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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의 업적
단군
- 우리 민족의 시조, 고조선의 첫 임금. 천제 환인의 손자이며 환웅의 아들.
기원전 2333년 아사달에 서울을 정하고 단군 조선을 세웠다. 단군에 관한 '삼국 유사'의 기록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하늘의 황제인 환웅이 인간 세상에 내려가 인간을 구원하고자 원하므로,
환인은 천부인(하늘 나라 왕의 표지) 3개를 주어 세상에 내려가도록 허락하였다. 환웅은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의 신단수에 내려왔는데, 이 분이 환웅 천왕이다.
환웅이 360여 가지 일을 맡아 다스릴 때 곰과 범 한마리가 사람이 되게 하여 달라고 환웅에게 빌었다.
환웅은 쑥 한 줌과 마늘 20쪽씩 주면서,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으로 태어날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먹으며 굴 속에 있던 중 범은 참지 못하고 도중에 뛰쳐나갔으나,
곰은 잘 참아 내어 37일 만에 여자로 변하였다. 이 웅녀가 아기 갖기를 원하자, 환웅이 잠시 변하여
웅녀와 혼인함으로써 단군을 낳게 되었다고 한다. 단군은 인간으로서 처음 왕이 되어 1500년 동안
고조선을 다스리다가 기자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 주고 아사달에서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동명왕
-고구려의 시조(재위 전37~전19). 성은 고, 이름은 주몽.추모.상해.도모. 동부여왕 해부루가 죽고,
금와가 즉위하였는데, 어느날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하백의 딸 유화를 만났다. 유화가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자기를 꾀어 내었기 때문에 부모에게서 쫓겨났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금와왕은 유화를 데려다 궁중에 가두었다. 그 유화가 햇볕을 받고 임신하여 알을 낳았는데,
그 알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이 사내아이가 곧 주몽이다. 주몽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씩씩하여 7세가
되자 활도 잘 쏘았다. 그러자, 금와왕의 일곱 아들과 신하들은 시기하여 주몽을 죽이려 하였다.
주몽은 유화 부인의 말에 좋아서 졸본부여로 내려가 나라를 세우니, 이 나라가 곧 고구려이다.
기원전 36년에 비류국 송양왕의 항복을 받은 다음, 기원전 34년에 성곽을 쌓고 궁궐을 세웠다.
이어서 해인국을 정벌하고 북옥저를 멸망시켰다.
온조왕
-백제의 시조(재위 전 18~28). 고구려 시조 동명 성왕의 세째 아들. 동명 성왕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 유리(큰왕비의 아들)가 내려와 고구려의 태자가 되자, 형 비류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우려 하였으나, 도읍 문제로 의견이 엇갈렸다.
형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 충청 남도 아산군 인주?)로 가고,
온조는 하남의 위례성(지금의 경기도 광주?, 충청 남도 천원군 입장?)에 도읍을 정하고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였다. 얼마 뒤 비류가 죽고 그 백성들이 위례성에 모여들자 나라 이름을 백제로 고쳤다.
기원전 5년 남한산으로 도읍을 옮기고, 9년 마한을 멸망시켰으며, 10년에는 아들 다루를 태자로 세웠다.
박혁거세
-신라의 시조. 왕호는 거서간. 전설에 의하면, 신라 6부의 하나인 사량부의 소벌공이 어느 날 숲속에서
말의 울음 소리를 듣고 다가갔더니, 그 자리에 커다란 알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알 속에서 어린 아이가
나왔다고 한다. 그 아이가 10여 세가 되자 기골이 빼어나고 총명하여, 의논한 뒤에 왕으로 삼았다고 한다.
기원전 57년 13세에 왕위에 올라 17세 때 왕비를 맞고, 왕비와 함께 전국을 돌면서 농사.양잠을 장려했다.
국호를 서라벌, 서울을 금성이라 정하고 궁성을 쌓아 국가의 기초를 세웠다. 사람들은 박과 같이 큰 알에서
나왔다고 하여, 박(박)이라는 성을 붙였고, 박이 또 세상을 밝게 다스린다는 뜻에서 혁거세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광개토대왕
고구려 제 19대 왕(재위 391~412). 고국양왕의 태자. 이름은 담덕. 12세 때인 386년 태자로 책봉되고
아버지가 일찍 죽자 17세 때에 왕위에 올랐다. 391년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영락'이라 함으로써 중국과
대등함을 보였다. 392년에는 백제 북쪽의 석현(지금의 재령 부근) 등 10여 개의 성을 함락시켜 한강 북쪽의
많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396년에는 친히 백제를 정벌하여 58성을 무너뜨리고 왕의 동생과 그의 대신
10여 명을 볼모로 잡아왔다. 이리하여, 한강 이북과 예성강 동쪽 땅을 완전히 차지하였다. 400년에는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5만 명의 원군을 보내어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으며, 연나라의 모용희를 반격하여
신성.남소 등 두성 700여리의 땅을 갖게 되었다. 405~406년에 모용의 두 번의 침략을 받았으나 요동성.
목저성에서 모두 물리쳤다. 410년 (광개토 대왕 20)에는 동부여를 정복하고, 이어서 북부여를 무릎꿇게 하였다.
그리하여, 랴오허강 동쪽으로부터 중국 동북부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 하였다. 작은 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든 그는, 아깝게도 39세로 죽었다. 왕이 된 후 하루도 궁궐에서 편히 쉬지 못하고 전쟁터를 달려 배달 민족의
영웅으로서 높이 존경받고 있다. 그의 능은 자세하지 않으나, 414년에 장수왕이 만주 봉천 지안현 퉁커우에
세운 광개토 대왕의 능비에 그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묘호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호태왕이다.
이사부 - 신라시대 장군. 541년(진흥왕 2) 병부(兵部)의 책임자이자 당시에는 상대등(上大等)·시중(侍中)을
겸할 수 있던 병부령(兵部令)이 되어 562년까지 실권을 장악하였다. 545년에는 국사 편찬을 제안하여
거칠부(居柒夫) 등이 《국사》를 편찬하는 계기를 이루었다.
백결 선생 - 경주 낭산(狼山) 기슭에 살았다. 몹시 가난하여 어찌나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었던지
세상에서는 “현순백결(懸百結:가난하여 입은 옷이 갈가리 찢어짐)”의 문자를 빌려 백결선생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악조건 가운데서도 백결선생은 한점 흔들림이 없이 오직 거문고만을 사랑하여 모든 희로애락을
거문고로 풀었다. 어느 해 세모(歲暮)에 집집마다 울려나오는 떡방아 소리를 듣고 부인이 “우리는 무엇으로
과세(過歲)를 합니까”라고 근심하자 거문고로 방앗공이 소리를 내어 위로하였는데, 그 곡조가 후세에 전하여
《대악(樂)》이란 이름이 붙었다.
의자왕 -
의자(義慈)는 휘(諱)로서, 그는 왕의 시호가 없다.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632년(무왕33) 태자로 책봉되었다.
효성과 형제애가 지극하여 해동증자(海東曾子)라 일컬었다. 642년 친히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城) 등 40여
성을 빼앗았고, 이어 윤충(允忠)으로 대야성(大耶城:경남 합천)을 함락시켜 성주인 품석(品釋)을 죽이는 등
신라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듬해에도 당항성(黨項城:남양)을 빼앗아 신라가 당(唐)나라로 가는 입조(入朝)의
길을 막는 등 국위의 만회에 힘썼다.
계백 -백제 말기의 장군. 일찍이 사로(仕路)에 나가 벼슬이 달솔(達率:제2품)에 이르렀다. 당시 신라가 한강
유역을 강점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결렬되자 백제는 고구려 ·일본 등과 친교를 맺고
신라에 대항하였다.
관창 -신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때의 화랑(花郞). 신라의 좌장군(左將軍) 품일(品日)의 아들이다.
어려서 화랑이 되어 널리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수련을 쌓았으며, 15세 때 이미 말 타고 활 쏘는 데 능하여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에게 천거되었다.
김유신 -신라 시대의 장군. 김 수로왕의 12대손으로, 15세 때 화랑이 되었다. 629년 (진평왕 51) 아버지와
함께 고구려의 낭비성 공격에 참가했을 때, 홀로 적진으로 돌진하여 적장의 목을 베어 옴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더 높여 승리를 거두게 하였다. 644년 상장군이 되어서 백제에 빼앗겼던 일곱 성을 되찾았으며,
돌아올 때 백제군이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가 크게 무찔렀다. 647년 왕족인 신하 비담과 염종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 반란군을 토벌하였으며, 진덕 여왕이 왕위에 있는 동안에도 백제의 공격을 잘 막아
냈다. 660년(무열왕 7) 상대등이 되고, 당나라의 소정방이 이끄는 군사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668년(문무왕 8) 나.당 연합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서울인 금성에 남고, 김인문과 김흠순 등의 장군을
보내어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세상을 떠난 뒤에 흥무 대왕의 칭호를 올리었다.
문무왕 - 신라의 제30대 왕(재위 661∼681). 성 김씨. 이름 법민(法敏). 태종무열왕 ·문명왕후(文明王后)의
맏아들, 비(妃)는 파진찬(波珍飡) 선품(善品)의 딸 자의왕후(慈儀王后). 외모가 뛰어나고 머리가 총명하며,
지략(智略)이 많았다
원효대사 - 신라 때의 승려. 속성 설(薛). 법명 원효. 아명 서당(誓幢) ·신당(新幢). 압량(押梁:慶山郡) 출생.
설총(薛聰)의 아버지이다. 648년(진덕여왕2) 황룡사(皇龍寺)에서 승려가 되어 수도에 정진하였다
혜초 -신라의 고승. 723년(성덕왕 22) 당나라 광저우[廣州]에 가서 인도의 승려 금강지(金剛智)의 제자가
된 뒤, 그의 권유로 나신국(裸身國)을 경유하여 인도 동해안에 도착, 불교 성적(聖跡)을 순례하고
파미르고원을 넘어감
장보고 -신라시대의 장군. 일명 궁복.궁파. 일찌기 당나라 서주에 건너가 무령군 소장이 되었으나,
신라에서 잡혀간 노비의 비참한 생활에 분개하여 사퇴하고 귀국하였다. 해적들의 인신 매매를 뿌리뽑기
위해 왕의 허락을 얻어 1만 명의 군사로 바닷길의 요충지인 청해(지금의 완도)에 진을 설치하고 청해진
대사가 되어 군사를 훈련하고, 해적을 소탕하였다. 837(화강왕 2) 왕위 계승 다툼에서 밀려난 우징이
청해진에 오자, 이듬해 그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민애왕을 죽이고 우왕을 왕위에 오르게 한 뒤 감의군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후, 시기하는 신하들이 보낸 자객 염장에게 죽음을 당했다.
대조영 -발해의 시조. 왕호 고왕(재위 699~719). 668년(고구려 보장왕 27) 고구려가 망하자 고구려
유민으로 라오허강 서쪽으로 이주하였다. 당나라의 억압에 대항하여 천문령에서 당나라 군사를 크게
무찌르고 말갈족을 합하여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 699년 둥마오산(지금의 지린성 근방)에 성을 쌓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진', 연호를 '천통'이라 정하고 왕이 되었다. 713년 고구려의 옛 영토를 거의 회복하고
국호를 발해라 고쳤다. 그 때 발해의 영토는 5천 리(동은 동해, 서는 거란, 남은 신라)에 이르고 10만여호의
집과 수만 군대를 거느린 대국을 이룩했다.
강감찬 -고려시대의 명장. 본관 금주(衿州:서울 관악구 봉천동), 초명 은천(殷川). 983년(성종 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부시랑이 되었다.
서희 -고려의 외교가 ·문신. 본관 이천(利川). 자 염윤(廉允). 시호 장위(章威). 960년(광종 11) 문과에 급제,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에 이어 내의시랑(內議侍郞)이 되었다
정중부 -고려시대의 무신. 본관 해주(海州). 인종 때 견룡대정(牽龍隊正)이 되고, 의종 초 교위(校尉)를
거쳐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최무선 -고려 말, 조선 초의 발명가. 본관은 영주(永州:永川)이다. 왜구(倭寇)가 창궐하자 화약제조법의
필요성을 절감, 원나라 이원(李元)에게서 그 제조법을 배웠다
죽림칠현 -고려의 문인..도가풍으로 유유자적을 즐기던 문인들. 가전체 소설인 <공방전>을 쓴 임춘(林椿),
시와 서예에 능했던 오세재(吳世才), 당대의 명유(名儒)인 이인로(李仁老), 조통(趙通), 황보항(皇甫抗),
이담지(李湛之), 함순(咸淳). 중국 죽림칠현과 구별해서 강좌칠현(江左七賢), 해좌칠현(海左七賢)이라고도
하였다. 우리나라 청담의 시조라 할 수 있다.
청담이란 대충 중국의 원조 죽림칠현들처럼 현실에서 벗어나 고고하게 살아가는 문인들이 나누던 철학적인
담론.
김부식 -고려시대의 문신 ·학자. 본관 경주. 자 입지(立之). 호 뇌천(雷川). 시호 문열(文烈). 신라 왕실의
후예로서 경주의 주장(州長)인 위영(魏英)의 증손자.
지눌-고려의 승려. 조계종(曹溪宗) 개조(開祖). 속성 정(鄭). 호 목우자(牧牛子). 시호 불일보조(佛日普照).
서흥(瑞興) 출생
지눌 -고려 시대의 승려. 본성은 정, 호 목우자, 시호 불일보조. 부모의 뜻에 따라 8세 때 중이 되었다.
1182년 승과에 급제했으나, 수도에만 힘쓰기로 하였다. 창평 청원사에 들어가 '단경'을 읽고, 중생을
제도하려면 먼저 자신이 부처의 경지에 이르러야 함을 깨달았다. 지리산 상무주암에 들어가 3년간 참선하여
선의 참뜻을 깨쳤다. 송광산 길상사로 가서, 중생을 떠나 따로 뿌처가 있음이 아니라, 중생을 위하여 일하는
데에 부처가 있다고 가르쳤다. 선종(참선을 중시한 불교의 한 파)과 교종(불교의 교리를 중시한 불교의 한 파)을
하나로 합치려고 노력하여 선종 우선의 조계종을 세웠다. 죽은 뒤 국사의 관위가 주어졌다. 저서로 '수심결',
'진심직설','간화결의론','법어' 등이 있다.
의천 -고려시대의 승려. 천태종(天台宗)의 개조(開祖). 자 의천. 시호 대각(大覺).
이종무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의 무신. 시호 앵후. 본관 장수. 1381년 아버지와 함께 강원도에서 왜구를
물리친 공으로 정용호군이 되었다. 1397년(태조 6) 옹진 만호로 있을 때 왜구가 다시 쳐들어와 성을 포위하자,
이를 격퇴하여 첨절제사에 올랐다. 1400년(정종 2) 상장군으로 있을 때 2가 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여,
좌명 공신 4등으로 통원군에 봉해졌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서 1419년(세종 1) 삼군 도체 찰사가 되어,
전함 227척을 거느리고 쓰시마섬을 정복하였다.
정몽주 -고려 말기의 문신·학자. 본관 연일(延日). 자 달가(達可). 호 포은(圃隱). 초명 몽란(夢蘭)·몽룡(夢龍).
시호 문충(文忠). 영천(永川) 출생.
문익점 -고려시대의 학자 ·문신. 본관 남평(南平). 자 일신(日新). 호 삼우당(三憂堂). 시호 충선(忠宣).
초명 익첨(益瞻). 강성현(江城縣: 경남 산청) 출생.
최충 -고려 초기의 문신.해자. 자 호연. 호 성재, 시호 문헌. 본관 해주.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1013년
국사 수찬관이 되고, 태조에서 목종까지의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037년(정종 3) '현종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047년(문종 1) 문하시중이 되어 법판들에게 율령을 가르치고 형법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관리 임명에는 실력을 중히여겼으며, 직무에 성실을 다하여 공신의 호를 받았다. 72세 때 벼슬에서 물러나,
사립 학교와 같은 사숙을 열고 학자들을 기르며 여생을 보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해동 공자'라고
일컬어졌는데, 그의 제자들을 문헌공도라고 불렀다.
일연 - 고려시대의 승려 ·학자. 속성 김(金). 이름 견명(見明). 자 회연(晦然)·일연(一然). 호 무극(無極)·
목암(睦庵). 시호 보각(普覺). 탑호 정조(靜照). 경상북도 경산(慶山) 출생.
최영 -고려 말기의 무신. 시호 무민. 본관 창원.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아버지가 죽으면서,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한 유언에 따라 평생을 청렴하게 살았다. 왕의 호위병으로 뽑힌 뒤 39세 때
대장군이 되어 1358년(공민왕 7) 오예포에 침입한 왜선 4백여 척을 무찔렀다. 이듬해 평양에 침입한
홍건적 4만여 명을 물리치고, 1361년 안우와 함께 개성을 점령한 홍건적을 물리쳐 1등 공신이 되었다.
1388년(폐왕 우 14) 수문하시중이 되었을 때,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소유하겠다고 통고해 오자,
랴오둥 정벌을 나섰다. 그러나, 이 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그 후 이성계에게
잡혀 누명을 쓰고 고향으로 귀양갔다가, 그 해 12월에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죽음과 함께 고려 왕조의
운명도 기울어지고 말았다.
황희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처음 이름 수로, 자 구부, 호 방촌, 시호 익성. 본관 장수. 개성 출생.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관이 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서 숨어 살았으나, 이 성계의 간청으로
조선의 벼슬에 올랐다. 사헌 감찰, 경기도 도사, 이조 정랑 등을 거쳐 1416년 (태종 16) 이조 판서가 되었다.
1418년 충녕 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에 반대하다가 귀양갔으나, 1422년(세종 4) 풀려나와 좌참찬이
되었다. 그 후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431년(세종 13) 영의정이 되어 18년 동안이나 재상으로 있으면서,
농사개량.예법 등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세종이 가장 신임하는 재상으로 명망이 높았고,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만인의 존경을 받았으며, 숱한 일화를 남겼다. 시와 문장에도 뛰어나 문집인 '방촌집'을 남겼다.
경기도 파주의 방촌 영당, 경북 상주의 옥동 서원 등에서 제사지낸다.
맹사성 - 고려 말 조선 초의 재상. 본관 신창(新昌). 자 자명(自明). 호 고불(古佛) ·동포(東浦).
시호 문정(文貞). 온양(溫陽) 출생
장영실 -조선 시대의 과학자. 본관 아산. 원래 부산 동래에서 종살이를 하였는데, 매사를 자세히 관찰하고,
그 원리를 캐내는 데 열심이었다. 그리하여, 광석을 제련하거나, 무기를 만들고 고치는 일, 성을 쌓는 일,
농기구를 개량하는 일 등에 뛰어난 솜씨를 보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숨은 인재를 찾던 세종은 장영실의
소문을 듣고, 1423년(세종 5) 그를 불러 상의원 별좌에 임명하고, 종의 신분에서 풀어주었다. 1432년 중추원사
이천을 도와 천문 관측에 필요한 간의대를 만드는 사업을 벌였다. 그리하여, 1437년 대간의.소간의.현주일귀
.정남일귀(해시계) 등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세종은 이 기구들을 경복궁 안의 간의대에 보관시켰다.
1434년(세종 16) 자격루를 완성하고, 4년 후 흠경각의 자동 물시계인 옥루기륜을 만들었으며, 세종 23년에는
세계 최초로 측우기와 수표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아는 등 과학 발전에 공이 컸다. '발명의 날'은
장열실의 측우기 발명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세종은 그의 공을 기리어 상호군의 벼슬을 내렸으나,
1442년 그가 감독 제작한 왕의 가마가 부서진 책임을 지고 벼슬에서 쫓겨났다.
신숙주 -조선 초기의 학자.문신. 자 범옹, 호 보한재.희현당, 시호 문충. 본관 고령. 1439년 문과에 급제하고
1443년(세종 25)에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가서 시로써 이름을 떨쳤다. 귀로에 쓰시마섬에 들러 계해조약을
맺었다. 그 뒤, 랴오둥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 학자 황찬에게 음운에 관해 묻고, 성 삼문과 함께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만드는 데 힘썼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좌익공신 1등이 되고 예문관 대제학에 올랐다.
성삼문 등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죽자, 단종과 금성 대군을 죽이는 일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 공으로 좌의정이 되고 1460년(세종 6)에는 북방에 침입한 야만족을 정벌하여 영의정으로 올랐다.
뛰어난 문학적 재능과 학식으로 6대의 왕을 모시며, '국조오례의'.'동국정운','국조보감'.'세조 실록' 등을
편찬하는 데 참가하였다. 문화 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나, 세조가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는 일에 협력한
탓으로 비난 받았다. 저서로 '보한재집'.'북정록' 등이 있다.
한명회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청주(淸州). 자 자준(子濬). 호 구정(鷗亭) ·사우당(四友堂). 시호 충성(忠成).
장순왕후(章順王后:睿宗妃) ·공혜왕후(恭惠王后:成宗妃)의 아버지
이율곡 -조선 중기의 학자·정치가. 본관 덕수(德水),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谷)·석담(石潭), 시호 문성(文成),
강원도 강릉 출생이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이다
이퇴계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본관 진보(眞寶). 초명 서홍(瑞鴻). 자 경호(景浩). 초자 계호(季浩).
호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시호 문순(文純). 경북 예안(禮安) 출생
신사임당 -조선중기의 여류 서화가(書畵家).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호는 사임당(師任堂:思任堂:師妊堂)·
시임당(媤妊堂)·임사재(任師齋)이다. 강원도 강릉(江陵) 출생이며, 율곡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곽재우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 현풍(玄風). 자 계수(季綏). 호 망우당(忘憂堂). 시호 충익(忠翼).
의령(宜寧) 출생. 1585년(선조 18)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 때문에 파방(罷榜)되었다
조헌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 백천(白川). 자 여식(汝式). 호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
시호 문열(文烈).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하생
김시민 -조선 중기의 무신. 자 면오, 시호 충무. 본관 안동. 1578년(선조11)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 판관으로 있을 때, 군사에 관한 일을 병조 판서에게 건의하였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
자리에서 물러나싼. 1591년(선조24)진주 판관으로 기용되었으며,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죽은 목사를 대신하여 성을 수리하고 무기를 갖추었는데, 그 공로로 목사가 되었다. 사천.고성.진해
등지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경상 우도 병마 절도사에 올라 금산에서 다시 적을 격파하였다. 그 해
10월 왜적의 대군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3800명의 군사로 7일 동안 성을 굳게 지키며 싸워 왜적
3만여 명의 사상자를 냄으로써 큰 승리를 거두었다.(진주대첩) 이를 싸움에서 그는 용전 끝에 적의
총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1604년 선무 공신에 봉해지고 후에 영의정.상락부원군으로 관위를 높여 주었다.
이순신 -조선 중기의 명장. 자 여해, 시호 충무, 본관 덕수. 서울에서 태어나 1576년(선조 9) 무과에 급제,
함경도 동구비보권관이 되었다. 이어서 훈련원 봉사, 발포 수군 만호 등을 거쳐 1591년 유성룡 등의 천거로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에 올라, 왜적의 침략에 대비하여 군비를 갖추기에 힘썼다. 이듬해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제1차로 옥포 앞바다에서 적선 30여 척을 무찌르고, 이어서 제 2차로 사천에서 스스로
만든 거북선을 이용하여 적선 13척을 불태웠으며, 당항포에서 100여 척을 각각 쳐부수거나 불태우는 등
승리를 거두고, 자헌대부에 올랐다. 그 해 7월 제3차로 한산도에서 적선 70여척을 무찔러 역사상 유명한
한산 대첩의 큰 공을 세웠다. 이어서 정헌대부에 알랐고, 다시 안골포에서 42척의 적선을 침몰시켰다.
9월에는 적의 본거지였던 부산에 쳐들어가 적선 100여 척을 쳐부수었고,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테서 적의 수군을 크게 무찔러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겼으며, 최초로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되었다. 그 뒤 명나라의 원군이 들어오자 죽도로 진을 옮겨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적을 막았다. 그리고 전쟁이 좀 쉬는 듯 하자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 확충에 힘썼다. 1597년 반대파 간신들의
모함을 받고 서울에 압송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정탁의 변호로 면하고 권율의 부하 장군이 되었다.
같은 해 정유재란 때, 삼도수군 통제사가 되어 있던 원균이 참패하자,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되어,
남은 배 12척으로 133척의 적선과 대결하여 31척을 쳐부수었다. 1598년 11월 9일, 고금도로 진을 옮기고
도망가는 적선을 노량 앞바다에서 무찌르던 중 왼쪽 가슴에 유탄을 맞고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글에도 뛰어나
'난중 일기' 등의 저서와 여러편의 시조.한시 등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한산섬 달 밝은 밤에....'란 시조는,
그의 애국심을 잘 나타낸 것으로 유명하다. 투철했던 애국 정신과 뛰어난 전술로 나라를 지켜 준 그는,
죽은 뒤 영의정으로 관위가 높여지고,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사적 제 112호인
아산 현충사 등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제사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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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조선을 건국함. 조선의 제1대 왕(재위 1392∼1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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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 -조선 제2대 왕(재위 1399∼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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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조선 제3대 왕(재위 1400∼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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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조선 제4대 왕(재위 1418∼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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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 -조선의 제5대 왕(재위 1450∼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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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조선 제6대 왕(재위 1452~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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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조선 제7대 왕(재위 1455∼1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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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악형(惡刑)에도 굴하지 않고 순사(殉死)한
조선 전기의 6총신->[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성삼문,박팽년]
생육신 -조선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탈취하자 세상에 뜻이 없어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여섯 사람.->[이맹전.조여.원호.김시습.성담수.남효온]
논개 -임진왜란 때의 의기(義妓). 성 주(朱). 전북 장수(長水) 출생. 진주병사(晋州兵使) 최경회(崔慶會)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며, 그 밖의 자세한 성장과정은 알 수가 없다.
권율 -조선 중기의 명장. 본관 안동. 자 언신(彦愼). 호 만취당(晩翠堂) ·모악(暮嶽). 시호 충장(忠莊).
홍길동 -서자로 태어나 온갓 무술과 도술을 익혀 약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훗날 율도국을 세우고
나중에 왕이 되는 '홍길동전' 의 주인공
임꺽정 -조선시대의 의적(義賊). 일명 거정(巨正). 양주(楊州)의 백정(白丁)이었으나 정치의 혼란과
관리의 부패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1559년(명종 14) 불평분자들을 규합,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창고를 털어 곡식을 빈민에게 나누어 주고 관아를 습격, 관원을 살해했다.
삼학사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 청(淸)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한 세 학사.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등을 말한다.
박문수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고령(高靈). 자 성보(成甫). 호 기은(耆隱). 시호 충헌(忠憲)
한석봉 -조선 중기의 서예가. 본관 삼화(三和). 자 경홍(景洪). 호 석봉(石峯) ·청사(淸沙). 개성 출생.
왕희지(王羲之) ·안진경(顔眞卿)의 필법을 익혀 해(楷) ·행(行) ·초(草) 등 각 서체에 모두 뛰어났다
단원 -김홍도. 조선 말기의 화가. 안견.장승업과 함께 조선 시대 3대 화가의 한 사람이며,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풍속화가이다.
김삿갓 -조선시대의 방랑시인. 본관 안동(安東). 본명 병연(炳淵). 속칭 김삿갓. 자 성심(性深).
호 난고(蘭皐). 경기 양주 출생.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던
조부 익순(益淳)이 홍경래에게 항복한 죄로 폐족(廢族)이 되었다.
김정호 -조선 말기의 지리학자. 자 백원, 호 고산자. 본관 청도.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서울로 이사하여 열심히 공부하는 한편, 정확한 지도를 만들어 보겠다는 꿈을 키웠다. 그는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지도마저 정확하지 못함을 보고, 실제로 여러 지방을 다니며 지도를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전국을 30여 년간 두루 답사한 끝에 1834년(순조 34) '청구도' 2첩을 완성하였으나 만족하지 않고, 전국을
다시 답사하여 1861년(철종 12) '대동여지도'를 다시 간행하였고, 여러 지방의 연혁.풍속.인물.산수.거리
등을 상세히 기록하여 '대동지지' 15책을 간행하엿다. '대동여지도'는 손수 그리고 띵판을 새긴 것으로,
그 한 벌을 흥선 대원군에게 바쳤는데, 이것을 본 대원군은 나라의 기밀을 누설하였다는 죄명을 씌워
그를 옥에 가두고, 목각판 지도를 압수하여 태워버렸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감옥에서 숨졌다.
영조 -조선의 제21대 왕(재위 1724~1776). 휘(諱) 금(昑). 자 광숙(光叔). 숙종이 양성(養性)이라는
헌호(軒號)를 내렸다. 숙종의 2남으로 어머니는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 1699년(숙종 25) 6세 때
연잉군(延 燥 君)에 봉해지고, 1721년에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정조 -조선의 제 22대 왕(재위 1777~1800). 이름 성, 자 형운, 호 홍재. 아버지는 장헌 세자, 어머니는
혜경궁 홍씨. 1759년(영조 35) 왕세손으로 책봉되고, 1762년 아버지 장헌 세자가 비참하게 죽은 뒤,
1775년부터 할아버지인 영조를 대신해서 정치를 보살피다가 이듬해 영조가 죽자 왕위에 올랐다.
영조의 뜻을 이어받아 당파 싸움을 조정하고 뿌리뽑기 위하여 애썼다. 즉, 탕평책을 써서 인재를
고루 뽑아 썼다. 규장각을 세워 역대의 서적을 보관하고 임진자.정유자.한구자.생생자 등의 활자를
새로 만들어 인쇄술의 발달을 꾀하고, 서적 편찬에도 힘써, '국조보감'.'문원보불'.'규장전운'.'오륜행실'
등으르 간행하였으며, 자신의 문집 '홍재전서'도 완성하였다.
정약용 -조선 후기의 학자 ·문신. 본관 나주(羅州). 자 미용(美鏞) ·송보(頌甫). 초자 귀농(歸農).
호 다산(茶山) ·삼미(三眉) ·여유당(與猶堂) ·사암(俟菴) ·자하도인(紫霞道人) ·탁옹( 襲 翁) ·
태수(苔 戒 ) ·문암일인(門巖逸人) ·철마산초(鐵馬山樵).
전봉준 -조선 후기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의 지도자. 초명 명숙(明叔), 별명 녹두장군(綠豆將軍).
전라북도 태인(泰仁) 출생. 아버지가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된 후부터 사회개혁에 대한 뜻을 품게 되었다
김대건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부·순교자. 성인. 본관 김해. 세례명 안드레아. 아명(兒名) 재복(再福)·
보명(譜名)·지식(芝植). 충청남도 당진군 우강면(牛江面) 출생. 증조부 진후(震厚)가 10년 동안의 옥고
끝에 1814년 순교함
황진이 -조선 중기의 여류 시인. 기생. 진랑이라는 이름도 가졌고, 기생으로서의 이름은 명월이었다.
개성 출생. 중종 때 진사의 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문 공부를 하였는데, 시와 문장이 모두 뛰어났다.
가야금.거문고 등 악기도 잘 다루었고, 얼굴이 예쁜 것으로 더욱 유명하였다. 15세 무렵, 마을의 어떤
총각이 자기를 사모하다가 병들어 죽자, 충격을 받았음인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생이 되었다.
그 후 이름만 문인.학자들과 사귀며 뛰어난 글재주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시의 대학자 서경덕을
자신의 재주와 미모로 유혹하려다 실패하고는 그의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청산리 벽계수야.','동짓달 기나긴 밤에...'등의 시조와 많은 한시를 남겼는데,
황진이와 서경덕, 그리고 박연 폭포를 아울러 '송도 삼절'이라 불리었다.
홍경래 -19세기 초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난의 최고지도자. 출신 지역은 평안도 용강군
다미동(多美洞).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봉기 당시 42∼43세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옥균 -조선 후기의 정치가. 본관 안동(安東). 자 백온(伯溫). 호 고균(古筠) ·고우(古愚).
시호 충달(忠達).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주도하였다
안중근 -한말의 독립운동가. 본관 순흥(順興)이며, 아명 안응칠(安應七)이다.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출생했다. 한학(漢學)을 수학했으나 오히려 무술에 더 열중하였다
이완용 -한말의 정치가. 본관 우봉(牛峰). 자 경덕(敬德). 호 일당(一堂). 1882년(고종 1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주서(注書)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 ·검교(檢校) ·수찬(修撰) ·동학교수(東學敎授)
·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를 역임하였다
윤동주 -시인. 어릴때의 이름은 해환. 북간도 명동에서 태어났다. 용정의 은진 중학교와 평양의
숭실 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연희 전문 학교를 거쳐 일본 도시샤 대학 영문과 재학중 여름 방학때
귀국하다가 독립 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그가 죽은 뒤 1948년에 그의 동지들이 그가 남긴 원고들을 모아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사'라는
시집을 간행하였다. 이 시집이 세상에 나오자 비로소 알려져 일제 말기의 저항 시인으로서 우명해졌다.
대표 작품으로는 '또 다른 고향'.'십자가'.'별 헤는 밤'.'슬픈 족속'.'무서운 시간' 등이 있으며,
연세 대학교 안에 윤 동주의 시비가 세워졌다.
지석영 -조선 후기의 의사ㆍ문신ㆍ국문학자. 자 공윤(公胤). 호 송촌(松村). 본관 충주(忠州). 서울 출생.
손병희(민족대표33인) -한말 천도교의 지도자, 독립운동가. 호 의암(義菴). 초명 응구(應九).
후명 규동(奎東). 충북 청주(淸州) 출생. 1882년(고종 19) 22세 때 동학(東學)에 입교,
2년 후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수제자로서 연성수도(鍊性修道)하였다
유관순 -독립운동가로, 충청남도 천안(天安) 출생이다. 1916년 선교사의 소개로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하였으며, 1918년에는 고등과 교비생으로 입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학생들과 함께
가두시위를 벌였고, 일제 총독에 의하여 학교가 휴교에 들어가자 만세시위를 지휘하기 위하여 즉각
고향으로 내려갔다.천안·연기(燕岐)·청주(淸州)·진천(鎭川) 등지의 학교와 교회 등을 방문하여
만세운동을 협의, 4월 1일 아오내[竝川] 장터에서 3,000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시위를
지휘하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이때 아버지 중권(重權)과 어머니 이씨(李氏)는 일본
헌병에게 피살되고, 집마저 불탔으며, 자신은 공주 검사국으로 이송되었다.
안창호 -호는 도산(島山)이다. 평안남도 강서(江西)에서 출생했다. 한학을 배우다가 서당 선배로부터
신식학문에 눈을 뜨고, 조국의 앞날을 염려하던 중 청일전쟁(淸日戰爭)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보고 깨달은 바 있어 1895년 상경, 구세학당(救世學堂)에 들어가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방정환 -아동문학의 보급과 아동보호운동의 선구자인 아동문학가. 호 소파(小波), 서울 출생이다.
선린상업학교를 중퇴하고 보성전문(普成專門)을 마친 후 도요[東洋]대학에서 철학과를 수학했다.
최초의 아동문화운동 단체인 색동회, 청년구락부, 소년운동협의회 등을 조직하였다.
이수일,심순애 - 조중환의 소설『장한몽』에 등장하는 가상인물. 이수일과 심순애의 애절한
사랑이야기. 후에 영화로도 나왔음.
김두한 -한국의 정치가. 호 의송(義松). 서울 출생. 3·6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독립운동가
김좌진(金佐鎭)의 아들이다. 서울 교동국민학교를 마치고 협객으로 활동하면서 주먹왕으로
군림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주먹의 힘으로 민족적·의협적인 행동을 하였다.
이상 -한국의 시인, 소설가. 본명 김해경(金海卿). 서울 출생. 대표적인 작품으로 날개,종생기
등의 작품이 있다.
이중섭 -서양화가. 호 대향(大鄕). 평남 평양(平壤) 출생. 오산고보(五山高普) 졸업.
일본 도쿄문화학원[東京文化學院] 미술과 재학 중이던 1937년 일본의 전위적 미술단체의
자유미협전(自由美協展:제7회)에 출품하여 태양상(太陽賞)을 받고, 1939년 자유미술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안녕하세요
다른님들이 "이수일과 심순애는 왜 나오죠?" 라는 질문을 많이 하는데요.
그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수일과 심순애는 조중환의 소설『장한몽』 에 나오는 가상 인물입니다.
그 줄거리를 알려드리자면,
줄거리
주인공 이수일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아버지의 친구인 심택의 집에서 자라나 고등학교까지 마친 뒤
심순애와 혼인을 약속한다. 그런 어느 정월 보름날, 심순애는 김소사의 집으로 윷놀이를 갔다가,
거기에서 대부호의 아들인 김중배를 만난다. 심순애에게 매혹된 김중배는 다이아몬드와 물질공세로
그녀를 유혹하였고, 심순애의 마음은 점점 이수일로부터 멀어져간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수일은 달빛 어린 대동강가 부벽루에서 심순애를 달래보고 꾸짖어도 보았으나,
한 번 물질에 눈이 어두워진 여자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울분과 타락 끝에 고리대금업자 김정연의
서기가 된 이수일은 김정연의 죽음과 함께 많은 유산을 받게 된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과오를
뉘우친 심순애는 대동강에 투신자살하려다가 수일의 친구인 백낙관에게 구출된다. 결국, 두 사람은
백낙관의 끈질긴 설득으로 다시 결합하여 새 출발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소설의 원작은 일본작가 오자키의 소설 "곤지키야샤(금색야차)"입니다.
※이 노래의 위인은 모두 몇명일까요?
1절
단군, 동명왕(고구려-주몽), 온조왕(백제),박혁거세(신라), 광개토대왕, 이사부, 백결,
의자왕(삼천궁녀는 의자왕을 수식하는것), 계백, 관창 (10명)
2절
김유신, 문무왕, 원효, 혜초, 장보고, 대조영, 강감찬, 서희, 정중부, 최무선,
죽림칠현(고려문인 7인: 임춘, 오세재, 이인로, 조통, 황보항, 이담지, 함순), 김부식, 지눌국사,
의천, 이종무, 정몽주, 문익점, 최충, 일연 (25명)
3절
최영, 황희, 맹사성, 장영실, 신숙주, 한명회, 이율곡, 이퇴계, 신사임당, 곽재우, 조헌, 김시민,
이순신,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사육신(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성삼문, 박팽년),
생육신(이맹전, 조여, 원호, 김시습, 성담수, 남효온), 논개, 권율 (34명)
4절
홍길동, 임꺽정,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 박문수, 한석봉, 김홍도(단원), 김병연(김삿갓),
김정호, 영조, 정조, 정약용, 정봉준, 김대건, 황진이, 홍경래, 김옥균, 안중근, 이완용 (20명)
5절
윤동주, 지석영, 손병희(33인은 손병희를 수식), 유관순, 안창호, 방정환, 이수일, 심순애, 김두한,
이상, 이중섭 (11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