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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6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 집회 48,1-4.9-11
복 음 : 마태 17,10-13
산에서 내려올 때에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11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13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떤 사람이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갔습니다.
취업도 되지 않고, 집에 안 좋은 일이 계속되어서 너무 힘든 상황에서
친한 친구가 이 점쟁이를 소개해 준 것입니다.
그는 삶이 너무 힘들어서 믿지 않는다면서도 시간을 내서 찾아갑니다.
점쟁이는 꽤 긴 시간 동안 점을 보더니 갑자기 큰 절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 될 팔자입니다.”
이 사람은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점쟁이가 절까지 하는 것을 보면,
이 어려운 시간은 금세 지나가고 분명히 왕이 될 것 같았습니다.
지금 시대에는 왕이 없으니 ‘대통령이 되는 것일까?’ 싶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그는 ‘아직 때가 안 되었을 뿐’이라면서 계속 기다리기만 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남자는 아무것도 되지 않았습니다.
저절로 되는 것이란 없습니다. 노력해야 여기에 걸맞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노력 없이 왕이 될 수 있을까요? 혹시 모르겠습니다.
‘게으름의 왕’도 왕이라고 한다면 말이지요.
어떤 사람의 ‘인맥’이 대단하다면서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합니다.
그렇다면 저절로 그 인맥이 생기고, 좋은 관계도 저절로 된 이루어진 것일까요?
그만큼 노력했기에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좋은 관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과의 관계는 어떠한지 묵상해 보셨으면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무엇인가를 맡긴 듯이
계속 요구만 하고 있으면서 하느님과 좋은 관계가 형성될 수 있을까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라고 묻습니다.
말라기서에 이런 구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말라 3,23)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지요.
문제는 엘리야가 왔지만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룬 것입니다.
엘리야를 알아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도 없었기에
세례자 요한을 함부로 다룬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그칠까요?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향해서도 고난을 줄 뿐이었습니다.
주님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먼저 해야 구원의 길에 가까워집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타볼산에서의 거룩한 변모 후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 17,10)
엘리야의 재림에 대해서는 이미 <말라키서>(3,1,23)에서는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에게 내린 율법과 규정을 기억하라는 말(3,22) 함께 언급됩니다.
그러니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의 관계에 대한 물음입니다.
여기에는 엘리야가 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메시아일 수 있느냐는
율법학자들의 주장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마태 17,11)라고
엘리야의 사명도 밝히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알아보지 못했음을 말씀하시면서,
마찬가지로 이미 와 있는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한 그들은 이미 와 있는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듯이,
이제 당신께서도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받게 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결국,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함을 말해주며,
엘리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암시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야도 메시아도 ‘이미’ 왔지만,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 가운데 와 계신 분을 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는 영적인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특히 성탄을 준비하면서 ‘먼저’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바로잡는 엘리야의 인도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완고함과 비뚤어진 마음과 악의로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하면,
그분은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그분을 버림받지 않고,
박해받지 않도록 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더 이상은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으신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있기 마련인 고난에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음에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4,13).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주님!
제 눈이 가려져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빛을 피하고 어둠을 좋아한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제 가슴이 굳어져 당신을 맞아들이지 못함은
진리보다 제 자신으로 꽉 채운 완고함과 오만이었습니다.
빛이요 진리이신 주님! 저를 밝히소서.
제 어리석음과 완고함을 걷어내소서. 오만불손함을 태우소서.
제가 밝아져, 더 이상은 당신을 제멋대로 다루지 않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대림시기에 준비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본당에서는 대림특강과 성탄판공을 준비합니다.
대림특강을 통해서 주님 성탄의 의미를 마음에 담는 것입니다.
마음에 담았다면 예물을 준비했던 동방박사처럼 우리들 또한 주님께 예물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탄생을 가장 먼저 와서 경배했던 목동들처럼 깨어 주님의 탄생을 맞이해야 합니다.
성탄판공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있는 죄의 뿌리들을 없애야 합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모시는 최초의 구유가 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을 맞이하는 정갈한 구유로 만들어야 합니다.
날마다 성전에서 기도했던 시메온과 한나처럼 기도하며 주님의 탄생을 축복해야 합니다.
저는 지난 10일에 코네티컷 한인성당에서 ‘대림특강’을 하였습니다.
주제는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VIP' 그리고 신앙의 'MVP' 되자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으뜸과 세상의 최고는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선악과를 쟁취하는 것이지만,
신앙의 으뜸과 신앙의 최고는 회개하는 것이고, 회개했다면 삶으로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의 으뜸과 신앙의 최고가 되어 주님의 성탄을 기쁘게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교회의 전례는 대림시기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대림시기 전례에 사용하는 두 가지 감사송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마련해 주셨음을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겠다고 다짐합니다.
독서와 복음도 이런 전례의 구조에 맞게 정해졌습니다. 두 번째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모든 예언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미리 알려주었고
동정 성모님께서는 극진한 사랑으로 그분을 품어 주셨으며
요한은 오실 분을 미리 알려주고 이미 와 계신 그분을 가리켜 주었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가 깨어 기도하고 기쁘게 찬미의 노래를 부르면서
성탄 축제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하셨나이다.”
독서와 복음도 이런 전례의 구조에 맞게 정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족보, 천사 가브리엘의 예고, 마리아와 요셉의 순명,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 주님의 탄생 그리고 천사들의 경배로 정점을 이루게 됩니다.
2000년 전에 있었던 주님의 성탄이 이제 우리의 삶에서 ‘재현’되고 있음을 기쁘게 맞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년 전례를 통해서 성탄을 준비하고, 맞이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성탄’은 그저 통과의례로 연말연시의 과정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성탄’은 그저 2000년 전에 있었던 한 사건에 대한 기억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성탄’은 어린 시절 가슴이 설렜던 빛바랜 추억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성탄’은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은 일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성탄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멀리 동방에서 주님의 성탄을 축하하러 왔던 동방박사들처럼
우리도 주님의 성탄을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성탄에 합당한 예물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정화되어 이제 내가 주님을 맞이하는 구유가 되면 좋겠습니다.
시메온과 한나처럼 침묵과 관상 속에서 주님의 성탄을 경건하게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유다인들은 메시아가 오시기에 앞서 그가 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전령이요 선구자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마지막 예언서인 말라기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3,23-24).
이 본문은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에게 신앙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엘리야가 ‘이미 왔는데’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세례자 요한이 바로 메시아에 앞서 오게 되어있는 엘리야인데 그를 몰라본 것입니다.
루카복음 1장16절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하고 천사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1,23)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하느님 나라를 위해 백성들을 준비시킨
마지막 때의 예언자로서 엘리야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대의 표징을 알아보지 못하고 요한을 제멋대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음에도
헤로디아의 딸에게 헛된 맹세를 하여 결국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마르6,26).
그러나 헤로데만 그를 죽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은 모두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요한의 외침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디아는 헤로데 동생인 필리포스의 아내입니다. 그러나 헤로데와 혼인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 했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길을 거부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는 욕심과 똥고집이 있을 수 있는데
이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도 요한을 죽인 공범자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의 징표를 읽고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언자도 메시아도 결코 만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언자 엘리야의 역할을 한 요한을 알아보지 못했고
결국 메시아이신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를 죽인 그들이 결국은 예수님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사악하기보다도 자기 안에 갇힌 무지의 탓이 크다 할 것입니다.
물론 요한의 죽음이 단순히 한 왕의 방자한 변덕과 경솔한 맹세의 결과가 아니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요한12,24) 메시아적인 구원의 죽음이었지만,
이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자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삶이었습니다.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온다는 진리를 알면,
주님을 따름에 있어 고통의 길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막연히 내가 그려놓은 주님을 기다리지 말고
주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시든지 제대로 알아볼 수 있도록 깨어있어야 합니다.
“오, 주님! 저는 당신을 몰랐나이다. 다만 지상의 일들을 알고 맛보려 했나이다.
주 하느님! 모든 것을 바꾸어 주시어 당신 안에 편히 쉬게 하소서”(십자가의 성 요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으나 알아보지 못하였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엘리야의 재림에 관해 이야기한다.
예수께서는 방금 제자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영광스러운 변모가 그분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왜 선구자인 엘리야가 나타나지 않는지 물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10절)
예수님은 요한 세례자를 엘리야로 소개하시지만,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화해와 재건을 이룩하지 못하고 참수당했기 때문에
재림한 엘리야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엘리야가 아직 재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음에 오실 메시아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예수님은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자 요한을 재림한 엘리야로 생각하였다(11,14 참조).
그러나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했다(14,3-12).
이렇게 메시아의 선구자가 배척을 당한 것처럼,
메시아이신 예수께서도 배척을 당하셨다(11,16-19 참조).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12절) 그를 감옥에 가두고 처형한 헤로데와 그들이 공범자였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12절)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그들이 엘리야에게 한 것과 같은 일을 당신도 당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엘리야가 이미 왔다.”(12절)는 말과 그에 대한 구원자의 설명을 듣고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깨달았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두 번 오신다고 말한다.
첫 번째 오심은 지금 오심이다. 바오로 사도는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줍니다.”(티토 2,11-12)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우리에게 오시는 그분을 잘 맞을 수 있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두 번째 오심에 대해 바오로는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티토 2,13)라 한다.
엘리야나 메시아의 참모습은 희생적인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 드러난다.
우리 자신이 엘리야가 되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은총의 선물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성체는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는 온전히 살아계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예수님께서 산을 내려 오면서, 제자들에게 선구자 세례자 요한,
그리고 당신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제멋대로’라는 표현에 한동안 멈춰 묵상을 해봅니다. 꽤 부정적인 뉘앙스로 여겨집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
이성적이거나 상식적인 사고나 판단이 배제된 즉흥적인 행동....
결국 ‘제멋대로’라는 표현은 진지한 성찰을 통한 신앙의 눈이 아니라
그저 인간적인 눈만으로 바라보고, 합리적인 규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고정관념이나 틀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닐까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바라보는 일부 몰지각한 유다인들의 시선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기대했던 선구자와 메시아의 모습이 따로 있었습니다.
좋은 가문을 배경으로, 무소불위의 권능과 휘황찬란한 복장을 한
화려하고 멋진 선구자와 메시아의 모습을 잔뜩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눈앞에 등장한 선구자는 어땠습니까?
외양부터 남루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얼굴은 평생토록 계속해 온 고행과 극기의 생활로 수척하고 거칠었습니다.
입고 있는 옷은 길바닥에서 주운 낙타털옷에다 맨발이었습니다.
거듭 외치는 예언의 말씀은 가슴을 후벼 파는 쌍날칼 같아 도무지 듣기가 민망했습니다.
예수님은 한술 더 떴습니다. 변방 중의 변방 갈릴래아 사람,
그중에서도 낙후된 깡촌 나자렛 사람이었습니다. 뒷배경도 시원찮았고 가방끈도 짧았습니다.
거기다 그가 하루, 온종일 어울리는 사람은 세리와 창녀, 죄인과 중병환자들이었습니다.
너무나 실망스러웠던 유다인들은 도저히 그들을 선구자요 메시아로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뚜렷한 징표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유다인들은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그릇된 고정관념, 끼고 있던 색안경으로 인해,
끝까지 그들을 거부하는 일생일대의 가장 큰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떤 선구자, 어떤 예언자, 어떤 메시아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까?
이번 성탄 우리는 과연 어떤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오늘도 매일의 성체성사 안에서 아기 예수님께서는 탄생하시고, 성장하시고,
고통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시는데,
우리는 너무 멀리서만 그분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성체는 물건이 아닙니다. 살아 있지 않은 사물이 아닙니다.
성체는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는 온전히 살아계십니다.
이것을 의식하며 그분을 받아 모실 때 우리는 더욱 온전히 살아 있게 되고,
그리하여 사도 바오로와 함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비니 플린, 성체성사의 일곱가지 비밀, 성바오로)
믿음과 불신의 대결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높은 산으로 데려가 자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체험하게 한 뒤(마태 17,1-9)
산을 내려 오면서 제자들과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이다.
대화내용의 핵심은 물론 엘리야와 메시아, 세례자 요한과 예수와의 관계이다.
대화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이는 제자들에게 요한과 예수님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염두에 두어야 할 내용은 지난 목요일의 복음이다.(마태 11,11-15)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모든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하셨고,
말라기 예언자가 특정한 때에 올 것으로 예언한
‘특사’와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임을 증언하셨다.
말라기 예언자는 “보아라, 나 이제 특사를 보내어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말라 3,1), 그리고
“야훼가 나타날 날, 그 무서운 날을 앞두고
내가 틀림없이 예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낸다.”(말라 3,23)고 하였다.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기 직전에 그 길을 닦을 야훼의 특사가먼저 올 것이며,
세상 종말에 야훼의 심판이 있기 전에 불 수레를 타고 승천했던(2열왕 2,11) 엘리야가
다시 와서 이스라엘의 화해와 재건을 도모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이 부분은 오늘 독서의 집회서(집회 48,1-4. 9-11)가 재삼 확인하고 있다.
‘집회서’는 이를 성서로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한 반대 입장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집회서는 기원전 132년경 예수 벤 시라에 의해 집필된 책으로서
자기 손자를 위해 희랍어로 번역해 둔 덕분에 우리에게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벤시라는 역사적 인물들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을 찬양하면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여호수아, 판관들, 다윗, 솔로몬 등 역대 선조들을 열거하는 가운데
기원전 850년경 북왕조에서 활동했던 엘리야와 엘리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벤 시라는 불 마차를 타고 불소용돌이 속 하늘로 올라갔던 엘리야가
주님의 심판 날에 다시 와서, 하느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 분노의 불을 끄고 아비들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하면서, 재림하는 엘리야를 볼 수 있고
그와 사랑으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을 노래하고 있다.(집회 48,9-11)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야훼의 종말 심판은 메시아에 의한 새로운 세상의 開闢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예언이 세례자 요한과 메시아이신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선포하고 계시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이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에 대한 단순한 불신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의 제자들도 세례자 요한의 정체성에 대하여
정확한 지식을 갖지 못하고 있다.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볼 때,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사명,
즉 이스라엘의 화해와 재건 도모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채
헤로데 안티파스에 의해 참수된 까닭에 ‘재림한 엘리야’가 될 수 없고,
따라서 메시아의 도래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예수가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의심은 예수님의 증언에 의해 차차 풀려가지만,
정작 해답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 속에 들어있다.
사람의 아들도 세례자 요한과 같은 대접을 받아 고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세 차례나 계속되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예고를 통하여
제자들은 차츰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참된 정체를 깨달아 간다.
이제 선구자와 메시아에 대한 제자들의 수용과 믿음은
바리사이와 율사들의 배척과 불신의 대결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허락된 은총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얻지 못하고,
그분의 부활 후에야 얻었던 믿음을, 예수님 성탄의 구유에서 앞당겨 갖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이승화 시몬 신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이가 두 명 있습니다.
한 명은 성조 이전의 에녹이고
또 한 명은 엘리야 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신앙의 순수함을 지켰고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며
더럽혀진 신앙을 정화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엘리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하늘을 닫아버리고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를 진정시키며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
이는 하느님 품으로 간 엘리야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며
동시에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알려줍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을 정화하면서
신앙의 순수함을 되찾으려는 모습
다시 하느님 품에서 충만함을 누릴 수 있는
그 나라를 기대하는 희망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왜곡된 만큼
세상은 엘리야를 거부할 것입니다.
그가 세상에 와 모든 것을 바로잡으려 하겠지만
결국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데 그칠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으며
사람의 아들 역시 고난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희망에 따라오는 고난을 묵상합니다.
이 고난을 이겨낼 힘은 오직
주님 안에서 키워나가는 희망뿐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사랑을 향한 여정을 걸어갈 때
비로소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오늘 기도하며 희망을 키워나가길 바랍니다.
많은 유혹과 역경 안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기다림
안 콘실리아 수녀
오늘 복음을 읽고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기다림”이다.
인간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기다리면서
정작 지금 자신과 함께 있는 이의 소중함을
알아보지 못하는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존재이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요한 세례자를 엘리야로 소개하시지만,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화해와 재건을 이룩하지 못하고
참수당했기 때문에 재림한 엘리야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엘리야가 아직 재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음에 오실 메시아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예수님은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논리로 내세우며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미 오신 분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한 번도 오지 않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대림 시기의 의미는 본질적으로는 간절한 기다림이다.
전례에서 우리는 대림 시기 동안 두 가지를 기다린다.
종말에 오시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린다.
우리가 기다리는 그 무엇!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이미 내 삶에 와 있는 선구자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닐까?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
불편하게 하는 상황,
그리고 나를 지지해 주는 모든 사람,
오늘 나를 향해 웃어주는 사람들이
나에게 예언자요. 메시아이다.
그리고 내가 향하는 작은 친절과 올바른 행동들이
누군가에게는 예언자요 그들안의 그리스도를 깨우는
작은 바람이 될수도 있음을 기억하며 깨어 있자!
[출처] 툿찡 베네딕도 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