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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3일 수요일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 이사 40,25-31
복 음 : 마태 11,28-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민속학자가 남아메리카 한 마을의 부족 아이들을 불러 모은 뒤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나무 옆에 탐스러운 과일과 맛있는 과자 바구니를 두었으니
먼저 뛰어간 아이에게 그 바구니를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모두 출발점에 섰고, 민속학자는 출발 신호를 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누구 하나 빨리 달리지 않고 서로 손을 잡고 함께 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구니 앞에 도착하자 모두 둘러앉아 나누어 먹었습니다.
민속학자는 “누구든지 먼저 간 사람에게 바구니를 다 주려고 했는데,
왜 손을 잡고 달려갔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너도나도 “우분투”라는 단어를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 뜻을 몰라서 당황하는데, 한 아이가
“다른 사람이 모두 슬픈데, 어떻게 혼자만 행복해질 수 있나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분투’라는 아메리카 말은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습니다.’(I am because you are)라는 뜻이었습니다.
이웃을 배려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남아메리카의 전통적인 윤리 의식이었습니다.
이 ‘우분투’가 지금에도 울려 퍼져야 하지 않을까요?
혼자 살 수 없음이 분명한데도 개인주의가 판을 치고 있고,
무관심 속에서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결코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도 ‘우분투’ 정신을 따라야 합니다.
이렇게 ‘우분투’ 정신이 가득하면 편안할까요? 편안하지 않을까요?
이 정신으로 산다면 우리의 삶은 분명히 편안해질 것입니다.
또한 삶이 어렵고 힘들다면서 너무 무겁다고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보다는 기쁘고 행복하다면 가벼운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주님께 오라고 하셨을까요? 주님은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면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자기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행복과 함께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었을 때를 떠올려 보면 아마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렵고 힘든 것이 가득한 세상이지만, 사랑이신 주님과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신 주님과 함께하면서 우리 역시 사랑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다른 이에게 편함과 가벼움을 줄 수 있는 행복의 이유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우분투’ 정신으로 보충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습니다.’라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의 세상은 절대로 힘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하나 되는 진정한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말씀 전례에서 도드라진 표현은 “주겠다.” 라는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이사 40,29)고 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고 선언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태 11,28)
이는 듣기만 하여도 벅찬 감격이 밀려오는 말씀입니다.
이 벅찬 초대는 ‘참된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얻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곧 ‘참된 안식’은 그것을 가지신 분으로부터 받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시는 분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그분이 선사하는 선물이요, 사랑이요, 자비요, 호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단지 '안식'에로 초대만 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우리를 제자로 초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 11,29)
'멍에를 멘다'는 말은 당시의 유대인 사회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를 말해줍니다.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을 이루어 두 노역자가 함께 메게 되어 있듯이,
‘예수님의 멍에’는 예수님과 함께 메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저희와 하나가 되어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함께 메는 ‘멍에’이기에
‘그 멍에는 편하고, 그 짐은 가볍습니다.’(마태 11,30)
그러기에 우리가 진 ‘짐’은 우리를 짓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도와줍니다.
오히려 우리를 북돋아 줍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돕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지고 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모범을 보여주는 스승만이 아니라
함께 걸으시고 동행하시면서, 몸소 우리를 지고 인도하는 참된 스승이십니다.
단지 '길'을 제시하는 인도하는 스승이 아니라 '길' 자체이신 참 스승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제자 됨'이란, 단순히 예수님을 뒤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하나 되어 걸으며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
곧 '양순하고 겸손하신 마음'(마태 11,29)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그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필립 2,5)
바로 그 마음 안에서 우리는 그 ‘참된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안식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입니다.
주님!
오늘도 짐으로 하여 길을 가오니, 제게는 짐이 은총입니다.
당신의 사랑을 짊어지고 살아가게 하소서!
짐에서 당신의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가야 할 길을 짊어지고 가는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주님!
나그네가 배낭을 짊어지듯 당신은 저를 지고 나르고
저는 당신의 사랑을 지고 나릅니다.
짓누르는 것은 짐이 아니라 제 자신일 뿐,
짐을 지고 가는 이는 제가 아니라 당신일 뿐,
당신이 함께 걸으며 저를 짊어지고 갈 뿐,
사랑의 짐을 지고서야, 짐이 되어 업히고서야,
비로소 당신에게로 건너갑니다.
당신의 사랑, 당신의 죽음을 짊어지고 살아가게 하소서!
그 짐에서 당신의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세도나에 갔을 때입니다. 형제님 한분이 친절하게 안내 해 주었습니다.
형제님은 600번 넘게 세도나를 다녀왔다고 합니다. 세도나의 구석구석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벨락(Bell Rock)’이라는 산에 갔을 때입니다. 형제님은 가파른 바위를 편안하게 올라갔습니다.
제게는 발을 놓을 자리를 알려 주었습니다.
형제님이 안내해 주는 대로 발을 놓으니 가파른 바위를 가뿐하게 오를 수 있었습니다.
열 개의 징검다리를 건너는 숲길을 갈 때였습니다.
형제님은 제게 나무 지팡이를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나무 지팡이로 균형을 잡으니, 물가에서도 균형을 잡고 징검다리를 건널 수 있었습니다.
형제님은 멋진 그림이 나오는 장소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형제님이 자리를 잡은 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모두가 하나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었는데도 형제님의 도움으로
꼭 봐야 하는 곳을 보면서 알찬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친절한 형제님은 세도나에서 함께 찍었던 사진들을 모두 보내 주었고,
사진을 보면서 세도나에서의 추억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70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열혈 청년처럼
세도나의 이곳저곳을 다니시는 형제님이 있어서 즐거운 여행이 되었습니다.
저는 8년간 보좌신부를 하면서 4분의 본당 신부님을 모실 수 있었습니다.
본당 신부님들은 제게 사제가 가야 할 길을 알려 주었습니다.
첫 번째 본당 신부님은 무척 자유로웠습니다.
제게 스키도 가르쳐 주었고, 매일 동네 산보를 같이 다녔습니다.
엄격함과 질서보다는 자유와 넉넉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신부님의 자유와 넉넉함은 기도에서 나왔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처럼
신부님은 사제 생활의 중심은 사제 자신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매일 기도에 충실하였던 신부님은 자유를 즐길 줄 아셨습니다.
두 번째 본당 신부님은 합리적이었습니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수도자와 사목회장과 충분히 협의를 하였습니다.
제게도 자율권을 주었고, 충분히 저의 의견을 들어 주었습니다.
합리적인 신부님의 결정은 겸손함에서 나왔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처럼
신부님은 겸손함으로 사제 생활의 길을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세 번째 본당 신부님은 조직적이었습니다.
신부님은 ‘적재적소’에 신자들이 봉사할 수 있도록 안배하였습니다.
성전 신축을 위해서 사목회와 성전신축위원회를 분리하였습니다.
본당사목과 성전신축이라는 두 업무를 빈틈없이 추진하였습니다.
전 신자가 함께하는 ‘가족캠프’를 기획하였습니다.
기획분과, 총무, 청소년분과에게 적절한 임무를 주었고,
제게는 가족캠프의 총괄책임을 맡겨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본당과 캠프장을 다니면서 필요한 것들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저는 하나를 보면 하나를 알기도 벅찬데 신부님은 하나를 보면 열은 아는 것 같았습니다.
신부님의 조직력은 다양한 독서에서 나왔습니다.
네 번째 본당 신부님은 ‘산해숭심(山海崇深)’이라는 말처럼 영성은 깊고, 지식은 넓었습니다.
신학교에서 성서학을 가르치셨던 신부님은
성서는 물론 문학, 예술, 건축, 경제에도 전문가 못지않은 깊이가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감히 제가 넘을 수 없는 큰 산과 같았습니다.
신부님의 영적인 깊이와 지식의 넓이는 ‘정중동(正中動)’에서 나왔습니다.
모든 것이 쉽게 변하는 시대에 큰 바위 얼굴과 같았던 신부님의 영성이 새삼 그립습니다.
본당신부로 8년을 지내면서 보좌신부님들과 지낼 기회가 있었습니다.
과연 나는 제게 큰 가르침을 주었던 본당 신부님들처럼
보좌신부님들을 대했는지 돌아보면 아쉬움이 많습니다.
저는 기도에서 나오는 자유를 보여주지 못했고,
겸손에서 나오는 합리적 결정을 보여주지 못했고,
다양한 독서에서 나오는 조직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정중동에서 나오는 영적인 깊이와 지식의 넓이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함께 했던 신부님들이 모두 사목의 현장에서 잘 지내고 있음에 감사할 뿐입니다.
제가 ‘청출어람(靑出於藍)’이 되었다면 그것으로도 만족할 뿐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다들 얼마나 힘드신가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여러 측면의 지표들이 급격한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 이 시대를
살아가시느라 다들 얼마나 힘드신가요? 사방을 둘러봐도 희망이 안 보이고, 기대할 것은 없고...
어디 그뿐인가요?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상처 입고, 그 상처 부여안고 눈물 흘리고...
이런 우리에게 오늘 주님께서는 참으로 큰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오 복음 11장 28~30절)
우리가 그분께로 다가갈 때마다 환한 미소와 함께 활짝 열린 두 팔로 환대하시고, 꼭 안아주시고,
고생 많다며 등을 토닥여 주시는 주님을 생각하니 순식간에 피로가 사라지는 느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릿속에는 주로 부릅뜬 눈으로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시고,
여차하면 진노하시고 징벌을 내리시는,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하느님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시며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표현하시니,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고생하고 방황하는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 안식을 주시긴 하시는데,
거저 주시지는 않으시겠답니다.
당신의 멍에를 메는 사람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편안한 안식을 주시겠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복된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한번 보십시오.
그 큰 고통에다, 그 숱한 짐을 지고 힘겹게 하루하루를 걸어가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특히 죽음과 내세에 대한 공포로 더욱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분께서 친히 우리 짐을 가볍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모두가 외면 한다 할 지라도 나만은 너를 외면하지 않겠다,
나만은 너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고 언약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고통, 지고 가고 있는 많은 짐들을
순식간에 없애주시겠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나눠지시겠다고 하십니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우리와 함께 나란히 걸어가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결국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인 마음의 고통, 정신적인 고통을 없애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거기다 고통의 끝판왕인 죽음의 고통을 덜어주시겠다고 약속 하십니다.
언제나 고통과 십자가를 이고 지고, 손에 들고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완전히 없애주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시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단 주님께서는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 곁에 늘 함께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에 못 이겨 신음할 때 우리 옆에서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고통도 눈물도 없는 당신 나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복된 그날까지 매일의 고통을 기쁘게 인내하면서 살아내야겠습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28절)
주님께서는 율법의 멍에를 멜 힘조차 없는 지친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악마에게 시달리며 무거운 짐을 지고 무수한 죄에 억눌린 우상 숭배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절)
우리는 그분에게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29절)한 것을 배우라고 하신다.
그분의 겸손을 배울 때,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벼워진다.
왜 주님께서는 그 길을 좁은 길이라고 하셨을까? 게으른 사람들에게는 좁은 길이다.
그러나 잘 배운 이들에게는 그 계명이 가볍다.
설사 잠깐 육체적 고통이 따른다 해도, 희망 안에 양육되고 있는 사람은
그 고통을 쉽게 견디어 내는 신심이 깊은 사람이다.
그러면 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이 어렵게 보이는 것을 요구하시는가?
이것이 어렵게 보이는 것은 멍에를 메고 그분의 말씀을 믿는다면
얼마나 편하고 가벼운 짐인지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분의 짐은 관습과 규정이 아니라, 영혼의 결심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원하고 좋은 날들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정과 악의의 멍에를 벗어버려야 한다.
모든 악덕의 멍에를 벗어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편하고 가벼운 멍에를 멜 수 없다.
그리스도의 멍에를 힘들다고 여기는 것은
세상에 물든 마음으로 하늘의 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은 아직 그리스도께로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울 수가 없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절)
세상 주인들의 짐은 힘을 점점 더 빠지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짐은 그 짐을 진 이들을 오히려 도와준다.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가며,
우리가 은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도우라고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주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마음의 평화를 얻는 법: 나를 무겁게 하는 짐의 정체를 먼저 알아야!
전삼용 요셉 신부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안식’을 약속하십니다.
이를 위해 안식이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성당에 다니기 위해 오는 사람 대부분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당 다니면서도 마음의 평화인 안식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내가 내려놓아야 하는 ‘무거운 짐’의 정체를 잘 모르는 게 아닐까요?
영화 ‘디스 파이널 아워스’(2013)의 줄거리입니다.
이야기는 호주 퍼스를 배경으로 하며, 지구를 멸망시킬 재앙적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
마지막 12시간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영화는 생명을 잃은 운석이 북대서양을 강타하여 지구 전체를 천천히 휩쓸고 있는
세계적인 불 폭풍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전 세계가 아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주인공은 제임스입니다. 제임스는 임신한 애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죽는 것도, 자신의 애인이 죽는 것도,
그 태중의 아기가 죽는 것도 보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저 술을 마시며 광란의 파티를 하다 죽고 싶어 그녀를 떠납니다.
종말의 혼란 속에서 제임스는 아버지와 헤어진 채
어른들에게 끌려가는 어린 로즈를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도와줍니다.
그녀는 아버지 옆에서 종말을 맞고 싶다고 제임스에게 아버지를 찾아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제임스는 생의 마지막을 아이를 도와주다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광란의 파티에 갑니다.
거기에는 참다운 우정도 없고 거기에서도 어른들이 로즈를
마지막 노리갯감으로 쓰려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제임스는 로즈를 데리고 나와 아버지를 찾아주기로 합니다.
로즈가 말한 아버지 집으로 갔더니 온 가족이 두려움에 자살한 상태였습니다.
제임스가 로즈와 함께 떠나려 하자 로즈는 그것을 거부하고 아빠 곁에 머물겠다고 말합니다.
제임스는 아이를 보며 마지막 시간에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와 머문다는 게
얼마나 힘이 되는 지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은 누구와 함께 죽음을 맞고 싶은가 생각하다
자신의 짐처럼 여겨 떠났던 임신한 애인을 찾아 나섭니다.
도중에 차도 고장이 나지만 뛰어서 그녀가 있는 해변으로 갑니다.
거기에서 용서를 빌고 그녀와 꼭 껴안은 채 바다에서 밀려오는 불 폭풍을 맞습니다.
이때 여자가 말합니다. “아름다워!”
사랑하는 사람과 맞는 죽음은 더는 공포가 아니고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안식입니다.
제임스는 자신의 무거운 짐이 임신한 애인, 자기가 책임져야만 하는 가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짐을 벗어 던지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안식은 없었습니다.
자기가 짐이라고 여겼던 것은 사실 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무거운 짐은 무엇일까요?
제임스에게 가장 무거운 짐은 자신에게 맡겨진 사랑의 의무를
다할 필요가 없이 즐기다 죽어도 된다고 말하는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이었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짐은 외적인 책임이 아닙니다.
바로 원죄에 물들어 책임을 회피하려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아니라 외적인 무언가를 내려놓으려 하기에 영원히 안식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마음을 약속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은 새로운 마음을 넣어주러 오셨습니다.
그것도 짐입니다. 그러나 이전의 마음보다는 가볍습니다.
이전의 마음은 온유하지 않고 겸손하지 않습니다.
죽어야 할 운명에 대해 화가 나 있고 나에게 주어진 책임에 대해 분노로 차 있습니다.
겸손하지 못해 감사하지 못하고 하느님과 나에게 짐처럼 보이는 이들에게 불만을 품고 원망합니다.
제임스는 로즈라는 아이를 통해 이 새로운 마음을 얻었습니다.
그랬더니 이전에 짐처럼 보였던 가족이
이젠 죽음 앞에서도 평화로울 수 있는 안식으로 보이게 되었습니다.
가끔 자신 안에 마귀가 산다고 말하는 이들이 찾아옵니다.
안수로 그것들을 내쫓아 달라고 말합니다.
누구도 자신 안의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것 때문에 몸도 아프고 삶도 피폐해졌다고 합니다.
이들은 그 마귀들이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짜 짐은 ‘외로움’입니다.
하느님도 없고 부모도 없고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습니다.
믿는 척은 하지만, 실제로 자기를 믿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된 게 마귀 탓이라고 하며 진짜 무거운 짐을 부인입니다.
그 무거운 짐이란 자신을 외롭게 만든 하느님과 가족에게 화가 나 있는 마음입니다.
그것부터 내려놓아야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장착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습니다.
원한다면 사제가 시키는 것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성당에 매일 나와서 ‘하.사.시.’를 30분 읽고 성체조배 하며 그 내용을 묵상하라고 합니다.
일주일이면 충분한 효과가 나타납니다.
그렇게 마귀가 나가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여럿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자기 마음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마귀와 자기를 그렇게 만든 환경이 문제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것만 없애 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식을 위해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니 불만스럽고 화가 나 있는 마음을 먼저 내려놓읍시다.
고생하는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이승화 시몬 신부
눈앞의 십자가를 보면
참으로 고통스러워 보입니다.
무엇을 사랑하기 감당해야 할 아픔은
내가 얼마나 견디어 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만큼
우리는 아픔을 품을 수 있습니다.
아픔보다 더 큰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세상이 하느님을 미워하는 만큼 전해집니다.
동시에 그 고통을
나를 사랑하는 하느님의 손길로 감싸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분께서
나를 너무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겪어야 할 아픔은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얻는 기쁨이 되고
그 기쁨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은 옳습니다.
그분의 멍에는 편하고 그분의 짐은 가볍습니다.
내가 홀로 어떻게 하지 못하는 세상의 고통을
예수님과 함께하기에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곧 세상 멍에와 짐이 가벼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하기에 가볍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희망합니다.
수많은 별을 다 창조하시고 이름을 부르시는 분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우리는 그분 안에서 체험할 평화를 희망합니다.
그 희망은
오늘 우리가 하는 선택을 만들어 주고
그 선택을 통해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게 도와줄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을 맞이하며
그분과 함께하는 평화를 희망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