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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에 ‘5.18역사에 대한 12년
간의 연구결과’를 보고합니다.
저는 5.18역사를 12년 동안 연구했습니다. 5.18
역사는 일본의 역사왜곡을 능가하는 역사왜곡 사
례임을 보고 드립니다. 아니 그보다 100배는 더
부끄럽고 악랄한 역사왜곡의 사례입니다. 5.18은
대한민국을 전복하기 위해 북한이 병력을 보내 일
으킨 폭동의 역사였음을 보고 드립니다. 북한이
10.26이후 꾸준히 소단위로 내려 보낸 600명의
특수군으로 하여금 광주에서 천대받는 양아치 구
두닦이 목공 석공 철공 등 사회불만세력을 소모품
으로 사용하여 폭동을 일으켰다는 연구결과를 보
고 드립니다. 무고한 광주시민들을 여러 가지 방
법으로 살해하여 놓고 그것을 계엄군의 소행으로
모략하여 남남전쟁을 유발하려 했던, 세계 전사
상 그 유례가 없는 북한의 적진침투 게릴라 작전
이었음을 보고 드립니다.
광주가 주도한 민주화시위는 전혀 없었음을 보고
드립니다. 1980년 5월 18일 이후 광주의 지식인,
교수, 학생 모두가 스스로도 비겁하다 토로했을만
큼 꼭꼭 숨어 있었는데 무슨 목숨을 건 민주화시
위가 있었다는 말입니까? 이제까지 35년간 우리
는 북한에 능욕당했고, 좌익들에 놀아났습니
다. 북한군이 광주에 와서 분탕질을 친 천하의 수
치스러운 치욕의 역사를 놓고 대한민국이 나서
서 한국 민주주의를 드높인 민주화운동이라고 해
마다 기념하고 있는 이 기막힌 수치를 언제까지
더 덮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 자문해 주시기 바랍
니다.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전국에는 살벌하
고 삼엄한 계엄령이 집행되고 있었습니다. 김대중
이 국가를 상대로 최후통첩을 발표하였습니다. “5
월 19일까지 계엄을 철폐하고 최규하-신현확 내
각을 해체하고 전국혁명내각을 구성하겠다” 이
런 내용으로 확답하지 않으면 5월 22일을 기해 전
국 봉기를 단행할 것이라 협박한 것입니다. 이는
당시 김일성이 간첩들에 내린 '전민봉기' 교시와
정확히 일치하였습니다. 당시 무엇을 믿고 그런
선전포고를 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김대중은 북
악파크 호텔에서 4-5월에 걸쳐 4차례씩이나 회동
하여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혁명내각 명부까지
작성해놓고 있었습니다. 정부는 5월 17일 밤중을
기해 전국의 경찰들로 하여금 각 지역에 문제가
될만한 야권과 운동권 인물들을 일거에 체포하여
이른바 고문을 시작하도록 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전체가 숨도 크게 쉬지 못 할 만큼 얼어붙었습니
다. 체포되지 않은 운동권과 학생들은 모두 깊이
숨어 문밖출입조차 삼갔습니다. 5월 18일은 가장
무서웠던 급냉의 날이었습니다. 이럴 때 감히 어
느 광주인들이 집단으로 나서서 민주화운동이라
는 걸 할 수 있겠습니까?
2001년은 광주공화국이 대한민국 위에 군림하던
시대였습니다. 그 때 5.18 영웅이라는 사람들이
5.18기념재단이 마련한 증언록에 그들이 겪은 모
든 것들을 진솔하게 털어놨습니다. 저는 그 책들
을 입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들은 유네스코
에도 제출돼 있습니다. 여기에 수록된 내용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5월 17일 자정을 기해 광주의 모든 운동권들은
경찰에 잡혀가 고문받기 시작했다. 잡히지 않은
운동권 지도자들은 모두 도망가 깊이 잠적했다.
정동년은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잡혀가
고문을 받았지만, 전남대 운동권 최고 지도자라는
윤한봉과 박관현은 ”항쟁“ 기간 내내 도망가 있었
다. 평시 운동권에 얼씬거렸던 광주의 지식인들,
교수들, 학생들도 항쟁기간 내내 도망가 자취를
감추었다. 특히 5월 18일에는 물론 항쟁기간 내
내 광주시내에는 학생들이 나오지 않았다. 지각
있고 분별력 있는 사람들은 다 시내에 나오지 않
았다. 시내에 나온 사람들은 개념 없는 10대 소년
들과 양아치 등 사회불만세력들이었다. 군법회의
에서 사형과 무기징역을 받은 사람들은 계엄군이
광주를 포기하고 외곽으로 철수한 이후 호기심 등
의 이유로 이리 저리 살피면서 도청에 들어왔다가
5월 26일 낮과 밤에 극히 소수의 강경파 건달들에
줄을 잘못 섰던 대가를 치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개념 없는 남남들로 구성되었으며 거의가 다 구두
공 화물차운전수 등 20대의 사회불만 계층들이었
다. 꼬마 운동권 청년들은 시위 기간에 어쩌다 아
지트에서 만나 의논을 하다가도 조금만 위험한 징
조만 나타나면 각자도생 하자며 뿔뿔이 흩어져 도
망다녔다. 예비군 출신은 거의 없었고, 거의가 다
총기를 잘 다루지 못했다.”
위와 같은 광주 분위기는 대한민국 전체지역의 평
균 분위기였으며, 지금 우리가 생각해 보아도 충
분히 납득되는 그런 분위기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살어름판 분위기 속에서 광주에서는 5월 18
일부터 21일까지 아래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습니
다.
5월 18일부터 5월 21일까지
의 광주상황
1) 5월 18일(일) 전남대에는 전라도 출신이 대부
분인 금마주둔의 7공수여단 제33대대가 파견돼
있었고, 공수대원 20명이 전남대 정문 앞에 일렬
로 서서 휴교령을 집행하고 있었습니다. 오전
9:30분경 대학생으로 보이는 250여명의 시위대
가 나타나 공수대원들에 도서관에 가겠다며 시비
를 걸었고, “안 된다 귀가하라”하자 책가방에 숨겨
온 각이 진 돌멩이를 던져 여러 명의 공수대원들
에 피를 흘리게 한 후, 공수대원들이 추적할 수 없
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금남로 번화가로 도망을
갔습니다. 거침없이 수십 개의 파출소에 불을 지
르고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전라도 70%를 몰살
시키려 왔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트렸습니다.
사람들은 불이나면 조건반사적으로 몰려듭니다.
이것이 5.18의 첫 장면이었습니다.
국민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광주의 모든 학생
들,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들이 쥐죽은 듯 숨어 있
었던 그 무서운 순간, 혹시라도 경찰이 오해하여
자기를 잡아갈까 꼭꼭 숨어 있었던 그 시각에 어
떻게 광주학생들이 250명씩이나 집단을 만들어
계엄군을 찾아가 감히 돌을 던지고 파출소들에 불
을 질러 군중을 모을 생각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한국군의 한계를 정확하게 꿰뚫고 그에 대해
오랜 기간 훈련해온 배포 큰 특수집단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2) 이후 이들이 사용한 다양한 공격기법들이 선을
보였습니다. 부나비들에 환각제를 먹이거나, 술을
먹인 후 대형차를 몰고 계엄군 집합대열을 향해
고속의 지그재그 궤적을 그리게 하면서 돌진시키
는 방법, 악세레다를 고정시켜놓고 계엄군을 향해
달리게 하다가 뛰어내리게 하는 방법, 대형 변압
기를 폭파시켜 MBC 건물을 불태운 방법, 불타는
휘발유 드럼통을 계엄군을 향해 굴리게 하는 방
법, 광주의 어수룩한 10대와 20대를 차에 태워 이
곳 저곳에 내려놓고, 서로가 서로를 계엄군으로
오해케 하여 사격하게 하는 방법 등 매우 대양한
방법이 동원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계엄군은 5월
19일 아침부터 수세에 몰려 그야말로 중과부적의
상태에서 공포감에 떨며 매타작을 당하면서, 실탄
을 달라, 철수를 시켜달라 지휘관에 요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3) 드디어 5월 21일이 되었습니다. 이날은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계엄군이 시위대에 집단발포를
해서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다쳤다고 묘사했
던 바로 그날입니다. “이날 그 발포 명령을 누가
내렸느냐, 전두환이 내렸을 것이다” 하면서 한껏
의혹을 부풀렸던 바로 그날입니다. 이날 아침
08:00시 정각에 300명으로 구성된 학생집단이
광주 톨게이트에 20사단 차량부대가 통과할 것이
라는 극비 중 극비 정보를 입수하고 매복해 있다
가 08시에 기습공격을 가했습니다. 부대는 혼비
백산 흩어졌습니다. 감히 어느 나라 학생들이
300여명의 세력을 형성하여 감히 부대이동정보
를 알아가지고 매복까지 하면서 기습 공격을 감행
할 수 있겠습니까?
이 300여명의 학생단은 사단장 지프차 1호를 포
함해 무전기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14대의 지
프차를 탈취해가지고 곧장 군용차량을 생산하는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아시아자
동자 직원들은 그 어마어마한 지휘용 지프차들과
사단장용 1호차를 보자마자 대세를 짐작하고는
순순히 그들의 요구대로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374대의 열쇠를 내주었습니다.
이때 또 다른 300여명의 학생단이 5대의 대형 버
스를 몰고 아시아자동차 공장에 합세했습니다. 이
들 600명은 전남 17개 시군에 꼭꼭 숨어있는 44
개의 무기고를 향해 예행연습을 한 듯한 매너로
곧장 달려가서 무기고를 솜씨 있는 방법으로 털었
습니다. 2개 연대 분이었습니다. 갈때는 쏜살같이
무기고를 향해 운전하더니 무기를 싣고 광주로 돌
아올 때는 여러 차례 길을 물었습니다. 유동3거리
에 와 놓고도 사람들에 유동3거리가 어디냐고 물
었습니다. 나머지 트럭과 장갑차 4대는 도청 근방
에 집결하여 계엄군과 대치하였습니다. 가장 빨리
털린 무기고는 낮 12시에 가장 가까운 곳에서 털
린 나주경찰서 무기고였습니다. 가장 늦게 털린
무기고들은 광주에서 멀리 있는 지역에서 거의 동
시에 털렸는데 그 시각이 오후 4시였습니다. 이러
한 기록은 북한이 발간한 대남공작 책자들에도 있
고, 1995년 7월 18일에 발간된 검찰최종보고서
와 안기부 자료에도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당시
정보당국은 정보분석을 세밀하게 하지 않고, 원자
료 상태로만 남겨놓았습니다.
가장 괄목할만한 상황은 이들 600명의 학생부대
가 8톤 분량의 TNT를 전남도청 지하실에 옮겨놓
고 순식간에 포탄으로 조립해놓았다는 사실입니
다. 이런 조립 및 해체 능력을 가진 사람은 당시 전
라도 계엄분소 전체에 오직 한 사람 5급문관인 배
승일 뿐이었습니다. 현역 군인들은 장교든 병사든
이런 능력 없습니다.
광주사태 최고의 하이라이트인 5월 21일,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이날 오후 1시경, 계엄군이
집단 발포를 했다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구전되어
국민 모두가 그렇게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이는
지어낸 거짓말입니다. 당시 광주에는 장갑차를 몰
만한 예비군도 없었고, 총기를 만질 줄 아는 예비
군도 시위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예비군들은
5.18 증언자들의 말 그대로 대학생들보다 더 사
리분별력이 많은 사람들이기에 나올 리도 없었습
니다. 오후 1시 경, 한 대의 장갑차가, 도청 앞에
집결해 있는 공수부대원 수백 명을 향해 지그재그
로 돌진하여 1명의 병사를 현장에서 깔아죽이고
1명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그렇게 질주하기를
네 차례나 반복 했습니다. 공수부대 병사들은 31
사단 소위가 헬기로 철수하면서 공수대원들이 실
탄 없이 고생한다며 넘겨준 수백발의 실탄을 가지
고, 질주해오는 장갑차를 향해 발사였습니다.
저는 이날 광주 일원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분포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날 광주일원에서 발생한 민
간 사망자는 모두 61명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28
명은 도청과는 거리가 먼 다른 곳들에서 사망했
고, 33명만이 도청 앞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러면
그 28명은 누가 죽였겠습니까? 도청 앞 사망자
33명에 대해 더 살펴보았습니다. 33명 중 20명은
칼에 찔리고 몽둥이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도청 앞에서는 계엄군과 시민이 수십 미터의
거리를 두고 대치해 있었습니다. 맞아 죽고 찔려
죽은 사람은 공수대원과 상관없이 죽은 사람들입
니다. 그러면 이들 20명은 또 누가 죽인 것입니
까? 한발 더 나아가 살펴보았습니다. 매우 놀랍게
도 도청 앞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 13명 모두가 무
기고에서 나온 총들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한마디
로 5월 21일에 칼에 찔리고 몽둥이로 맞고 총에
의해 사망한 61명 모두가 계엄군과는 무관한 사
망이었던 것입니다.
광주사태 10일 동안 사망한 민간인은 166명입니
다. 차량사고로 죽은 사람, 찔려 죽은 사람,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으깨진 사람, 목이 잘린 사람,
불에 그을린 사람, 총에 맞은 사람 등입니다. 5월
21일에 사망한 사람들에서 보았듯이 이들 주검들
의 대부분은 공수부대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66명의 사망자 중 총상 사망자가 116명으로 가
장 많았습니다. 제가 모두 여러 차례 세어보니 그
중 69%에 해당하는 80명이 무기고에서 탈취한
총들에 의해 사망했고, 36명이 계엄군이 소지한
M16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1982년 육군본부가
발행한 “계엄사” 141쪽 상단에는 총상사망자 수
가 117명, 이중 75%인 88명이 무기고에서 나온
총들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앞서 저는 5월 21일 통계를 제시해 드렸습니다.
도청과는 거리가 먼 곳들에서 사망한 28명은 누
가 죽인 것이며, 도청 앞에서 칼과 몽둥이에 의해
사망한 20명은 누가 죽인 것이며, 도청 앞에서 무
기고 총에 의해 사살된 13명은 누가 죽인 것이겠
습니까? 과연 광주시민이 80명이라는 광주시민
을 쏘았겠습니까? 광주시민이 쏘았다면 5.18은
자작극이 되는 것이며 광주는 시민이 시민을 등
뒤에서 쏜 패륜의 도시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
까? 칼에 찔리고 으깨지고 머리를 잘라놓은 시체
는 계엄군의 소행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이 잔
인함의 모두가 광주시민들의 소행이라는 말입니
까?
도청 앞에서의 특수작전이 얼마나 강한 것이었으
면, 그 막강하다는 계엄군이 도시를 포기하고 오
후 5시부터 시 외곽으로 도망을 쳤겠습니까? 도
망가는 길에도 곳곳에서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전남대에 주둔했던 3공수 여단 4개 대대는 20일
밤부터 전멸당할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고 약 20
시간 동안 밀리고 밀리는 공방전을 거듭하다가
21일 오후 4시부터 시 외곽으로 도주하였습니다.
10:1 이상의 중과부적 상태에서 큰 피해 없이 도
망친 것이 기적이었습니다.
5월 18일부터 21일까지 전개된 위와 같은 고도의
게릴라전을 광주의 대학생이, 광주의 껌팔이 구두
닦이 계급들이 나서서 주도했다고 믿을 국민 없을
것입니다. 이런 작전이 광주인들에 의해 전개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21일 계엄군이 철수하고, 동시
에 북한군 600명이 잠수해 있었던, 5월 22일에
더욱 확연하게 재확인 됩니다.
아시아자동자공장에서 장갑차와 트럭을 몰
고 나가는 모습
이마의 수건은 자기들끼리 통하는 피아식별
비밀표시
몽둥이로 이동 중인 20사단 사령부를 기습
공격하여 지프차들을 몰고 가는 모습
20사단에서 빼앗은 지프차 행렬
군용트럭 도어 부분에 있는 4명이 몽둥이와
카빈총 소지
장갑차에 거치된 기관총, 장갑, 복장, 눈매, 능숙
해 보이는 자세에 주목
전경복장으로 위장한 북한군
전경복장으로 위장한 북한군
전경복장으로 위장한 북한군
지프차에서 지시를 하는 듯,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모습
5월 22일부터 5월 25일까지의
광주상황
5월 21일 오후 계엄군이 광주시를 떠나자 광주시
가는 갑자기 조용해 졌습니다. 수백-수천 명씩 모
여가지고 수많은 곳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
했던 건물소각, 차량소각, 국가자산 소각 행위가
사라지니 부나비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파괴된
광주를 보면서, 일부 광주 유지들이 5월 22일 도
청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더 이상의 희생은 안 된
다. 이 무서운 무기들을 반납하고 계엄군과 관련
자 처벌에 대한 협상을 하자”는 데 의견이 일치됐
습니다. 그리고 그 엄청난 무기를 털어온 학생들
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학생들은 광주에 없
었습니다. 광주시민이 민주화를 위해 무기를 털었
다면 이렇게 쉽게 무기를 반납하자는 말이 나올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학생들을 애타게 찾자 겨우 나타난 학생이 22세
의 전남대학 학생 김창길이었습니다. 교수들이 도
청에 나왔지만, 그 교수들은 어떤 학생들이 그런
엄청난 작전을 수행했는지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
다. 극히 소수의 광주의 유지들, 교수들이 수습대
책위라는 것을 만들었지만 실제로는 22세의 김창
길이 YWCA 소속의 일부 사람들을 이끌고 무기회
수에 나섰습니다. 전교사에 다니면서 체포된 자들
과 무기를 맞바꾸는 일도 했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참으로 큰일을 했습니다. 도청
에 무기 상태로 조립돼 있는 다이너마이트 더미를
해체해야 광주시가 온전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
고 전교사에가서 이 정보를 제공하였습니다. 계엄
분소장 소준열 장군은 유일한 기술자 배승일 문관
을 25일과 26일에 걸쳐 파견하였고, 김창길은 온
건파들과 함께 배문관의 생명을 보호해주었습니
다.
무기를 손에 쥐어주면 광주시민들이 원수 같은 공
수부대와 잘 싸울 것으로 알았던 600명, 무기를
수거하고 반납하는 모습을 보자 몸이 달았습니다.
복면을 하고, 무기를 들고, 차를 몰며, 날랜 모습
을 보여주었습니다. 자기들을 믿고 끝까지 항쟁하
라고 독려하고 다닌 것입니다. 광주시민들의 분노
를 다시 솟구치게 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계엄
군으로 오해하도록 상황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래도 광주시민들은 그들에 놀아나지 않았습니다.
무기회수가 지속되었습니다. 600명에게 남아 있
는 유일한 길은 교도소를 점령하여 그 속에 수용
돼 있는 2,700여명과 180여명의 좌익수를 풀어
폭동의 맥을 이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총 6
회에 걸쳐 교도소를 공격했습니다.
육군본부 정보보고에 의하면 당시 북한은 교도소
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계속 내보내고 있었습니다.
교도소쟁탈전은 남북한 특전부대끼리 벌이는 치
열한 전투였습니다. 호를 깊이 파고 있었던 공수
부대와 장갑차 및 군용트럭을 타고 앞으로 전진하
던 600명과의 전투는 아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아마 여기에서 600명중 상당수가 죽었을 것입니
다. 북한군은 죽기 전에 각가지 방법으로 증거를
없앱니다. 그리고 남은 특수군은 5월 26일 밤과
27일 새벽에 안개처럼 사라졌습니다. 북한의 조
국통일사가 1982년 3월 20일에 발행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595쪽
에는 “5월 26일 600여명의 광주학생시민들은 도
청 지하실에서 최후의 항쟁을 선언했다.”는 기록
이 있습니다. “600명”은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책
들에 공동으로 나타나는 암어입니다. 2013년 5
월 15일 채널A에는 전 북한특수군 신분으로 광주
에 투입되었던 가명 김명국이라는 탈북자가 그의
침투사실을 증언하였습니다.
여기까지가 계엄군이 시 외곽으로 빠져나가 있던
5월 22일부터 25일까 전개됐던 광주의 모습이었
습니다. 이 기간 중 광주인들에 의한 민주화시위
는 전혀 없었습니다. 광주시민들에게는 오직 '역
겨워 보이는 무기'를 회수하여 반납하는 일이 가
장 중요했습니다. 이때에도 광주 학생들은 은신
칩거 중이었습니다. 온건한 생각을 가진 22세의
김창길이 주도하는 대로 무기반납 운동이 이루어
졌다면 광주사태는 여기에서 평화적인 피날레를
장식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25일 밤중에 돌연
히 사태가 악화되었습니다.
부산항에 미국 항공모함이 왔는지에 대한 정보는
광주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
니었으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해한 정보
판단 역시 광주의 20대 젊은이들에는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26세의 조선대생 김
종배가 이 사실을, 누군가로부터 전해 듣고 열흘
만 견디면 미국이 광주를 도와줄 것이라고 확신했
습니다. 이 정보를 믿은 그는 결사항쟁을 생각해
냈습니다. 당시 항공모함이 극비리에 부산에 오는
것은 맞는 정보였지만, 그 항공모함을 타고 오는
미군이 광주폭도를 도와주리라 생각한 것은 넌센
스였습니다. 아마도 구군가로부터 잘못된 판단을
제공받았던 것 같습니다.
5월 26일과 27일 새벽까지 전
개된 광주상황
25일 밤늦은 시각, 김종배, 화물차 운전사 박남선
(26), 30세 회사원 정상용, 5.18의 상징인 30세
윤상원, 27세의 조선대 출신 허규정이 주축이 되
어 김창길 등을 권총으로 위협하여 축출시킨 후
수습위원회를 ‘항쟁본부’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결
사항쟁을 선포했습니다. 이들의 진술에 의하면 이
들은 거의 서로가 생면부지의 처지로 도청에서 처
음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김종배가 항쟁본부 총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항쟁본부라는 거창한 이름
을 붙인 이 그룹은 불과 80명 정도로 구성된 콩가
루 집합체였으며, 주로 고교생과 막노동자들로 구
성됐습니다. 이들만 아니었다면 광주 재진입작전
은 없었을 것이며, 27일 새벽에 발생한 17명의 민
간 사망자도 발생하지 대한민 것입니다. 고교생들
은 대부분 죽었고, 항쟁본부 간부들은 항복을 표
시하여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신흥귀족
으로 등극해 있는 것입니다. 5월 27일 05:23분,
일
첫댓글 알만한 사람은 다 알지요
항공유가 떨어 질 정도로 수송기가 부상병과 교체인력을 실어 날랐죠,
실제침투한 북한한 부간군 탈북자 증언을 가로막는 대한민국 ㅋㅎㅎㅎㅎㅎ
이런걸 전두환 대통령만 죽일 대통령이 됐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