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담다.
사람들은 세월을 보낸다고 말한다.
그냥 자연스럽게 늙어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끼리 후다닥 여행갈 것을 약속하고 목적지 없이 그냥 동해 7번 국도를 따라 2박3일의 여행을 떠난다.
어떤 곳에 들러야 한다는 약속은 물론이거니와 어디에서 숙박을 할 것인지도 정하지지 않았기에 운전하는 사람이 머물고 싶으면 멈추는 막무가내씩 여행이다.
차가 제일먼저 멈춘 곳은 포항 호미 곳이다.
흔히들 알고 있는 손모양의 구조물이 있고 해가 일찍 솟아오른다는 곳이다.
바람은 거칠게 불고 파도는 하안 이빨을 드러내며 세차게 부서지는 날이다.
진눈개비가 하나씩 흩날려 옷깃을 여미지 않으면 찬 냉기를 감당하기 어려운 날씨지만 폐부를 관통하는 거친 바람 맛이 여행자의 입맛에는 맞다.
언젠가 와 본적이 있었던가? 분명 처음 본 풍광인데 낯익은 이유는 년 초 해돋이 때면 늘 매스컴을 통해 전달되어 꼭 와본 기억이 존재하는 착각을 하고 있다.
광장에도 손모양의 구조물은 존재하고 거꾸로 가는 시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지만 돌아가고 있다.
이 시간 전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면 하고 생각을 해보지만 다시 어떤 시점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유쾌하지 않다. 왜냐면 지금의 이 자유와 낭만은 내가 갈구하던 최고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지금 칼바람의 맛을 느끼며 강하게 부딪쳐 부셔지는 파도의 그 호쾌함이 과거의 회기보다 훨씬 아름답기도 하지만 지나온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마음은 손톱 끝만큼도 없어 행복하다.
사진을 찍고 내가 지나온 곳에 대한 흔적을 남기면서 웃는 것은 내일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나름의 여유가 인생을 황홀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투박한 경상도 아줌마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차는 또 무작정 떠난다.
두 번째 정차한곳은 망향휴게소다.
이곳은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앞바다에 부셔지는 파도의 아름다운 산화도 멋있지만 멀리 바라다 보이는 수평선과 하얀 백사장의 모습은 어디서나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조화를 갖추고 있다.
바람은 머리카락만 휘날리는 게 아니다.
파도가 부셔지면 그 작은 물보라도 하늘로 휘날리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어 길손의 발길을 머물게 하고 잠시 잠깐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재주도 있다.
찬바람과 커피의 조화는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피부를 짓눌려는 얄궂은 바람도 따듯한 커피 한 모금으로 달랠 수 있는 멋진 조화이다.
백암온천.
참 오래된 관광지이자 온천욕의 대명사로 통했던 적이 있는 유명한 곳이다.
길손은 휴식을 원한다.
아무렇게 달리는 차일지라도 잠깐 멈추고 몸을 녹여야 하기에 늬엇늬엇 저가는 해를 안고 들어간 곳이 백암온천의 한 호텔이다.
이곳의 호텔은 40여년의 나이가 있어 낡았지만 그런대로 품위를 유지하고 있다.
안내하는 늙은 중년이 수리를 해서 따뜻하고 좋다면 특히 오늘은 특가로 보급하고 있다는 자랑을 늘어놓아 구미를 당기게 한다.
여행의 재미는 먹고 쉬는 것이다.
여행 중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며 미리 준비한 생선회와 돼지 족발을 늘어놓고 소주잔을 기우리니 휴식이 주는 여유와 소주는 환상의 궁합을 이루고 있음을 안다.
급하게 조합하여 만든 상도 명품이요 미리 준비한 음식도 구미에 맞고 마주앉은 동행인은 더더욱 정겨워 좋다.
술이란게 그런 것인지 마음이 맞은 여행의 맛이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준비한 음식을 다 먹고 다시 자리를 옮겨 음식점에서 2차를 즐기는 기분 또한 참으로 멋있다.
백암 온천물은 그런대로 품위를 지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늙은 중년의 얘기처럼 새로운 단장을 한 사우나는 그런대로 품격을 유지하고 따뜻한 온천물은 지친 몸을 치유하는데 적격이다.
아마 몰라도 주말이면 많은 사람들이 와서 복잡하고 번잡하여 온천욕의 진정한 맛을 즐길 수 없겠지만 주중이라 사람들이 많지 않아 나름의 여유를 즐길 수 있어 좋다.
사람들은 흔히 백암은 한물간 온천이라고 말하지만 오래된 관록을 아직은 보유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어 보인다.
한잔의 소주와 따듯한 사우나의 위력은 대단하다.
아침에 거뜬히 일어나 다음 관광을 위해 떠나는 순간 약간의 아쉬움이 있지만 언제나 올 수 있는 곳인지라 미련을 내려놓고 떠나 흔히 예약을 하지 않으면 갈 수 없다는 대금굴로 향한다.
약5억 3천만년 전부터 현재의 위치에 이르게 되었고 오랜 세월 침식되어 동굴이 형성되었으며, 대금굴은 외부에 입구가 노출되어 있지 않았으나 인위적인 발굴작업에 의하여 2003.2.25 대금굴을 처음 발견하기에 이르렀으며, 2006년 6월 20일 명칭을 '대금굴(大金窟)'로 결정하였고, 7여년의 긴 시간 동안 준비하여 2007.6.5 대금굴을 일반에 개방하였다.는 기록처럼 오랜시간 인간의 눈에 띄지 않고 존재한 사실도 경의롭다는 사실이다.
산중턱에서 발달한 동굴속에 폭포가 존재하고 그 많은 수량은 어디에서 만들어졌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한결 같이 신비를 더해주고 있다. 종류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석순을 만들고 석순이 자라 종류석과 이어진 모습에서 오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다양한 종류의 종류석을 보면서 자연이 만들고 창조해낸 기묘한 모습에서 세월은 보내는 것이 아닌 품거나 담아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린 이 조용한 동굴이 인간에게 무엇을 말하려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존재하고 있을 뿐이라고 무지한 생각을 하지만 동굴은 수많은 세월을 담으며 하루가 다르게 변신하고 새로운 사실들을 기억하려 묵묵히 긴 세월을 담아왔던 것이다.
대금굴은 미리 예약을 하고 가야만 관람이 가능하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주중이라 그런지 무턱대고 가서 예매하고 은하열차를 타고 구경할 수 있었던 것은 백수만 누릴 수 있는 특권처럼 느껴져서 의미 없는 웃음을 띠게 만든다.
숨어 지낸 수많은 세월을 가슴에 안고 졸갑 내지 않은 동굴의 인내도 그것을 찾아 인간이 발굴하고 가다듬은 의지도 우리에게는 참으로 숭고하다는 느낌이 있고 경의를 표하고 싶은 생각이다.
강원도의 깊은 산골에 사람이 산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농사지을 땅이라고는 찾을 수 없지만 촌락을 이루고 사람이 산다는 것이 참으로 의아하다.
무엇을 먹고 살까?
흔히 떠오르는 감자나 옥수수를 먹고 살기는 하겠지만 평평한 땅 한 평이 발견되지 않은 골짜기 마을 사람들의 삶이 궁금하기만 하다.
산과 산으로 둘러 쌓인 아담한 마을에 대한 궁금증은 차차 시간을 내어 풀어보기로 하고 식당주인이 일러준 정동진을 향한다.
정동진의 여성들에게 로망이 있는 장소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룻밤 뜨거운 사랑을 하고 뒷날 아침 동해에서 솟아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꼭 한번은 해보고 싶은 낭만의 끝판왕이다.
여기저기 삼삼오오로 몰려다니는 젊은 연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비록 동성끼리의 여행이긴 하지만 내일은 동해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길 기원했지만 누구나 다 누릴 수 있는 영광은 아닌지 구름은 태양의 장엄함을 용서하지 않은 아쉬움을 우리에게 선물하고 말았다.
사랑하는 연인은 아니지만 낭만을 즐기는 것은 같은지라 전날밤 술로 회포를 풀었건만 일찍 일어나 해돋이 구경을 나서는 서로의 모습에서 인간은 누구나 같은 순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 좋다.
해돋이 구경을 뒤로한 체 강릉을 향해 달려가는 차안에서 아쉬움의 주인공인 해가 백밀러에 비쳐 허허로운 웃음을 날린다.
강릉하면 떠오르는 경포대에 이르러 한 장의 사진을 남기고 해변에 있는 우편함에서 사랑하는 아내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아직 내 속에 있는 낭만과 로맨스에 따듯한 온기를 느낀다.
이율곡과 신사임당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오죽헌에서 위대한 선조들의 기를 받기도 하고 오래전 우리 조상들의 수명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은데 어찌 그리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을까하고 생각하니 존경이 스스로 우러나옴을 알 수 있다.
신사임은 48세 율곡은 49세에 별세하였다고 하니 현대의 수명은 엄청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짧은 생애에 수많은 업적을 남기고 가신 조상들이 이룩한 업적에 감사하고 이번 여행의 끝자락 통일전망대로 향한다.
북한과 아직도 주적관계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만드는 장소가 통일전망대이다.
멀리 금강산의 끝자락이 보이고 북한군의 진지도 망원경으로 관람할 수 있는 곳이지만 왜 이런 곳을 관광해야하는지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내 속에 있다.
분단의 아픔을 체험할 수 있는 곳도 아니고 단지 저 건너편에는 통제된 사회속에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사는 좀 색다른 곳 일뿐이데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전망대에 왔는지에 대해 궁금하기도 하다.
굳이 구경해야 한다면 dmz박물관이라고 존재하는데 그곳은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려주고 있어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아이들에게는 참 좋은 교육의 장이 될듯하다.
우리네의 오래전 모습이 아닌 그 옛날의 비참한 생활상을 발견하고 오늘 내 삶의 원천에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가난의 흔적이 베여 있음을 느낀다.
여행은 어디로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좋은 것이라며 정동진에서 도원결의를 한 손 맞잡은 사진을 머릿속에 떠올리면 목적 없이 그냥 떠난 후다닥 여행은 많은 여운을 남기고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차안은 왠지 모를 뿌듯함이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