 길다. ㅋㅋ 조지 마이클 얘기 중간에 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