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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주현대불교 원문보기 글쓴이: 흐르는강물처럼
해산스님의 책을 촬영하기 위해 한페이지씩 펼치는 운여거사님의 손길이 지극하기만 하다.
◦ 대학시절 삶에 대한 갈등 때문에 —꼭 출가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그냥 내원암에서 얼마 동안 살게 되었다.
내원암에서 나의 일과는 나무 하고 장작 패는 일이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장작을 패고 있는데,
해산 스님이 다가와서 가슴팍을 건드리면서
“이제는 역전에서 지게품을 팔아도 밥 굶지는 않겠네.”
라고 하시고 가셨다.
생각해 보니, 하산하라는 말씀이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다음날 가방을 챙겨놓고
하직인사를 드리려고 스님 방문 앞에 서서,
“스님 계십니까?” 하고 몇 번을 여쭈었다.
계시는 것이 분명한데도 응답이 없으셨다.
인사를 않고 갈 수는 없어서 방으로 들어가 보니,
스님이 누워 계시는데 끙끙 신음소리를 낼 정도로 많이 편찮으셨다.
지금 같으면 당장 등에 업고 뛰어 내려와 병원으로 모셨을 것이다.
그때는 어려서 불교를 머리로 알고 있었다.
‘스님께서는 모든 것에서 해탈한 도인이시니,
육신이 주는 고통 같은 것은 벗어나신 분이시다.
유마거사도 중생이 아프기 때문에
자신이 아프다고 하셨지 않는가?
이런 일에 하찮은 나 따위가 끼어들 것이 못된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누워 계신 상태로 삼배를 했는데,
고개를 끄덕이시며 나의 절을 받으시는 표시를 하셨다.
산을 내려오면서 얼마 전의 일을 회상해 보았다.
어떤 사람이 내원암 뒷산에도 산삼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갑자기 궁금해져서
“스님께서 산에 다니시다가 산삼을 캐게 되면, 잡수실 겁니까?”
하고 물었다.
“그래, 캐면 먹어야지” 하고 스님이 대답하셨다.
속으로, ‘해탈한 도인이라고 들었는데,
몸에 집착해서 몸을 보존하겠다고 그 따위 것을 먹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스님께서 “오래 살라고 먹는 게 아니다.”라고 하셨다.
‘그러면 뭘까?
생사의 굴레를 벗어난 자는
모든 고苦의 원인인 몸이 공空하다는 것을 항상 실감實感하고,
그런 차원에 머물러서 삶을 볼 것이다.
그러면 몸이 필요하다고 요구하는 것은 어떤 형태의 것이든,
과감히 뿌리쳐야 함은 당연한 일이며,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나아가서 그 뿌리까지도 캐내 버려야만 한다.’
라는 것이 내가 불교에 대해 정립한 확고한 사고였다.
나는 그 시절 불교학생회에서
교리로 배운 관념적 불교에 중독되어 있었다.
그런 나의 사고체계가 해산 스님 근처에 머문 짧은 시간에
근본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갇혀있던 불교를 삶 속으로 끌어내
생명을 불어 넣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 해산 스님을 가까이서 뵐 수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불교에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내가 스님을 처음 뵌 것은
대학교 1학년 때 표충사에서 열린 대학생수련대회에 참여했을 때다.
회원들과 함께 막 절문을 들어서는데,
양동이를 들고 우리 앞을 지나가는 초라하고 볼품없는 한 노인이 있었다.
오갈 데 없는 불쌍한 노인을 절에서 보호해 주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어떻게 하든, 일정에 맞춰 수련을 한다고는 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천팔십배를 하고 법명을 받는 수계식에 참석하여,
수계를 해주신다는 조실스님을 모두들 엄숙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법당문이 열리고
말끔히 법의를 수하신 조실스님이 들어오셨다.
그런데 처음 보는 조실스님이 안면이 있는 분 같았다.
자세히 보니, 절문을 들어설 때 보았던 그 초라한 노인이 아닌가?
순간, 의아해 하면서도 당혹스러웠다.
그런데 법상에 오르셔서
주장자를 짚고 근엄하게 앉아 계신 모습이 너무도 성스럽고 경애스러웠다.
책을 통해서 알고 있었던 부처님이 지금 눈앞에 앉아 계시는 것이었다.
그 아래 마냥 엎드려 있고만 싶었다.
나는 이때 이미 해산 스님을 떠날 수 없게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스님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학재학 시절,
조그만 갈등을 문제로 삼아 내원암에 올라가 몇 달을 살고 내려온 것이
스님 곁에 있고 싶어 하는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 내원암에 몇 달을 살다가 온 이후로 내원암을 자주 들락거렸다.
고등학생들을 인솔하고 내원암으로 수련회를 몇 차례 갔다 왔고,
또 개인적으로도 의문이 생기면 즉시 달려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원암에만 가면
그 궁금하기만 하던 의문이 눈 녹듯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거기에 가면 그 궁금하던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가서 나무 한 짐 해놓고 청소하고 나면,
해산 스님께 인사드리고 내려오는 것뿐이었다.
그 날도, ‘어제 해산 스님께서 부산 소림사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비가 오게 한 뒤 가셨다’라는 말을 들었다.
낙동강에 바닷물이 역류할 정도로 극심하게 가물었는데
기우제를 지내니 비가 많이 왔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탈속脫俗해야 할 도인이 속세의 일에 왜 관여하고 나서는 건가?
그 보다는 더 고차원적으로,
중생을 교화하여 생사윤회의 수렁으로부터 제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고작 현상적現象的인 사건에 집착하여
삼류 도술사道術士처럼 신통력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아침 기차를 타고 내원암으로 갔다.
내원암이 가까워지자
오늘은 열일을 제쳐두고 꼭 한번 따져 물어야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그런데 해산 스님이 절 문밖 담벼락 쪽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내가 가는 것을 지켜보고 계셨다—.
이제까지도 방에서 뵙고 앉아 있어본 적은 없지만,
문밖까지 나와 계시는 것은 처음이었다—.
여하튼 인사를 드리니,
대뜸 “하참! 체면 구길 뻔 했제? 비가 안 왔으면 우짤 뻔 했노?”
라고 하셨다.
내가 물을 내용을 알고 미리 이야기를 해 버리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봐라, 비가 오니까 이 풀과 꽃들이 얼마나 싱싱하고 생동감 넘치며,
저 벌과 나비들은 얼마나 즐거이 날아 다니느냐?” 하셨다.
一塵中有一切刹 한 티끌 안에 모든 국토가 있고,
一一刹有難思佛 하나하나의 국토마다 헤아릴 수 없는 부처가 있다.
無盡法界盡亦然 다함이 없이 많은 법계가 모두 그러한데,
衆類咸來遊戱場 떼 지어 한바탕 놀이마당에 왔도다. <해산 게송>
해산 스님께서는 장난감 총으로
어른을 위협하려고 드는 철부지에게 우주의 마음,
법계法界의 마음인 대자비심大慈悲心을 내보이셨다.
◦ 그 날도 내원암을 막 들어서려는데
문 앞에 있는 화장실 쪽에서 나오시는 스님과 마주쳤다.
합장을 하고 반배를 하면서 보니,
스님이 잠자리를 손가락사이에 끼우고 계셨다.
“스님, 잠자리를 잡으셨습니까?”라고 하니,
아무런 반응도 미동도 없이, 순간적으로 손을 놓아 버리셨다.
잠자리는 유유히 날아가고 스님은 방으로 들어가셨다.
너무도 감동적이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한 장면이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그 몸짓,
그 장면을 계속 떠올리는 것만으로
틀림없이 공부의 구경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마침 공양때가 되어 세존께서는 가사를 입어시고
발우를 들고 사위성舍衛城으로 가시어 한집씩 차례로 걸식을 하시었다.
다시 정사로 돌아 오시어 공양을 마치신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뒤 자리를 펴고 앉으시었다.
그때 장로 수보리가 대중 가운데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의 옷을 걷어 메고 오른쪽 무릎을 꿇어 합장하며
“참으로 희유한 일이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했다.」
라고 금강경 첫머리에 쓰여져 있다.
나는 그 경을 읽을 때 마다
‘수보리가 무엇을 보고 희유한 일이라고 했을까?’ 하고 궁금해 했었다.
萬行圓成一擧足 만 가지 행이 발 하나 드는 데서 원만히 이루어지나니,
超等十地等覺位 십지와 등각의 지위를 넘어서고,
但能一念歸無念 단 한 생각에 무념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高踏毘盧頂門行 높이 비로의 정수리를 밟고 간다.
<해산 게송>
[명상음악] 진흙 속의 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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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예,감사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잠시 큰스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훈습이 됩니다...
저도 그걸 알게 되었지요,,,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