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삼백일흔여섯 번째
이어령의 ‘메멘토 모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 우리는 무엇을 떠올리게 될까? “엄마, 바다라고 하는 건 뭐야?” 어느 날 물고기가 물었답니다. “글쎄, 바다가 있기는 한 모양인데 그걸 본 물고기들은 모두 사라졌다는구나.” 물고기가 바다를 나오면 죽지요. 그 순간 자기가 살던 바다를 보게 됩니다. 내가 사는 바다를 볼 수 있는 상태, 그게 죽음이에요. 죽어야 세상이 보입니다. 그리 말했던 이어령 선생의 임종을 지켜본 그의 장남 이승무는 “아버지는 죽음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봐야겠다는 표정이셨다.”라고 했었습니다. 이어령 선생이 영면하기 한 달 전 그를 만났던 한 기자는 “죽음에 대한 평생의 호기심을 충족한 선생은 마지막 순간에 기쁘게 패배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기쁘게 패배했다’라는 말뜻은 알지 못하지만, 죽음이 어떤 것이었을까요? 이담에 만나면 물어봐야겠습니다. 이어령의 ‘메멘토 모리’라는 시의 첫 구절은 이렇습니다. “목숨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기저귀를 차고 나온다. 아무리 부드러운 포대기로 감싸도 수의壽衣의 까칠한 촉감은 감출 수가 없어. 잠투정하는 아이의 이유를 아는가.” 그는 ‘메멘토 모리’를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 그리 살면 한순간도 허투루 보낼 수 없고, 진실을 외면할 수도 없겠지요. 어떤 이들은 ‘그래, 언젠가는 누구나 죽는 거지. 그러니 실컷 즐기다 가야지.’ 그러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늘 기억하며 사는 사람은 드뭅니다. 오히려 생각 저편으로 밀어두고 삽니다. 심지어 죽음을 앞에 두고도 남의 일로만 치부하려 듭니다. 더구나 죽어야 세상이 보이고, 세상이 보여야 죽음도 알게 될 테니 굳이 지금 생각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고개를 돌립니다. 그러나 숱한 선현들이 죽음을 가까이할 때 우리는 진실해진다고 일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