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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7일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제1독서 : 이사 61,1-2ㄱ.10-11
제2독서 : 1테살 5,16-24
복 음 : 요한 1,6-8.19-28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19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펭귄은 새일까요? 아니면 물고기일까요?
작지만 날개가 있는 것을 보면 ‘새’ 같기도 하고,
전혀 날지 못하고 헤엄을 잘하는 것을 보면 ‘물고기’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날지 못해도 분명히 ‘새’라고 합니다.
헤엄을 치면서 물속에 있는 물고기, 낙지, 새우 따위를 먹지만 말이지요.
더군다나 땅에서 뒤뚱거리며 걸어 다니는 모습에 우리는 우스꽝스럽다고 말합니다.
사실 남극은 너무 추워서 하늘 나는 것이 전혀 도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먹을 것이 그래도 풍부한 바닷속에서 헤엄치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펭귄은 하늘을 날게 하는 날개를 줄여서
바닷속에서 헤엄을 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멋있지 않습니까? 겉모습만을 보고서 우스꽝스러운 ‘새’라고 말하지만,
환경에 적극적으로 변화하는 열린 마음을 가진 놀라운 ‘새’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좋아 보이는 것이 많습니다.
돈도 좋고, 세상의 높은 지위도 부러움을 삽니다.
명품이라는 물건들은 멋져 보이고,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는 많은 재능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멋진 것은 지금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좋아하는
물질적인 세속적인 가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주님의 가치를 따르는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 안에서는
그 판단이 훨씬 어리석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인·성녀가 주님의 가치만을 따랐습니다.
오늘 대림 제3주일의 복음 말씀에서도 세상에서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주님으로부터는 큰 인정을 받게 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당시 사람들로부터 구세주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스스로 “내가 구세주다.”라고 한마디만 했어도,
사람들은 하느님으로 떠받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써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세상의 가치보다 주님의 가치가
더 중요하기에 가장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6)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도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자기 영혼은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기쁨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항상 맨 끝자리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우리의 삶 안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혜롭게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기쁨주일’(gaudete)입니다.
‘핑크 빛’ 대림초에 불이 붙여졌습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을 기쁨으로 태웁니다.
빛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도 기쁨입니다.
<입당송>에서는 노래합니다.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필리 4,4.5 참조)
<제1독서>에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앞에
의로움과 찬미가 솟아나게 하시리라.”(이사 61,10-11)
<화답송>에서는 성모님의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고,
내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내 마음 기뻐 뛰노네.”(루카 1,46)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기뻐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아버지의 뜻입니다.”(1데살 5,16-18)
<복음 환호송>에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전하는 기쁜 소식을 노래합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이사 61,1 참조)
그렇습니다. 이토록 오늘 말씀은 기쁨의 선포로 꽉 차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기쁨으로 나서야 하는 곳은 당혹스럽게도 광야입니다.
우리는 설레는 기다림과 고대하는 기쁨의 핑크빛 옷을 입고서
어처구니없게도 텅 빈 광야로 나서야 합니다.
그곳에서 광야처럼 텅 빈 사람, 요한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을 증언하며 기뻐합니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요한 3,29)
참으로, 요한은 자신을 온전히 비워버린 이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외치는 이’가 아니고, 그저 ‘외치는 이의 소리’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비워져있기에, 참된 소리가 되었습니다.
비어 있는 자만이 온전한 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소리를 내는 이는 피리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입니다.
피리가 결코 스스로 소리를 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붓이 스스로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붓을 쥔 이가 글씨를 쓰는 것이듯이 말입니다.
그처럼, 요한은 자신이 ‘외치는 이’가 아니라,
‘외치는 이의 소리’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그저 비어 있는 피리에 지나지 않으며,
글을 쓰는 이의 손에 쥐어져 있는 붓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진정 비어 있는 이였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말이 아니라,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어 퍼질 수 있었습니다.
그는 비어졌기에 말씀을 반겨 맞아들였고,
들어온 그 말씀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말씀의 참된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비어져 있음은 겸손과 낮춤으로 드러납니다.
그는 이제 자신이 다른 이의 발밑으로 내려가려고 하나,
그 자격마저 없는 몸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7)
본래 주인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종이 그 신발 끈을 풀어주는 법인데,
요한은 그런 종의 일마저도 할 만한 조격조차 없는 부당한 몸이라고 고백합니다.
한편, 그는 자신이 비어져 있는지라
다른 이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분을 알아보고서 선포합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그렇습니다. 그분이 우리 가운데 계시건만, 우리는 그분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이 감겨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분을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5)
그렇습니다. 어둠은 그분을 보지 못합니다.
빛이 들어와 눈이 열려야 그분을 보게 됩니다.
마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눈을 뜨고도
“그들과 함께 걸으시는”(루카 24,15)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야
“눈이 열려”(루카 24,31) 알아보았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믿음 안에서 영의 눈이 열려면, 보게 됩니다.
곧 빛이 비추어 눈이 열리는 것이 “깨어남”입니다.
그러니 “깨어있기” 위해서는 먼저 깨어나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쁨도 함께 깨어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이 열려 주님의 현존을 보게 되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기쁨’ 안에서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말을 너희에게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함이다.”(요한 15,11).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한 1,23)
주님!
화살표 같은 존재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붓이 되어 당신의 말씀을 삶으로 쓰게 하소서.
피리가 되어 당신의 노래를 온몸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주인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생명의 춤이 되고, 당신 축복의 강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2005년에 개봉되었던 영화이니 어느덧 20년이 되어갑니다.
영화는 옴니버스 형식으로 4가지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을 이어가는 젊은 부부,
경제적인 여유는 있지만 애정이 없는 부부,
엄격한 아버지 앞에서 주눅이 드는 아들,
카페를 운영하는 여인과 노년의 사장님의 우정을 잔잔하게 전해 주었습니다.
영화는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바벨탑을 오르려는
우리시대의 욕망과 허상을 비웃듯이
‘사랑, 나눔, 우정’이라는 꽃마차를 타고 가려는
따뜻한 이웃의 이야기를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보는 내내 가슴이 뭉클하였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영화 속의 대사가 있습니다.
“초라한 옷이 창피한 것이 아니다. 초라한 생각이 창피한 것이다.
이 세상에 너로 인해 행복한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면 놔줄게.”
2000년 전에 있었던 주님의 ‘성탄’에도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을 맞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멀리 동방에서 예물을 준비하고 주님을 찾아왔던 동방박사들이 있습니다.
천사의 인도로 들판을 지나 이제 태어난 주님께 경배드렸던 목동들이 있습니다.
이제 성탄이 일주일 남았습니다.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으로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로 성탄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평화신문을 읽으면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시편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윤영주님의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조상의 묏자리를 잘못 써서 그렇다. 사주가 나빠서 그렇다. 등등
치료 방법도 거의 없고, 질병의 원인도 잘 알지 못했던 근동 지방의 고대인들에게도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내 자식이 이런 아픔을 겪어야 하나’ 라는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육체적인 아픔이 마음과 영혼까지 좀먹어 갑니다.
그 때문에 치료는 ‘죄의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질병의 원인을 죄에서 찾았기에
현대인들보다 더 자주 성찰하고 참회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더 가까웠고, 주님께 더 많이 의지하였을 것입니다.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수명을 늘렸고, 질병의 원인도 알고 있기에
주님께 가까이 가는 기회가 적어진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의지적으로라도 더 자주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있기를 청합니다.”
영성의 안부를 묻는 김용은 수녀님의 이야기도 나누고 싶습니다.
“언젠가 수녀원에서 마당을 정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몇몇 나무를 정리해야 했습니다.
그때 유치원 교사인 한 수녀님은
어린이들과 함께 나무와의 고별식을 거행했습니다.
아이들은 한 명씩 나와 나무에게 이별 인사를 하면서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고마웠고, 미안했고, 수고했다는 아이들의 언어로 이별 의식을 치렀습니다.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아이들은 의식을 통해서 나무가 세상의 일부이고,
자신들도 그 나무와 연결된 세상에서 살고 있으며
무엇보다 초월자인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나무나 사물은 함부로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자신과 모든 사물은 연결되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터득했습니다.”
이렇게 가톨릭평화신문은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며 자선 주일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해야 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신앙인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 나에게 편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외로운 이들을 위로하고,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것이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한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비록 그 길이 험난하고, 비록 그 길에 장애물이 있어도 넘어가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겸손하게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도 좋아하셨고,
한동안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오늘은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오르네.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아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아 아 라라 라라라 라라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미완성으로 태어나는 인간
전삼용 요셉 신부
대림은 구세주를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무엇을 준비하며 기다려야 할까요?
그리스도께서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구세주는 필요 없는 존재가 되면 그분이 오셔도 무시하거나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우리에게 그분은 왜 필요할까요? 그분 없이는 완성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라고 묻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말하기 이전에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며 모세에게 예언된 그 예언자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고는 자신은 메시아께 가는 ‘길’과 같다고 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그러나 요한의 정체를 알려고 온 이들은 ‘길’이 어떤 의미인지 몰라 이렇게 따집니다.
그러자 그는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6-27)라고 말합니다.
이는 자신이 그리스도께로 이르는 분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을 감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했다고 놀라지 말기를 바랍니다.
요한은 그리스도께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고,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만나면 누구나 그분께 가는 길이 되고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완성하려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여자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여자로 완성되어 태어난 것일까요?
그러나 여자는 자녀를 낳고 키울 때 완성됩니다.
그래야 모성애도 알고 자기 몸에서 아기를 먹일 살과 피와 같은 젖도 나옴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남편이 없었다면 아이가 태어날 수 없었음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남편을 존중하지 못하는 아내 밑에서 자란 아이는 엄마도 공경할 줄 모르게 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와 남자와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내는 주님께 순종 하듯이 남편에게 순종 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그 몸의 구원자이신 것과 같습니다.”(에페 5,22-23)
여자가 남자라는 구원자를 만나야 여자로서 완성되는 것처럼, 사람도 하느님을 만나야 완성됩니다.
여자가 남자를 그리워하듯 인간은 하느님을 그리워합니다.
반대로 남자가 여자를 그리워하여 자기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준비가 되어있듯,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신을 찾으면 됩니다.
우리의 양식이 되기 위해 십자가에 자기를 못 박은 신은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겸손’입니다.
라틴어 단어 겸손(humilitas)은 ‘흙’(humus)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흙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위에서 자라는 나무들은 자기 자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자기만의 열매가 아닙니다.
하늘에서 비가 오고 태양이 비추니 나무가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무에게 “나는 하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라고 말할 때
흙이 완성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첫째 날 ‘빛’이 창조되었습니다. 아기에게 빛이 들어오면 부모를 찾게 됩니다.
처음엔 자기를 바라보는 부모를 구별하지 못하다가 점차 그와 자신을 구별하게 됩니다.
둘째 날 궁창이 창조 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같은 물인 줄 알았지만, 나는 땅의 물이고 하늘의 물이 존재하는 것을 압니다.
셋째 날은 자기를 하늘의 물과 같은 존재라고 여기는 물을 바다로 밀어내고 마른 땅이 나옵니다.
그러고는 하늘에서 비를 받아 땅에서 풀과 나무들이 자라게 합니다.
그러면 땅은 이제 풀과 나무가 하늘을 알아가게 만드는 ‘길’이 됩니다.
이때 비로소 땅이 완성됩니다.
엘리사벳을 방문하시는 성모 마리아도 마찬가지이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을 잉태한 땅입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이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길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러고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48)라고 노래하셨습니다.
이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역할을 하면서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자기를 완성하여 당신께로 이끄는 길이 되려는 땅에게
주님께서는 참 하늘이 되어주십니다.
요한 세례자의 증언과 기쁨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주제는 기쁨이다.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비록 자기는 무대 뒤로 서서히 사라지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그리스도께로 쏠리게 된다는 사실에서 그의 기쁨이 충만해진다.
기쁨의 동기는 구원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어둠의 세력에 질식되고 있는 이 세상에,
확신에 찬 모습으로 기쁨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구원받은 자의 얼굴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요한의 역할에 대해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를 증언해 주었듯이
성탄을 앞둔 우리에게도 그분을 증언해 주어야 한다.
그렇다 해도 우리가 만일 깨어있지 못하고 그분의 신비를 볼 수 없다면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26절) 라는 말을 우리도 들을 수 있다.
우리가 성탄 성가를 부르고 끊임없이 말구유를 경배한다고 하더라도
깨어있지 못하여 신선하고도 밝은 믿음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도 다시 오시어 우리 가운데 서 계신 주님을 뵙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요한의 증언은 신앙과 전례에서 계속된다.
그의 증언은 우선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6절)으로서 예언적 사명을 띠고 온 것이며,
또한 그는 빛이나 메시아가 아니라, 그 빛을 증언한다.
증언이라는 의미는 직접적인 인식과 체험 그리고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손으로 만짐(1요한 1,1 참조)을 전제하므로 역사적이다.
그분은 내면으로부터 파악되지 않으면 절대 인식되지 않는 분이다.
그러기에 증언이라는 것은 항상 상충적인 판단의 상황을 전제로 한다.
즉, 진실과 거짓, 빛과 어두움, 신앙과 불신 사이에서
옳음을 가리는 심판의 과정을 전제로 한다.
요한에게 그의 정체를 묻는 것은 진리를 알고자 하는 자세가 아니라, 심문이다.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아요? 그 예언자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요?”(21-22절).
그러한 자세였기 때문에 그들은 이미 그들 가운데 와 계신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으며, 앞으로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요한의 태도는 진실하고도 진리를 존중하는 태도이다.
그는 엘리야도 모세의 뒤를 잇는 예언자도 아니었지만,
엘리야와 예언자로서의 요소를 다 갖추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23절) 한다.
그는 하나의 소리로서 희망과 구원, 그리고 회개의 소식을 전하기 때문에
그 소리가 가리키는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것이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25절) 라는 질문에 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26-27절).
요한은 유다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의 안목으로는 알아 뵙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에도 부당함을 말함으로써 그분의 위대하심을 증언하면서
청중들에게 그분께 대한 갈망을 일으키도록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 자리를 마련해 드리고자 하는 겸손한 행위이다.
이러한 자세가 우리에게서도 나타날 때
우리는 우리 가운데 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성탄의 신비 앞에 요한은 위대한 교육자이다.
이사야는 한 신비스러운 인물이 올 것과 그의 사명을 예고하는데
특별히 가난한 이들, 약한 이들, 압박받는 이들을 돌보아 줄 것이라고 한다(이사 61,1-2).
예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이 구절을 읽고
자신에게서 이루어졌다고 하시면서 공생활을 시작하셨다.
그분이 이 신비스러운 인물이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그분을 믿지 않고 죽이려 했다(루카 4,28-30 참조).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 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자신들의 판단 기준에 따라 해석하여
자기 편한 대로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오히려 예수께 자신을 따르라고 하고 있다.
예수님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분이며,
아무도 생각해 주지 않는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고,
이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포로들과 옥에 갇힌 이들을 해방하고,
찢긴 마음을 싸매어 주라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시다.
얼마나 많은 찢긴 마음들이 이 세상에,
보잘것없다고 하는 사람들과 뛰어나다는 이들 사이에,
무죄한 사람들과 살인자들 사이에, 가난한 이들과 너무 많은 재물로
질식하고 있는 이들 사이에 있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신다.
예수님은 오셨다.
그리고 성탄 때마다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
누구든지 필요로 하는 정신과 육체의 해방을 이루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에게 오심을, 우리에게 베푸실 이 해방의 은총은
이제 우리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이에게 기쁜 소식으로 전해져야 한다.
그것이 나에게 참된 기쁨의 소식이었고, 나에게 혁명적이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혁명적인 것으로 그 마음 안에서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기쁨의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너희 가운데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염철호 사도요한 신부
제1독서로 봉독한 이사야서는
주님께서 기름을 부어 세우신 메시아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주 하느님의 영이 메시아 위에 내리시어
가난한 이들, 마음이 부서진 이들, 잡혀간 이들,
갇힌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질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메시아를 파견하시어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실 것인데,
그때가 되면 신랑이신 하느님께서 신부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붐을 맞이하듯 모든 민족들 앞에도 의로움과 찬미가 솟아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이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임을 증언합니다.
요한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두고 빛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요한도 하느님께서 보내신 인물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빛을 증언하라고 파견된 인물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요한이 물로 세례를 베풀며 사람들을 정화하는 것을 보고
유다인들은 요한이 혹시 메시아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사제와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요한이 활동할 당시, 에세네파 사람들은
두명의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여겼는데,
하나는 사제 메시아요, 또 하나는 임금 메시아였습니다.
그들은 사두가이파와 마찬가지로
사제계급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 이들이었는데,
사제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이 사제계 메시아로
백성들을 정화하는 분이 아닐까 하고 여겼던 듯합니다.
하지만 요한은 “서슴지 않고”,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들을 보낸 이들은 바리사이들이었는데,(요한 1,24)
그들은 요한을 두고 “엘리야”냐고 묻습니다.
구약성경 예언서 마지막 편인 말라 3,23에 보면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를 보내리라는 예언이 나오는데,
메시아가 아니면 혹시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엘리야인지 물은 것입니다.
이 질문에 요한은 그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마지막으로 “그 예언자”인지를 묻습니다.
신명 18,15에서 모세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줄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그 예언자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요한의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라고 묻습니다.
이에 요한은 자신이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에 불과하다고 밝힙니다.
자신은 오직 메시아에 관해 증언하러 온 소리에 불과하며, 자신 뒤에 오실 분,
곧 메시아가 계신데,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을 정도의 사람이라고 밝힙니다.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하느님 일에 있어서 주인공으로 등장할 수 없습니다.
요한은 이런 식으로 베타니아에서 다가오실 예수님의 신원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너희 가운데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우리 곁에 메시아가 이미 와 계시지만,
우리의 눈이 어두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요한은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을 두고
“어둠”(요한 1,5)이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빛이신 예수님께서는
어둠으로 가득한 세상에 오시어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빛으로 우리 눈을 열어 주시어
당신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요한이 증언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분 빛으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만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어떤 어둠 속에 있더라도 희망을 잃지 말고 언제나 기뻐하며,
끊임없이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아가라고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성실하신 하느님께서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반드시 빛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서공석 요한 신부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서」가 세례자 요한을 소개하는 부분입니다.
이 「복음서」는 요한이 누구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있었고,
요한이 그들 앞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증언하였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자기가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가 살아 돌아온 것도 아니며, 예언자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또 말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것이 오늘의 복음이 세례자 요한을 소개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네 개의 「복음서」가 모두 예수님의 활동을 이야기하기 전에
세례자 요한에 대해 먼저 언급합니다.
「마르코복음서」와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지만,
「루카복음서」와 「요한복음서」는 그 사실조차 적당히 얼버무리고 맙니다.
네 복음서가 하나같이 긍정하는 것은,
요한은 예수님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요한에 대한 복음서들의 그런 진술들은
예수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이 事實이라,
그 사실은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에게 부담스러웠다는 것을 엿보데 합니다.
「복음서들」이 기록될 당시, 요한의 제자들도
그들의 스승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자칫하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요한이
세례를 받은 예수님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들은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파견된 인물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서는 요한은 빛이 아니라, 빛을 증언하는 인물이고,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의 길을 고르게 하기 위해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요한이 비록 예수님에게 세례는 베풀었지만,
그는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도 없는 인물이라고도 말합니다.
「복음서」의 그런 언급들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예수님에게 가도록 해야 한다는
초기 신앙인들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중에 요한 세례자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고 극찬하여 말씀하신 사실을 보면,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 운동에 일찍이 가담하셨던 분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 운동은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세례 운동을 펼치는 다른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죄에서 정화되는 의례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약속을 받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 운동에 공감하고, 가담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복음서들」이 전하는 바를 보면, 요한은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마태 3,10; 루카 3,9)고 말하면서
엄하게 심판하실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계시면,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예수님은 하느님이 그 함께 계심에서 아무도 제외되지 않으신다고도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은 양 백 마리 중 한 마리도 잃지 않으려는
목자와 같은 분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9. 13)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은 심판하실 무서운 분이 아니라,
자녀에게 좋은 것을 베푸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5-36)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 안에 하느님은 그 생명의 아버지로 살아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을 소개하면서도, 우리의 시선이 예수님에게로 가도록 인도합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으면서, 하느님을 벌주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무섭게 심판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요한을 넘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자비하신 하느님,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숨결, 곧 성령을 베푸셔서, 우리도 자비로운 당신의 질서 안에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도 우리 주변에 당신의 은혜로움을 실천하며 살아서 당신의 자녀 되게 하십니다.
청해도, 찾아도, 두드려도 하느님은 반응하시지 않더라도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었습니다.
자녀가 어리고 未熟할 때, 부모는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다해줍니다.
그러나 성장한 자녀는 자기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스스로 뼈를 깎는 노력을 합니다.
부모는 성장한 자녀를 대신해서 모든 것을 다 해 주지 않습니다.
창세기는 말합니다. 사람은 “부모를 떠나 자기 배우자와 하나가 된다.”(2,24)
인간은 부모를 떠나서 비로소 배우자를 사랑할 수 있는 독자적인 인간이 된다는 말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떠나지만, 부모의 뜻을 받들어 삽니다.
자녀는 자기 일은 자기가 하지만, 부모와 마음으로 함께 있습니다.
부모의 가치관을 따라 살면서 부모의 뜻이 자기를 통해서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생명을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하느님의 靈이 자기 안에 살아계시게 청하고, 찾고, 두드립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로운 시선으로 자기 주변을 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회개는 그런 것입니다.
병자를 고쳐주고, 달라는 사람에게 주며,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들은
모두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우리 안에 함께 계시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며 살아서 그분의 성숙한 자녀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이승화 시몬 신부
하느님을 만난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는
사람들의 환호가 들려올 때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만을 바라보게 된다는 점입니다.
열심히 할수록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하기 마련입니다.
자신이 흘린 땀만큼
결실은 자기 노력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넘어선 운의 요소를 잊는다면
또 나를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을 잊는다면
그 사람이 맺은 결실은 이미 바닥을 보이게 됩니다.
사람의 인기는
교만의 유혹으로 빠지게 하고
불완전한 기반이기에 작은 충격에도 무너져 버립니다.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두려워하며
지금 하고 있는 일의 목적이
사람들에게 매여버리게 됩니다.
인기를 위해 선택을 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선택을 하면서
결국 자기 자신을 파괴하게 됩니다.
자신의 영혼이 머물 장소를 스스로 허물어 버립니다.
세례자 요한은 달랐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체험했고 그분을 희망했으며
그분을 증언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봉헌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어도 흔들리지 않았고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찾아왔는데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영광이 자신의 힘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며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 충실할 뿐입니다.
누구는 그를 보면서 겸손하다고 말할 것이고
누구는 그를 보면서 교만하다고 할 것입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한다고 비난하기도 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고 칭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끝까지 자신을 알았습니다.
지금 주어진 칭찬과 사람들에게 만족하기보다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지금 할 일을 했습니다.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준 세례자 요한을 보며
우리 역시 그를 닮고자 합니다.
그가 발견한 희망을 바라보고
희망을 대하는 자세를 닮으며
내 안에 희망을 담고 주님을 바라보는 간절함과 절실함을 키워나갑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교만하지도 허영에 빠지지도 않고
오직 주님과 관계 안에 머물면서
해야 할 일을 충실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삶은
하느님을 더 깊이 체험한 이들
하느님을 희망할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우리 역시 희망을 키우며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고
주님 안에서 기쁨을 가득 채우는
그런 한 주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