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qmF-t2K4GfE?si=yCPpJ-5h_FCB7uK1
Shostakovich: Symphony No. 5 - Tennstedt.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쇼스타코비치는 총 15곡의 교향곡을 작곡했으며, 그 가운데 제5번 교향곡이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작품의 표현력이나 규모의 장대함에 있어서, 베토벤의 제5번 교향곡<운명>에 비견되고,
그의 작품은 인격의 형성을 생각하며, 고뇌를 거쳐 거기에 도달하는 경지를 음악으로
구상함으로써,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에서 나타나는 "극복과 승리"라는 악상과 통하는 면이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을 가리켜 "신 베토벤 양식" 이라 일컫기도 한다.
(구)소련의 한 비평가는 이 작품을 가리켜...
1악장은 "어린 시절의 회상" 이라고 말했으며,
2악장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과거에의 씁쓸한 미소"
3악장은 "눈물의 고뇌"에 넘치다
4악장은 작곡가 자신의 말을 빌어
"지금까지 악장에 붙여진 모든 의문에 대한 해답" 이라고 말했다.
이 작품은 4번 교향곡을 작곡한 이 후 3개월간의 단 기간에 걸쳐 만든 작품이지만,
제5번 교향곡을 탄생시키기 위해 상당히 긴 내면적인 준비과정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비교적 작곡기간은 짧았다고 쇼스타코비치는 말했다.
초연은 1937년 11월 21일 소비에트 혁명 20주년 기념일에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교향악단에 의해 연주되었고,
연주회가 끝난 후, 대단한 찬사와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천재 소년 쇼스타코비치
“현재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작곡 이론과 피아노 연주에 재능이 뛰어난 학생, 장래에 반드시 위대한 작곡가가 될 쇼스타코비치가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는 정말 뛰어난 자질을 보이고 있지만, 영양실조로 몸이 약해져서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 이 학생에게 힘을 주기 위해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신경을 써 주십시오.”
글라주노프는 실수하지 않았다. 쇼스타코비치는 19세의 나이에 오늘날까지 세계 곳곳에서 연주되고 있는 교향곡을 작곡했다. 소방관 헬멧을 쓰고 있는 쇼스타코비치의 사진이 신문에 나왔을 때는 위 이야기들은 모두 지난 일들이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원 교수였고, 여섯 개의 교향곡과 두 개의 오페라를 작곡한 작곡가였다. 쇼스타코비치에 대하여 많은 논쟁이 있었다. 열정적인 숭배자들도 있고, 격노하는 반대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무관심한 사람은 없었다.
이 교향곡은 그가 31세때인 1937년에 완성된 곡으로 다이내믹한 음향에 델리킷한 감정표현을
볼 수 있는 명작이다.
더구나 이곳은 베토벤 이래의 전통을 고수하는 문제의 야심작이다.
따라서 투쟁에서 승리로 이끌어 가는 베토벤의 이념과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고,
밝고 명량하며 환희의 세계를 지향하는 경지를 그린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제1악장 조금 비극적인 매력을 가진 테마가 카논품으로 나타낸다.
뒤이어 바이올린의 독특한 제1테마와 제2테마가 나타나 발전되다가 코다로 끝난다.
제2악장 경쾌한 기분의 힘찬 왈츠곡풍이다. 중간부는 민족 무곡풍으로 나타난다.
제3악장 전곡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악장이다. 그의 독특한 서정미를 음미할 수 있으며
애수에 찬 번뇌의 분위기도 자아낸다.
제4악장 온갖 슬픔이 사라지고 승리의 개가를 올리는 듯한 서주가 있은 후
행진곡풍으로 장쾌하게 전진한다
https://youtu.be/0FF4HyB77hQ?si=Cuf4SkfZoqsvFXkU
Shostakovich: Symphony No. 5 / Bernstein · New York Philharmonic Orchestra
미국 대표, 레너드 번스타인의 지휘입니다. 뉴욕 필하모닉과의 연주입니다.
번스타인 특유의 춤추듯 오버하며 지휘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카라얀의 눈감고 폼재며 지휘하기와는 다른 매력이지요. .
연주는 상당히 격렬합니다. 빠른 지휘에도 그걸 잘 받아내는 오케스트라의
역량이 멋지고...번스타인도 역시 멋있습니다...
얼어붙은 땅의 휴머니즘 -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
80년대 한국. 대학가에서 은밀히 유통되던 카세트 테이프 가운데 ‘혁명’이라는 게 있었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의 교향곡 5번 D단조.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 사람의 작품으로 제목까지 불온하기 짝이 없으니 당시에는 몰래 들어야 하는 음악이었다. 은밀한 호기심으로 이 곡을 듣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곡을 ‘인터내셔널가’에 버금가는 이념 음악으로 신비화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음악 자체에 대한 이해는 뒷전이었다.
30년대 소련. 스탈린 1인 숭배 체제 하에서 3천만 명이 숙청 당한 공포 정치의 시대였다. 어떤 음악을 써야할지 작곡가보다 ‘당’이 더 잘 알던 시대였다.
문화 예술은 암흑 속에서 낙관주의를 설파해야 했다. 당의 지침에 순응하지 않는 예술가에게는 어김없이 ‘형식주의’ ‘타락한 자본주의’ 등의 딱지와 함께 생명의 위협이 가해졌다. 이념과 체제의 잣대로 음악을 재단하던 시대였다. 촉망받는 젊은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1936년 1월,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드 부인>은 “음악이 아니라 횡설수설하는 음표 더미들”이라는 <프라우다>의 비판을 받았다.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혔다. 쇼스타코비치는 그해에 완성한 교향곡 4번 C단조의 초연을 포기해야만 했다. 짙은 고독과 염세적인 분위기에 싸인 이 곡은 ‘타락한 부르주아 음악’으로 평가될 게 예상됐고, 그것은 곧 작곡가의 신변을 위협할 게 분명했다. 1937년 11월에 발표한 교향곡 5번은 스탈린의 압제에 대한 쇼스타코비치의 대답이었다. 1악장과 3악장의 비극적인 분위기를 일소하는 4악장의 당당한 화음과 강력한 타악기의 향연은 아무리 혹독한 억압에도 꺼지지 않는 민중의 승리를 표현했다고 해도 좋고, 운명을 대하는 개인의 낭만적인 의지를 그렸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느 경우든 스탈린 체제의 전진과 승리를 찬양하는 것은 작곡가의 의도와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관변 비평가들은 ‘낙관적 비극의 전형을 그렸다’ ‘더 밝은 미래의 비전을 들려주었다’ 등의 찬사와 함께 쇼스타코비치를 복권시켜 주었다.
이 곡은 초연 당시 1시간이 넘도록 박수를 받았다. 연주 시간 45분보다 더 긴 시간이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곡의 피날레에서 나는 생기에 찬 낙관적인 비전을 보여주고자 했다. 앞의 세 악장에서 드러난 비극적인 느낌들에 대한 해결책을 추구한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러한 모호한 표현으로 체제와 그럭저럭 타협하며 살아간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자신은 훗날 제자 로스트로포비치에게 이렇게 강조한다.
“우리는 모두 음악의 전사들일세. 어떠한 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아 인간을 옹호해야 하는 전사들….”
https://youtu.be/9AQMA0XLuAo?si=tRxKb2s9w2c8qDKn
SHOSTAKOVICH Symphony No 5 in D minor op 47 Dir Valery Gergiev Orq Mariinsky theatre
스탈린과 쇼스타코비치가 완전히 의기투합한 것처럼 보인 적도 있었다. 히틀러의 침공으로 레닌그라드가 포위된 1941년 완성한 교향곡 7번 C장조 ‘레닌그라드’. 쇼스타코비치는 나치에 대항하여 온 인민이 떨쳐 일어설 것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고, 전쟁의 포연 속에서 절반밖에 남지 않은 볼쇼이관현악단 멤버들을 불러모아 이 곡을 연주했다. 평화를 호소한 이 음악회는 연합국 내에서 ‘쇼스타코비치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스탈린에 대한 저항 의지를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었다.
“이 곡을 ‘레닌그라드’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점령된 레닌그라드’가 아니라 ‘스탈린이 이미 철저히 파괴했고 히틀러가 마지막 타격을 가한 레닌그라드’를 애도한 곡이다.”
전쟁이 끝난 뒤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9번을 발표했다. 스탈린은 이 곡이 세계2차대전의 승리를 기리는 장대한, 기념비적 작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베토벤의 9번이 그러했듯 쇼스타코비치의 최대 걸작이 나올 걸로 은근히 기대했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는 이러한 기대를 비웃기나 하듯 단순하고 귀엽고 유머가 넘치는 교향곡을 내놓았다. 스탈린은 격분했고 1948년 ‘즈다노프의 비판’이 이어졌다.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이 죽은 1953년까지 스탈린 1인 숭배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저열한 선전 영화의 음악을 만들어야만 했다.
음악은 인간의 마음과 의지 그 자체를 표현하는 가장 추상적인 예술이다. 문학은 언어로, 미술은 구체적인 회화나 조형물로 말하기 때문에 체제를 옹호했느냐 비판했느냐를 객관적으로 판단하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그러나 음악, 특히 가사 없는 교향곡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한 개인이나 집단이 판단하려고 할 경우 오류를 범하기 쉽다. 음악이란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들릴 수 있는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무한히 다양한 뉘앙스와 표현의 섬세함, 바로 그 점이 음악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곡가보다 당이 음악을 더 잘 알던’ 스탈린 시대에는 이러한 일이 자주 일어났다. 공포 정치 속에서도 살아있는 인간의 의지를 묘사한-적어도 쇼스타코비치의 <회고록>에 의하면-교향곡 5번을 소련 공산당이 찬양한 것은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이 시대를 웃으며 살아가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다. 지휘자 게르기에프는 이렇게 말한다. “스탈린은 절대 권력을 휘두른 독재자요, 폭군이었다. 하지만 스탈린이 억누를수록 쇼스타코비치는 더욱, 더더욱 강해졌다. 스탈린의 압제는 이런 의미에서 쇼스타코비치의 모든 음악에 흔적을 남긴 것이다.” < 출처 네이버 지식 in>
글쓴이 : 베토벨라
https://youtu.be/H2BLC3-eBuI?si=F_ykFjWL0IqwDpRo
Shostakovich - Symphony No 5 in D minor, Op 47 Evgeny Mravinsky 지휘. Leningrad Philharmonic Orchest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