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폴 드 무솔 요양원의 현관
1889년 10월(혹은 5월), 검은색 분필 분홍색 종이에 수채
테오에게...
삶은 이런 식으로 지나가버리고 흘러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일할 수 있는 기회도 한 번 가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맹렬히 작업하고 있다. 나의 경우 더 심한 발작이 일어난다면 그림 그리는 능력이 파괴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발작의 고통이 나를 덮칠 때 왈칵 겁이 난다. 그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막상 겪게 되면 공포를 느끼게 된다. 전에는 회복하고 싶은 마음조차 없었는데. 이제 2인분을 먹어치우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다시 아프게 될까봐 다른 환자들과의 접촉도 꺼리는 것은 바로 이 정신적인 공포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나는 회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자살을 시도했는데 물이 너무 찬 걸 깨닫고 강둑으로 기어올라가는 사람처럼.
사랑하는 동생아, 너도 알다시피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남프랑스에 와서 나의 모든 것을 그림에 던졌다. 다른 빛을 찾아내려 했다. 더 환한 하늘 아래에서 자연을 관찰하면 일본인들이 느끼고 그린 방식을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래서 이곳의 강렬한 태양을 보길 원했다. 그걸 접하지 않는다면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그 기법이나 기술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북쪽 지방의 안개가 일곱 가지 기본색을 보지 못하게 가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어느 정도는 옳았다. 도데가 '타르타랭' 에서 묘사한 남프랑스를 마음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곳에서 친구도 사귀게 되었고 애착이 가는 것도 많이 발견했다. 그러니 내 병이 아무리 끔찍할지라도, 이곳에 깊은 정이 들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너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인연으로 다시 이곳에 와서 그림을 그리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른 시인에 북쪽지방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래. 내가 지금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치우고 있다고 고백했듯, 친구들을 다시 만나고 북쪽지방에 다시 가고 싶은 지독한 갈망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도 숨기지 않겠다.
사람이 그림만 그리면서 살 수는 없다. 다른 사람도 만나고 어울리면서 조금씩 새로운 생각도 접하고 지내야 한다.
다시는 발작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희망은 포기했다. 그러니 이따금씩 있는 발작은 받아들여야겠지. 그럴 때면 내가 정신병원에 가거나 독방이 있기 마련인 감옥에 갈 수도 있다.
여하튼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그림은 잘 진행되고 있고, 글쎄, 밀밭을 비롯해서 그릴 게 아직도 많이 있다는 건 너에게 말할 필요도 없겠지. 가능하면 빨리 캔버스를 보내다오. 흰색 물감도 열 개 더 필요하게 될 것 같다.
우리가 용감하다면 고통과 죽음을 완벽하게 받아들임으로써, 그리고 스스로의 의지와 자기애를 깨끗이 포기함으로써 오히려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런 건 나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고, 사람을 만나고 싶고, 그리고 우리 삶을 만드는 모든 것, 네가 원한다면 인공적인 것이라 불러도 좋은 그 모든 것을 접하고 싶다. 그래, 진정한 삶이란 다른 어떤 것일 테지. 그러나 나는 살아가고 고통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사람은 못 되는 것 같다.
붓을 한 번 움직이는 것은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바람에, 태양에, 사람들의 호기심에 노출된 야외에서는 별다른 생각 없이 잔뜩 몰두해서 캔버스를 채운다. 그것이 진실된 것, 본질적인 것을 잡아내는 방법이다. 가장 어려운 일이지.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그림에 큰 변화를 주지 않으면서 손질을 하면 확실히 그림이 더 좋아진다.
1889년 9월 7 ~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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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폴 드 무솔 요양원의 현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