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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솔빛
2011년 7월 31일 연중 제18주일
이사55,1-3 로마8.37-39 마태14,13-21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마태오 14,13-21)
생각만 하면 생각대로 되고 /김찬선신부님
제가 듣기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가 “안 돼”라는 말입니다.
해 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 Negative Thinking 말입니다.
이 Negative Thinking이 부정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생각은 씨앗이기 때문이고
생각대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만 하면 생각대로 되고’라는 로고송이 있습니다.
생각하면 생각대로 된다는 것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면
생각은 그저 생각일 뿐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가능성을 닫아 버리기에
아예 시작도 하지 않고 포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 된다고 생각하면 생각대로 안 될 것이고
된다고 생각하면 생각대로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된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안 된다고 생각합니까?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은 된다고 생각할 것이고
믿는 구석이 없는 사람은 안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자신을 포함하여 사람을 믿건
하느님을 믿건
믿는 구석이 있을 때 생각대로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차원에서는 생각과 믿음이 동의어입니다.
‘생각대로 된다고 생각합니까?’와
‘생각대로 된다고 믿습니까?’는 같은 뜻입니다.
가능성에 대한 생각을 보았는데
다른 차원에 대해서도
우리는 똑 같이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소용, 쓸모에 대한 생각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안드레아 사도처럼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생각하면
써보지도 않고 쓸모없는 것으로 버려버리고
버리는 순간 그것은 보물이 아닌 쓰레기가 됩니다.
所用과 所重.
용(用)이 있는 곳에 중(重)이 있는데
用이 없다 하니 重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는 오병이어가 소용이 있고 그래서 소중한데
안드레아는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생각합니까?
가난한 사랑과 욕심의 차이가 아닐까요?
욕심 없는 사랑을 하면 쓸모가 적어도 크게 쓰고
설사 쓸모가 없어도 소중합니다.
운동이든 예술이든 훌륭한 지도자는
다른 모든 사람이 쓸모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래서 포기한 사람을
발굴하여 쓸모 있는 사람으로 바꾸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운동과 예술의 지도자들이 이러 할진데
종교와 신앙의 지도자들은
얼마나 더 쓸모없는 사람에게서 쓸모를 발견하고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얼마나 더 소중하게 생각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결국 사랑의 문제입니다.
일의 가능성을 극대화 하는 것이 믿음이라면
사람의 가능성을 극대화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 어떤 사랑보다도 큰 사랑의 주님이시기에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를 소용이 있고 소중하다 하시고
보잘 것 없다고 여겨지는 나도
보잘 것 없다고 여기는 그도 소중히 여기시며
당신 사랑의 도구로 요긴히 쓰십니다.
2011.7.31 연중 제18주일
이사55,1-3 로마8.37-39 마태14,13-21
새 날, 새 아침, 새 생명 /이수철 신부님
가만히 앉아서 게시판을 보니
이제 오늘로 7월은 끝나 6월 달력을 떼어내고
9월 달력을 붙여놓으니 7-8-9월,
과거-현재-미래가 한 쌍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8월이 끝나면 8-9-10월이 또
나란히 붙을 것입니다.
창밖 역시 계절의 흐름을 한 눈에 볼수 있습니다.
겨울이었는가 하면 어느 사이 봄이고 어느 사이 여름입니다.
나는 언제나 지금 여기 가만히 있는데
세월은 강물처럼 나를 부딪히며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바로 지금 여기의 정주가 영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서 영원한
현재를 사시는 정주의 하느님이며
우리의 정주처는 하느님의 영원을 배우며
영원을 살아가는 장이기도 합니다.
어느 수도형제와의 대화 중
‘질리다’라는 말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물리다’라는 말도 비슷합니다.
사전을 찾아 봤더니
‘질리다; 질력 나서 귀찮은 느낌이 들다
(예; 술 먹는 것도 이제는 질렸다)’
‘물리다; 아주 싫증이 나다
(예; 너무 자주 먹어서 이제 국수에는 물렸다)’로
소개 되어있었습니다.
혹시 삶에, 일에, 사람에,
단조로운 일상에
질리거나 물리지는 않았습니까?
살다보면 누구나 때로
질리게 되고 물리게 되어
휴가나 여행 등 창조적인 일탈의
시간을 마련하기도 합니다.
오늘 아침 산책 중 주차장 옆 둑에
심지 않고 뿌리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무성이 자라나 피어난
연노랑 달맞이꽃이 참 청초했습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새 날, 새 아침, 새 생명을 주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듯 했습니다.
얼마 전에 썼던 글이 생각났습니다.
“‘주님을 찬미합시다.’ 청초하게 피어난 연노랑 달맞이꽃 아침인사
하느님 희망의 메시지 마음이 환하다.”
수도원 건너편의
인위의 압도적인 거대한 아파트들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하느님의 작품,
새 날, 새 아침을 알리는
하느님 희망의 메시지
연약한 달맞이꽃들입니다.
하느님께는 매일이 새 날, 새 아침, 새 생명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믿을 때,
사랑할 때, 희망할 때
정주생활은 질리지도 물리지도 않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닮아 늘 새 날, 새 아침,
새 생명을 살 수 있습니다.
“오너라.”
하느님은 우리의 영원한 정주처이자 안식처입니다.
우리의 정주의 제자리는 바로 하느님입니다.
바로 우리의 영원한 정주처인 하느님께 오라는 초대입니다.
세월 흘러 나이 들어 갈수록
찾아갈 곳이 점점 사라진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이 정주처임을 말해 줍니다.
세월 흘어 찾아 갈 사람이 점점 사라진다는 것 역시
우리가 마지막 만날 분은 하느님이심을 말해 줍니다.
하느님의 초대보다 반갑고 고마운 일은 없습니다.
만사 제쳐 놓고 하느님의 초대에 응해야 합니다.
세상에 하느님의 초대에 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없습니다.
우리 모두 초대 받은 하느님의 손님들입니다.
하느님은 가슴 활짝 열고 우리 모두를
미사잔치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의 초대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그대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없이 술과 젖을 사라.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도 못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것에 수고를 들이느냐?”
참 어리석은 사람들의 실상이 이러합니다.
양식도 못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것에 수고하다
인생 마치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목마른 자들, 굶주린 자들을
당신께 초대하는 주님이십니다.
마태오 복음의 초대 말씀 또한 잊지 못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우리의 참 정주처인 주님의
초대에 응할 때
진정한 평화와 휴식입니다.
더불어 요한복음의 주옥같은
주님의 초대 말씀도 생각납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6,35).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7,37-38).
영육으로 지친 이들에게
참으로 위로와 힘이 되는
주님의 자비로운 초대 말씀입니다.
집 떠난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늘 가슴 활짝 열고 우리를 초대하고
기다리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들어라.”
주님은 우리의 배움터이자 쉼터입니다.
바로 보이는 성전이,
성전에서의 미사가 상징하는바
배움터이자 쉼터인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배움터가
거룩한 미사가 거행되는 성전입니다.
역시 이사야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들어라.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좋은 것을 먹고 기름진 것을 즐기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음은 우리 영성생활의 기초입니다.
잘 듣기 위한 침묵이요
잘 들어야 순종이자 겸손이니
들음은 주님의 평생학인인 우리에겐
필수자질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
주님을 닮아갈 때
더불어 치유되는
심신의 병과 상처입니다.
우리의 멍에 역시 편해지고
짐도 가벼워져 마음의 안식이니,
배움터는 동시에
안식의 쉼터가 됨을 깨닫습니다.
오늘 주님은 말씀과 성체의
미사식탁을 마련해 놓으시고
우리를 초대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생명 잔치의 주인이 주님이시듯
이 미사잔치의 주인도
똑같은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눠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눠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성체성사의 풍요로움을
보여주는 복음 장면입니다.
빵의 기적 사화에 성찬례가
모태가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요한을 죽음에 이르게 한 헤로데의
죽음의 잔치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오늘 주님의 생명의 미사잔치입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입니다.
굶주린 군중들을
빵으로 배불리 먹이신 주님은
일용할 양식인 말씀과
성체의 빵으로 우리를 배불리시고
참 좋은 쉼터에서 휴식을 주십니다.
매일 육신의 양식을 먹어
활력을 얻어야 하듯이
미사 중 말씀과 성체의 양식을 먹어야
영육도 치유되고 활력을 얻습니다.
“살리라.”
영혼이 살아있어야 진정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사람 없는 빈집이 죽은 집 이듯이
영혼이 없는 육신은 죽은 사람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을 믿을 때, 주님을 희망할 때
살아나는 영혼입니다.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
이사야의 말씀대로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살아나는 영혼입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못하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삽니다.
의미를 찾는 사람입니다.
무의미한 삶에 뒤따라오는
무기력한 무감각한 삶은
살아있다 하나 실상 죽은 삶입니다.
말씀은 생명이자 빛입니다.
우리 삶에 의미를 주는
생명과 빛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이 되어 살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은
언제 들어도 감동적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는 자가
이미 영원한 삶을 사는 자요
진짜 사는 자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것도. 저 깊은 것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질리지 않고
날마다 새 날, 새 아침, 새 생명을
살 수 있는 길은 단 하나입니다.
“오너라.” 부단히 주님의 초대에 응하는 것입니다.
“들어라.” 평생 주님의 듣고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살리라.” 주님의 초대에 응하여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배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아갈 때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새 날, 새 아침, 새 생명의 삶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의 은총입니다. 아멘.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무한 리필 뷔페 /양승국신부님
가끔씩 결혼식이나 혼배성사를 주례하고 나면
혼주들께서 ‘꼭 식사하시고 가라’ 해서
뷔페식당으로 내려가 보면 정말 대단합니다.
입구에는 입장티켓을 확인하는 직원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서 있습니다.
티켓이나 표시가 없으면
절대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면 정말 혼잡합니다.
식사 끝내고 나가시는 분들,
막 결혼식을 끝내고 들어오는 분들,
시끌벅적, 와글와글, 웅성웅성.....
자리마다 사람들로 꽉꽉 찼습니다.
접시 들고 이리 저리 다니다가 빈자리를 찾아
앉으려하면 누군가가 놓아둔 가방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어색하고 낫선 분위기입니다.
천만다행으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는데,
전혀 모르는 낫선 사람들과 마주 앉아,
서로 시선을 피하며 식사를 하자니
정말 고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잔치 치고는 정말 어색한 잔치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제대로 된 잔치를 차려놓고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없이 술과 젖을 사라.”
주님께서 준비하신 잔치는 곧 도래할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예표합니다.
그 잔치는 티켓이 없다 할지라도
마음 편하게 들어갈 수 있는 잔치입니다.
입구에서 통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잔치 분위기도 정말 제대로입니다.
얼마나 풍성하고 편안하고,
쾌적하고 흥겨운지 모릅니다.
뒤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위해 후다닥 먹어치우고
빨리 일어설 필요도 없습니다.
먹고 싶은 것 몇 번이고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풍요롭기 한이 없는
‘무한리필’ 뷔페입니다.
어떤 면에서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모두를 위해 준비하신
구원의 식탁인 성체성사를
미리 앞당겨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역시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만 열두 광주리인
풍요로운 잔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이
남자만 해서 오천 명이었습니다.
어린 아이들, 여성들 포함하면
만 명은 족히 될 인원입니다.
만 명 이거 보통 인원이 아닙니다.
관광버스 200대를 대절해서
가득가득 채워야 만 명입니다.
일렬종대로 줄을 세우면
끝이 보이지 않을 많은 군중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오랜만에 느낀 포만감에
모두가 만족하고 행복해했습니다.
배가 즐겁다보니 마음까지 즐거워졌습니다.
사람들의 분위기 역시 화기애애해졌습니다.
자기 자신으로만 향했던 시선이
이웃들에게로, 하느님께로 돌려졌습니다.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커다란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마치도 천국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거행하는 성체성사
역시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미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한 식탁에서 빵을 나누기에
한 형제자매처럼 지내야 합니다. 더 이상
분열과 불협화음과 상처는 없어야 합니다.
이 특별한 사랑의 성체성사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특별한 선물이 주어집니다.
그 선물은 오늘 제2독서인
로마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바오로 사도가 체험한 선물입니다.
“형제 여러분,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사랑의 힘,
특히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힘은 대단합니다.
우리를 강건하게 만듭니다.
지혜롭게 만듭니다.
세상으로부터 초월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결국
죽음까지도 이겨내게 만듭니다.
마치 바오로 사도처럼 말입니다.
<연중 제18주일 2011. 7. 31>(마태 14,13-21)
빵의 기적 /송영진신부님
7월 31일의 복음 말씀은 '빵의 기적' 이야기입니다.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이 모두 배불리 먹었는데,
그렇게 해주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사람들이 가난해서, 또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곳이 외딴곳이고 밥 먹을 시간도 지났기 때문에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물론 사람들 중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겠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기적은 사람들의 육체적인 굶주림이 아니라
영적인 굶주림을 해결해주기 위한 기적으로 해석됩니다.
먹을 수 있는 실제 빵으로 보이지 않는 은총을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영성체도 눈에 보이는 빵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은총을 받아먹는 일입니다.
둘째, 제자들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시간도 지났고 외딴곳이니
사람들을 해산시켜서 각자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자는 제자들의 건의는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판단에서 나온 건의입니다.
외딴곳이라고 해도 그 군중은 모두 근처 마을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이 너무 인간적으로만 판단했다는 것은 지적해야 합니다.
셋째,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너무 시선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이야기의 핵심 요소가 아니라
이야기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없었어도
기적을 행하셨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넷째, 많은 사람들이 빵의 기적을 해설할 때
'나눔'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은데,
'나눔'이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중 하나라는 것은 맞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사랑과 나눔의 정신을 가르치기 위해서
빵의 기적을 행하신 것은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도 사랑과 나눔의 실천은 잘합니다.
우리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만 보다가, 또 '나눔'만 생각하다가
예수님을 시선에서 놓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나눔'이라는 것은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나 빵의 기적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먹은 빵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것을 서로 나눈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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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라고 하신 말씀은
'너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 주어라.' 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돈도, 빵도 없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나누어 줄 수는 없습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셔서 빵을 아주 많이 만드시고 나서
'자, 이 빵을 너희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라고 하셨다면 자연스러운 명령이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 일이 그렇게 진행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신 다음에
그 빵을 사람들에게 직접 주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에게만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빵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실현된 셈입니다.
다만 일의 진행 순서가 좀 바뀌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듣고 제자들은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사실상
'저희는 가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저희도 먹을 것이 부족한데 어떻게 나누어 먹습니까?' 라고
불평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 상황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나도 없는 것과 같은 양입니다.
제자들을 변호하는 쪽으로 해석한다면,
'저희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고, 예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빵의 기적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는 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군중은 처음에는 부자, 가난한 자, 높은 사람, 낮은 사람,
유대인, 이방인이 섞여 있는 군중이었지만,
기적이 일어난 다음에는 '배불리 먹은 사람들'밖에 없었습니다.
더 이상 부자도 가난한 자도 유대인도 이방인도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전면 무상급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천국의 모습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면서
부자들과 배부른 사람은 뒤로 빠져라, 라고 하셨다면?
또는, 나는 배가 부르니까 기적의 빵을 안 먹겠다, 라고 하면서
뒤로 빠지는 사람이 있었다면?
많이 어색하고 이상한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 부류의 '모든 사람'을
'똑같이 배불리 먹은 사람들'이라는 하나의 부류로 만든 것,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이 예수님 앞에서 똑같은 사람이 되고,
똑같이 풍요로움을 체험한 것, 그것이 기적입니다.
분명히 오천 명 이상의 군중 속에는 부자도 있었을 것이고,
먹을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자기 것을 이미 먹어서 배가 불러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빵을 나누어 줄 필요가 있는가?
라고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건 절대로 불공평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느님의 공평함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가난하고 배고픈 존재로 '환원'되어서
똑같은 은총 속에서 살게 되는 나라가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게 예수님의 방식이고 천국의 방식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 배불리 먹은' 빵의 기적은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존재로 '환원된' 기적이고,
하느님 나라를 실현시킨 기적입니다.
그 기적을 행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이 기적의 첫 번째 가르침이고 교훈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최인각신부님
예수님께서 휴가중에 행하신 사랑
여름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아무리 더운 날씨라 하더라도, 그 더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음을 우리는 고백합니다.
불볕 같은 더위 속에서도 우리는 한결같이 주님을 찬미하고,
그분의 사랑을 뜨겁게 느끼는 은총의 시간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불볕더위, 찜통더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면 부릴수록
더욱더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지혜로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더위에 짜증을 낼 것이 아니라, ‘더위야, 너 왔니? 함께 놀자.’
‘더위야, 함께 주님을 찬미하자.’
‘더위야,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게 해주니 고맙다.’라고
더위와 노니는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위와 노닐고, 주님을 찬미하는 여름의 뜨거운 시간,
그것이 참 기쁨이고 휴가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정말 열심히 살았던 분, 많은 일에 지쳤던 이들에게
휴가나 피서는 영혼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당신은 휴가를 다녀올 자격이 충분히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 가족과 직장을 위해 정말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멋진 휴가를 다녀오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을
누군가로부터 들을 수 있는 휴가가 되면 좋겠습니다. 하여튼
나름대로 행복한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에 도움이 되는 휴식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님께서 휴가를 떠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정말 휴가가 필요할 정도로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병자를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며,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그들과 함께하시느라 정신이 없으시며,
밤에는 늦게까지 기도하시느라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셨던 분이십니다. 가족과도 함께하지 못한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물러가신 때는
당신께서 사랑하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 소식을 들은 후였습니다.
당신 앞에 오셔서 당신의 앞길을 준비하며, 당신에게 세례를 주고,
당신을 빛으로 증언하였던 이의 죽음 소식을 전해 듣고,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지 상상이 갑니다. 더욱이
헤로데 왕에게 ‘동생의 아내와 혼인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라는 말을
여러 차례 한 것으로 말미암아, 원한을 품고 있던 이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소식을 접하고, 그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고 무거웠을지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휴가 계획은 어그러지기 시작합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나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어 당신보다 앞서 도착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 있는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휴가는 자연스럽게
군중과 함께하는 휴가요, 병자들을 고쳐주는 휴가로 바뀌었습니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라는 의견을 제시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픔으로
어려워하는 이들을 보시고 가엾게 여기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가져오라고 하신 다음
군중에게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시고는,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과 군중에게 나눠주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으며,
먹은 사람은 남자만 오천 명가량이 되었다고 복음서는 전해주고 있습니다.
역시 예수님의 휴가는 다른 사람의 휴가와는 다릅니다.
혼자 가시지만 많은 이가 동행하는 휴가, 휴가지에서 혼자만의 휴식을
취한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이들 모두에게 참다운 휴식을 선물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그들에게 봉사하시는 모습,
아픈 이들을 고쳐주시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 이상을 먹이시며 아쉬움이 없도록 이끄시는 모습.
참으로 흐뭇하고 행복한 휴가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휴가도 예수님과 같은 모습의 휴가라면 좋겠습니다.
아주 작은 것 안에서도 정말 많은 기적을 체험하고, 사랑을 나누며
치유와 화해를 이루는 지혜를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책과 씨름하며 논문과 원고를 쓰면서 방학을 보내야 하는데,
부족한 능력과 시간적 한계, 밀려오는 더위를 휴가 삼아
예수님과 같이 잘 보낼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여름 계획이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병이어(五餠二魚) /송봉모 신부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19세기 성서학자인 슈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ss)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빵 증식 기적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기보다는
영적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지어낸 이야기라 보았습니다.
초대교회가 신자들에게 사랑의 기적을 알려 주기 위해서
창작한 것이라 보았던 것입니다. 좀 더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개중에는
음식을 갖고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음식을 갖고 온 이들은 기회가 오면 무리에서 벗어나
자기 혼자 먹으려는 심산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순진한 한 소년이 자기의 도시락으로 갖고 온 보리빵 다섯 개와
조그만 생선 두 마리를 예수님 앞에 내어놓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것들을 무리들 앞에 들어 보이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가진 음식은 모두 이것뿐이니 이것을 가지고 나누어 먹읍시다.”
예수님의 이 모습을 보면서 군중들의 이기적인 마음이 움직였고,
자기가 갖고 온 음식을 풀어 옆에 있는 사람과 나누어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모든 이가 굶주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금세기 놀란(Albert Nolan) 같은 학자는 슈트라우스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여, 빵 다섯 개로 수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인 기적에서
정말로 기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이기적이던 무리가 이타적인 존재로
바뀌면서 사랑과 연대감을 갖게 된 기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학자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가능한 한 이성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빵 다섯 개를 갖고서 수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였다면, 그것은 자연과학적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 됩니다.
이성적으로 설명이 안 되기에 역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기적 사건으로 해석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학자들의 가설은 빵을 배불리 먹은 군중의 반응 앞에서
설득력을 잃어버립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놀라운 이적 능력을 목격하고는
예수께 달려들어 강제로라도 왕으로 삼으려했습니다(요한 6,15 참조). 만일
이들 학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실제적인 빵 증식의 기적이 없었다면, 곧
군중이 자기들이 갖고 온 음식을 서로 나눠먹는 사랑의 기적만 있었다면,
군중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겠다고 달려드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빵 다섯 개로 수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인 기적은 창작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분명히 있었던 사건입니다. 모든
복음서가 이 기적을 보도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이성을 중시하는 이들 중에는 예수님의 기적이나 놀라운 사건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성서를 공부한다면 성서는
단 두 가지밖에 남지 않을 것입니다. 성서의 앞과 뒤 곧 표지만 남을 것입니다.
나눔, 모두 함께 행복해지는 길 /배광하 신부님
어서 와서 먹어라
한국 초대 교회의 신앙은 그야말로 공동체 정신으로
뭉쳐진 신앙이었습니다. 특히 교우촌의 삶은 나눔의 삶이었습니다.
많은 백성이 굶어죽는 보릿고개 때에도
산중의 교우촌 신자들은 콩 반 쪽이라도 나누어 먹었기
때문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농사와 옹기 만드는 일과 숯을 굽고 장작을 패는 일은
평생 해보지 않았던 양반 교우들도 사랑하는 가족과 출세의 영욕을
모두 버리고 스스로 그 고단한 길을 택했습니다.
세속에서 멋들어진 풍류와 산해진미를 맛보았을 그들이
천국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가시밭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순교의 때가 오면 이제야 천국을 간다는 기쁨에 기꺼이
목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날, 그 기쁨과 영광의 날에
사랑했던 주님께서 천국 잔치를 열어주시어 ‘술 한 잔 주시겠지’라는
작은 소망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들 역시 오늘
이사야 예언자의 축복의 예언을 기억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 없이 술과 젖을 사라”(이사 55, 1).
성경은 자주 하느님 나라를
잔치와 축제가 열리는 곳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주 하느님 나라를
잔칫집으로 비유하셨습니다.
특별히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을
그 잔치에 초대하셨습니다(루카 14, 21 참조).
한국 초대 교회의 교우들 역시 예수님의 이 같은 사랑을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들 공동체에 굶는 사람이 오면 받아들여
함께 먹었고, 온갖 장애와 서러움을 안고 찾아오는 이들을
형제로 여기고 극진히 대접하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결코 굶주리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부족함 없이 채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은 선배 신앙인들의 믿음은 물론,
애덕의 실천에도 턱없이 부족한 모습을 보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겨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을 먹이신 분임을 우리는 자주 잊고 살았던 것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복음의 예수님 기적 뒤에는 분명 기적을 보았던 이들의 깜짝 놀람이
뒤 따르는 법인데,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 뒤에는
아무도 놀라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군중도 그저 덤덤할 뿐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빵을 남산만큼, 물고기를 고래만큼 크게 하셨고,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셨다면, 분명 제자들과 군중은
깜짝 놀랐을 것이고, 그 기적은 복음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이 기적의
이야기엔 모든 목격자들이 놀라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 예수님께서 인간의 이성과 과학적 논리로 증명할 수 없는
신비한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평범한 인간도 할 수 있는 일로 오천 명을 먹이신 것입니다.
그래야 훗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도 그 일을 행할 수 있을 것이고,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보다는
그것이 더욱 효과적인 가르침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복음사가가 기억하고 있는 이 기적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많은 군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의 공통된 반응은 불가능이었고, 이구동성
군중을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예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적은 양이라도 그것을 나누라고 가르치십니다.
나누면 모두가 먹을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모아 모두가 함께 나누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기적이었고, 사도행전 초대 교회의 모습
(사도 4, 32~35)이었으며, 한국 초대 교회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기적은 당대의 일회성 기적으로
그쳐버린 것이 아니라, 세상이 끝나는 그날까지 이어질 기적이
된 것입니다. 그 같은 나눔의 기적을 우리는 오늘도
우리 주변에서, 세계 도처에서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은 오늘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눔의 기적을 살아야 훗날
영원한 천국 잔치에 초대 받을 수 있음을 깨우치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성자라 일컬어졌던 프랑스의 ‘아베 피에르’(1912~2007)
신부는 삶의 목적을 묻는 이들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삶의 목적은 바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데 있다”고, 그리고
말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타인인 당신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인인 당신이
불행하고 괴로우면 나도 아픈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돌려보냄이 아니라, 배고픈 군중과 함께 나눔이 진실한 사랑인 것입니다.
성찬례 /정희완 신부님
성경의 기적 이야기들에 대해 문자 그대로
수용할 것인지, 합리적 사고체계 안에서 이해할 것인지,
상징적·의미론적으로 해석할 것인지는
개인적 선택의 문제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오늘 복음의 오천 명을 먹인 기적 이야기는 초기 교회의
성찬례의 풍요로움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기적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성찬례의 중요성을 배웁니다.
사실 모든 종교에 있어서 제의는 신성함과 세속성이
만나는 자리이며, 영원성이 개입되는 자리이며,
인간의 변화를 촉구하는 자리입니다.
제의는 궁극적 실체와 연관이 있으며, 따라서 제의 가운데
주어지는 규정은 그 자체로 거룩한 것이 되어 공동체 삶의
기본 질서를 표현하는 수단이 됩니다.
그와 동시에 제의는 무엇보다도 인간을 낡은 사회 구조에서
해방시켜 대안적 사회로 편입시키는 변혁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과연 성찬례의 거룩함과
그 변혁적 힘을 제대로 실현해 내는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성찬례는 그 자체로서 은총의 자리입니다. 하지만
실제 우리들 안에서 성찬례가 어떻게 거행되는지 살펴보면,
뭔지 모를 아쉬움이 남습니다.
제의와 일상의 삶은 언제나 연결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성찬례 참여는 단순한 종교적 예식
참여에 머무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오늘날 성찬례의 모습이 이렇게 된 데에는 저희 같은
성직자들의 잘못이 더 크지만 말입니다
풍성하게 베푸시는 하느님 /강길웅 신부님
배부르게 먹는다는 것은 먹을 것이 변변치 못했던 유대인들에게는
하나의 커다란 꿈이요 이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배가 고팠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계속적인 불신과 그리고 역대 왕들의 썩은 정치 탓으로
나라는 피폐할 대로 피폐되었고 앗시리아와 바빌론,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에
차례로 멸망당하면서 나라와 백성은 허탈과 절망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 1독서의 내용은 바빌론에게 망한 뒤의 처참한 현실 앞에 백성들이
망연자실할 때 하느님께서 들려주시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그때는
나라만 망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 거의 모두도 바빌론에 끌려가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비참했는지 모릅니다.
죽느니만도 못한 참혹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시련은 축복입니다.
고난은 다 높으신 분의 뜻이 담겨져 있는 사랑의 섭리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때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성찰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등지고 멀리했을 때 과연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되었던가를
뼈저리게 체험하고 반성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예언자가 나타나서
하느님께서 초대하시는 잔칫상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너희 먹을 것 없는 자들아, 오너라.
맛좋은 음식을 먹으며 기름진 것을 푸짐하게 먹으리라."
하느님께서 무엇을 주실 때는 항상 넉넉하게 주십니다.
결코 인색하거나 째째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값싼 것도 아닙니다.
돈으로도 결코 살 수 없는 아주 귀한 것이면서도 돈도 받지 않습니다.
그냥 주시는데 그것도 후하게 넘치도록 주십니다.
옛날 광야에서의 만나도 그랬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자라지 않게 넉넉하게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남자만도 5천 명이나 되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도록 그렇게 후하게 베푸셨습니다.
성서의 내용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아주 계획적으로 오늘 사건을 만드셨습니다.
백성들을 이끄시고 일부러 먼 곳으로 데리고 가셔서
식사 때가 되어도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도록 안배하신 것입니다.
백성들은 뭣도 모르고 그냥 따라간 것입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이 그저 감탄스럽기 때문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무조건 따라간 것입니다.
그러다가 황송스럽 게도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잔칫상에 초대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치밀하면서도 극적으로 일을 계획하셨습니다.
당신께서 누구시라는 것을 알리실 필요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백 마디 말보다 한 가지 이적이면 충분했습니다.
바로 그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배부른 것을 느낄 때 예수님이 어떤 사명을 가지고
그들 앞에 등장하셨는지를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아가 오면 그들의 굶주린 배가 가득
채워진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오셨지만 백성들의 현실적인 배를
채워 주기 위해서 오신 것은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다른 복음 에 보면 배부르게 먹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 하자
예수님이 슬그머니 피하신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현실 문제를
지금 당장 해결하시는 그런 식의 메시아는 원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단식을 하실 때도 사탄으로부터 받은 유혹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빵으로
만들어 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세상의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고 또 썩어 없어질 양식에는 별 관심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 위대한 포부가 계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처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초대하신 잔칫상이나
또는 광야에서 모자라지 않게 40년 동안 후하게 내려 주셨던 만나,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오천 명을 배부르게 먹이신 사건은 다 성체성사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다른 양식은 다 어떤 징표요 상징에
불과합니다. 오직 생명의 양식이 그 핵심이요 포인트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성체의 그 진정한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성서가 지향하고 가르치는 빵과 잔치는 영원히 죽지 않는 그 성사의
양식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썩는 양식에만 치사하게
묶여 살 것이 아니라 썩지 않는 양식에 보다 관심을 갖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 음식을 모셔야 합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위대하고 값진 음식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잔칫상에 감히 나설 수도 없는 자격 없는 인생들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런 돈 없이 원하는 대로 먹을 수 있도록
베푸셨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을 모시면 세상을 다 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내주지 못하고 베풀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도 나누고 베풀도록 합시다.
서로 나누기 /박문식 신부님
내가 이탈리아 파도바에서 신학 공부를 할 때 가끔
학장 신부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환자에게 피가 부족하니 피를 나누어 줄 학생들을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한번은 심한 화상으로
피부 이식이 필요하니 피부를 줄 사람을 보내 달라고도 했다.
신학생 5명이 자원을 해서 조직검사를 받았는데
환자와 맞는 사람이 2명이었고 그들은 3주 동안
피부 이식을 위해 입원했다. 이후 그 환자가 살아나서
학교에 찾아와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이 살갗은
○○수사님 것이고 여기는 ○○수사님 것이라고 하며 웃었다.
우리 수도회는 엘리사벳 나눔의 집과 부산에 평화장터가 있다.
고마운 은인들로부터 물건을 받아 싸게 팔아서
소년 소녀 가장과 어려운 이웃들의 살림에 도움을
주고 있다. 나눔으로 더 풍요로움을, 기쁨과 보람을 찾는다.
돈, 명예, 권세를 쥐려고 날마다 발버둥치며 살아가는
삶이지만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길이다.
욕심만 더해 가며 사는 사람과 나눔의 삶을 사는 사람은
얼굴 모습과 이웃 사람들의 평가가 전혀 다르다.
평안과 기쁨, 웃음이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나눔은 자신을 내어 주는 행동이다. 나의 생각, 말, 웃음,
기쁨, 재능, 시간, 지식, 그리고 물건과 돈, 장기기증,
그 밖의 모든 것을 나누는 것이 내 생명의 한 부분을
주는 삶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의 정성과 땀,
시간을 바칠수록 이 세상은 복음화된다.
광우병 논란으로 세상이 뜨겁다. 미친 소가 아니라
아픈 소인데… 풀을 먹어야 할 소가 오직 사람에게 먹히기 위해
먹고 싶지도, 먹어서도 안 되는 나쁜 먹이를 먹어
골에 구멍이 뚫리는 병에 걸리고… 그런 쇠고기를 사람이 다시
먹어야 한다면…. 이것은 나눔이 아니라 삶을 죽이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신자인 것은 주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 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빛과 그리스도의 현존이 되어
주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내어 주고
먹히고 다른 이들에게 자양분이 되기 위해서이다”(젱델).
오늘 복음에서는 보리떡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인 엘리사
(2열왕 4,42-44)보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이 훨씬 위대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마태 14,18-19). 여기에서 ‘자리잡다’는 직역하면 ‘눕다’라는
뜻인데 유다인들은 비스듬히 누워서 먹을거리를 먹었다.
양식이 적어 나누면 모자랄 것 같지만 일단 나누어 주니까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는 이야기에 따라 나눔의 보람을 새겨볼 수 있다.
거래가 없이 그냥 아무 대가도 없이 퍼 주는 사랑과
나누려는 마음만 있다면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다.
머리로만 나누는 삶이 아니라 손과 발로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여
기쁨과 행복을 찾자. 제자들에게,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먹을 것을 당신들이 주시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자신의 몸(성체)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서로 사랑을 나누도록 당부하신다. 물질이든 정신이든 마음이든
나눌 것이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고 나눔을 받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서로 돕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정, 교회, 사회가 되길 바란다.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허 성 신부님
“나눔의 신비 기적 일으켜 보자”
오늘의 복음말씀 요지는 주님을 만나려고 외딴 곳까지 몰려온
군중을 측은히 여기신 예수께서, 어느 소년이 가지고 와서
예수님께 드리려고 사도들에게 갖고 온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여명이나 먹이시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다고 하는 놀라운 기적의 이야기이다.
주일학교에 다니는 꼬마들은 이 기적의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듣지만, 많은 지식인들은 「설마 그런 일이 있었을까?」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이 기적은 나눔의 신비가 만들어
낸 기적이라고 봤을 때에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소년이 가지고 있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이 소년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겠다고 히니까 그의 엄마가 배고플때에 먹으라고
싸준 도시락이었다. 한창 성장하는 소년은 식욕도 왕성하고
소화도 빨리 되어 점심 때가 지나서는 무척 배가 고팠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소년은,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자기가 먹지 않고 통째로
예수님께 드리고 싶어서 사도들에게 전달했던 것인데, 예수님은
그 도시락을 또 당신이 드시지 않고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굶주리면서 하루종일 당신을 따라 다닌 엄청난 군중을 측은히
여기시어 사오십명씩 무리지어 풀밭에 앉힌 다음 제자들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게 하시니까, 거기에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고 보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많은 군중들이 굶주린 것은 빵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갖고 있는 음식을 이웃과 나누기가 아까워서,
자기마저 못먹다 보니 도시락을 가져온 사람이나,
못가져온 사람이나 모두가 굶주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어떤 소년이 자기의 도시락을 송두리째 예수님께 봉헌했고,
예수님은 그 도시락을 당신이 드시지 않고, 그 많은 군중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셨다. 이 모습을 본 군중들은 감복한 나머지 모두가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그렇게도 아까워 나누지 못했던 음식을 이웃과 나누어
먹게 되었고,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남은 음식이, 그 당시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던 여행용 가방 구실을 하던 낚시 바구니 비슷한 광주리로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고 추측한다면, 그것은 빵과 물고기의 분량이 불어나서
오천명 이상이나 되는 군중을 배불리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기적
보다도 더 큰 기적일뿐 아니라 우리가 받아들이는 데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복녀 마더 데레사 수녀는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부족함이 없이
충분히 살아갈 수 있도록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어 주셨지만,
욕심많은 사람들의 욕구를 다 채울만한 세상은 만들어 주시지 않았다』라고
하셨다. 이 세상의 많은 분쟁과 불의와 폭력과 빈곤과 불행들은
나눔의 정신 보다도 욕심이 우세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나는 동남아 여행을 한 적이 있었는데, 어느 나라는 비옥한 땅이
너무도 넓었고, 자원도 풍부한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국민들이 너무나도
가난하게 살기에 그 이유를 물었더니, 누가 대답하기를,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 나라의 전체 국민중 5%의 사람이
그 나라의 75% 땅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5%의 부자는 만족한
생활을 하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못하다. 이 세상에 자기의 재산으로
만족하는 재벌이 어디에 있는가? 욕심많은 사람에게 재산은 마치
바다에서 표류하는 사람의 갈증을 풀어주지 못하는 바닷물과 같다.
바닷물은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만 증폭되기 때문이다.
사랑은 나눌수록 커지고, 고통은 나눌수록 작아진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는 모으는 것도 나누는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면, 그
모은 재산들은 생명력을 상실하여 어느 누구에게도 행복과 보람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 나눈다는 것은 자기가 쓰고 남은 것 중의
일부를 나누어주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예수께서는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습니까?』라고 묻는 어느 부자 청년에게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고, 그가 풀이 죽어서 떠난 다음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 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셨고, 아나니아와 삽피라 부부는 밭을 팔아서 그 일부는 숨기고,
나머지만 사도들 발 앞에 내놓자 사도 베드로는 『당신들은 어쩌자고
하느님을 속입니까?』라고 말하자 그들은 즉시 기절하지 않았던가?
예수님은 당신이 주실 수 있는 것은 아낌없이 전부 주셨고 마지막에는
당신 자신마저 우리에게 먹이로 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여 주었으니
우리도 우리 자신을 나누어 줌으로써 나눔의 신비 기적을 일으켜 보자.
뻥이요~~~!! /안병철신부님
튀밥 장수가 뻥튀기할 준비를 합니다.
주변의 아이들은 귀를 막고 기다립니다.
튀밥 장수의 외침과 함께 아이들이 모여듭니다. 예전 장터에서
주전부리를 위해 튀밥을 튀기던 흔하게 보던 풍경입니다.
쌀이나 강냉이를 넣어 뻥튀기 기계를 빙빙 돌리다가
어느 정도 달궈져 적당한 시간이 되면 뻥이요~~ 라는 외침과 함께
쌀, 강냉이가 몇 배나 부풀려져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지요.
그것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그마한 봉지에 담겨져 뻥튀기 기계에 들어간 쌀이
요술 상자 같은 뻥튀기 기계 안에서 어느새 큰 부대에
담아야만 할 만큼 커진 것이 마냥 놀라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천 명이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작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예수님의 손을 거치자 오천 명이 먹고도 남을 만큼 불어났습니다.
그 적은 양의 음식이 어떻게 그렇게 많이 불어났는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봉헌한
작지만 소중한 빵과 물고기가 예수님의 손을 거쳐
엄청나게 불어났음은 확실합니다.
예수님은 어릴 적 신기하게만 보였던 튀밥 장수 같습니다.
우리의 작은 봉헌물을 받으셔서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받을 수 있도록 부풀려 주십니다.
우리가 보기엔 너무나 하찮고 작은 봉헌물이지만
예수님은 그 미약한 제물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마더 데레사의 작은 희생, 아프리카 톤즈라는 작은 마을에서의
이태석신부님의 보이지 않는 봉헌의 삶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주님께로 이끌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마태13,31-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분께 드리는 것은 작은 겨자씨이지만
그분의 다스림 안에 들어가면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되는 것이 바로 하늘 나라의 신비입니다.
비록 작고 비천한 모습이라 할지라도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온전히 그분께 봉헌할 때 그분은 우리를 한없이
큰 당신의 도구로 써주실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작은 헌금을 크게 보아주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화려하고 큰 봉헌을 바라지 않으시고 초라하고 작지만 정성스럽고
온전하게 봉헌한 우리의 제물을 어여삐 보아주십니다.
오늘도 나는 턱없이 부족한 나의 제물을 가지고
그분께로 가서 봉헌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 손에
나의 작은 제물을 받으시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사람들에게 넘치도록 나누어 주실 것입니다.
어릴 적 들었던 튀밥 장수의 외침이 오늘은
예수님의 목소리로 들리는 듯합니다. 뻥이요~~!!!__
예수님을 담은 사진첩 /이정재 신부님
먼지가 뿌옇게 쌓인 사진첩을 보았습니다.
오랜시간동안 조그만 관심조차 주지 못했기에
장롱 구석에서 쓸쓸하게 지냈을 녀석을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오랫만에
사진첩을 열어보았습니다.
‘아! 나에게 이런 시간도 있었구나. 아! 이사람
지금 뭐하고 있을까? 야~ 이때 정말 재밌었는데….’
혼자 사진첩을 한 장씩 넘기면서
얼굴에 지을 수 있는 표정이란 표정은 다 지어가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들여다보았습니다.
지나간 추억들을 떠올려보고, 그 기억들 때문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들 가슴에 아직
사랑이라는 이름의 추억들이 깊이 남아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추억은 사랑을 싣고
계속해서 우리를 따라다닌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옛 기억들은 그토록 소중하게
우리들 가슴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예수님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드러내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그 기적은 서로를 사랑하도록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이끌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실천은 비록 어렵고 힘들지만,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찰 만큼
후하고 넘치도록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알려주십니다.
훗날 제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때 그 기적에 대해
이야기 나누며 예수님을 그리워하였을 모습이
지금 이 시간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잊지 못하고 계속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제자들이 마음속에 그 장면을
생생히 찍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진첩이 기억하는 사랑의 추억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진첩을 통해 기억하듯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했던 생생한
추억과 사랑을 마음으로 찍었고, 그들은
그것을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해 주었습니다.
지나간 시간들, 추억들에 대한 평가는 다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평가는 분명하게 내려졌습니다.
예수님을 담은 사진첩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열두 광주리에 가득차고도 남을 후한 선물을 주시는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참 하느님이심이 밝혀졌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마음으로 담아 찍어놓은
예수님께 대한 소중한 추억의 사진첩을 통하여,
예수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우리의 구세주 그리스도
이심을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도움과 나눔의 존재 /안규태 신부님
으앙……. 갓 태어난 아기가 울음을 터뜨립니다.
포근한 모태에서 바깥 세계로 나온 다음 이 차갑고 낯선 세상에 대하여
처음으로 나타내는 갓난아기의 반응이 울음이다.
갓난아기의 울음 소리는 이렇게 외치는 것일는지도 모릅니다.
“절 좀 도와주세요.” 당신들이 이미 갖고 있는 것들을
연약한 저에게 좀 나눠주세요. 그래야만 저는 살 수 있어요.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는 우리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두 가지의 기본적인 진실을 향해 부르짖는 외침인 것입니다.
첫째로, 인간은 처음부터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
아니 남의 도움없이는 살 수 없는 한계성을 지닌 존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둘째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남의 도움을 받고 살기에 당연히
남을 도와주어야 하는 존재, 남과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하는 존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주위에는 이러한 사실을 망각한 듯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애써 외면하고자
통밥 굴리기에 여념이 없는 자들도 있습니다.
자기 혼자서 저절로 성장한 듯이 부모를 구박하는 사람,
자기 노력 하나만으로 부자가 된 듯이 가난한 이웃을 무시하는 사람,
자기 능력 하나만으로 국회의원이 된 듯이 떠벌이는 사람….
이러한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회는 삭막하기 마련인데 그것은
그들에 의해서 동물적인 행태가 자주 저질러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면서부터 타인의 도움을 받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항상 당연히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면서 살아야 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남에게 얻어먹었으니 이제 내가
이웃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이 삭막한 세상은 살맛나는 세상으로 변하리라.
적지만 모이면 큰 힘 /장동현 신부님
올해 우리 학교는 가난한 학생을 위한 배려를
청소년사목계획의 노력 중점 가운데 하나로 삼았습니다.
비참할 정도로 가난하게 사는 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난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아 위축되어 있는 학생들도 많습니다.
밥을 굶거나 돌봄으로부터 방치된 학생도 있습니다.
사실 교육당국도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는 말처럼 제도와 정책이
어찌 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가난한 학생을 위해 정부지원을 최대한 찾아보아라.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다.
너희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어라’라고요.
학교에서 일하는 신부님 하나가 조용히 실천하는 게 있습니다.
모금운동을 하여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돕는 활동을 주관합니다.
소리 없이 많은 교직원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적지만 모이면 큰 힘이라는 사실을 체험하니 모두 마음이
뿌듯합니다. 하늘나라에는 빈부차이가 없습니다. 어렵겠지만,
가난 때문에 공부길이 막히는 학생이 없는 학교를 만들고 싶습니다.
몸이 움직여야 마음도? /김찬선신부님
오늘은 2시도 안 되어 잠이 깼습니다.
어제 하루 종일 회의를 하여 몸이 피곤한 때문인지
바로 일어나지지 않아 얼마간 잠자리에 누워있었습니다.
그런데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천장에서 내려다보듯
제가 보이고 제가 가엾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 그럴까?
어제 머리를 많이 쓰는 회의를 한 뒤의 건조함과 공허감 때문일까?
아니면 어제 자기 전에 읽고 잔 오늘 복음 때문일까?
내 마음이 더 따듯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 마음이 더 생동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느낌을 갖고 일어나 오늘 복음을 마주 하니
예수님을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이렇게 예수님을 찾아 나서고
나는 어떤 사람이기에 예수님을 찾아 나서지 않을까?
수도원에 매일같이 미사 드리러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번 강추위에도 빠지지 않고 그 새벽에 미사 드리러 오셨습니다.
저는 우리 집에서 미사를 드리니 찾아 갈 필요가 없었지요.
찾아 가는 것,
몸이 가지만
몸이 가기 전 마음이 찾습니다.
그러니 찾아 감에는 몸과 마음의 어떤 관계가 있습니다.
몸이 찾아 갈 필요가 없으니 마음의 찾음이 그리 열렬하지 않습니다.
몸이 편안하니 마음이 그리 뜨겁게 찾지 않습니다.
저는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시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찾아 어디 갈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하느님을 찾아 어디 간 적이 없습니다.
유명한 강사를 찾아 가시는 신자들을 보고
좋은 강의를 들으러 가는 우리 형제들을 봐도
나도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형제들이 영화 “위대한 침묵”을 보고 와서 그 느낌을 얘기하고
우리 카페에 그 영화 감상이 올라와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 영화 괜찮은 영화일 거라 생각이 들어도
굳이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것입니다.
작년 “워낭 소리”처럼 누가 표까지 사 와서 같이 가자고 하면
어쩔 수 없이 가고,
또 가서 보면 감동을 받겠지만 아직까지 갈 생각이 없습니다.
사실 작년 “워낭 소리”를 보고 감동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聖事的인 영화라고 생각하고 “위대한 침묵”도 그럴 것입니다.
그래도 갈 생각이 없습니다.
아무튼 수도원 성당에 성체가 모셔져 있고,
내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고 생각하니
무엇을 찾아 어디 갈 생각이 없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저의 축복인 것 틀림없지만
微動도 않으니 感動도 없는 것은 아닌가,
몸으로 찾지 않으니 주님을 찾는 마음도 없어지는 것은 아닌가,
깊이 생각하게 되는 새벽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측은지심의 하느님 /양승국신부
사람이 꽤 ‘괜찮은’ 한 연예인을 가까이서 뵌 적이 있었습니다.
빡빡한 스케줄 가운데서도 마음이 얼마나 착하고 관대한지
깜짝 놀랐습니다. 정기적인 출연을 소화하기에도 벅찰텐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각종 자선바자회, 음악회,
자원봉사 활동에도 열심이었습니다.
아무리 바쁘다 해도 시간이 허락하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봉사하러 간다는 말에 얼마나 존경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또 얼굴이 알려지다 보니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은 듯 했습니다. 자신만을 위한 시간,
여유 있는 휴식시간은 거의 없다고 했습니다.
어디든 가도 사람들이 알아보니 아는 채 하니,
당연히 행동에 제약이 따르겠지요. 속상할 때도 많답니다.
동물구경 하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고,
‘어린 것들’도 예의 없이 함부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댄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에는 늘 환한 미소를 달고 다니니 대단했습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친절하게 대하고 웃어주는 등
일일이 ‘제대로’ 응대하는 모습이 보기 정말 좋았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모습 역시
별반 다를 바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공생활이 본격화되면서
예수님 역시 여유 있는 개인적인 삶은 끝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 마다 사람들은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군중들은 어떻게 해서라고 예수님 가까이 자리 잡기 위해서
목숨 걸고 경쟁했습니다. 군중들은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 손 한번 잡아보려고 난리였습니다.
끝도 없이 몰려드는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치유를 원하면 치유를,
구마를 원하면 구마를, 안수를 원하면 안수를,
먹을 것이 필요하면 먹을 것을,
재미있는 이야기가 필요하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그렇게 반복하셨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계속되는 강행군 속에
예수님의 심신은 지쳐만 갔습니다. 거의 탈진 상태에
도달한 예수님께서는 ‘이러다가 큰 일 나겠다.’ 싶어
억지로라도 휴식시간 찾으십니다.
잠시 틈이 나자 예수님께서는 ‘잽싸게’ 군중들을 따돌리십니다.
군중들을 피해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십니다.
한숨을 돌린 예수님께서는 ‘이제야 조금 쉬게 되었구나.’
하셨는데, 결코 그게 아니었습니다.
호수 반대편으로 배가 가까워지면서 육지를 바라본 예수님께서는
‘어쩔 수 없구나.’하고 포기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호수 건너편에는
아까보다 더 많은 군중들이 모여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찌된 영문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잠시 휴식을 취하러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다는
낌새를 즉시 알아차린 군중들이 선수를 친 것입니다.
사람들은 육로를 따라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호수를 직선으로 건너가는 시간보다
육로를 따라 호수를 돌아오는 시간이 훨씬 길텐데...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에 앞서 도착해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시던 동안
있는 힘을 다해서 뛰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 당신을 만나기 위해,
당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
간절한 소망 한 가지 이루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뛰어온
군중들 앞에서 예수님의 마음은
측은지심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과로와 스트레스로 파김치가 된 예수님이셨지만,
그 측은한 군중들 앞에서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사목활동을 다시 시작하십니다.
병자를 치유시키십니다.
마귀를 몰아내십니다.
당신을 따라다니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해
쓰러질 지경인 사람들을 위해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측은지심의 하느님입니다.
당신 백성의 고초를 결코 외면할 수 없으신
연민의 하느님이십니다.
병고에 시달리고 죽어가는 형제의 슬픔 앞에
함께 눈물 흘리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그 측은지심을
우리가 지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나날이 피로와 스트레스로 힘겨운
나날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가엾은
우리 이웃들에게 다가서는 우리이길 바랍니다.
신자무적(信者無敵) /이수철 신부님
베네딕도 규칙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희망을 하느님께 두라(RB4,41)”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절대로 실망하지 말라(RB4,74).”
이래야 삭막한 세상 좌절하지 않고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제 어느 형제분의 말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참 살아가기 힘듭니다. 살얼음판을 걸어가는 것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악으로 살아갑니다.
돈을 이기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매일 기도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세상 한 복판에서 기도하며
말씀대로 살아가려 노력하는 어느
형제분의 진솔한 고백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악으로 살아갑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사랑으로, 희망으로 살아갑니까?
너나 할 것 없이 목말라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에 목마르고,
진실에 목마르고,
믿음에 목마르고,
사랑에 목마르고,
희망에 목마르고,
행복에 목마르고,
기쁨에 목마르고,
평화에 목마르고,...
통 목마르고 굶주린 사람들뿐입니다.
이런 근원적 목마름 돈만으로는 도저히 해갈될 수 없습니다.
이런 목마름,
결국 하느님께 대한 목마름이요
하느님 만나면, 체험하면
일거에 해갈되는 목마름입니다.
이제 하느님에 대해서 많이 말하기 보다는
하느님을 만나 살아야 할 시대 같습니다.
이런 하느님을 제외해 놓고
세상 것들로 채우려하기에
마음의 갈증과 굶주림은 여전합니다.
끝없는 욕심에 돈의 유혹을 이기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이래서 하느님입니다.
어느 때보다 하느님 찾고 만나는 일이 절실합니다.
1독서 이사야서의 말씀,
그대로 목말라 애타는 우리 모두를
향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너무 절실한 부르짖음이라 통째로 전부 인용합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여기에 물이 있다.
너희 먹을 것 없는 자들아, 오너라.
돈 없이 양식을 사서 먹어라.
값없이 술과 젖을 사서 마셔라.
그런데 어찌하여 돈을 써가며, 양식도 못되는 것을 얻으려 하느냐?
애써 번 돈을 배부르게도 못하는 데 써 버리느냐?”
참으로 통쾌하고 시원한,
정곡을 찌르는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마음의 갈증이 해갈되지 않으면
육신의 욕망 충족으로 향하기 마련이요
결국은 중독에 폐인입니다.
알게 모르게 낭비되는 돈은,
순전히 몸의 욕구 충족을 위해
낭비되는 돈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우리의 목마름을 해갈시켜 주시고
영혼의 병을 고쳐주시기 위해
이 거룩한 생명의 미사 잔치에
초대해 주신 고마우신 하느님입니다.
이어 주님의 간곡한 권고 말씀을 들어보셔요.
“들어라. 나의 말을 들어 보아라.
맛 좋은 음식을 먹으리라. 기름진 것을 푸짐하게 먹으리라.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로 오너라.
나의 말을 들어라. 너희에게 생기가 솟으리라.”
주님의 초대 말씀을 요약하면,
‘오라-마셔라-먹어라-들어라’ 이며,
‘나의 말을 들어라’가 결론입니다.
마치 이 은혜로운 미사의 구조 같지 않습니까?
주님의 오라는 초대에 응하여
주님의 성혈을 마시고 성체를 먹고 말씀을 들음으로
영육이 충전 치유되는 우리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돈이 하느님이 된 세상이기에,
어느 때보다 참으로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 목마른 시절입니다.
너무나 황폐한 영혼들이요,
외형만 사람들이지 속은
날로 사나운 야수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참사람들 날로 줄어가는,
약육강식, 생존경쟁 치열한 세상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참사람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건강한 영혼 육신으로 살아남게 합니다.
저는 세상 곳곳에 묻혀있는
이런 보물 같은 분들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보다
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은,
생기 솟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말씀을 통해
바로 하느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존재 속속들이 주입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욕망도 저절로 정화되고
절제되기 마련입니다.
이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생명이요 희망입니다.
바오로의 고백 그대로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환난과 역경과 박해,
굶주림과 헐벗음,
위험이나 칼,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우리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 진정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말 그대로 신자무적(信者無敵)입니다.
아무도 다치지 못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진정 세상 밭에 묻혀있는 하느님의 보물들입니다.
가장 부드러우면서도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하느님 닮아 측은지심 가득한
마음 순수한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이 의미심장합니다.
기적의 시발점은 주님의 측은지심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극도로 절망스런 상황입니다.
그러나 측은지심 가득한 예수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자
곧장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여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만도 열두 광주리 가득했다 합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
예수님의 순수하고 진실한 측은지심이,
철석같은 믿음이,
하느님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아니 지성(至誠)이면 감인(感人)이라,
예수님의 측은지심이 숱한 군중들을 감동, 회개시켜
나름대로 깊이 숨겨뒀던 먹을 것
모두를 내 놓게 했다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하느님의 일방적인 기적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일어나는 기적, 이게 기적의 참뜻입니다.
세상의 불행 대부분은 하느님 탓 천재(天災)가 아니라
대부분은 사람 탓 인재(人災)임을 깨닫습니다.
있는 나라들이,
있는 자들이 가진 것을 나누지 않는
욕심 때문에 자초한 화입니다.
모든 자원을 아끼고 나눈다면 모두가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세상입니다.
마음으로의 회개는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가진 것을 나눔으로 비로소 완성됩니다.
나눔이 없는 회개 백번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의 기적을 통해서
당신의 모두를 나눠주신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나눔의 기적을 계속 발생시키십니다. 아멘.
부자가 되고 싶습니까? /강영구신부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그대에게
예수님과 제자들의 생각은 극과 극입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어라.”하시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에게 지금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제자들은 오천 명이 넘는 군중 앞에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나눌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신 다음,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주십니다.
양의 많고 적음에 매달리는 제자들은 나눌 엄두를 내지 못하지만,
양의 많고 적음에 매달리지 않는 예수님은 적은 것이지만 나누어줍니다.
예수님은 부자이고 제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일상적으로 많이 가진 사람을 부자(富者)라 하고,
가지지 못한 사람을 가난한 사람이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부자(富者)와 빈자(貧者)의 기준은 달라집니다.
많이 가졌더라도 나눌 마음이 없는 사람은 가난뱅이이고,
가진 것은 없지만 무엇이든지 나눌 마음을 가진 사람은 부자(富者)입니다.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그것도 모자라서
헐떡이는 사람을 어찌 부자라 할 수 있습니까?
너의 가난함과 배고픔을 나의 것으로 여기는
자비지심(慈悲之心)을 가진 사람은 양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고
가진 것을 함께 나눕니다. 그가 진정한 부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자(富者)가 더 부자(富者)가 될 수 있도록
축복하시는데 그것을 기적(奇蹟)이라고 합니다.
당신도 부자가 되십시오.
흘러넘치는 은총과 축복 속에서 행복하기 바랍니다.(一明)
♪ 파가니니의 "칸타빌레" (Cantabile in D Major) /장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