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장히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인산 선생님께서 제발 우리 몸에 칼대지 말고, 항암제 맞지 않고, 방사능 쬐지 말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 같아 올려 보았습니다. 과연 이러한 상황에 처했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처하셨겠습니까?
말기암 환자 남편의 극한 외조기
외줄타기로 달려온 3년 “생활고에 힘들지만 아내가 자랑스럽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주치의를 찾아가는 날이 다가오면 며칠 전부터 초조해진
다. 더 나빠졌으면 어떻게 하나? 다른 방법은 또 없을까. 주치의 말 몇 마
디 듣는 것에 불과한데 왜 이리 안정이 안 되는지….’ 남편은 어떻게 아내
의 암과 싸우는가. 말기암 환자 남편의 極限 외조기.
아내는 말기 암 환자다. 3년 반 전 처음 병원을 찾았을 때, 이미 온몸은 물
론 암세포들이 뼛속까지 전이된 상태였다. 말기암 환자의 가족으로 사는 고
통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암 환자의 생존 기간은 간병인 하기
에 달려 있다고 할 만큼 암 환자의 간병은 피를 말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월간중앙’에서 “암 환자 가족들이 읽고 힘을 얻을 수 있는 남편의 외조
기를 듣고 싶다”고 했을 때 두 가지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하나는 언론
이 암 환자의 가족들에게 관심을 가져 준다는 것이 고마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언론 앞에 나서는 것에 대한 반감이었다. 나는 아직 아내가 암
환자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 싫다.
주위에서는 나름대로 걱정해 주는 것이겠지만, 당사자에게는 동정으로 비치
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내가 아직 완치된 것도 아니고, 투병중이기 때문에
더욱 언론에 나가는 것이 망설여졌다. 지난 세월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 자
체가 아직은 고통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부부 이야기를 통해 다른 암 환자와 그 가족들이 조금이라도
힘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인터뷰 요청을 수락했다.
“헉!”
2000년 10월, 반찬그릇을 넣으려고 냉장고 문을 열던 아내가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내는 비명을 듣고 달려간 내게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며 허리 통증을 호소했다. 아내의 이 외마디비명은 우리가 겪은
지난 3년 반의, 아니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길고 긴 암투병을 알리는 신호음
이었다.
대전 토박이인 우리 부부는 당시 아파트 근처에서 함께 약국을 운영하고 있
었다. 아내와 나는 일곱 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사내결혼한 부부다. 약
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던 아내는 결혼 후 회사를 그만두고 약국을 개업했
고, 나는 계속 직장생활을 하다 지난 1992년 명예퇴직한 뒤 작은 사업체를
차렸다. 그러나 IMF 여파로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사업체를 계속 끌고나가
기가 벅차 이내 접고 아내의 약국 일을 거들던 참이었다.
허리가 아프다며 주저앉아 일어서지 못하는 아내를 업고 무조건 근처 정형
외과로 달려갔다. X-레이 촬영을 했으나 특별한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상이 없다는 의사 말에 안심한 아내는 진통제 주사를 맞고 한숨 잔 뒤 이
내 퇴원해 약국으로 향했다.
나 역시 놀라기는 했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이 날도 밤 늦게까지 약국
을 지키다 퇴근했다. 그러나 아내는 한밤중에 또 다시 자지러지게 허리 통
증을 호소했다. 놀라서 근처 종합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으나 역시 병원에서
는 진통제만 주사해 줬다. 그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시간이 없다. 큰 병원 가서 정밀 진단 받아라”
이날 이후 아내의 허리 통증은 계속됐다. 출근하듯 정형외과를 들락거렸지
만, 진통은 점점 더 심해졌다. 주사와 물리치료에도 차도가 없자 아내는 정
기적으로 찜질방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달이 훌쩍 흘렀다. 그러나 아내의 허리 통증은 가실 기미가 없었
다. 은근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내에게 다른 정형외과로 옮겨 다시 X-
레이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병원을 옮겨 다시 검사받
았지만 여전히 허리 통증의 원인은 찾을 수 없었다.
이즈음, 아내는 어디서 스포츠 마사지를 받으면 좋다는 말을 듣고 동네에
서 유명하다는 스포츠 마사지사를 찾아 갔다. 그러나 아내는 통증 때문에
마사지조차 받을 수 없었다. 마사지사는 뭔가 이상하다며 “내과 검사를 받
아 보라”고 권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 때까지 내과 검진을 받을 생
각을 못 했는지 모르겠다.
내과를 찾은 아내는 의사의 문진에 목과 겨드랑이도 아프다고 했다. 그 때
까지만 해도 나는 아내가 목과 겨드랑이까지 아파하는지는 몰랐다. 병원에
서 혈액 검사와 초음파 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를 살피던 의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심상찮은 분위기가 진찰실을 휘감았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의사는 깊은 숨을 내쉬더니 “시간이 없는 것 같다. 큰 병원에 가서 정
밀 진단을 받으라”고 말했다. 의사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 순간까지도 미처 암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음날, 의사의 권유에 따라 아내와 함께 대전에서 비교적 큰 병원을 찾아
가 컴퓨터단층(CT) 촬영을 했다. 며칠 후 전화가 왔다. 병원이었다. 검사
결과 ‘골육종’이 발견됐다는 것이었다. 자궁에서는 7cm 크기의 혹도 발견
됐다고 했다. 골육종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던 나는 자궁의 혹만 염려되었
다. 골육종이야 그냥 뼈에 생긴 육종인가보다 하고 단순히 생각했다. 아내
는 나중에 유방암 판정을 받았지만, 당시 유방 초음파 검사에서는 아무런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일단 수술을 권했다. 나는 자궁의 혹 때문이려니 하고 아내와
의논 끝에 서울로 올라가기로 했다. 서울 모 대학병원에는 처남 부부가 의
사로 근무하고 있었서 처남에게 의지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 때까지도 우
리 부부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의사가 시키는 대로, 반사적으로 행동
했던 것 같다.
대전에서 찍은 CT 사진을 받아 서울 병원 산부인과로 가지고 갔다. 방사선
과 의사인 처남댁은 산부인과 주치의와 무엇인가 심각하게 얘기하다 아내
와 내가 들어가자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나는 순간 ‘무엇인가 감추고 있
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차마 무슨 이야기냐고 묻지 못했다. 본능
적으로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그 순간 병실의 분위
기는 침울하다 못해 싸늘하기까지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골육종은 뼈에 발생해 유골조직(類骨組織) 혹은 골조
직을 형성하는 악성 종양을 말한다. CT 검사 결과 뼈에서 골육종이 발견되
었다는 것은 이미 암이 뼈에까지 전이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내는 이미
말기암이었던 것이다.
아내는 2000년 12월13일 자궁수술을 받았다. 남들은 수술 스케줄을 잡는
데 한 달씩 기다리기도 한다던데, 처남 부부가 의사였던 덕을 본 듯했다.
그 때까지 아내와 나는 단 한 번도 의사에게 암이라는 말을 듣지 못했다.
자궁혹부터 제거해야 한다는 말에 그런가보다 하고 부랴부랴 수술 날짜부
터 잡았을 뿐이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안 해 준다. 바
빠서인지, 아니면 말해도 환자나 환자 가족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
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병원에 있는 동안 그 점이 늘 답답했다. 내 짐작일
뿐이지만 의사들은 아내의 자궁에서 생긴 암이 뼈로 전이돼 골육종이 생겼
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자궁수술도 그래서 했던 것 같고….
그런데 수술 후 조직검사 결과 자궁의 혹이 양성으로 나타났다. 자세한 속
사정을 몰랐던 나는 양성이라는 말에 일단 안심을 했지만, 의사들은 오히
려 당황했던 듯하다. 원발암을 찾기 위한 여러 검사가 시작됐다. 일단 의사
들은 위장내시경 검사를 실시했다. 그러나 아내가 너무 괴로워해 중도에 포
기해야 했다. 아내가 극심한 다리 통증을 호소했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대
신 자기공명영상(MRI) 검사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MRI 사진에서 척추뼈
가 부러진 것이 발견됐다.
허리 통증과 다리 통증도 부서진 뼛조각이 척수를 누르기 때문인 것으로 밝
혀졌다. 정형외과에서는 사진을 보자마자 수술하자고 했다. 아내는 자궁수
술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인 12월23일 척추뼈수술을 받았다.
아내가 척추뼈수술을 받는 것을 보면서 나는 정형외과 의사들은 인간목수라
는 사실을 절감(切感)했다. 아내가 받은 척추뼈수술은 갈비뼈를 잘라내 척
추의 부서진 뼈가 있던 위치에 대신 끼워 넣는 대공사였다. 갈비뼈를 잘라
내야 했기 때문에 수술도 등이 아닌 복부쪽을 했다. 이 수술은 수술 도중
다른 장기들이 다칠 수 있는 위험한 수술이기도 했다.
항암치료 시작 전 이미 배변도 못 하게 된 아내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의사들의 말만 듣고 척추뼈수술을 받은 것이 큰 실
수였다. 그 수술 후 아내가 걷지 못하게 됐다. 수술 전에, 후유증으로 걷
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그
때는 들었다고 해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
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울의 병원에 입원한 이래 매일매일 하도 엄청난 일들이 들이닥쳐 하루하
루가 멍하게 부유(浮遊)하고 있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주위에서 뭐라고 하
는 말들이 하나도 뇌로 전달되지 않았다.
로봇마냥 검사받으라면 검사받고, 수술하자면 수술하고…. 걷지 못할 수 있
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평생 진통제를 맞는 한이 있더라도 척추뼈수술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정형외과가 아닌 신경외과 수술을 받았거
나…. 지금이야 다양한 치료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 때는 그런 것
도 몰랐다. 어쨌든 아내는 지금도 그 수술의 후유증으로 휠체어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정작 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척추뼈수술을 받은 후 아내가 대소
변을 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수술 후 웬일인지 아내는 장운동을 전혀 하지
못했다. 소변은 소변줄을 끼워 간신히 받아 냈으나 대변이 큰 문제였다. 사
람이란 먹는 만큼 밖으로 배설해야 하는데, 아내는 장운동을 하지 못하니
위에서 소화되어 내려온 음식이 장에 차곡차곡 쌓이게 되는 것이었다.
유일한 방법은 배를 마사지해 변을 인공적으로 밀어내는 것이었다. 항암치
료를 받기 위해 입원한 환자가 정작 항암치료는 시작하기도 전에 걷지도 못
하고, 배변도 혼자서는 하지 못하게 됐으니, 그 기막힘은 경험해 보지 않
은 사람은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하루 종일 아내의 배를 마사지해 주고 변을 받아 내는 것은 고스란히 내 몫
이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오가는 병실에서 변을 받아 내는 것은 아내에
게나 나에게나 못 할 짓이었다. 특히 아내는 남들 앞에서 변을 받아 내는
것을 매우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병실도 1인실로 옮겨야 했다. 경제적으로
상당히 부담되는 일이었다.
수술 후유증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술 후 아내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워
졌다. 체온을 높이기 위해 하루 종일 전신 마사지를 해 줬지만, 마사지로만
은 한계가 있었다. 고민 끝에 한 가지 묘수를 생각해 냈다. 다리미로 온몸
을 따뜻하게 데워 주는 것이었다. 집에서 다리미를 가져와 아내의 배를 수
건으로 감고 물을 뿌려 가며 다림질을 했다. 아내의 몸을 다리미로 지지며
이것이 인간의 몸인가 싶어 가슴 속에서 피눈물이 났다. 어쨌거나 다림질
은 생각했던 것보다 효과가 있었다. 배가 따뜻해져서인지 변도 예전보다
잘 보는 것 같았다.
의사가 회진을 돌 때마다 “수술이 잘못 된 것 아니냐”는 말이 목구멍까
지 치솟았지만 참았다. 병원에서 의사에게 밉보여 봤자 손해는 고스란히 환
자에게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의사들은 걷지 못하게 된 것이나 대변을 못
보는 것에 대해 일절 설명이 없었다. 무턱대고 지켜보자는 반응이었다.
결국 아내는 2001년 4월 인공항문수술을 받았다. 인공항문수술은 일반적으
로 결장암이나 직장암수술 등으로 직장이나 항문을 크게 절제한 환자들이
받는 수술로, 오른쪽 혹은 왼쪽 배 아랫부분으로 결장하부를 꺼내 인공적으
로 새로운 항문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인공항문은 배변 활동을 조절하는
기능이 없으므로 평생 배 밖으로 대변주머니를 달고 살아야 한다.
척추뼈수술을 받으면서 뼈 조직검사도 함께 받았고, 이 조직검사로 아내는
최종적으로 암 판정을 받았다. 이전까지는 의사에게서 정식으로 암이라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의사가 암이라는 말을 처음 끄냈을 때, 솔직히 충격
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다. 의사들이 정확한 병명을 말해 주지 않을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냥, 멍한 상태라고 할까. 아무런 생
각이 들지 않았다.
아내의 주치의는 암이라는 사실만 말해줄 뿐 치료가 가능한 상태인지, 아닌
지, 몇 개월이나 살 수 있는지 전혀 언급이 없었다. 그저 지켜봐야 한다고
만 했다. 지켜봐야 한다고…. 그 말이 간병인에게는 얼마나 피를 말리는 말
인지 의사들은 모를 것이다.
어디서 생긴 암이 뼈로 전이됐는지도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방사선 치료
가 시작됐다. 의사들이 처음에 짐작했던 자궁혹이 양성으로 나타났기 때문
에 원발암이 몸 속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 점이
영 개운치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막상, 아내의 항암치료가 시작되자 비
로소 내 아내가 암이라는 사실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의사에 따라서는 환자에게 암이라는 사실을 숨기는 편이 낫다고 한다. 환자
가 받을 충격을 생각해서다. 그러나 나는 아내에게 병명을 숨기지 않았다.
대전에서 병원에 다닐 때부터 늘 아내와 함께 의사를 만났기 때문이기도 하
지만, 서울로 올라온 이후에는 아내나 나나 정확한 병명이나 상태에 대한
설명 한 번 제대로 듣지 못한 채 의사들이 하자는 대로 그저 쫓아 다니던
상황이어서 숨길 것도 없었던 것이다.
이러저러한 검사를 받으러 끌려다니면서 암이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 것처럼 아내도 그런 식으로 자신의 병을 알게 됐던 것 같다. 우리는 서
로 병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서로 암이라는 사
실을 눈치채고, 인정하고 있었다.
2000년 12월초 CT 사진 한 장 들고 엉겁결에 서울로 올라온 우리 부부는
2001년 설을 병원에서 맞았다. 두 차례 큰 수술을 받는 동안 어느덧 한 달
여가 훌쩍 지나간 것이었다. 아내는 방사선 치료를 시작한 이래 시커먼 흙
같은 변을 쏟아냈다. 방사선치료를 받은 뼈사진을 보니 뼈가 시커멓게 타들
어가 있었다. 그 사진을 보자 아내가 과연 나을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섰
다.
2월부터는 화학치료도 병행했다. 아내는 화학치료를 받기 시작하면서 백혈
구 수치가 급격히 떨어져 항균실에 들어가는 날이 많아졌다. 어떤 때는 항
균실에 열흘 간이나 들어가 있었지만 체온이 39도에서 단 1도도 떨어지지
않았다. 의사는 마지막 약이라며 ‘시노시스 항생제’를 권했다. 이 약은
항생제 중에서도 가장 독하다는 약이다. 아내는 이 주사를 12일 간이나 맞
았다.
약물에 찌든 아내의 몸은 새카맣게 변했다. 성한 손톱 하나 남지 않았다.
가시나무처럼 마른 몸은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것만 같았다. 차마 인간의 형
상이라고 할 수 없는 아내의 모습을 지켜보며 나의 무력함에 가슴이 미어졌
다. 아내는 1차 항암치료가 끝난 2001년 2월8일 퇴원했다.
아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주위에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한 달여가 넘는 입
원 기간에 문병객은 거의 없었다.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처남과 처남댁이
종종 들를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한 달을 어떻게 견뎠을까 싶다.
너무나 갑자기 닥친 엄청난 일에 놀라 그냥 하루하루를 버틴다는 심정으로
보냈던 것 같다. 만약 준비된 상태였다면 이것저것 생각도 하고 꾀도 났을
테지만, 당시에는 생각할 여유도, 꾀를 낼 여유도 없었다.
암 환자의 간병인은 환자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한다. 사랑하
는 사람이 병마와 싸우는 것을 고스란히 지켜보는 것도 힘들지만, 치료법부
터 식이요법까지 환자가 어떤 도구를 가지고 암과 싸울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도 온전히 간병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암
과 싸우는 셈이다. 그러니 단 한 순간도 긴장의 끊을 놓을 수 없다.
환자가 기침만 한 번 해도 소스라치게 놀라고 긴장하게 된다. 또 어딘가가
고장난 신호인가 해서다. 아내가 자는 동안 체온이 떨어지면 주물러 줘야
하기 때문에 나는 잘 수조차 없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날이 며칠인지 모
른다. 그래도 아내가 치료받는 사이 나는 틈틈이 암 관련 서적을 뒤적였
다. 병실에 혼자 남아 있을 때면 드는 잡생각,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였
다. 무엇보다 암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간병 틈틈이 암에 대해 공부
사람들은 암이라는 병마가 자신에게 혹은 자신의 가족에게 닥치기 전까지
는 암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런데 세상에는 암에 대한 정보가 깔려 있었
다. 암 관련 서적만 해도 의학적으로 암에 대해 풀어 놓은 책부터, 어떻게
암을 이겨냈는지 개인 체험을 쓴 책까지 다양하다.
그 중에서 내가 고른 책은 약사가 직접 암의 기본부터 식이요법까지 써 내
려간 ‘기적의 항암치료 15일’이라는 책이었다. 처음 접한 책이었는데, 첫
인상이 좋았다고 할까. 이 책을 공부하면서 다른 책은 거의 안 봤다. 운 좋
게 헤매지 않고 좋은 안내서를 고른 셈이다.
이 책은 총 3권으로, 1,000쪽도 넘는 책이다. 일종의 암 백과사전이다. 나
는 이 책을 틈틈이 읽고 또 읽었다. 다른 책과 달리 이 책은 ‘이렇게 하
면 암이 낫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병이 나았다’ 하는 사
례만 보여 줄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사례들을 보면서 ‘이대로만 하
면 아내의 병을 고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혈구 수치가 무엇을 말하는지, 혈액검사 수치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등도
알게 됐다. 이후 나는 아내의 혈액검사 수치를 직접 챙기기 시작했다. 퇴원
하는 대로 곧장 책에서 소개하는 식이요법을 시작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1차 치료를 마치고 2차 치료를 기다리며 집으로 내려온 아내는 미
처 식이요법을 시작해 보기도 전에 다시 병원으로 실려갔다. 퇴원 후에도
매일 아내의 배를 마사지해 줬는데 언제부터인가 아내의 방귀가 항문이 아
닌 앞쪽에서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한두 번은 그냥 넘어갔는데, 갈수록 심
해지는 것 같아 전화로 간호사에게 물어 봤다. 병원에서는 일단 방사선 치
료의 부작용으로 대장이 녹아 내리면서 구멍이 생긴 것 같다며 MRI를 찍어
보자고 했다. 결과는 역시 장루였다.
의사들은 즉시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변이 장에 생긴 구멍으로 새 나가면
감염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백혈구 수치가 낮아질 대로 낮아져 있어 이
상태로는 더 이상 화학치료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아내는 자궁수술과 척추
뼈수술을 받고 퇴원한 지 2주 만인 2001년 2월21일 다시 입원해 대장루수술
을 받았다.
장루수술을 하려면 수술 전 10일간 금식해야 한다. 연이은 대수술로 몸이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아내에게 금식이라니…. 그것을 지켜봐야 하는 내
마음은 더욱 고통스러웠다. 설상가상으로 의사들은 방사선 치료를 받다 터
진 장은 꿰매도 다시 터질 수 있다며 인공항문을 하자고 했다.
그 때까지 묵묵히 의사들의 권유를 따르던 아내가 처음으로 수술을 거부했
다. 인공항문만큼은 싫다는 것이었다. 평생 대변자루를 차고 살아야 한다
는 얘기이니, 그럴 만도 했다. 나 역시 이번만큼은 아내의 의견을 존중해
주고 싶었다. 나라도 인공항문수술만은 받고 싶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
다. 고심 끝에 우선 장루수술만 받고, 경과를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
나 수술 결과는 역시 실패였다. 여전히 가스가 몸 앞쪽에서 새 나왔던 것이
다. 결국 아내는 인공항문 수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장루수술을 받기 위해 두번째로 입원했을 때, 아내가 겨드랑이와 목의 통증
을 호소해 다시 가슴사진을 찍었다. 의사들은 가슴사진에서 암 조직 비슷
한 것이 발견됐다며 조직검사를 권했다. 처음 입원했을 때라면 의사들 말
을 100% 신뢰하고 조직검사를 받았겠지만, 그 때는 더 이상 의사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었다.
마침 읽고 있던 책에서도 조직검사를 하는 과정에서 쇠붙이 등이 암세포에
닿으면 전이가 빨라질 수 있다고 하는 말을 보았던 참이었다. 또 이미 암
이 뼈에까지 전이된 상태에서 원발암이 무엇인지 밝히기 위해 또 다시 조직
검사를 하는 것은 아내에게 쓸데없는 고통만 줄 뿐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고심 끝에 조직검사를 받지 않기로 했다. 의사들은 조직검사 없이 사
진에 나타난 것만으로 유방암 판정을 내렸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원발암
이 유방암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시점이 아니었다. 어떻게 아내를 살릴 것이
냐가 중요했다.
아내는 소변줄을 끼고 퇴원했다. 집에서 침대에 눕혀 머리를 감기며 너무
감격해 눈물이 났다. 그날 얼마나 좋았던지…. 장루수술을 받은 후 20일에
한 번씩 서울로 올라와 항암주사를 맞고 다시 대전으로 내려가는 생활이 반
복됐다. 병원에 입원해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대전과 서
울을 오가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픈 사람을 데리고 서울에 올라오는 것도 힘들었지만, 애써 올라왔는데 백
혈구 수치가 기준보다 낮아 항암치료를 받을 수 없으면 그것 또한 낭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미리 동네 병원에서 혈액검사
를 받아 항암치료를 받을 수 있는 수치가 됐을 때만 올라가는 법을 택했
다. 백혈구 수치가 낮게 나오면 퇴원할 때 받아다 냉동고에 얼려 둔 백혈
구 촉진제 주사를 맞고 올라가기도 했다.
집에서 머무를 때는 늘 아내가 감염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시달렸다. 항
암치료로 인해 백혈구 수치가 떨어진 암 환자들은 감염에 무방비 상태이기
때문이다. 책을 보면 감염으로 죽는 환자도 많다고 한다. 아내 소식을 듣
고 찾아오는 문병객도 내게는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걱정하는 마음에 멀리
서 찾아오는 문병객을 마다할 수는 없었지만 우선은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모질게 마음먹고 되도록이면 문병객을 사양하기로 했다.
걱정했던 것보다 아내는 1, 2차 항암주사를 부작용 없이 잘 견뎌냈다. 겨
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까 하는데 또 아내가 쓰러졌다. 척추뼈수술 이후 간
간이 있던 다리의 통증이 항암치료의 부작용으로 견딜 수 없이 심해진 것이
었다. 통증학에서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통증의 강도를 1부터 10까지로 구
분한다고 한다.
항암치료를 시작한 이래 8~9 정도에서 왔다갔다 하던 아내의 다리 통증은 5
차 항암치료 이후 10까지 올라갔다. 통증 10이 되면 진통제로도 어떻게 할
수 없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아픔, 바로 그것이었다.
아내가 고통을 못 이겨 금방이라도 혼절할 듯 싶을 때, 그것을 바라보며 막
막해서 어찌할 줄 모를 때 나는 하릴없이 아내를 들쳐업고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그러나 아내나 나나 이미 병원에서도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차마 그 순간을 넘기기 힘들어
공연히 움직이기라도 해 보는 것이었다. 의사의 말로는 화학치료로 말초신
경이 죽으면서 생긴 통증이라고 했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식이요법 시작
다행히 5차 치료 검사에서 척추에 붙어 있던 암의 크기가 상당히 줄어들었
다는 결과가 나왔다. 큰 암덩어리들은 그대로였지만 척추 주위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작은 암덩어리들이 없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통증은 나날이 심해
졌다. 2001년 여름부터 아내의 통증은 말할 수 없이 심해졌다. 그러다 8차
항암치료를 앞두고 아내가 마침내 더 이상 서울에 못 올라가겠다고 했다.
항암치료를 포기하겠다는 말이었다.
2001년 9월, 아내와 나는 항암치료를 포기하고 집에서 요양하기로 결정했
다. 사실, 통증으로 인해 항암치료를 계속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주
치의에게 도저히 더 이상 치료받지 못할 것 같다는 결심 아닌 결심을 전하
러 갔다가 우연히 레지던트에게서 “6개월 정도 살 수 있겠네요” 하는 말
을 들었다. 그 길로 주치의를 찾아가 주치의에게 정확한 아내의 상태를 말
해 달라고 처음으로 따져 물었다. 의사는 2년까지 본다고 말했다. 애써 돌
려 말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항암치료를 포기한 데다 사실상 시한부 인생을 선
고받고 병원 문을 나오는데 전혀 좌절스럽지 않았다. 절망 끝에 오는 무덤
덤함도 아니었다. 오히려 아내를 살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동안 미뤘던 식이요법을 시작하기로 했다.
치료 포기를 전하러 서울로 올라가기 전,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
로 ‘기적의 항암치료 15일’을 쓴 약사를 수소문해 찾아갔었다. 암 환자들
에게 항암치료를 포기한다는 것은 이제 막다른 골목까지 갔다는 얘기다. 죽
을 날 받아 놓고 두 손 놓고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아무리 생각해도
식이요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만 하면 분명히 낫는다’는 말을 기대하고 찾아간 나에게
약사는 담담하게 “책에 쓴 그대로입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나을 수
도 있고, 안 나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런 약사에게 오히려 믿
음이 갔다.
약사가 권해 준 식이요법은 양배추·감자·연근 등의 즙을 내 마시는 것.
그러나 빨리 낫게 해야겠다는 욕심이 앞섰던 탓일까. 계속된 항암치료로 인
해 상할 대로 상한 아내의 위장은 하루에 2,500cc 가량의 야채즙도 소화시
키지 못했다. 아내는 또 다시 병원으로 실려가야 했다. 괜히 식이요법을 시
작해 병만 악화시킨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과 자괴감이 몰려왔다.
대부분의 암환자 간병인들이 범하는 실수가 급한 마음에서 온다고 한다. 하
루라도 빨리 병을 고첬으면 하는 급한 마음에 무리하게 되고, 이것저것 시
도해 보다 환자의 상태가 생각만큼 호전되지 않으면 금방 실망하고 낙담하
다 포기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식이요법을 처음 시작할 때는 같은 마음이
었다. 하루라도 빨리 아내의 상태가 호전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아내의
몸 상태는 고려하지 않고 좋다는 것을 다 먹일 생각만 했던 것이다.
또 식이요법을 시작할 당시에는 당연히 완치를 목표로 삼았다. 그래야 우리
의 삶에도 희망이 있을 것 아닌가. 그런데 아내가 병원으로 실려 가는 모습
을 보면서 ‘이 병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었다. 완치의 꿈도 이 때 버렸다. 지금은 아내와 나 모두 완치가 불가능하
다는 것을 안다.
완치의 희망을 버리자 의외로 담담해졌다. 오랜 투병 생활 끝에 오는 자포
자기도 아니었다. 오히려 하루라도 빨리 완치시켜야 한다는 조급증을 버리
자 삶의 질을 생각할 만한 여유마저 생겼다. 지금은 아내의 남은 삶의 질
을 얼마나 높여줄 것이냐를 고민하게 됐다.
퇴원 후 다시 식이요법을 시작했지만 처음과 같은 욕심은 버렸다. 아내가
먹을 수 있을 만큼만 먹이기로 했다. 그래도 병원에서 길어야 2년을 산다
고 한 아내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식이요법의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욕심 같아서는 현미식과 무염식도 해 보고 싶지만 아내가 싫다고 해
서 참고 있다. 몸에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것이 남편으로서는
제일 아쉬운 부분이다.
항암치료를 포기한다는 것이 곧 암에 투항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
다. 아내의 퇴원을 결정한 이후에도 한 달에 한 번씩은 병원에 가 검사받았
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치료법을 찾아 다녔다. 각 신문
의 건강면은 정보 수집의 중요한 원천이 됐다. 이상하게도 건강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기사들이 쏙쏙 눈에 들어왔다. 암과 관련한 기사는 빼놓지 않
고 스크랩했다.
집에서 요양을 시작한 이후 식이요법에 최선을 다했다. 암에 좋다는 것은
힘 닿는 대로 구해 먹였다. 소문에는 누가 상황버섯을 먹고 병이 나았다,
선삼을 먹고 나았다고 하지만 그런 소문을 믿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이 무
엇이 됐든 아내가 투병생활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먹이
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몸에 좋다는 것을 알아도 그것을 일일이 사다 먹이는 것이 쉬운 일
은 아니다. 가장 큰 장애는 역시 경제적 부담이다. 버섯 등 대체식품을 한
달에 최소한 3∼4가지는 먹여야 하는데, 이 비용만 100만원이 더 든다.
‘글리벡’도 먹이고 싶지만, 한 달에 300만원이 필요하다. 돈이 없으면 치
료도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아내와 함께 약국을 경영하던 터여서 회사 걱정 없이 아내의 병 간호에 전
념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지만, 긴 입원 기간 약국 경영은 다른 사람에
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약국도 지난 2001년 처분했다. 2001년에는
아파트도 작은 평수로 줄여 이사했다. 지난 3년간 아내 병원비로만 약
8,000만원이 들어갔다. 그나마 힘이 되는 것은 퇴원 후 아내의 상태가 최소
한 더 나빠지지는 않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겨울 아내의 이를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갔다. 몸도 아픈데 이 치료까
지 받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한 시간도 넘게 치료받고 나온 아내
는 휠체어에 앉아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 모습을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 아픔을 나눠 가질 수도 없고, 줄여줄 수도 없는 내가 한없
이 무력하게 느껴졌다.
그저 아내를 지켜보며 속으로 울 수밖에 없었다. 아내가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 다음 치료를 예약하지 않았다. 방사선 치료로 이가 전부 썩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아내가 아파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의사에게
는 다음 봄에 와서 다시 치료하기로 했다.
완치 희망 없는 것이 가장 힘들어
한 달에 한 번씩 주치의를 찾아가는 날이 다가오면 며칠 전부터 몹시 초조
해진다. 더 나빠졌으면 어떻게 하나? 다른 방법은 또 없을까. 이 생각 저
궁리를 하느라 며칠이 힘들다. 주치의 말 몇 마디 듣는 것에 불과한데 왜
이리 안정이 안 되는지….
화학치료를 중단한 후 1년 동안은 후유증으로 엄청난 고생을 했다. 그러나
지금 아내는 목발을 짚고 방에서 식탁까지 걸어와 식사를 하기도 하고, 언
제부터인가는 목욕탕 변기 위해 앉아 목욕도 한다. 물론 내가 욕조에 물을
받은 다음 안아서 넣어 준다. 병실에 누워 “아!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
고 비누거품 목욕을 한번 해 보았으면…” 하고 혼잣말을 하던 아내.
남들이 들으면 우습지도 않은 일이지만 아내와 나는 정말 힘들게 그 일을
이루었던 것이다. 나는 내 아내가 자랑스럽다. 생활고에 힘은 들지만, 또
언제 다시 나빠질지 알 수 없지만, 이 정도나마 움직이게 됐을 만큼 병마
와 투쟁하는 아내가 나는 자랑스럽다.
물론, 우리 가족의 삶은 아내의 암 투병이 시작되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1
주일에 한 번씩 치러 다니던 골프도 그만뒀고, 겨울이면 가족끼리 함께 다
니던 스키장도 이제는 다른 세상 이야기다. 암이라는 병마가 우리 가정을
완전히 파괴한 셈이다. 다행인 것은 아내가 굉장히 긍정적인 사람이라는 것
이다. 나보다 훨씬 긍정적이다.
내가 지쳐보일 때면 아내는 “여보, 암이라는 것이 하루 아침에 생기는 병
이 아니잖아요? 오랜 세월 서서히 몸 속에서 생겨난 병이라면 그것을 치료
하는 데도 그만큼의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어요? 낙숫물이 바위
를 뚫는 세월이 지나면 이 병도 낫지 않겠어요?” 하고 오히려 나를 위로한
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 아내를 보면 내가 먼저 포기할 수 없다는 오기가
다시 생긴다.
암투병 아내의 남편으로 살아가는 일상은 녹록하지 않다. 아침 7시에 일어
나 한 시간 반마다 아내에게 과일즙을 갈아 먹이는 것은 보통 번거로운 일
이 아니다. 틈틈이 집청소도 하고, 빨래도 해야 한다. 두 아이를 챙기는 것
도 온전히 내 몫이다. 아내가 투병생활에 들어간 이후 지난 3년 반 동안 1
년 365일 중 단 하루도 마음 편하게 외출한 날이 없다. 하루에도 가슴을 쓸
어내릴 일이 몇 번이나 생기기 때문이다.
아내의 수명이 내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면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
다. 집안일 하고, 목욕시켜 주고, 대소변 받아 내는 것은 사실 힘들지 않
다. 몸으로 다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작 힘든 것은 삶의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완치된다는 희망만 있으면 그 희망으로 버텨 보겠지만….
무슨 일을 하다가도 이런 생각이 들면 모든 것이 짜증스럽고, 다 그만두고
싶진다.
사람들은 말기암 환자 아내를 3년 반 넘게 간병한 나에게 어떻게 그 절망
을 이겨냈느냐고 묻는다. “글쎄요”라는 대답밖에 나는 할 말이 없다. 정
말 내가 어떻게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도…. 솔직히 말하면 나에게는 절망을 느낄 여유마저 없었다. 절
망하고 눈물 흘리는 것…, 이런 것은 오히려 여유 있는 사람들이나 느끼는
사치스러운 감정으로밖에 안 보인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정신없이 달
려왔다는 것, 오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는 것뿐이다.
내 아내는 아직 완치되지 않은 현재진행형 암환자다. 언제 다시 악화될지
모른다. 아직도 하루하루가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심정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포기했던 희망이, 완치의 희망이 조금씩 보이는 듯하다. 잘 하면 내년
쯤이면 실명으로‘암 투병 성공기’를 말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 희망에
살아가는 것이겠지만….
첫댓글 우와~!! 지루해! 나 읽다가 포기했어 ㅋㅋ (거무운 씨! 참고 읽어주는게 도리 인줄 알고있으나 나의 한계(인내)가 미치지 못하여 중도 포기한걸 양해 하시길...미안!)ㅋㅋㅋ
영식이가 중도에 포기했어도 희망은 보았겠지.........그리고 거무운 이왕 소개하려면 글자를 잘 보이게 편집하는 성의는 보여라
나는 컴 퓨~터를 잘 모르니까 그냥 퍼다 날랐으니 이해하시게! 지루하면 안 읽어도돼 큰영식이 같이 ㅎㅎㅎ 나도 읽어보는데 약간 길더군!
휴우~~거무운 난 끝까지 다 읽었넹 눈물겨운 외조가 정말로 감동 스럽다 ,,,좋은글 고마 ^^
앗싸~~다 읽었다 한참앍다보니 사랑방인지 다른방인지..방향감각 잃을뻔했지만...너무 감동적이글 고마^-^ 세상엔 좋은남편들이 참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