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威化島 回軍 |
위화도 회군, 개경 전투 |
조민수(曹敏修)가 흑대기(黑大旗)를 들고 영의서(永義署) 다리에서 최영(崔瑩)에게 쫒기는데, 태조(太祖)가 황룡대기(黃龍大旗)를 세우고 선죽교(善竹橋)를 거쳐 남산(男山)에 오르니, 그 먼지는 하늘을 뒤덮었으며, 그 북 치는 소리는 온 땅을 뒤흔들었다. 최영의 휘하 장수 안소(安沼)는 정예병을 거느리고 남산에 웅거하다가 그 모습을 보고 달아났으며, 형세가 다한 것을 본 최영은 화원으로 달려 돌아와 분노를 참지 못했다.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위화도 회군, 개경 전투 | |||
날짜 | |||
1388년 음력 5월 22일 ~ 6월 3일 | |||
장소 | |||
① 평안북도 신의주 시 위화도 ② 개경 | |||
교전세력1 | 교전세력2 | ||
교전국 | 쿠데타 군 | 고려(高麗) | |
지휘관 | 이성계 조민수 유만수 정지 남은 지용기 이지란 기타 | 우왕 최영 안소 정승가 기타 | |
병력 | 3만 가량 | 불명 | |
피해 규모 | 불명 | 불명 | |
결과 | |||
최영의 패배. 쿠데타 세력의 개경 장악 | |||
기타 | |||
고려의 멸망, 조선의 성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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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태조(太祖)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 |
"자고로 나라의 임금이 시해당하면 재상자리에 있는 사람이 먼저 그 죄를 받는 법입니다. 황제가 선왕의 변고를 듣고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는다면 공이 필시 모면하지 못할 터이니, 원나라와 화친해두는 것이 상책입니다." ─고려사 이임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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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추의 활동과 14세기말 동아시아 정세』, 윤은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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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추의 세력지 금산(金山)의 위치 |
홍무 20년, 풍승(馮勝]에게 명령하여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으로 삼아 영국공(潁國公) 부우덕, 영창후(永昌侯) 남옥을 좌,부우장군으로 삼아, 남웅후(南雄侯) 조용(趙庸) 등 보병과 기병 20만을 거느리고 이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중략) 나하추는 대적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 나리오의 말로 인하여 항복을 청하였다. ─ 명사(明史) 풍승전 |
홍무 21년, 3월 남옥에게 명하여 군대 15만을 거느리고 이를 정벌하게 하였다. (중략) 창졸간에 그 앞에 이르자, 크게 놀라, 맞아 싸웠으나, 적을 패배시켰다. ─ 명사(明史) 남옥전 |
고려에서 짐의 지시를 따르겠노라고 스스로 원하기에 짐은 해마다 말을 바치라고 지시했으나 바친 말들은 쓸모가 없는 것들이었다. 또한 공납의 어려움을 하소연하기에 내가 바치지 말게 하고 다만 3년에 종마(種馬) 50필만을 바치게 하였더니 바친 말이 또한 쓰기에 적당하지 못했다. 뒤에 사서 바친 5천 필도 모두 작고 약해져서 우리 말 한 필의 값으로 그런 말 두세 필을 넉넉히 살 만한 정도였다. 지금 또 복색을 개정해 준 은혜에 감사하다면서 바친 것도 발굽이 제멋대로 생긴 데다 다리에 종기까지 났으니 기왕 바칠 것이라면 어째서 이런 따위를 바쳤는지 알 수 없다. 이는 필시 사신이 오는 길에 서경(西京)에서 원래 말을 팔아버리고 나쁜 말로 바꾸어 온 것이 틀림없기에 장자온(張子溫)을 금의위(錦衣衛)에 여러 해 동안 수감하는 벌을 내린 것이다. 그대가 귀국하거든 이 사실을 정무를 맡고 있는 대신에게 알리도록 하라. 짐이 이미 통상(通商)을 허락했는데도 고려에서는 공식적으로 문서를 보내 무역을 하려 하지 않고 몰래 사람을 태창(太倉)으로 보내 우리의 군사태세와 전함 건조여부를 정탐하게 했으며 또 우리 명나라 사람으로 그곳에 가서 정보를 누설한 자에게 후한 상을 주기도 했다. 이러한 것은 길거리에 노는 어린아이의 짓거리니 지금부터는 그런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할지며 또한 사신도 보내지 말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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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崔瑩) |
"지금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안 될 이유가 네 가지 있습니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역격(逆擊)하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 온 나라의 군사들이 원정에 나서면 왜적이 허점을 노려 침구할 것입니다. 넷째 때가 장마철이라 활을 붙여놓은 아교가 녹고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것입니다."
"전하께서 꼭 이 계책을 성취하려고 하신다면, 일단 서경에 머물러 계시다가 가을철에 군사행동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때는 대군이 먹을 군량이 풍족할 것이니 사기가 높은 가운데 행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군사행동에 적합한 시기가 아니오니 비록 요동의 성 하나를 함락시키더라도 쏟아지는 비 때문에 군대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한다면 군사가 지치고 군량이 떨어져 참화를 재촉하게 될 것입니다."
"이자송이 죽긴 했으나 후대에 훌륭한 인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살아 있긴 해도 이미 전략상 큰 실책을 범했으니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 최영(崔瑩) |
총 병력 50,473명 군마 21,682필 |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조민수(曹敏修) 서경도원수(西京都元帥) 심덕부(沈德符) 부원수(副元帥) 이무(李茂) 양광도도원수(楊廣道都元帥) 왕안덕(王安德) 부원수(副元帥) 이승원(李承源) 경상도상원수(慶尙道上元帥) 박위(朴葳) 전라도부원수(全羅道副元帥) 최운해(崔雲海) 계림원수(鷄林元帥) 경의(慶儀) 안동원수(安東元帥) 최단(崔鄲) 조전원수(助戰元帥) 최공철(崔公哲) 팔도도통사·조전원수(助戰元帥) 조희고(趙希古) 안경(安慶) 왕빈(王賓) |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李成桂) 안주도도원수(安州道都元帥) 정지(鄭地) 상원수(上元帥) 지용기(池湧奇) 부원수(副元帥) 황보림(皇甫琳) 동북면부원수(東北面副元帥) 이빈(李彬) 강원도부원수(江原道副元帥) 구성로(具成老) 조전원수(助戰元帥) 윤호(尹虎) 배극렴(裴克廉) 박영충(朴永忠) 이화(李和) 이두란(李豆蘭) 김상(金賞) 윤사덕(尹師德) 경보(慶補) 팔도도통사·조전원수(助戰元帥) 이원계(李元桂) 이을진(李乙珍) 김천장(金天莊) |
"이제 대군(大軍)이 장도에 올라 행군에만 한 달을 끌게 된다면 군사 작전이 성공할 수 없으니 제가 가서 행군을 독려하겠습니다."
"선왕께서 시해를 당한 것은 경이 남쪽으로 정벌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하루라도 그대와 함께 있지 않겠는가?"
당시 명나라에서는 우왕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고려 정벌에 나서기 위해 황제가 친히 종묘에서 점을 치려고 사흘 동안 재계(齋戒)를 하다가 회군 소식을 접하고는 바로 재계를 중지했다. ─고려사 우왕 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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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왜구의 침입 피해 상황 |
전라도 안렴사(安廉使) 유량(柳亮)이 보고하길, 왜적이 배 80여 척을 진포(鎭浦)에 정박시켜, 인근 고을들을 노략질하고 있다 하였다. ─ 고려사 우왕 14년
왜구가 세 도(道)를 침략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주(州)·군(郡)의 사람들을 죽이고 불태워도 장수와 수령 가운데 막아낼 자가 없었다. ─고려사 정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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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명나라 영토를 침범함으로써 천자로부터 벌을 받는다면 즉각 나라와 백성들에게 참화가 닥칠 것이다. 내가 이치를 들어서 회군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으나 주상께서는 잘 살피지 않으시고 최영 또한 노쇠해 말을 듣지 않는다. 이제는 그대들과 함께 직접 주상을 뵙고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자세히 아뢰고 측근의 악인들을 제거해 백성들을 안정시켜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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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군의 회군 루트 |
"현릉(玄陵)[29]께서 지성으로 명나라를 섬기는 동안에는 천자가 무력으로 우리를 억누를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최영이 총재(冢宰)가 되자 조종(祖宗) 이래로 큰 나라를 섬기던 뜻을 망각한 채 먼저 대군을 일으켜 상국을 침범하려 했습니다. 한 여름에 많은 사람을 동원하니 온 나라의 농사가 결단나고 왜놈들은 수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 내륙 깊이까지 침입해 약탈을 저지르며 우리 백성들을 살육하고 우리 창고를 불살랐습니다. 게다가 한양 천도 문제 때문에 온 나라가 소란한 지금, 최영을 제거하지 않으면 필시 나라가 전복되고 말 것입니다
"명령에 따라 출정했으면서 진군하라는 지시를 위반한데다 군사를 이끌고 대궐을 침범하려하니 또한 이는 인륜을 어기는 짓이다. 이러한 불미스런 일이 일어난 것은 부족한 이 몸 때문이긴 하나 군신(君臣)간의 대의는 진실로 역사에 있어서의 보편적인 원칙이니 글 읽기를 즐기는 경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더구나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강토를 어찌 쉽사리 남에게 내어 줄 수 있겠는가? 차라리 군사를 일으켜 대항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여러 사람들과 논의했으며, 그 사람들이 모두 옳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어찌 감히 어기는가? 그대들이 최영을 지목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만, 최영이 나를 보호해주고 있는 것은 경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며 우리나라를 위해 힘써 수고한 것도 또한 경들이 잘 아는 사실이다. 이 교서를 받아보는 즉시 쓸데없는 망상을 버리고 개과천선하여 끝까지 함께 부귀를 보존할 것을 생각하라. 나는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태조가 숭인문(崇仁門) 밖 산대암(山臺巖)에 진지를 구축한 다음,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유만수(柳曼殊)를 숭인문으로 들여보내고 좌군을 선의문(宣義門)으로 들여보냈으나 최영이 맞서 싸워 모두 물리쳤다. ─고려사 우왕 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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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 전투 요도 ─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개경 전투』, 이상훈 |
"이 일은 내 본의가 아닙니다. 국가가 편안하지 않고 백성이 피곤하여 원망이 하늘에 사무쳐 부득이 하게 일어난 일입니다. 부디 잘 가 십시오, 잘 가십시오."
첫댓글 "낭믄", "1354년, 나하추는 결국 명나라에 항복하고 만다" 이 두부분 오타 있네요.
정도전 명대사 나오겠네요 이인임의 말이 옳았구나. 박영규가 어떤 포스를 풍기며 저 대사를 읊을지 기대되네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최영과 이성계...기대 되군요..
크~ 한국사의 몇 안되는 명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