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흰 손
수녀님이 찾는다는 전화를 받은 건 어제 아침이었다. 차마 임종을 앞두고인 줄은 알지 못했다. 연락 못하고 지낸 지가 칠팔 년, 충청도 수리치골의 아름답고 맑은 풍치 속에서 수도원의 평화로운 노년을 지내고 계신 걸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관념 속에 가두어 둔 시간 속에서 수녀님은 어느새 노환을 맞은 것일까. 맑은 얼굴, 소녀 같은 자태였다. 가는 허리에 검은 수도복이 늘 애련함의 기억과 함께 하던 수선화 같은 해맑음의 잔상이 스쳐갔다.
아침 일찍 서둘러 열차에 올랐다. 기억을 되짚어 본다. 연세가 몇이신 지, 아마 예순 후반쯤 되셨을까. 무소식이 희소식 이랬는데 세월의 무상함이 새삼 떠올랐다. 경부선 철로 가에는 무심한 강물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강물의 끝 지점은 바다요 이승의 끝자락은 영겁의 처소인가. 심지가 다한 촛불의 꺼짐은 세상 이치인데도 사는 동안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잊고서 산다. 그러다가 이번처럼 뜻밖의 소식을 접하고는 놀란 듯 황급히 길을 나선다. 제행무상이라 세상에 영원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수녀님의 병실은 5층 호젓한 방에 있었다. 안내하는 수녀님이 조신하게 일러준다. 올해 벨라뎃다 수녀님 연세가 일흔 둘이라는 것과 간암 말기라는 것을. 마음이 처연해졌다. 조용히 병실 문을 열었다. 누우신 채 미동도 않는 수녀님은 흰 이를 드러내며 조금 웃어 주신다. 나도 웃었다. 다른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말이라는 것이 때로는 고통이나 재난 앞에서 얼마나 무력하고 공허한 것이던가. 십 년 세월의 간극은 거기에 없었다. 어제인 듯 수녀님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뇌리를 스치며 빠르게 지나갔다.
대구 과수원집 딸 셋이 모두 미리내 수녀가 되었다. 부모는 외인이었으나 딸들로 인해 후일 가톨릭 신자가 된다. 벨라뎃다 수녀님은 세 딸 중 중간이었다. 병환 중이신 언니 수녀님도 병실 옆 침대에 함께 계셨다. 얼마 전 세 자매 수녀는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오셨다. 누군가의 회갑기념이었다. 전능하신 분께서는 이 세상 순례를 거두실 때 당신의 땅을 밟게 하셨구나. 땅 위에 누구 하나 그들 이름을 기억하는 이 없을 때 그 분은 당신 딸들의 이름을 기억해 주셨구나.
가늘디가는 수녀님의 흰 손을 잡았다. 이미 묵주를 쥘 힘이 없어 손바닥은 빈손이었다. 한 때는 그 손에 애착도 번민도 쥐었건만 종국엔 이렇듯 다 버리고 가는 것을.
“양희씨 볼라고 아직 가지 않았나 보네.” 들릴 듯 말 듯한 소리였다. 세례명인 레지나 보다 수녀님은 늘 예전 그대로 양희씨라 불렀다. 하긴 세례 전부터 알았으니 그 이름이 더 익숙할 터였다.
“...... 염치가 없다. ” “네?” 앞에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옆에 계신 언니 수녀님이 통역을 하신다. “세월 지났는데도 늙지를 않았으니 얼굴이 염치가 없대요.” “아- 네 그 말씀이시군요.” 옛적 친분을 되살리는 해묵은 농담이었다. 할 말이 더 있으신 듯 하다가는 입술을 오므린다. “천국에서 만납시다.” 이 말 한마디를 하시고는 힘없이 눈을 감으신다. 마음이 숙연했다. ‘수녀님 저는 천국이 자신이 없는데요’ 하는 그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얼마간의 비감한 침묵 후에 수녀님이 편하시게 침대 시트를 다독여 드린다.
목련처럼 피어나던 삼십 대에 수녀님을 처음 만났다. 그러나 그 목련은 그 때 병든 꽃이었다. 심장이 병약한 환자와 병실을 돌보는 약사 수녀로서 우리는 첫 대면을 한 것이다. 가톨릭에 입문하고자 초심자의 병약한 열정에 들떠 있던 내게 수녀님의 출현은 거룩한 회심에 비춰진 등불이었다. 입원실 옆 침대에 열심 했던 동정녀 할머니를 안배해주고는 나날이 꽃처럼 위안을 가져다주었다.
느릿한 대구 말씨였으나 금테 안경 속의 혜안은 빛이 났고 가는 몸매에 차가워 보였으나 속정이 깊은 분이셨다. 가톨릭계 병원으로 설립 초기였으니 건강 회복 후 자연스레 ㅅ병원을 후원하게 됐다. 뜻을 모은 신자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월 모임을 갖고 수녀님은 매번 훈화말씀으로 영적인 힘을 심어주었다. 그 세월이 십 오 년이었다. 오십대 초반 수도자로서의 전성기와 초심 신자의 맹목적인 정열이 늘 함께 한 시기였다.
하단 집으로 언젠가 수녀님이 방문하셨다. 겨울이었을까. 이불 밑에 함께 발을 넣고는 자매처럼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때 나무 십자가를 주고 가셨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세상 근심에 짓눌렸을 때도 나는 그 나무 십자가를 늘 매만지곤 했다. 그 고상은 정(情)을 나누었던 한 수도자의 사랑이자 하느님의 위안이었다.
이 땅에서 수도자로 산다는 것, 그것은 전적인 자아포기요 헌신이 아닐까. 수녀님에게서도 그늘이 보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언뜻언뜻 스치는 인간적인 면모가 그분께로 가까이 다가가는 지름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신을 섬기며 근원적인 물음을 통해 자신의 길을 꽃피우며 그렇게 수녀님은 운수(雲水)의 길을 걸어갔다.
눈을 감은 수녀님의 모습은 애기 같다. 소화데레사처럼 예수님의 작은 꽃이다. 머리 수건을 한 채 누워 있는 티 없는 얼굴은 유리알 같은 별사탕이다. 평화로이 잠든 모습에서 한 생을 추구해 온 님의 모습을 보는 듯도 하다. 하늘나라는 저런 것일까.
오래 전에 수녀님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환자였고 수녀님은 성한 이였다. 이제 그녀를 마지막 대하는 지금은 그 반대 입장에 서 있다. 수녀님은 성치 못한 나를 보살폈으나 나는 수녀님을 보살펴 드릴 수가 없다. 그 사실이 저릿하게 가슴을 눌러온다. 그 때 홍윤숙 시인의 애송하던 싯귀가 떠올랐다.
내가 지상을 마지막 떠나는 날은
꽃피는 춘삼월 어느 아침이거나
만산홍엽으로 물들어 불 타 오르는 가을 햇빛 속이면 좋겠다.
머리맡에 사랑하는 가족들 둘러앉고
부엌에선 한 생애 손때 묻은 놋주전자
달달달 물 끓는 소리 들리고
그레고리안 성가 한 소절 잔잔히 흐르는 향불 사이사이
슬로비디오로 돌아가는 한 생애 필름
스르르 문풍지에서 바람자듯 잠들면 좋겠다.
............ 중 략 ............
어둡고 긴 묘지의 터널을 지나
먼 산과 들을 건너 비로소 열리는 광활한 빛의 나라
애증도 이별도 생사고락도 다시없는 나라
주님 홀로 지키는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면 좋겠다.
수녀님은 그렇게 창호지에 저녁 햇살이 지듯 고요한 천상의 여로를 꿈꾸고 있을까.
이불 깃 사이로 수녀님의 작은 손을 만져본다. 손과 손의 교감, 이미 애증이나 칠극(七克)의 고뇌마저 놓아버린 손이다. 나는 새들이 무심히 우짖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다보았다. 그리고는 말없이 병실 문을 나섰다. 바깥에는 유난히 햇살이 눈부셨고 거리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첫댓글 하늘나라로 가신 수녀님의 기억.... 가을 끝자락에서 더욱 돼새겨 집니다.
저의 제4수필집에 실렸던 글을 쉼터님들과 함께 나눕니다.
나눔은~~~ 친분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주님 안에서 평화를 빕니다.
위령성월의 이달은 삶과 죽음을 기억하게 하는 달입니다.
운향님의 수녀님을 향한 절절한 회고...
우리도 언제가는 그 순간을 맞을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 너무도 생소한...
익숙하고 정들었던 모든 것을 뒤로하고...
그러나 우리의 필연인 그곳을 향한 인간들의 괴뇌는
이렇듯 많은 사연을 낳고 있지요.
수녀님의 천상 복락을 위해 기도합니다.
@록은 록은님,
쉼터를 통해 자주 만나뵈니 반갑습니다.
평화를 빕니다.
진하게....아름다운 향기가
마음을 ....
혹시...운향님께서....천양희님...이신지요...
선생님 시를 몇 번 읽었는데..
꿈은 아니겠지요...
곡스님, 반가워요.
이름은 맞는데 성씨가 틀리지요.
'천양희' 그분은 시인이시고 저는 수필을~~~
곡스님도 시인이시던데요?
따뜻한 목소리 많이 들려주세여~~~~^^*
아하...ㅎㅎㅎㅎ
운향님....올려 주시는 글
너무 좋아요...
자주....읽고 싶어요...
수녀님께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시길 빕니다.
따뜻한 마음 고맙습니다.
이 가을 행복하십시요----
이 위령성월에 귀한 글을 접하며
삶과 죽음을 생각 합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세상을 떠날 수 있기를 바래 봅니다.
고맙습니다.~!
하나님~~
반갑습니다.
늘 좋은 사진과 글 올려주셔셔
카페를 풍성하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