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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5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이사 48,17-19
복 음 : 마태 11,16-19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17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18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19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본당에 어떤 행사를 계획하면 꼼꼼하게 챙겨야 할 것이 많아집니다.
다가오는 성탄 자정 미사를 위한 준비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전례는 어떻게 해야 할지, 성가는 무엇이 좋을지, 미사 후의 뒤풀이는 어떻게 할지,
그날의 봉사자는 어떤 단체가 해야 할지 등등…. 신경 쓸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매일 하는 것이 아닌 일 년에 딱 한 번 맞이하는 예수님의 기쁜 성탄이기에
특히 신경 써야 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성탄을 기억하면서 잘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구원일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마태 24,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체적인 계획이 하나도 없습니다. 분명히 중요한 일인데도 말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무계획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무계획은 주님을 오롯이 따르겠다는 고백을 통해,
즉 주님께 바치는 기도에 의해 채워지는 것이었습니다.
당신께 대한 믿음, 당신 뜻을 따르는 사랑 실천을 통해
하느님의 무계획이 조금씩 채워져 구원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라는 말씀만 보고서
아직도 그날이 멀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삶으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어 가는 것이기에 아직 무계획처럼 보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삶으로 채워지는 계획이기에 지금은 무계획처럼 보이지만,
계속 미루다가는 커다란 후회만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세대를 장터에서 노는 아이에 비유 하십니다.
피리를 불면 함께 춤을 추면서 즐겨야 하고, 곡을 하면 함께 가슴을 치면서 아파해야 하는데,
지금 세대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만 현세의 행복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귀를 막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자, 마귀가 들렸다고 하고,
예수님께서 드시고 마시자, 먹보요 술꾼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고 또 받아들이지 않으니,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것도 불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의 뜻에 함께하면서 하느님의 무계획을 채워야 하는데,
예수님을 오히려 반대하면서 하느님의 계획에 동참하지 못하게 됩니다.
계속해서 뒤로 미루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도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 세상 것을 모두 채우고 나서야 하느님의 일을 따르겠다는
안일하고 자기 편한 마음을 따르는 것이 아닐까요? 크게 후회할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6-17)
이 비유의 뜻은 명료합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의 놀이는
요한의 '회개의 세례의 선포'(마르 1,4; 루카 3,3)에도 회개의 가슴을 치지 않고,
예수님의 '하늘나라의 복음의 선포'(마태 4,23; 9,35)에도
기뻐 춤추지 않는 세대를 말해줍니다.
혹 우리도 뉘우침의 눈물도, 복음의 기쁨도 없지 않은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이러한 타자에 대한 폐쇄와 계시에 대한 배척의 뿌리에는
무관심과 영적 무지와 완고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완고함’이란 마치 엎어져 있는 항아리를 보고
입이 없다고 투덜거리거나 바닥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바로 세워놓고 보면 입도 있고 바닥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 뿌리에는 바로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진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완고함’이란 사실을 바로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진 마음 때문에 ‘목이 뻣뻣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외침을 듣고도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귀신 들렸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도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먹보요, 술꾼이요, 죄인들의 친구’라고 조롱합니다.
사실 이쯤 되면, 예수님의 사랑은 안타까움과 비탄을 넘어 아픔입니다.
결국 당신의 사랑은 춤추지도 곡하지도 않는 냉대와 완고함이라는 가시에 찔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됩니다.
사랑이 거부당한 아픔입니다.
내가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고 냉대할 때, 바로 그러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의 사랑을 거부하고 완고할 때, 그렇게 당신의 눈에는 눈물이 흐를 것입니다.
내가 내 형제를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은 그렇게 가시에 찔릴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하신 일은 십자가에 달리시어
자신을 ‘깨뜨려’ 찢고 나누어 건네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면,
예수님의 그 피와 살을 먹고 자신도 ‘부서져’ 쪼개고 나누어져
다른 이에게 건네주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실 때 벌리시는 일은
우리를 ‘깨뜨리고 부수는’ 일이요,
진정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가 ‘찢기어지고 나누어지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힘이 있고, 살아 있으며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 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의 영께서 오시어 벌리시는 일은
우리와의 교제와 친교로 진리를 깨닫게 하고 새롭게 하여,
변화와 성화로 주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성령께 응답한다면,
다윗이 주님의 계약 궤 앞에서 춤추었던 것처럼 우리도 춤추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과 영을 제 마음에 들게 맞추기보다
제가 꺾이고 부서져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마태 11,17)
주님!
제 마음이 무디어져 있습니다.
빛보다 어둠에 치우쳐 있습니다.
불의를 보고도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진리를 보고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제가 당신의 말씀을 냉대할 때, 당신의 가슴은 가시에 찔리셨을 것입니다.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의 눈은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이제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치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울고 함께 웃게 하소서!
완고함의 벽을 헐고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가끔 미사를 봉헌하는 ‘꿈’을 꾸지만, 며칠 전에는 아주 생생한 꿈을 꾸었습니다.
미국에서 사목하는 선배 신부님의 서품 4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였습니다.
신부님들이 10명 이상 모였고, 교우들도 많이 왔습니다.
신부님 중에 한 분이 몸이 불편하신 장애인이었습니다.
불편한 몸으로 주례 사제 옆에서 복사를 서는데 그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하였지만 제게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미사에 함께하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제의를 깜빡하고 놓고 와서 다시 제의를 가지러 갔습니다.
교구청에서 5년, 미국의 가톨릭평화신문에서 5년째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10년 가까이 본당을 떠나있었기에 그런 꿈을 꾼 것 같았습니다.
물고기는 물에 살아야 하듯이,
사제는 교우들과 함께 지낼 때가 가장 보람 있고, 행복한 것 같습니다.
황량한 사막에 오아시스가 있어서 먼 길 가는 나그네에게 위로가 되는 것처럼,
매 주일 함께 하는 부르클린 한인 성당의 미사는 제게는 오아시스와 같습니다.
지난 10월 한국에 휴가 갔을 때입니다.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지내던 동창신부님이 20년 만에 본당신부가 되었습니다.
사제생활 32년 중에 10년은 유학갔었고, 20년은 학생들을 가르쳤고,
드디어 첫 본당의 주임신부가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SNS에 교우들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사진과 글을 통해서 공유하고 있습니다.
참기름이 고소한 것처럼, 신부님의 첫 본당 생활에 깨가 쏟아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본당의 외벽을 도색한 이야기, 사목위원 연수 이야기, 시니어 아카데미 학생들의 공연 이야기,
레지오 단원들 훈화 이야기, 장례 미사 이야기, 혼배 주례 이야기,
주일학교 학생들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습니다.
신부님의 행복한 모습을 보니, 마치 먼 여행을 마치고 그리운 가족들의 품으로 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행복은 거창한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은 모든 것이 충족되면서 시작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은 작은 것들에서도 감사할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행복은 해야 할 것들을 마땅히 사랑할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불행은 고난과 고통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불행은 결핍과 가난에서 시작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불편할 수 있지만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결핍과 가난 속에서도 행복은 씨를 뿌리고 꽃이 피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불행은 어디에서 시작될까요?
오늘 제1독서는 불행의 시작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에서 멀어지면 불행은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잊어버리면 불행은 불쑥 찾아옵니다.
그렇습니다. 불행은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멀리하면서 찾아옵니다.
행복은 작은 일에 감사하고, 해야 할 일을 사랑할 때 찾아옵니다.
오늘 화답송은 그래서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 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비록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고 하여도 아쉽지 않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불행한 삶을 사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사랑하며 행복한 날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울어주고
반영억 라파엘 신부
자기주장을 펴고 그것만이 옳다고 우기는 세상이 되어갑니다.
자기 뜻대로 하기를 원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틀렸다고 말합니다.
다름을 인정하기보다 서로를 비난합니다.
정치 현실을 보면, 여당과 야당은 옳고 그름,
더 큰 선을 지향하는 정책과는 상관없이 갈라져 싸웁니다.
세대 간의 갈등도 만만찮습니다. 마음 한 번 굽으면 모든 것이 굽어 보이게 마련입니다.
거짓은 거짓을 키워가고 결국 악은 악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결코 하늘의 그물은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넉넉함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성숙함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장터에 앉아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11,17).고 말하는 아이들의 비유를 통해
제 뜻대로 하자고 우기는 세상을 드러내 줍니다.
제 입맛에 맞지 않으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서로 다른 것을 틀렸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그러니 거기에 하느님의 말씀이 어찌 제대로 통하겠습니까?
자기 마음에 들면 하하거리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투덜대는 세상에서
누구의 비위를 맞추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아주 엄격한 속죄의 생활을 하였던 요한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마귀 들린 사람으로 취급했고, 버림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기를 거리끼지 않는 예수님을 보고는
너무 세속적이라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굽어서 이것도 저것도 다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요한의 길을 가는 것이요, 예수님은 예수님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의 비위를 맞출 이유도 없이 아버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대나 요한의 시대나 마음이 굽어있는 이상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의 눈이 뜨이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누구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가야 할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가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것은, 선한 것으로 봐줄 줄 알아야 합니다.
잘못된 것은 인정하고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함께 피리를 불 줄 알아야 하고, 함께 장례 놀이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 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 몸이 온통 환할 것이다”(루카11,34-3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이 우리 영혼을 환하게 비추어 언제나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들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서로를 존중하고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뜻을 알고 행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 또 성도들과 함께 여러분이 물려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알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에페1,1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 비유를 말씀하신다.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례자 요한도 배척하였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리며 식사하시는 예수님도 배척하였다.
그 모습이 마치 장터에서 편을 갈라 노는 아이들과 같다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17절),
즉 우리는 너희가 선행하도록 노래를 불러 주었지만, 너희는 그렇게 하기를 싫어했다.
너희가 회개하라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17절), 너희는 회개하지 않았다.
이렇게 두 가지 선포, 즉 지은 죄를 회개하라는 것과 선행에 힘쓰라는 권고를 다 거부했다.
이는 바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요한을 마귀 들렸다하고, 예수께는 먹보요 술꾼이라고 했다.
그들이 둘 가운데 어떤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의 비유는
바로 세례자 요한의 엄격함도, 그리스도의 자유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어떤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마르 1,4)할 때,
자신을 회개해야 할 사람의 본보기로 제시했고,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마태 4,23; 9,35)하실 때,
당신 안의 빛나는 자유를 보여주셨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그려 보여주셨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19절)
지혜는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서 자신이 전에 주었던 선물을 빼앗아,
순종하며 믿음 깊은 백성에게 선물로 준다.
지혜의 선물은 사용하지 않으면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으로 잃어버리고도 알지를 못한다.
요한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삶이 달라졌다.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을 위해 그 지혜를 사용했다.
유다인들은 요한의 단식과 금욕적인 삶을 보고서도,
주 그리스도의 순종하는 삶의 모습과 하늘나라에 대한 약속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지혜롭게 완성하신 분을 단죄하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그분을 살아계신 지혜라고 생각한다.
그분은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는 고약한 대접을 받으셨지만,
그들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라고 부르신다.
사람이 복음에 무감각한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
예수님은 당신과 세례자 요한에게 무관심한 이 세대를 질타하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여기서 피리는 세례자 요한을 의미할 수 있고
곡을 함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춤을 춘다는 행위는 자기를 버리는 행위이고
곡을 한다는 행위는 누군가의 마음과 하나 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세상은 구원에 무관심할까요?
그분의 가르침을 따를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없으면 안 믿어야 할 ‘핑계’만 늘어납니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습니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핑계 대지 않고 믿게 할 마음, 곧 “착한 뜻”을 갖게 만드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를 먼저 받아들이지 않으면 착한 뜻이 생기지 않습니다.
착한 뜻이 없으면 그 사람에게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은 가치를 잃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반면 지혜가 들어가 그 사람 안에 착한 뜻을 갖추게 하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놀라운 표징이 됩니다.
곽상빈 변호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스팩을 지녔다고 여겨집니다.
그는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공인회계사, 증권분석사, 감정평가사,
변호사, 손해사정사, 가맹거래사, 경영지도사, CIIA(국제공인투자분석사) 등
전문직 자격증 30여 개를 소지하고 있습니다.
남들은 150년이 걸려야 할 따낼 수 있는 자격증을 10년에 다 땄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머리가 좋았을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했던 사람은 아닙니다. 고등학교도 선린인터넷고등학교란 곳을 나왔습니다.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서서 다섯 가족은 거의 길거리 나앉다시피 하였습니다.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형제들마저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 상황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마음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교회에서 목사님이 우리 안에 주님께서 능력을 넣어주셨고
그 능력으로 이웃을 위해 무한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세상에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합니다.
불만과 죽고 싶은 마음을 접고 공부해 보기로 합니다.
죽기 살기로 하니 3개월 만에 열 개의 자격증을 따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편안하게 살고 싶은 마음을 버리고 광야의 삶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을까요?
바로 세례자 요한을 만난 것입니다.
그가 세례자 요한을 만난 이유는 세상에 좋은 일을 하려는 ‘착한 뜻’을 장착하였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세상에 좋은 일을 하게 만들기 위해 자기와 싸워 이기도록 이끄는 인물입니다.
이것을 넘어서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힘은 ‘감사’입니다.
곽상빈 씨가 군대에 들어갔을 때 악마 같은 선임이 있었습니다.
그를 너무 견디기 어려워 그는 친구를 모아 하느님께 예배드렸습니다.
주님께 의탁하니 일이 잘 풀렸습니다.
시험을 얼마 앞두고 맹장이 터졌을 때도 주님께서 살려주셨습니다.
이런 것을 통해 하느님께 감사하게 되니 이젠 내가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께 감사하여 보답하는 삶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요한을 만나는 것도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도 모두 지혜가 심어준 착한 뜻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자 하는 착한 뜻이 없으면
그 착한 뜻의 열매를 맺게 하는 예언자와 주님에게 무관심하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저에게는 이 광야가 신학교였고 세례자 요한이 ‘하.사.시’였습니다.
하.사.시를 읽은 것은 주일학교 교사를 하는데
아이들에게 예수님을 더 잘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신학교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라고 하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려는 착한 뜻 때문에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그리스도는 착한 뜻을 실천하는 방법과 힘을 주시는 분들입니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을 가집시다.
그러면 그분들을 순서대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 놀이
박상대 마르코 신부
세례자 요한의 선구자적 역할과 메시아의 실제적 도래로 말미암아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다.
세례자 요한을 끝으로 더 이상의 메시아에 관한 예언은 있을 수 없다.(13절)
이미 이 세상에 메시아가 도래했고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자기 안에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의적으로 이를 배척하고 거부하고 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고의적인 배척과 거부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이미 역사 안에 사실로 드러났다.
이사야 예언자는 외친다.
“주님인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네가 잘되도록 가르치는 너의 스승이요, 네가 걸어가야할 길로 인도하는 너의 길잡이다.
네가 만일 나의 명령을 마음에 두었더라면, 너의 평화는 강물처럼 넘쳐흐르고,
너의 정의는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으리라.”(이사 48,17b-18)
결국 이스라엘은 주님이신 스승을 외면하고 엉뚱한 길을 걸어갔고,
이스라엘의 바빌론 유배가 그 결과였던 것이다.
예수님 시대 사람들도 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태도를
‘잔치 놀이’와 ‘장례 놀이’에 함께 하지 않는 아이들에 비유하신다.
예수께서는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과 메시아이신 당신을 받아들여
이 땅 위에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깨닫고 이를 향하여 자신의 삶을 질서 지우는 태도를
‘하느님 나라 놀이’에 함께 노는 것으로 비유하신다.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의 비유에서
‘피리와 춤’은 잔치 놀이를, ‘곡과 울음’은 장례 놀이를 의미한다.(15절)
그런데 편을 갈라 앉은 아이들이 서로 다른 편의 놀이에 같이 놀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놀이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다.
잔치 놀이에는 술과 음식, 춤과 여흥이 필요하고,
장례 놀이에는 금욕과 절제, 울음과 긴장이 필요하다.
따라서 장례 놀이는 회개와 참회의 세례를 선포했던 금욕주의자 요한에 비유되고,
잔치 놀이는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기뻐하고 食飮하시는 예수님에 비유되고 있다.
‘하느님 나라 놀이’에 함께 놀아주지 않는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장터에서 편 갈라 앉은 아이들보다 더 나쁘다.
그들은 놀이를 함께 하지 않고 구경만 할 뿐 아니라,
놀이를 주관하는 주체를 야유하고 비난하여, 세례자 요한더러는 ‘미쳤다’(18절)고 하고,
예수를 두고는 ‘세리와 죄인들하고만 어울린다.’(19절)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하느님의 지혜가 있다.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이미 도래한 하느님 나라에 의해 밝혀지겠지만,
당장은 이 세대의 눈에 가려져 있음이 안타까운 것이다.
하느님의 지혜는 스스로 자신을 찬미하고, 군중 속에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낸다.
하느님의 지혜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입으로부터 나왔으며, 안개와 같이 온 땅을 뒤덮었다.
하느님의 지혜는 높은 하늘을 두루 다니고,
심연의 밑바닥을 거닐면서 온 땅과 모든 민족과 나라를 지배하였다.
하느님의 지혜는 이 모든 것들 틈에서 안식처를 구했으며
어떤 곳에 정착할까 하고 찾아다녔다.(집회 24,1-7 참조)
하느님의 지혜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의 마음 안에 안식처를 구하여 정착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내 안에 먼저 하느님의 지혜가 잉태되어야 한다.
이 지혜가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준다.
어느 때에 잔치 놀이를 하여야 하고, 또 어느 때에 장례 놀이를 하여야 하는지를 말이다.
그래서 주님의 성탄은 매년 오는 것이다.
내 안에 하느님의 지혜가 탄생할 때까지 말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그들은 요한의 말도 사람의 아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
이승화 시몬 신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해왔던 일만 지속하면서
새로움이 찾아오길 바랄 수는 없습니다.
새로움은 시도에서 찾아오고
시도는 의지에서 나오며
의지는 품고 있는 희망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
곧 구체적으로 갈망하며 절실하지 않은 사람은
길을 알려주어도 찾아가지 않고
삶을 보여주어도 관심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피리를 불어 주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습니다.
그저 멀리서 평가와 비판만 하면서 자기만족에 머물 뿐입니다.
그러니 신앙인들은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누리게 될 영광을 꿈꾸고
하느님이 내 안에 오심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하며
하느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세례자 요한은 옳았습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나듯
일상에 만족하고 머무는 이에게는 그 정도의 삶이 주어지고
희망을 품고 나아가는 이에게는 결실이 주어집니다.
그러니 우리도 기도합니다.
내가 품고 있는 꿈이 무엇인지 돌아보며
주님 안에서 꿈을 이뤄나갈 수 있기를
그리하여 하느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그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