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간단했다. 서양에서 불교를 접했던 이야기에 대해 글을 하나 썼고, 스님이 댓글을 달았다. (28. 채식으로 밥 해먹기에 도전. 쾰른의 불교신자 미리암 아주머니와 카우치서핑을 하다.http://bananabackpack.egloos.com/2281986) 스님 블로그를 찾아보니, 18개월의 아시아+유럽+아프리카 여행을 계획하고 계신 분이었다. 호기심이 마구 생겨 바로 카우치서핑으로 쪽지를 보냈고, 딱 3일 후에 해인사로 내려갔다. 원래 생각이 많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법이다. 뭐든 일단 행동부터 해야한다. 500만원 들고 6개월 다녀온 것도 생각을 깊이 했으면 못 했을 것이다.
2월 26일. 내 생일 다음날이다. 페이스북에 생일 축하한다던 외국인 친구에게, “생일 여행”을 간다는 댓글을 달았다.
이번에 처음 해 본게 엄청 많다. 다 처음이다. 국내 여행도 처음이고, 전라북도에 가는 것도 처음이고, 절에 찾아 가는 것도 처음이고, 스님 만나러 가는 것도 처음이고 하여간 서울 촌놈이 드디어 세상 구경 한다. 그리고 특히나 해인사를 가보고 싶었던게, 세계 각국의 유적지, 관광지를 가보며 만나게 되는 호스트들에게 한국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서 팔만대장경에 대한 말을 많이 해왔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목판이 한국에 있으며, 당시 우리의 인쇄기술이 어쨌노라고 침을 튀기며 말을 했던 적이 있는데, 정작 나는 한번도 우리나라는 다녀본 적이 없으니 약간은 부끄러웠다. 어쨌든 이렇게 인연이 닿아 여행다녀온지 1년만에 여행을 또 가는구나!
버스에서 자다 일어나니, 금강휴게소. 생각해보니 금강도 처음이다.
항상 현실은 생각과는 조금 다르다. 내가 다녔던 6개월 여행에 대해 굉장히 낭만적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실상은 매일매일 이동수단, 밥, 숙박 문제들과의 싸움이었던 것 처럼, 나도 뭔가 비현실적인 낭만을 기대했나보다. 기왕 4시간이나 버스 타고 가야되는거 옆자리에 예쁜 아가씨 한분 앉아서 가면 좋겠다.. 생각하며 버스에 오르는데 버스에는 대부분 할머니, 할아버지들. 아가씨는 한명도 없네. 그래도 옆에 계셨던 할머니와 과자 같이 까먹으며 내려왔다.
바람이 많이 불어 추웠지만, 강 앞에서 폼잡고 사색하는 척을 했다. 난 여행중이니까!?
여긴 내가 여태 가본 휴게소들 중 가장 인상적인 곳이었다. (서울 촌놈이 이때까지 가본 휴게소가 몇 개나 되겠냐만..) 강을 끼고 휴게소가 있는데, 가운데 식당가 건물을 중심으로 서울쪽과 부산쪽으로 휴게소가 나눠져있다. 그러니까 한 곳에 두 개의 휴게소가 있는 셈. 강 구경도 할 수 있었고, 여행 시작부터 뭔가 잘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고령 버스터미널. 주말에 타지에 가셨다가, 일요일 아침에 댁으로 돌아가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서울에서 고령 내려가는 버스에서 내 옆에 타셨던 할머니도, 주말이라 아들딸들 보러 서울 올라 오셨다가 내려가시는 분이셨다. 역시나 저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가셨다. 연령대가 확 높아지는 것을 보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학교다니며 이촌향도 같은 것들에 대해 책으로 배우긴 했지만, 직접 보는 것은 뭔가 달랐다.
해인사 앞 주유소. 엥? 가야산 중턱에 주유소가 있다니?
서울에서 고령까지 4시간, 고령에서 30분 대기하다가, 해인사까지 1시간. 버스타고 가다가 주유소에 서서 보니 해인사까지 걸어서 1.6km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아저씨 저 그냥 내려서 걸어갈께요” 스님께 말씀드린 예정 도착시간이 약간 촉박하긴 하지만 인생 별거 있나.. 금방 도착 하겠지..
산 곳곳에 암자와 선원이 있다. 가운데 보이는 큰 것이 해인사.
해인사로 가는 길. 소풍나온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꽤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명해서인지 외국인들도 많이 보인다.
두둥 가야산 해인사!! 드디어 도착. 두근두근 하다. 사실 절이라곤 외국인 친구 인사동 데리고 다니다가 옆에 있는 조계사 잠깐 가봤던게 전부.
입구로 들어가 계속 올라가면 보이는 대적광전. 예불을 올리는 큰 법당이다. 저 뒤로는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법보전이 있다.
그리고 원제스님이 찾아오라 하셨던 퇴설당. 여기 뒤로는 큰스님이신 법전스님께서 계시는 곳이다.
난 뭐든 가급적 혼자 해결해 보려는 습성이 있는데, 덕분에 위의 대적광전 근처에서 열심히 헤메다가 못찾아서 그냥 연락을 드렸다. "스님 저 다 왔습니다. 팔만대장경판 있는데 바로 밑인데 퇴설당이 저기 일반인 출입금지라고 쓰여져 있는 곳 맞습니까??“
퇴설당에 들어가 원제스님을 만났다. 18개월의 유라시카 여행을 준비하시는 스님이라.. 카우치서핑으로 (혹은 인터넷으로) 사람을 만나면, 만나는 순간의 느낌이 있다. 모니터의 사진으로 봤던 사람이 모니터를 비집고 나온 느낌. 그냥 평소에 생각하던 스님? 의 이미지와는 다른 분위기에 마음이 더 편했다.
핸드 드립 커피와 코스트코 치즈케익. 전생에 미국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농담을 하시는 원제스님.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직접 경험하는 것과 그냥 상상하는 것과는 현실에 큰 괴리가 있는데, 나는 절을 가본 적도 없고 스님을 만나본 적도 없다보니, 어릴 적 위인전 읽었을 때 생각하던 사명대사, 원효대사의 추상적 이미지를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누다보니, 이분들도 다 현실세계?!에 살고 계신 사람이구나 싶었다. 그냥 동네 형같이 편했다.
보통 밖에서는 스님이라 하면 녹차만 마시는 줄 아는데, 스님께선 커피를 더 좋아 하신단다. 커피에 대해서는 거의 전문가! 사실 나도 왠지 녹차에 떡을 하나 먹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빵에 초콜릿까지 내어 주셔서 약간 놀랐다 ^^;; 그렇게 커피를 마시고, 차를 또 마시고, 저녁밥을 먹고(절에서는 공양), 또 얘기를 하다 보니 시간 참 잘 가더라. 여행이라는 비슷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의 대화는 항상 즐겁다.
18개월의 여행을 위해 장만하셨다는 사진기. 다음 날은 같이 사진기 들고 산책에 나섰다.
팔만대장경(고려대장경)이 있는 해인사의 꼭대기. 안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
사진을 못 찍어서 해인사 웹사이트에서 퍼왔다 ^^;; 저 안쪽에 있는 법보전이라는 곳이 풍수지리상 기운이 가장 강한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팔만대장경을 모셔 놓았고, 지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 이렇게 국사책으로만 보던 팔만대장경을 직접 보게 되었다.
안쪽의 법보전은 위쪽 창이 작고 아래쪽 창이 넓은데, 바깥쪽의 수다라장은 위쪽 창이 크고 아래쪽 창이 작다. 팔만대장경의 보관을 위한 통풍장치라고 한다. 그 옛날에 지은 건물인데도,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선조들의 기술이 참 대단하다. 하긴 그러니까 지금까지도 박물관이 아닌 해인사에 있겠지...
개인적으로 박물관에 가서 보는 건 컴퓨터로 찾아보는 것과 별 다른 것 없는 것 같아 딱히 좋아하지 않는데, 세계 어디를 가도 대부분 이런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물은 다 박물관에 고이 보관되어 있었다.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있는 유물을 아직도 해인사에 보관하고 있다는 점도 자랑할 만한 일이다!
그렇게 팔만대장경을 쭉 보고 나오면 안에서 사진을 못 찍어 아쉬운 관광객들을 위한 포토존이 있다. 이렇게 포토존을 만들어 놓은 곳은 처음이었다 :)
해인사 정문 앞에 있는 사대천왕과 설명을 해 주시는 원제스님.
스님은 왜 출가를 하셨습니까?, 스님은 왜 여행을 계획하고 계십니까? 출가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불교에서의 참선과 수행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선(禪)이란 무엇입니까? 화두수행은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스님의 일과는 어떻습니까? 밥 먹는 것은 왜 공양이라고 합니까? 공양 중 묵언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불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스님이 되는 과정은 어떻습니까? 조계종과 다른 종과의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스님들도 음주-흡연을 합니까? 육식은 절대 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문 앞에 사대천왕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등등 물어본 게 참 많았다. 들은 것도 많다.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련암 올라가는 길이었던 것으로 기억. 사진도 찍고.
성철스님 사리가 모셔진 곳. 사실 전까지는 성철스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몰랐다. 또 다시 질문이 시작. 성철 스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해인사 기준 백련암 반대편 쪽에 있는 암자. 한번 찾아 올라가보고 싶었으나, 헤메다가 포기했다. 가장 맘에 드는 사진.
그렇게 둘째 날 하루 낮에 원제스님과 함께 몇 시간이나 해인사 주변을 돌아다니며 얘기를 나누다가 돌아왔다. 오랜만에 안 쓰던 몸을 쓰다 보니 다리가 적응을 잘 못했다. 6개월간 여행 다닐 때는 20kg가까이 되는 배낭 매고 거의 매일 10km정도 걸어 다녔는데.. 벌써 서울 생활에 너무 풀어졌나보다..
혼자 다니다가 발견한 암자. 사람 한 명 안보이고 한적한 분위기가 묘했다.
해인사의 식사(공양). 밥 먹는 것도 수행의 일부라서 묵언을 지켜야 한다. 공양 중 묵언도 하는데 사진 찍는 것은 더 하면 안되는 것 같았지만, 기록의 욕구를 참지 못해 한 장 찍었다. 큰 잘못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밤에 자는데 잠이 너무 안 온다. 엎치락뒤치락 하다 보니 벌서 한시. 11시쯤 누웠는데 두 시간이나 못 자고 있었다. 절의 밤은 어떨까 싶어 산책을 나왔다. 팔만대장경 있는 곳에 혼자 들어가 보면 어떨까 하는 발칙한 생각도 0.5초정도 했지만, 큰 일 치르게 될 것 같아서 조용히 사진 한 장 찍고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 해인사 버스 정류장. 6시 40분부터 고령으로 가는 첫 차가 있다. 짧은 여행 마치고 이렇게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구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6개월 여행 후, 다시는 동행 없이 혼자 여행가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나오니 또 혼자 다니는 맛이 있다. 뭘 하느냐 만큼 누구를 만나느냐가 참 중요한데, 좋은 스님 만나서 많은 얘기 나눌 수 있었고,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카우치서핑이나 히치하이킹에 대해서 많이 알려드리고 싶어서 찾아 갔던 것도 있는데, 내가 알려드리진 못하고 계속 질문만 하다 와서 약간 아쉽긴 하다 ^^;; 이것도 인연인데.. 가끔씩 만나게 될 수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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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뭔가가 있는듯 합니다.바나나님은? ㅎㅎ 글을 또 언제 올리시나? 기다려 지게도 만드는.... 저만 그럴지 몰르겠지만요? ㅎ 편안하게 잘 읽고 잘 감상했어요.^^
저도 오랜만에 너무 기분 좋은 댓글이네요 ^^ 정말 감사합니다. 누가 내 글을 이렇게 재미있게 읽어준다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이네요 ㅠㅠ 엉엉 댓글 없으면 가끔 힘빠질때도 있는데
전북 고령이 아니구요.. ㅎ
경북 고령이고.. 해인사 주소지는 경남 합천 이여요.. 그래서 합천 해인사 라고 하죠..화이팅~!! ㅎㅎ
네 ㅠ 쓸때 헷갈렸나봐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