쳐다만 봐도 재수 없다고 / 임월순
“쳐다만 봐도 재수 없다고”
“그럼 안보면 되잖아”
“보이는데 어떻게?”
“그럼 눈을 감으라고 하지 뭐”
“그렇게 말하니까 더 싫은 거지”
한바탕 웃으면서 나눈 이야기였지만 문득문득 가슴을 찔렀다. 요지는 나이 많은 노인들은 젊은 사람들을 피로하게 한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노인은 바로 나 자신이고, 젊은이를 대변해서 내게 경고를 날린 이는 쉰 두 살의 내 후배다.
그는 학생들과 교수님들보다 진정 나를 위해서라며 심벌즈 같은 목소리로 대화를 끊었다.
나는 60대의 대학원생이다. 학생들이나 교수님들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하다니, 후배의 충고를 이해하려고 해도 쉽게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저나 나나 도긴개긴인데 말이다.
제아무리 꾸며 본들 시간은 결코 거꾸로 흐르지 않는 법, 파운데이션을 덧바를수록 주름은 도드라지고 옷을 갈아입을수록 땀만 끈적거렸다.
학교 앞에 도착하자 나도 모르게 시선이 아래로 깔렸다. 자신의 그림자만 보고 다니라는 후배의 후렴구가 떠올라서였다. 나를 생각해주는 후배의 마음이야 진심인줄 알지만 표현방식은 참으로 잔인했다. 그럼에도 나는 교수님의 숨소리까지도 놓치고 싶지 않아 강의실의 맨 앞자리를 차지했다. 학비도 아깝고, 마스크를 쓴 교수님들의 목소리가 선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미 전달은 입 모양과 얼굴의 표정을 통해야 효과적이다. 그런데 오로지 청각에만 의존하다보니 숨을 참는 것처럼 힘이 들었다. 그러나 나이 탓을 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날도 내가 앉았던 앞자리는 비어있었다. ‘교수님의 입장도 생각해 줘야지. 턱밑에 할머니가 버티고 앉아 있으면 강의 할 맛이 나겠어?’ 또다시 후배의 잔소리가 윙윙거렸다. 나는 하는 수없이 뒤쪽으로 이동했다.
시대가 변해 늙은 사람에겐 아무렇게나 말을 해도 면죄부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물론 핸드폰 하나로 모든 것을 작동시키는 젊은이들의 능력은 탁월하다. 그렇다고 인간을 최신형 전자제품이나 자동차 기능과 비교해서는 안 될 일이다. 젊은이들은 어른들과 비교하기를 AI나 쳇GPT의 성능만큼이나 차이를 가진 것으로 착각하는 것 같다. 옛날 사람들도 배우고 익히고 깨우친 사람들이다. 케케묵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젊었을 적에는 적어도 어른들을 공경하고 예의를 지켰다는 사실이다.
등하교 길에 어른을 만나면 무조건 두발을 모으고 70도 각도로 인사를 했고 남학생들은 달리던 자전거에서도 폴딱 뛰어내려 큰소리로 인사를 해야 했다. 어느 집 자식이 똑바로 자랐는지는 그 인사법으로 가름했으니 말이다. 요즘 세상엔 인사도 에너지 낭비라니, 허허허 웃을 수밖에.
드디어 마스크가 해제되었다. “임 선생은 마스크 덕을 톡톡히 보셨군요.” 나이 많은 남학생이 말했다. 그런 소리를 듣고도 그냥 웃어 넘겼다. 나는 유난히도 튀어나온 입을 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이 나온 사람은 말이 많다고 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듯이 언제나 내 입술은 앞장을 섰다. 그런데 그 학생으로 인해 모두들 내 하관만 쳐다보는 것 같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끼리끼리 놀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때를 맞춰서 ‘어르신 교통카드’를 발급 받으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어르신이라는 어감이 거북해서 한참을 버텼다. 그러나 공짜로 지하철을 타면 매일 커피 한잔을 마실 수가 있었다. 또한 가장 척박한 시대에 태어난 58년생들이 살아온 일을 생각하면 그 정도의 나라 혜택은 받아도 될 것 같았다. 다행이 카드 색깔은 누렁색이 아니고, 파랑색이어서 일단 맘에 들었다. 카드를 게이트 투입구에 넣자 삐삐 두 번의 소리가 났다. 만약 젊은 사람이 사용할 경우엔 즉시 부정행위를 입증할 수 있는 장치였다. 그런데 하차할 때가 문제였다.
뜬금없이 ‘어르신 건강하셔요.’라는 멘트가 나왔다. 굳이 그런 인사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나를 알지 못하는 기계가 기계적으로 건네는 인사는 언어가 아니라 그냥 기계음에 불과했다. 게다가 익명의 사람들에게 내 나이를 공개하는 것 같아서 불편하기까지 했다.
에이, 이왕 이렇게 된 것 나는 갈 때까지 가보기로 했다. 당당하게 마스크를 벗고 다시 교실 앞좌석을 차지하고, 지하철의 경로석도 점령했다. 누군가 시비를 걸면 재빨리 노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카드지갑을 목에 걸었다. 노인들이 다가와도 주눅 들지 않고 꿋꿋하게 버텼다. 그런데 경로석은 앞을 보나 옆을 보나 ‘쳐다만 봐도 재수 없다’는 노인들뿐이었다.
대각선의 일반석엔 예쁜 여자아이와 엄마가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허리의 맨살을 드러낸 어여쁜 아가씨가 서있었다. 그들에게선 가만히 있어도 싱그럽고 산뜻한 향이 느껴졌다. 그렇게 일반석과 경로석의 경계는 확실하고 분명했다. 순간, 경로석은 노인 우대가 아니라 구석으로 한정 짓는 차별과 다름이 없다고 느껴졌다. 진정으로 노인을 생각한다면 일반석 중앙에 배치해야 옳지 않을까? 그래야 청각도, 시각도, 후각도 모두 즐거워질 테니 말이다. 노인들 틈에 끼어있노라니 파고다 공원에 가면 똑같은 할아버지가 되는 것처럼 내 모습도 동색이 되었다.
예전에는 ‘노인들은 말을 하지 않아도 말이 많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경로석의 노인들은 상대가 호응하지 않아도 계속 말을 했다. 옷이 참 곱소, 어디서 샀오? 몇 살이요? 자식은 몇이나 두었오? 아니 그런걸 알아서 어쩌려고 그러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에게나 말을 걸고, 수다를 떨었다. 그들에 비하면 60대인 나는 아직 젊었다. 색(色)이 반란을 일으키는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할머니는 핸드폰을 열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날더러 인상이 아까우니 전화를 하면 돈 버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어느새 나는 경로석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내게 연락처를 달라는 꽃무늬 원피스는 기어이 명함을 주고 일어섰다. 그 자리에 젊은 남자가 앉고 나는 손창섭의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손창섭의 고뇌는 강렬했다. 오죽하면 혈서라도 쓰고 싶었을까?
혈서 쓰듯
혈서라도 쓰듯
순간을 살고 싶다
모가지를
이 모가지를
뎅겅 잘라
내용 없는 혈서를 쓸까!
손창섭의 ‘혈서(血書)’는 내가 선택한 대학원 진학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손창섭은 왜 마지막 연의 ‘쓸까’에 물음표가 아닌 느낌표를 달았는지 궁금했다. 나는 옹알이를 하듯 ‘미래를 생략한 손창섭, 현실에 굴복한 손창섭’을 되뇌이며 그것도 손창섭의 의지라고 생각했다. 한계를 직시하는 절규.
사고를 치고 돌아온 남자가 며칠째 잠만 잤다. 이불에 불을 붙였다. 순면 이불보가 탔다. 하얀 구름솜이 연기를 물고 불꽃에 합류했다. 남자가 눈을 떴다. ‘뜨겁다’ 고.
남자는 바퀴벌레를 잡듯 탁탁, 불을 때렸다. 그러자 불이 꺼졌다. 몇 번의 짝짜꿍으로 손에 묻은 그을음이 날아갔다. 곧바로 남자는 토막 난 잠을 다시 이었다. 그 남자는 내 남편이었다. 나는 이 순간도 그 남자와 살고 있다. 어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손창섭에게 대꾸해본다.
혈서 쓰듯
혈서라도 쓰듯
순간을 미치고 싶다
삶을
이 삶을
뎅겅 잘라
쓰잘데기 없는 글이나 써볼까?
나는 느낌표대신 물음표다. 그 끝이 어딘지 갈 데까지 가보는 것도 희망이고, 미래이니까. 나만의 혈서를 쓰고 있을 때 까만 발가락이 삐져나온 샌들이 다가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 다리를 안쪽으로 접었다. 뜨끈한 체온이 무릎을 스쳤지만 무시했다. 옆자리의 남자도 꼼짝하지 않았다.
“사람이 왔으면 일어서야 할 것 아냐, 버르장머리 없이.”
나도 남자도 모른 척 했다. 할머니는 무릎을 들이밀며 본격적으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이쪽을 보라는 듯 갈라진 목소리 톤이 점점 더 올라갔다.
남자가 고개를 들어 할머니를 쳐다보자
“뭘 봐, 어른이 왔으면 뽈딱 일어서야지. 사람이 안보여? 젊은 것이 싸가지 없이 말이여.”라며 침을 튀겼다.
이내 할머니의 팔은 허공을 가르고 남자의 숨소리는 식식거리고, 나는 일어설 때를 놓치고 말았다. 내가 자리를 양보하면 오히려 싸움판을 제공하는 꼴이 될 것 같아 그대로 자리를 지켰다. 이윽고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 쪽에 응고되었다. 할머니의 무례함보다는 젊은 남자를 비난하는 분위기로 변했다. 노인의 영역을 침범했으니까 당연했다. 그건 진리도 아니고 법도 아니고 그냥 배려하자는 것일 뿐인데 인식은 그랬다.
목을 조이듯이 점점 좁혀오는 눈총을 못이긴 남자가 벌떡 일어섰다.
“아이 씨, 나두 있다구, 죽고 싶어? 죽고 싶냐구? 콱 죽여 버릴 테니까.” 그러곤 주머니에서 뭔가를 끄집어냈다. 남자가 꺼낸 것은 장애인 카드였다. 승자가 누구인지 재판이 내려지기도 전에 남자는 열린 지하철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제야 나는 경로석이 아니라 노약자석임을 깨달았다.
노약자석의 벽에는 지팡이, 휠체어, 임산부, 영유아를 안은 사람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젊은이를 향했던 사람들의 눈총은 일제히 할머니에게 박혔다. 그래서 노인은 쳐다만 봐도 재수 없다고 했던가? 후배의 말이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아! 노인 되기도 힘들고 젊어지기도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