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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14-47.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십니다. 2023. 6. 18.
먼저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오늘 본문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베드로의 설교인데 그 말씀 속의 내용입니다. 중요한 내용은 복음의 사실을 선포하면서 청중들에게 부담을 주었습니다. 때는 주님이 부활하시고 50일이 되는 날이며, 승천하신지 10일이 되는 오순절 날 주일이었습니다. 장소는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입니다, 1절에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다 한 곳에 모였습니다. 모인 이유는 주님의 명령 때문인데, 행 1;4,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었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명령과 함께 약속하시기를 너희가 기도를 하면 1;5,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그래서 모인 사람들이 주님의 명령과 부탁에 따라 열심히 기도하면서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아니하고 다 같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다 같이 라는 표현은 한 마음과 한 뜻과 동일한 소망의 마음을 가지고 한 곳에 모여 기도를 했습니다. 1;14,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쓴 곳인데, 모인 모든 사람들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그 결과 성령의 지시대로 말을 하고 행동을 했습니다. 4절,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그들은 성령을 받고, 자신들이 아직 배운 바가 없었던 언어로 모여든 각 나라와 각 지방의 방언으로 말을 하고, 청중들은 그 방언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랬을까요? 얼마나 사모하던 은혜입니까? 그런데 이 성령의 강림은 요엘이 예언했던 내용입니다. 사모함의 은혜이고 생각지도 못했고, 경험되지 않았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7-8, 다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라며, 다른 여러 지방에서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은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을 하였습니다. 다 놀라고 기이히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의 실력을 알고 있었으며 어떤 성격의 소유자이고 어떤 사람인 것을 알았었는데 그 내용을 뛰어 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역사는 우리를 놀라게 하고, 기대하게 하고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갈릴리 사람이지만 갈릴리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왜요? 사람의 모습이 달라지고 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생각하고 경험하는 것이 달라졌고 말하는 것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 전의 태도와 자세가 아니고 놀랄 만큼 기이하게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 속에 있을 때에 오늘 본문이 시작이 됩니다. 베드로가 일어나서 기이히 여기며 의문을 품는 청중들에게 설교를 합니다. 이전의 베드로에게서 볼 수 없었던 일이고,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설교의 주제는 요엘 선지자가 예언을 했던 내용을 가지고 과거에 성취된 사실과 현재, 지금 성취되고 있는 사실과 장차 미래에 성취될 사실을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살아가야 할 현실은 세상이기 때문에 은혜와 함께 겪게 되는 고난이 있는데 그 고난 중에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때에 사람들의 반응이 어찌되었습니까. 37절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은 즉각적인 반응을 드러냈습니다. 설교에 대한 즉각적인 결과는 청중들의 깨달음과 질문이고 교훈과 권고였습니다. 여기에 순종과 영적인 감동과 능력의 계속적인 결과로 의식이 새로워지고, 교제가 새로워지고 새로운 경험과 꾸준한 성장을 하게 됩니다. 이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의 배경이고 은혜를 나누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은혜를 나누려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1. 적용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어찌해야 하나라는 표현은 언제 사용을 합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각자가 직면한 문제들 앞에서 한숨과 눈물과 통곡을 하고, 건강과 경제적인 문제 앞에서 몸부림을 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나의 문제들을 해결할 길이 없는 막다른 골목길에서 어찌할꼬? 탄식을 합니다. 잘못 생각하고 잘못 행동한 것 때문에 후회함에서 어찌할꼬? 하고,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어찌할꼬?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별하거나 사별 했을 때에 어찌할꼬? 하고, 다시 회복의 기회마저 박탈 당 했을 때에 어찌할꼬? 합니다. 외부로부터 제기된 문제 앞에서 서러움을 겪어야 하는 상황에서 어찌할꼬? 하고, 대립과 분배와 여러 가지의 문제와 공포와 불안 앞에서 어찌할꼬?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이런 절망과 탄식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흔히 겪는 고통이며 이 것 때문에 어찌해야 하는가는 어느 시대마다 다 존재했습니다.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말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어찌할꼬? 에 대한 내용은 어떤 경우가 있나요?
1-1. 피해를 겪게 되는 사람의 입장에서 스스로 어찌할꼬? 입니다. 사랑 때문에 어찌할꼬? 생각하고 기대했던 일과 삶과 설계 앞에서 이룰 수가 없을 때에 어찌할꼬? 더욱이 이런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시간이 없고 시급할 때에 어찌할꼬? 합니다. 엎친데 더하여 덮치는 경우에 어찌할꼬? 합니다. 예전에 지인으로부터 제가 들은 표현입니다. 도쿄에서 살다가 이혼을 하고 삶이 팍팍해지면 치바로 가고, 치바에서 살다가 망하면 밋또로 간데요. 그러니까? 또 다른 사람이 오사카에서 살다가 이별을 하고, 삶이 팍팍해지면 고베로 가고, 고베에서 망하면 히메지로 온다고 합니다. 그러면 치바와 밋또에 사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고베와 히메지에 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여러분,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피해를 입고 사는 내 자신의 입장에서 어찌할 수 없지요. 이럴 때에 어찌할꼬? 악플을 어찌할꼬? 저절로 표현이 되고 나오는 말입니다. 왜 이렇게 표현을 할까요? 내 자신이 어떻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컨트롤할 수 있으면 어찌할꼬?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시3;1-2,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시6;2-3,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떨리나이다. 어느 때 까지 입니까? 시10;1, 어찌하여 멀리서시며, 어찌하여 숨으시나이까? 억울하게 당하는 입장에서 어찌할꼬? 나의 대적이 어떻게 그리 많습니까? 일어나 나를 치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이 사람들과 이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비아냥거립니다. 그래서 내가 수척하고 나의 뼈가 떨리고 나의 영혼이 떨리고 흔들리는데 이런 상황의 지속이 어느 때까지입니까? 하소연을 합니다. 이 하소연이 어찌할꼬? 이지요. 여러분, 힘이 드시고 감당할 수 없습니까? 밀려오는 아픔과 고통 때문에 어찌할꼬? 하십니까? 언제까지 피해를 입어야 합니까? 그래서 임마누엘 되시는 주님께 간구하고 간구하는데도 세상과 어두움은 비아냥거리십니까? 이 시간 진정한 보호자이신 주님께서 여러분을 찾아오시고 성령의 충만한 은혜로 수척하고 뼈가 떨리고 영혼까지 흔들리는 어찌할꼬?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여러분을 위로하시고 해결할 수 있는 담대함과 용기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2. 자의이든지 무의식이든지 자신의 엄청난 잘못과 감당되지 않는 상황에서 어찌할꼬? 합니다. 원하지 않았던 잘못과 진행했던 잘못된 행동 앞에서 어찌할꼬? 합니다. 여러분, 주님이 없는 우리의 인생은 원래 죄인이었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신앙의 불신과 의심을 합니다. 사람은 허물투성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과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것이 허물이고 죄라고 합니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했습니다. 죄로 인한 인간의 모습은 비참합니다. 그래서 가인이 동생을 죽이고 난 이후로부터 처처에 지금도 살인을 하고, 나라와 나라가 전쟁을 합니다. 문제는 이 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그 해결방안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잊는 것으로 되지 아니하며, 묵인하고 무관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잘못을 한다는 보편적인 시각의 삶을 살아도 평안이 없습니다. 양심이 자신을 향하여 고발을 하고 소리를 치며 영혼을 아프게 하며 고통으로 몰아갑니다. 잠을 못 이루고 삶이 어지럽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제일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각자가 자기의 그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과 회개치 않음으로 하나님과 단절이 되고 사람들과 불화하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더욱 더 악해졌습니다.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평안도 없으며 사죄의 은총도 없고, 사망에서의 구원도 얻지 못합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문제에 대하여 무감각할 뿐 아니라 이에 대한 자책이나 죄에 대한 형벌까지도 무시합니다. 고통과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세상 현대인들의 모습이며, 잘못을 하면서 당연하게 살아가는 것이 주어진 현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이 있고 죄의 값은 지불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고통과 비애는 이런 문제에서 오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자신을 하나님 안에서 볼 수 있어야 하지만, 문제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영과 생명과 마음과 생각과 행동에 대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하여 바르게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삶을 바르게 이끌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말씀을 바르게 인식하고 그 창조의 하나님을 믿어야 자신의 존재를 밝히 알게 됩니다.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는 말씀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게 됩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을 위하여 천사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는 이런 인간의 무능 앞에서 자신을 바라볼 때 어찌할꼬? 탄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런 고백과 어찌할꼬? 하는 탄식은 바로 자신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한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이 어느 하나도 선하거나 의롭지 못합니다. 주님의 시각에서요. 그래서 사람은 하루에 세 번 자기를 살피고 반성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내 자신을 볼 줄 모르거나 바르게 보지 못한 상황에서는 어찌할꼬? 의 탄식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허물에 매여 있습니까? 나의 허물과 잘못 때문에 어찌할꼬? 하십니까? 어떠한 허물과 죄악 가운데서도 70번 씩 7번, 영원히 속죄하시고 사랑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면서 어찌할꼬? 가운데 길을 내시고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소망하며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3. 감당해야 할 책임 앞에서 어찌할꼬? 삶의 불성실 앞에서 어찌할꼬? 여러분, 내가 감당해야 될 일 앞에서 감당할 조건이 안 될 때에 어찌할꼬? 합니다. 사람은 책임을 감당할 때에 사람대우를 받습니다. 믿음의 생활에서 행할 책임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 하는 일입니다. 그 순종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 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이 말씀을 받들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키는 것이 책임이행입니다. 세상의 사람들과 이웃에게 사랑과 겸손과 온유와 평안의 본을 보이면서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온 맘과 정성을 다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전11;9,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책임의 중요성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풀기 어렵고, 복잡하고 극한 상황은 누구 때문일까요? 모두가 책임을 다하지 않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나의 삶과 사회생활의 책임을 다하고 바르게 실천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직무에 대한 책임을 다 하면 사업과 직장생활에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길은 맡겨진 삶에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응답이며, 사회의 생활에서의 도덕과 윤리에 대한 행동의 진실성입니다. 그런데 이런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거나 게을러서 안한 사람들을 향하여 세상은 모두 실패자이며 인생의 낙오자라고 합니다. 이 때에 책임의 부분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책감으로부터 어찌할꼬? 라는 탄식이 나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맡기신 영역에서 책임을 다 하여야 삶이 부끄럽지 않은데, 성령의 충만한 베드로는 예수님의 참 제자로서 책임을 집니다. 영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시대에 대한 책임을 지고 복음에 대한 책임을 집니다. 그래서 청중들이 어찌할꼬? 하는 방법론을 찾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맡기시고 부탁하신 모든 일에 성령의 조명하심 속에서 어찌할꼬? 가 아니라, 책임을 다 하시는 그래서 착하고 충성된 종에게 주어지는 10 고을 권세의 복을 받으시는 여러분 모두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그러면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청중들은 왜 어찌할꼬? 합니까? 청중들은 즉각적인 반응을 드러냈습니다. 그 결과는 청중들의 깨달음과 질문이고 교훈과 권고였습니다. 그래서 어찌해야 하는가를 베드로에게 반대로 물었습니다. 깨달음 속에서 질문을 하는데 어찌할꼬? 합니다. 무엇에 대하여 어찌할꼬? 합니까?
2-1. 새롭게 듣는 복음 때문에 그렇게 질문을 합니다. 37절,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모인 사람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자신들도 모르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되물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의 설교가 무슨 내용입니까. 16절.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요엘2장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처음 설교를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 했습니다. 50여일 전의 생생한 부활을 전했습니다. 여러분, 설교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그런데 이 것이 모든 말씀의 주제이고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전한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입니까? 나사렛 예수입니다. 22절,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 하셨느니라.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름, 나사렛 예수를 말씀했습니다. 왜요? 권능과 기사와 표적 때문에 생긴 오류를 시정할 목적 때문에 귀에 익은 나사렛 예수를 말씀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메시아입니다. 나사렛 예수님이시고,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메시아이기 때문에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어떤 예수님입니까?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본 바요, 들은 대로 골고다 산상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왜요?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고 이제부터 시작이며 십자가는 하나님의 비밀이고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예수님입니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전하고자 한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나사렛의 예수로써 죽으신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32절,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신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인지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살리라는 믿음입니다. 찬송이 무엇입니까?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이 것을 한마디로 무엇이라 합니까? 복음입니다. 그래서 청중들은 베드로로부터 복음을 듣고 스스로 우리가 어찌할꼬? 했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복음을 접하면 어찌할꼬? 하게 됩니다. 복음은 예수님에 관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이시고, 인성에 대한 완전함과 사역에 대한 증언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으로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 하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인카네이션이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입니다. 3년의 공생애가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고치시고, 회복시키시고, 12제자를 부르시고 함께한 모든 사역이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의인의 자리에 있게 하신 것이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에 대한 설명으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가 사망에 매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부활하셨음을 말씀하고, 그리고 승천과 성령을 받음에 대한 증언을 했는데 이런 복음의 내용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모든 것입니다. 이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베드로가 전했습니다. 사실 이전에는 이런 내용을 알면서도 베드로는 전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복음에 대하여 확신이 없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100퍼센트 알지 못했고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체험한 베드로는 담대하게 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왜 이 복음을 베드로가 청중들에게 전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요엘 선지자가 예언했던 기록된 말씀과 살아있는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냥 예수님이 아닙니다. 이 예수님에 대한 복음 때문에 청중들이 우리가 어찌할꼬?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말씀 가운데 마음이 뜨겁고, 무엇인가 영혼을 두드리십니까? 간절함이 있습니까?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예수님의 전부를 나의 심령 가운데 채우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이 보이고 성령의 은혜를 받고, 오늘 우리도 내가 어찌할꼬? 하는 고백이 나옵니다. 여기에 은혜와 깨달음과 영적 부흥과 축복이 있습니다. 그래야 구원을 받는 사람들의 수가 날마다 늘어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통해서 주님께서 역사하셔야만 되는 경이로움입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2. 깨달음은 있지만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행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어찌할꼬? 물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 자신에게 어찌해야 하느냐는 물음이 없는 것에 대하여 어찌할꼬? 해야 합니다. 심령이 냉랭하고 깨달음이 없음을 어찌할꼬? 해야 합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감동을 받고 가슴을 치면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물었습니다.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그들의 뺨을 적시었고, 가슴속에서는 뜨거움이 있었고 감격은 샘솟듯 했습니다. 애통하며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하옵소서.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애통하는 마음이 없고 감격이 없고, 깨달음이 없습니다. 십 년을 믿었습니다. 이 십년을 믿었습니다.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형제자매를 미워하면서도 회개할 마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손에 못을 박았음에도 뉘우칠 마음이 없습니다. 여러분,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 어떤 시간입니까? 어찌할꼬? 하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형편은 잿더미에서 회개해야 될 형편입니다. 어찌할꼬? 해야 될 사람들 입니다. 이 고백이 살길이며, 이 고백이 소망입니다. 왜 가슴을 치면서 어찌할꼬? 해야 합니까? 눈물과 한숨과 고통과 낙심과 비극이 만연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을 보면서 감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땅의 수많은 신앙인들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졸고 있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슬퍼하지 않고, 소고를 쳐도 춤을 출 줄 모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우리를 깨닫게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무엇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기도의 응답과 성령의 능력도 말씀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오늘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마다 새 술에 취하여 살고, 목마른 사슴처럼 살았습니다. 날마다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며 살았습니다. 감당하지 못할 감격이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그래서 구원을 받는 사람들의 수가 날마다 늘어났지만 이것 또한 주님께서 역사하신 결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드리는 이 시간 주님을 만난 감격과 성령의 인도하심의 간절한 찬송과 어찌할꼬? 하는 목마름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3. 결과입니다. 사도들이 만나고 도마가 증거 했던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신앙인들은 그 은혜를 생각하면서 어찌할꼬? 되풀이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본문38절.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여러분, 왜 심령이 이처럼 냉랭하고 영혼이 불안해합니까? 감격이 없기 때문이요, 성령의 능력을 체험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병든 영혼이 있습니까? 심령이 목마르십니까? 성령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셔야 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17세 되던 해에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의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그 후 13년 동안이나 종노릇했고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옥살이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입니까? 30세 되던 때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영광을 누릴 수 있었을까요? 창39:2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창41:38. 바로 왕이 요셉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요셉이 이렇게 성공을 하고,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신이 이렇게 만들고 길을 냈습니다. 오늘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릴리 어부출신이 아닙니까. 오늘도 유대인과 모인 사람들이 이 사람들은 갈릴리 출신이 아니냐고 합니다. 빈민촌이었고 중심에서 벗어난 사람들이었고 뭇 사람들의 시선에서 제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3년 동안 따라 다녔지만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빌라도의 법정 뜰에서 3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저주하고 멸시하면서 부인했던 베드로, 그런데 오순절 성령이 임했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 베드로는 변화되었습니다. 성령 충만을 통하여 소망이 넘쳤습니다. 외치는 메시지에 감동과 능력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아 어찌할꼬? 고백을 하게 했습니다. 그 능력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성령의 역사로 되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사람을 바꾸어 놓는데, 소극적인 사람을 적극적인 사람으로, 비인격적인 사람을 인격적인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비굴한 사람이 용기를 얻고, 슬퍼하는 사람이 기쁨을 얻고 낙망된 사람이 소망을 얻었습니다. 기쁨과 평화가 넘쳐 나고 축복이 몰려왔습니다. 여러분, 요엘 선지자가 왜 예언을 했던 당시의 상황이 어떤 것 이었나요? 욜1;2 이하에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데, 4절,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먹을 양식이 없습니다. 5절, 단 포도주가 백성들의 입에서 끊어졌습니다. 6절, 사자의 이 같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은 민족의 침입을 받았습니다. 7절, 침략한 민족들이 이스라엘 백성인 포도나무를 멸하며 이스라엘 백성인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그 모든 사람이 하얗게 되었습니다. 10절,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처량하니 곡식이 진하여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습니다. 밭의 소산이 없습니다. 12절, 포도나무가 시들었고 무화과나무가 말랐으며 석류나무와 대추나무와 사과나무와 및 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므로 사람들의 희락이 말랐습니다. 17-18절, 씨가 흙덩이 아래서 썩어졌고 곡식이 없어서 창고가 비었고 곳간이 무너졌습니다. 가축과 동물들과 생축이 탄식을 하고 소떼가 민망해하고, 양떼도 곤핍했습니다. 그래서 다 죽습니다. 20절, 시내가 말랐고, 들의 풀이 불에 탔습니다. 마실 물이 없고 모래 바람만 휘 날립니다. 그래서 그 때를 일컬어서 8-9절, 처녀가 어렸을 때에 약혼한 남편을 인하여 굵은 베로 동이고 애곡함 같고, 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전에 끊어졌고 여호와께서 수종을 드는 제사장은 슬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13-14절, 제사장들은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고, 단에 수종을 드는 사람들은 밤이 맞도록 곡하고, 굵은 베를 입고 밤이 맟도록 누우라고 합니다. 금식 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포하여 장로들과 이 땅 모든 거민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으라고 강력하게 권고했습니다. 여러분, 이 때가 얼마나 어려운 시기이고 얼마나 고달픈 때입니까? 오죽하면 처녀가 어렸을 때에 약혼한 남편을 인하여 굵은 베로 동이고 울부짖는 것 같고, 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전에 끊어졌고 여호와께서 수종을 드는 제사장이 슬퍼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슬퍼했습니다. 희락이 말랐습니다. 생명이 붙어있으니까? 살아있지만 사람들의 소망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과 여건 속에서, 어찌할꼬? 울부짖는 백성들을 보면서 요엘 선지자는 그럼에도 소망의 예언을 했습니다. 욜2;28-32,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다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이니라. 그래서 구원을 받는 사람들의 수가 날마다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주님께서 역사하신 결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복을 받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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