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대 수인천황(垂仁天皇:B.C.9~A.D.70)
수인천황시기 도읍을 ‘纏向’으로 옮기고 ‘珠城宮’을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纏向의 소재지로는 ≪肥後風土記≫에 ‘肥後國 玉名郡’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 의문시 되는 것은 수인천황시기에도 도읍이 纏向이었음에도 그 후대천황인 경행천황(景行天皇)시기에도 도읍을 纏向으로 했다는 기록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본 것이 숭신천황과 수인천황은 다른 세력으로 숭신천황과의 전쟁에서 이겨 다시금 纏向에 도읍을 세웠다는 것(1)과 纏向이란 지명이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곳일 수 있다는 것(2)입니다. 무엇이 더 가능성이 있고 없고는 일본서기를 보시고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수인천황시기 주목할 것은 3가지 사건입니다.
첫 번째가 숭인조 65년에 왔던 있던 임나(任那)국의 ‘蘇那曷叱智’의 귀국이고 두 번째는 ‘天日槍’의 등장 세 번째는 순장의 금지입니다.
그럼 첫 번째부터 보겠습니다.
수인천황 2년이 되는 해에 任那人 蘇那曷叱智가 돌아가길 청하자 천황은 붉은 비단 100필을 선물로 주고 돌려보내주었다는 것입니다.(이후 첨가되는 부분은 蘇那曷叱智가 돌아가려하자 신라가 군사를 보내어 붉은 비단 100필을 빼앗았고 이로 인해 두 국가의 사이가 나빠졌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 뒷부분에 一云 이라 하여 똑 같은 이야기지만 이름만 다르게 나옵니다.
‘意富加羅’ 왕자 ‘阿羅斯等’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기본줄거리는 天日槍설화+蘇那曷叱智설화이며 아라사등이 귀국하면서 숭신천황의 이름인 ‘미마키(御間城)’를 본따 국호를 ‘미마나(彌摩那)’로 했다는 첨가부분이 있습니다.
이 기록에서 저의 의문점은 수로왕이 가야의 창건자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가야가 세워지기까지는 이시기 보다 무려 반 세기가 더 흘러야 수로왕의 가야국이 역사에 등장하는데 이미 기원전 시기에 任那나 意富加羅(혹은 大加羅라고도 하는데 글쎄...)라는 국명이 등장하여 혼란스럽게 합니다. 물론 伽倻라는 나라가 갑자기 등장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기반구축은 기원전 시기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이미 국호가 수로왕의 개국이전부터 등장하는 것은 삼국유사의 기록이 누락된 것이거나 일본서기의 이 기록은 연대를 소급시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두 번째 천일창(天日槍)의 도래 설화입니다.
천일창설화는 이미 많이 알려지고 언급된 설화이기 때문에 줄거리는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바로사 카페 1인 컬럼방에 들어가시면 역사탐정Y(임길채)님께서 올린 글 중 천일창 이야기가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천일창은 부인을 쫓아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고사기≫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본서기에도 있나? 지금 PC방이라 확인을 못하는데, 제 기억으로 일본서기에는 부인을 쫓아 왔다는 기록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천일창이 부인을 쫓아 일본열도로 갔다면 왜 가면서 7가지 보물(칼, 거울, 옥 등)을 가지고 갔는가... 도 생각해봐 될 것이며 그것을 왜 수인천황에게 바쳤으며 이후 천일창의 행로는 부인의 행방을 찾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고사기에서의 부인이 도망가 그것을 찾아 일본으로 왔다고 하는 것은 천일창과 일본천황과의 전쟁을 숨기기 위한 하나의 隱喩가 아닐까 합니다.
천일창은 7가지 보물을 가지고 일본으로 갔고 수인천황은 그것을 받고 단마(但馬)에 보관하였는데, 뜬금없이 어디에 살고 싶냐는 말과 함께 ‘파마국(播磨國)’의 ‘■粟邑’과 ‘담로도(淡路島)’의 ‘出淺邑’을 주겠다고 하였으나 천일창은 거절하고 近江國 吾名邑에 가서 잠시 머물다가 但馬國으로 갔으며 천일창을 따라왔던 사람들은 近江國 鏡村 골짜기에 머물러 살았고 일본서기에서는 ‘요인’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설화는 흡사 전쟁을 한 것을 비유한 것처럼 보여지는 것이 천황이 왜 타인에게 땅을 주겠노라라고 말했고, 천일창은 자기가 머물고 싶은 곳을 선택하겠다고 하여 단마국에 간 것 그리고 근강국에 자신이 따라온 사람들을 놔둔 것은 천황이 신라국의 공격을 받고 항복하여 播磨國과 淡路島의 일부를 할양하겠다고 하였으나 천일창은 조국(신라)과의 접촉유지를 위해 길비~출운 지방을 차지하였고 신라의 세력을 내륙지방에 침투시키기 위해 근강국 경촌을 자신을 따라왔던 사람들에게 준 것으로 해석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길비~출운지역은 다음에도 이야기 할 것과 같이 신라계유물과 신라계통의 지명이 많이 남아있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므로 신라의 이 지역진출이 구전을 통해 천일창 설화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세 번째는 순장의 금지입니다.
수인천황 28년 왕의 동생 ‘倭彦命’이 죽자 능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을 모아 순장을 했는데 땅에 묻힌 사람들은 수 일 동안 죽지 않고 울부짓으며 절규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천황은 순장을 금지했고 재위 32년 황후가 죽자 출운국 土部 100명을 데려와 진흙으로 사람형체를 만들어 산 사람대신 능묘에 묻게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서 土部란 흙을 다루는 기술자 집단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되고 출운국에서 데려왔다는 것은 일본인들은 아직까지 그런 기술자 집단이 없기 때문에 천일창의 영토인 출운국에서 잠시 고용한 것일 것입니다.
진흙으로 사람형체를 만들었다는 것은 ‘하니와’라는 것을 말하는 것을 신라 금령총(5세기~6세기)에서 발굴된 기미인물형 토기와 같은 것을 일본에서는 하니와라고 표현합니다.
일본서기의 이 기록은 하니와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현재 하니와가 최초로 발굴된 곳은 자우산고분이며 자우산고분에서 발굴된 하니와의 편년을 4세기정도로 잡고 있기 때문에 문헌의 기원1세기와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고고학에서는 발굴된 것만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현재까지 발굴된 것만가지고 이 기록이 거짓이다 어쩌다 라고는 보류하는 것이 옳다고 보여집니다.
제 12대 경행천황(景行天皇:71~130)
이미 언급했듯이 경행천황시기 도읍또한 纏向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했기 때문에 생략.
재위 12년 9월 筑紫 豊前國 長峽縣에 궁을 짓고 그 곳을 京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京이라는 것은 서울, 도읍이라는 뜻입니다. 축자를 京으로 했다?
이 기록의 의미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경행천황시기에는 土蜘蛛정벌과 熊襲정벌등이 있는데, 土蜘蛛나 熊襲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공부중이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제 13대 성무천황(成務天皇:131~190)
성무천황시기에는 주목해봐야 할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 인물은 ‘武內宿禰’라는 이름을 가진 사나이 입니다.
성무천황 3년에 大臣이 되었다고 일본서기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붙여진 말이 성무천황과 같은 날에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성무천황은 24살(경행 46년)에 태자가 되었기 때문에 성무3년시 武內宿禰의 나이는 41세가 됩니다. 이 기록까지는 별로 주목할 것이 없겠지만 앞으로 보시면 아시게 됩니다.
제 14대 중애천황(仲哀天皇:192~200)
성무천황이 죽은 해가 190년이고 중애천황이 등극한 때를 192년이라 기록해 1년의 공백이 보입니다. 하지만 일본서기를 봐도 특별히 주목할 만한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미 성무천황시기때도 24살에 태자가 되었다는(본래는 33살) 잘못된 기록과 함께 중애천황의 등극에도 의문점이 들게 되어 작위적인 기년조작이 눈에 보이게 됩니다.
중애천황이 죽은후 황후가 되는 신공황후의 이름을 중애기에서는 ‘氣長足姬’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氣長足姬가 신라계라는 주장은 일본학자나 여러 한국학자에 의해 나오고 있으나 명확한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신공황후가 신라계가 아닌 백제계가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 보지만 아직까지 추측일뿐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또 생략.
중애천황은 熊襲을 정벌하려다 실패하고 그 다음해 죽습니다.
熊襲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것으로 보이지만 중애천황이 죽은 것을 신공황후나 武內宿禰가 숨기고 있다가 장사지낸 것(고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중애천황의 사망시 기록을 봐도)을 보면 중애천황의 죽음은 신공황후와 武內宿禰의 합작품이라고 보여집니다. 하지만 왜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미지수이며 공부를 더 해야 되는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