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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2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이사 40,1-11
복 음 : 마태 18,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13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은 변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랜 시간 계속 반복되면 변하게 됩니다.
하지만 변화를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이 변하는 일은 없다고 단정 짓기도 합니다.
어떤 형제님과 나눴던 대화가 생각납니다.
직장 동료 중에 도저히 맞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들 앞에서는 착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딴생각을 품고 힘들게 일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보는 것이 고역이었고, 사랑을 실천하자고 매일 마음 먹으면서도
점점 미워하는 자기 모습에 우울과 절망을 체험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람이 싫은 이유를 새롭게 만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불안과 미숙함을 그 사람에게 투사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반성하고 성찰하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나면 먼저 이야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제는 그 사람이 괜찮은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 그 자체에 큰 기쁨을 가질 수 있었다고 웃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계십니까? 계속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어느 순간, 변화된 나와 다르게 보이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잃어버린 한 마리 양 이야기를 하십니다.
양 백 마리중에서 한 마리가 길을 잃게 되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내가 싫어하는 사람 한 명이라고 묵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는 사람은 정말로 몇 명 되지 않습니다.
즉, 그 수는 늘 적은 숫자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어떻게 하십니까?
그들이 자기 무리에서 벗어나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잘 되었다. 그런 사람은 없어져야 해.”
이것이 과연 하느님 아버지의 뜻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들도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야 하고, 그들을 찾아 나설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 어렵고 힘든 길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면서 내가 변하고, 너가 변하고, 우리가 모두 변합니다.
오늘의 명언
행복한 결혼 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얼마나 잘 맞는가 보다, 다른 점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이다(톨스토이).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참 묘한 일입니다.
나무들은 걸치던 옷들을 다 벗고서 겨울을 나는데,
우리네 인간들은 옷을 겹겹이 덧입고서 겨울을 납니다.
겨울나무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비우는데,
우리네 인간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오히려 채웁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 자신을 그렇게 채우는 바람에 그분이 들어오시지 못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도 자신을 채우는 게 아니라 자신을 비워야 하지 않을까요?
비워진 그 자리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는
오늘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 목자에 대한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 비유의 ‘목자’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 인류라는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 그리스도를 표상합니다.
이 비유는 '목자의 기쁨'과 '아버지의 뜻'에 대해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10)
그리고 그 이유를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기 때문”(마태 18,11)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비록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 할지라도 소중히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목자의 기쁨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아버지의 기쁨’입니다.
이는 작은 것 하나마저도 귀중하게 여기시는 아버지의 사랑,
비록 보잘것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결국 이 비유의 정점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버지의 사랑’을 행함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아버지의 이 지극하신 사랑’을 알려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목숨을 바쳐 ‘이 사랑’을 행하셨고, 바로 그 일을 당신의 기쁨으로 삼으셨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 말씀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목자이신 ‘당신의 소명’이요, 동시에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소명’임을 말해줍니다.
제 1독서에서는 이를 이렇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이사 40,11)
그러니 우리는 우리를 찾고 계시는 아버지의 음성,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기쁨에 귀 기울여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처럼 ‘먼저’ 찾아 나서고, ‘먼저’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작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끌어안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그렇게 작은 모습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막상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기쁨’보다
우리 ‘자신의 뜻’과 ‘자기 기쁨’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이제는 냉정하게 자신에게 물어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기쁨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대체 어디에서 기쁨을 찾고 있는가?
<오늘의 말·샘 기도>
“아버지의 뜻” (마태 18,14)
주님!
당신 기쁨이 제 기쁨이 되게 하소서!
저를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의 사랑을 알게 하소서!
오늘도 “너 어디 있느냐?” 하고 찾으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네 형제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먼저 찾아오신 당신처럼, 저도 먼저 형제에게 다가가게 하소서!
제 사랑의 소중함보다 당신 사랑의 소중함을 먼저 보게 하시고,
‘당신 뜻’의 소중함을 알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번 서울에 갔을 때, 동창 신부님의 사제관에서 ‘도교와 그리스도교’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번 LA 신문 홍보 갔을 때는 교우분 댁에서 ‘미생’이라는 만화책을 읽었습니다.
예전에 넷플렉스에서 드라마로 본 적이 있었는데 다시 읽으니, 감동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미생이라는 말은 바둑 용어인데 아직 완전하게 두 집이 나지 않는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살아 있지만 곧 죽을 수도 있고, 완전하게 두 집을 내고 살 수도 있는 상태입니다.
신앙인에게 지금의 삶은 어쩌면 ‘미생(未生)’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알아,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에로 나간다면 부활의 삶, 완생(完生)이 되는 것입니다.
미생에서 완생이 되려면 최소한 두 집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려는 삶의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은총이 없는 삶의 내용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삶의 내용이 없는 은총만으로도 부족합니다.
따뜻한 햇볕이 있다고 모두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닙니다.
따뜻한 햇볕을 받아 꽃을 피우려는 뿌리의 노력이 있어야 비로소 꽃이 피는 것입니다.
바둑은 판 위에 돌을 놓는 것입니다.
판 위에 돌을 놓을 때는 ‘의도(意圖)’가 있어야 합니다.
실리를 챙기려는 의도, 세력을 키우려는 의도, 상대의 돌을 공격하려는 의도,
나의 돌을 지키려는 의도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런 의도가 없는 돌을 ‘사석(死石)’이라고 합니다. 가치가 없는 돌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놓은 돌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의중(意中)’이라고 합니다.
상대방이 돌을 놓은 의중을 알면 알맞게 대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의도와 의중이 잘 어울리면 멋진 한판의 바둑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LA에 온 의도는 신문 홍보를 위해서입니다.
저의 의중을 잘 알았던 본당 신부님은 제가 신문 홍보를 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봉사자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매미사 때마다 저보다 더 열심히 신문 홍보를 해 주었습니다.
미사 후에는 ‘구독과 신청은 사랑입니다.’라며 교우들에게 구독을 권면해 주었습니다.
신부님의 도움으로 저는 구독 신청과 후원을 받았습니다.
의도와 의중에 민감한 사람들이 있는데 ‘정치인’들입니다.
국민들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맞는 적절한 정책을 마련하는 정치인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성공할 것입니다.
국민들의 의중을 모르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정치인은 설 자리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예수님의 의중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미주 지역에 ‘가톨릭평화신문’의 구독자 수는 1,500명가량 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앞으로 미주 지역 ‘가톨릭평화신문’의
구독자 수가 15,000명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주일미사의 참례 수는 10% 대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일미사 참례 수가 적어도 50%는 될 수 있도록
본당 공동체가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하느님 나라의 계산법과 인간 세상의 계산법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휴가 나온 선교사들 뵐 때 마다, 큰 존경심과 동시에 큰 부끄러움을 감출수 없습니다.
저도 한때 그런 꿈을 자주 꾸곤 했었는데, 그래서 선교 청원서를 여러분 쓰기도 했었는데,
용기와 결단력 부족으로, 시도조차 못 해본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치료차 나오신 수녀님께 제가 그랬습니다.
“그만큼 계셨으면 충분합니다. 이제는 연세도 있으시니, 한국에서 편안한 노후를 보내시죠.”
수녀님께서는 추호도 그런 생각이 없는 분위기였습니다.
힘없이 쫄쫄 흘러나오는 선교지 수도꼭지만 보다가,
콸콸 흘러나오는 한국의 수도를 보니, 죄책감이 드신답니다.
식탁 위에 놓인 빵들이 남아있는 것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드신답니다.
선교지에서는 뭐든 순식간에 먹어 치우니 남아있는 것이 없답니다.
현지에서 살아있는 성인으로 불리는
한 살레시오 선교 사제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에는 제가 정말이지 부끄러웠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노 사제는 언제나 장난꾸러기 아이들 사이에 현존하신답니다.
신부님이 너무 좋은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더 신부님과 가까이 있으려고 무한 경쟁을 벌인답니다.
어깨에 매달리고, 무릎 위로 올라가고, 팔을 잡아당기고,
그런 아이들 사이에서 신부님은 항상 흐뭇한 미소를 짓고 계신답니다.
연륜이 지긋한 노 수도자로서 이제는 편안하게 노후를 보낼만한데,
조금도 그런 생각이 없으시답니다.
영성과 인품을 동시에 갖춘 신부님이시기, 여기저기서 초대를 하지만, 한사코 거절하신답니다.
그 이유는 당신이 돌보고 있는 길잃은 어린 양들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면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노사제의 삶입니다.
그 연세에 그 쌩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불쌍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바라보실 때, 가장 기뻐하실 삶의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마태 18,12-13)
하느님 나라의 계산법과 인간 세상의 계산법은 철저하게도 다릅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세상의 논리나 이치, 세상의 계산법으로
교회나 수도회를 운영하게 된다면, 그 끝은 참담할 것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시대, 이 땅 위에
과연 어떤 존재가 길 잃은 어린 양 한 마리인지 눈을 크게 뜨고 살펴봐야겠습니다.
목자와 길 잃은 양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께서는 길 잃은 양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백 마리의 양 떼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
그것은 목자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양이 무리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 양은 태초에 주님께서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신 인간 아담이다.
아담은 죄를 지어 천사들의 무리에서 벗어났다.
그 때문에 인류 전체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다.
주님께서는 인류를 죽음에서 삶으로 다시 부르신다.
그분의 죽음은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다.
착한 목자는 길 잃은 양을 어깨에 메고 나머지 양 떼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목자는 길 잃은 양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셨다.
그것은 죽었던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분은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길잃은 백 번째 양을 찾으면 더욱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신다.
예수께서는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사회로부터 냉대받고 소외된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면 그들과 함께 기뻐하셨다.
예수님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더 기뻐하신다고 하신다.
우리 가운데, 우리 공동체에 어떤 사람이라도,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차별 없이 신앙의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을 볼 때는,
그가 멸망하지 않고 구원되도록 모든 교우가,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이 힘써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회개가 필요하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이 아니라,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이런 처지를 생각 못 하고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한다고 하면서 조건이나 기억을 가지고 대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회개한 다음에는 기쁨만이 있다.
우리도 이러한 사랑을 갖고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나의 잊혀진 작은 성체 조각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어린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모범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결론으로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안에 우리가 어떻게 착한 목자가 될 수 있는지의 그 방법이 들어있습니다.
우리 성당에도 많은 어르신이 교통수단이 없어 성당에 나오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분들을 일일이 찾아서 모셔 오지 못하는 것이 저에게는 마음의 큰 부담이 됩니다.
지금도 그 방법은 계속 생각하고 있지만, 그분들을 직접 찾아 나설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만큼 사랑이 부족한 것입니다.
저의 논문지도 교수였던 조르지오 마짠티는 본당 신부이기도 하였습니다.
이태리는 한 번 본당을 맡으면 굉장히 오래 있기에 신자들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압니다.
따라서 누가 미사에 안 나오면 그분은 끝까지 찾아가셨습니다.
한 번은 지붕 위에서 작업하시는 분과 이야기하기 위해 당신도 지붕 위로 올라가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성당에 나오게 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런 마음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그 사람을 사랑해서라기보다는 하느님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양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 양이 내가 사랑하는 주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성당에 나오지 않으시는 분들의 얼굴을 아직 모릅니다.
그래도 찾아가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마음 아파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그들 한 사람도 잃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이 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증가시킬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밥상을 엎으면서 부모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먼저 주는 선물에 감사해야 부모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그분의 살과 피로 주시는 성체를 영하지 못하면 용서받지 못합니다.
제가 유학할 때 어떤 신부님이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구둣발로 쓱싹쓱싹 지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분이 잃어버린 한 마리 어린 양을 찾아 나설 수 있을까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어린 양이 바로 그 땅에 떨어진 성혈 한 방울과 같기 때문입니다.
김창옥 강사가 요즘 알츠하이머 증상이 있어서 강의를 거의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원인을 살펴보니 본인 생각으로는 아버지에게 매일 가정 폭력에 시달린 어머니를
구하지 않고 외면했던 어린 시절의 죄책감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합니다.
부모에게 완벽히 감사하지 못할 때 자녀에게 그 영향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그만큼 사랑받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다면
자녀도 그 정도로 세심하게 사랑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따라서 자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아주 작은 것까지 감사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언제나 부모를 기쁘게 해 주려는 마음이 근저에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가 나에게 해 준 모든 조각도 다 감사한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부모가 나에게 준 것을 사랑하지 않으며 부모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성체의 한 조각, 떨어지는 가루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잃어버린 작은 영혼들이 그분의 성체의 한 조각임을 느끼게 되고
그러면 그들을 찾아 나설 수 있게 됩니다. 감사한 만큼 보답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인이 주는 선물인 성체와 성혈의 조각들을 사랑하지 못하면
주인의 마음에 무감각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저는 백포도주보다 붉은 포도주를 미사에 사용합니다.
한 방울도 씻겨나가지 않도록 주의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노력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설 수 있는 사랑으로 성장하기를 청해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위해...
박상대 마르코 신부
제2 이사야서(40-55장)가 달리 ‘위로의 책’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 책이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40,1) 하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바빌론의 귀양살이가 끝나가고 있음을 알고 예루살렘의 기쁨을 미리 내다본다. (40,9)
유배 기간은 그들에게 복역 기간이었고, 죄벌을 받는 기간이었으며, ‘잃어버린 기간’이었다.
이제 그 기간이 끝난다.(40,2) 예언자는 외친다.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벌판에 큰길을 훤히 닦아라.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내려라.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은 넓혀라.”(40,3-4)
목자가 양 떼에게 풀을 뜯기고, 새끼 양들을 두 팔로 안아 가슴에 품으며,
젖먹이 달린 어미 양을 곱게 몰고 오듯이, 야훼께서 팔을 휘둘러 원수를 정복하시고,
승리하신 보람으로 찾은 백성을 친히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오신다는 것이다.(40,10-11)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요르단강으로, 요르단강에서 예수에게로
구원의 길을 닦고 예수를 예언된 메시아요 구원자로 계시하였던 것이다.(마태 3,1-17; 요한 1,35-36)
예수는 곧 100마리 양 중에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목자이시다.
오늘 복음이 바로 이 사실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마태오 복음 18장은 믿음의 공동체에 대한 설교로서,
구성원 상호 간의 형제애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담겨있다.
그 주제들을 요약하면, 겸손, 善導, 상호존중, 자비와 용서 등이다.
가르침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어라(1-5절)
작은 이들을 죄짓게 하지 말라(6-9절),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10-14),
형제가 죄를 짓거든 바로잡아 주어라(15-18절),
둘이 함께 내 이름으로 청하면 아버지께서 다 이루어 주신다.(19-20절)
몇 번이고 용서하라(21-22절), 무자비한 종의 비유(23-34절)
그러므로 진심으로 용서하라(35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10-14절)는 대목에서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의 비유’(12-14절)만 들려준다.
‘길 잃은 양의 비유’는 ‘잃은 은전의 비유’와 ‘잃은 아들의 비유’와 함께
루카복음에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에 관한 주제로 다루어진다.(루카 15,4-32)
루카는 이 비유를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에도 복음을 전하시고,
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는 일을 못마땅해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들려주신 것으로 소개한다.
그러므로 루카의 비유에서 ‘잃은 것’은 세리와 죄인들을 의미하며,
이들의 회개를 ‘다시 찾은 것’에 비유하면서 이 사실을 두고 하늘 전체가 기뻐한다는 것이다.
물론 비유의 脈은 잃은 것에 대한 하느님의 끈질긴 관심과 사랑과 자비이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이 공동체에 속해 있는 ‘보잘것없는 작은 이’에 비유된다.
비유의 결론은 100마리의 양들 중에, 아흔아홉 마리를 그대로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끝까지 가서 찾아내시고 기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아
작은 이들에 대한 공동체 전체의 각별한 관심과 배려를 표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가난하고 보잘것없고 무능한 이들은 교회 밖에서는 물론이고
교회 안에서도 종종 설 자리를 잃는다.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예수께서 간절히 권고하시건만,
교회 안에도 늘 업신여김과 차등과 차별이 존재한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세상에 대하여 가난하고 보잘것없고 무능한 자가 되셨다.
얼마 있지 않아 우리는 이 사실을 구유에서 목격하게 될 것이다.
우리 공동체는 다시금 마음을 모아 하느님의 사랑을 배워야 한다.
하느님의 列外 없는 사랑, 잃은 것, 상한 것, 구석에 있는 것에 대한, 끈질기고 인내하는 사랑,
큰 것보다 작은 것에 더 기뻐하는 사랑, 어떠한 질책이나 책임추궁 없이
다시 찾은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사랑을 말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이유와 조건 없는’ 사랑이며,
구원자 예수께서 못난 우리에게 베푸실 사랑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바로 나일 수 있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세상에 오시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이승화 시몬 신부
양 백 마리가 있는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두고 찾으러 갑니다.
이는 양이 많이 있기에 안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산이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고
하느님 안에 머물고있는 이들이기에
그들이 흩어질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이가 있다면
그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참 진리이신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세상 유혹에 빠져 살아간다면
하느님 자녀다움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한 마리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는 모든 것을 다 받아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산에 머물고 있는 것처럼
하느님 안에 머물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떠난다면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는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떠난 것이며
하느님을 거부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것과 떠난 것을 구분한다면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머물고 있는 이들에게는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잃어버린 이에게는 참된 길을 보여주고
떠난 이에게는 우리의 삶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그럴 때 더 많은 이들이 산에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을 살피고
우리와 함께하는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가운데
우리의 삶으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