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식초에 정성을 담아
당산마을 모퉁이 감나무 집 할머니네는 올해 감농사가 풍년입니다. 이파리를 모두 떨군 채 주홍빛 감을 보기 좋게 달고 있는 풍경은 겨울 길목의 스산함을 달래주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할머니 집에는 앞마당에 커다란 감나무 두 그루, 뒷마당에 한 그루가 있는데요, 뒷마당 대봉감은 어느새 곶감을 만들어 주렁주렁 걸어두셨더라구요.
꽃다운 나이 서른하나에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 둘 딸 하나를 키우셨다는데, 효성 지극한 사위가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다녀간답니다. 손재주가 그만인 사위는 보일러가 고장나면 뚝딱 고쳐주고 지붕이 새면 또 말끔히 고쳐준다네요. 말수가 유독 없는 할머니, 두 해 전부터 치매기가 와 종종 병원 신세를 지시는 걸 보니,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저희도 소나무 묘목을 심던 해에 감나무 묘목도 함께 심었습니다. 열매 따 먹는 재미도 있어야 한다며 묘목상 점원이 감나무 묘목을 다섯 그루나 덤으로 준 덕분에요. 겨울이면 유박비료 반 포대씩 얹어주고 가끔 하늘로 벋은 도장지 잘라주고 나면 일년 내내 방치(?)해 두는데도, 제법 많은 열매가 달리는 감나무를 보면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일머리를 모르는 데다 게으르기까지 해서 제때에 약 한번 쳐준 적 없는 우리 집 감이야말로 ‘완전’ 무농약 친환경 인증 대상일 겁니다.
혹시 가지에 달린 채로 알맞게 익은 홍시, 맛보신 적 있나요? 정말 거짓말 안 보태고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만큼 그 맛이 환상적입니다. 언젠가는 나무에서 떨어져 터져버린 홍시를 나비가 날개를 펄럭이며 맛나게 먹는 모습도 보았답니다. 농장 주인장인 이모님이 당뇨 판정을 받은 지 올해로 30년째인데요, 앉은 자리에서 홍시를 예닐곱 개씩 먹어도 이튿날 혈당 수치가 거의 그대로 유지되어 안심하고 즐기신답니다. 물론 사람마다 체질 차이가 클 테지만, 달달한 맛이 일품인 홍시를 마음껏 드시니 고마운 일입니다.
감도 해거리를 하는지라 작년엔 수확이 아주 적었던 대신 재작년엔 다섯 그루에서 골고루 많은 양의 감을 땄습니다. 일부는 서늘한 곳에서 말랑말랑 노골노골해지도록 두었다가 먹었구요, 나머지는 감식초를 담갔습니다. 감식초가 혈액순환에도 좋고 고혈압도 잡아주고 당뇨에도 그만이라며 권유하시는 동네분들 말에 귀가 솔깃해져서, 난생 처음 담가보았습지요.
감을 깨끗이 닦아 잘 말린 후에 커다란 통 속에 차곡차곡 넣은 후, 알코올 발효를 위해 막걸리를 한 병 부었습니다. 설탕도 조금 넣었구요. 담고 보니 커다란 통 2개, 작은 통 1개가 꽉 채워졌습니다. 밀봉한 다음 뚜껑 위에 날짜를 적고 2년을 기다렸다가, 드디어 지난 달 감식초를 걸러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병뚜껑을 열고 두텁게 낀 곱을 걷어내고 나니, 말간 감식초가 우러나와 있었습니다. 거실 창문을 활짝 열어 놓았음에도 주인장은 초산 발효 냄새에 취해 그만 넋이 나갔답니다.
감식초를 1.8리터들이 생수병에 담고 보니 제법 여러 병이 나왔습니다. 올해 연말연시 가족 모임이 있을 때, 양가 형제자매들과 아들딸들에게 선물로 안겨 줄 생각입니다. 농사를 짓다 보니 술도 담그게 되고 청이나 식초도 만들게 되는데요, 오랜 시간이 담긴 선물이야말로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를 오롯이 지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십오 년 전 성바오로딸 출판사가 [사십대여 숲으로 가자]라는 수필집을 내면서 필자들을 모두 초대해 조촐하게 출판 기념회를 열어 주었습니다. 수녀님들은 원고료도 챙겨드리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을 헤아려달라시며, 당신들이 직접 텃밭에서 재배한 재료로 저녁상을 차려주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예쁜 항아리를 선물 받았는데요, 그 항아리 속에는 수녀님들이 직접 담근 된장이 담겨 있었답니다. 된장 속에 정성스레 버무려 넣어둔 수녀님들 정성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네요.
올해는 블루베리 수확량이 적어 술도 못 담갔고, 감식초도 때를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가족 친지들을 위해 시간 속에 사랑을 담은 선물을 준비하고 싶은데, 농사 첫해에 담근 2010년산 매실주를 한번 풀어 볼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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