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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15
젊은날의초상
(나의 인생 유전기)-1
글, 사진 : 김 한 종
(2010. 12. 남아공 와인너리에서)
1937~2014
우리들의 자화상(젊은날의 초상)
-(1)-
우리는 해방 전에 태어나 초등학교를 일제 하에 다녔고
1945년에 해방을 맞으면서 비로서 우리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정부수립 전후한 혼란기에 초등교육을 마치면서 중학교에
당시로선 정말로 어렵게 진학하면서 소년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 간, 이내 6.25라는 미증유의 동란을 맞아
가족은 뿔뿔이 헤어지거나 또는 전쟁에 목숨을 잃으면서
정말로 어려운 유년기와 소년기를 거치면서 폐허 속에서
어렵사리 학업을 마치면서 50년대를 보냈고, 대학으로 가며
4.19라는 미증유의 학생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거리에서
데모에 나서면서 조국과 민족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었고
민주화와 자유의 열풍 속에서 혼란한 사회를 체험하게 되었다.
그것도 잠간 민주당 정부는 사회혼란에 휘말려 제 기능을 잃고
1961년 5월 16일 군사 구테타가 일어나 민주정부는 붕괴되었다.
군정이 들어서면서 모든 질서가 회복되면서 점차 정상화 되어갔다.
그 후 민정으로 바뀌면서 한일 회담으로 또 한차례 혼란을 겪으며
우리사회는 민족주의를 지향하면서 국가발전에 디딤돌을 마련한다.
1965년 월남파병을 하면서 6.25에 빗진 국제사회에 기여하면서,
우리는 안으로는 경제건설과 방위력 향상에 힘쓰며, 북한과 대치하고
서독에 광부와 간호원을 파견하면서 라인강의 기적을 배우게 되고
70년대에 들어와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 산업국가로 탈바꿈한다.
국가 통치가 강화되면서 경제제일 시책, 새마을 사업이 강화되어
농업국가가 점차 중화학, 경공업 국가로 전환하면서 발전이 되었고
마침내는 1972년 10월 유신이라는 미증유의 국가체제가 들어서고,
북한은 유일체제가 구축됨으로서 적대적 관계가 강화되어
남북한 서로 상대방의 위협으로부터 체제를 지키기 위한 권력이 강화되어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사상적 자유가 국가 제일 주의에 억압되고
나라는 점차 의식주가 해결되면서 민주화 열망에 휩싸이게 되고
급기야는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이 시해되는 불행을 맞이하고
18년이 넘는 통치시대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가질서가 자리잡기도 전에
억눌렸던 자유의 물결은 꽃도 피기 전에 또 다시 12.12 사태라는
군부통치의 시대가 열리는 불행한 시기를 맞이합니다.
그 후 국보위라는 통치기구와 통일 주체 국민회의라는 체제아래
또 다시 국민 주권은 억눌리고 강권 통치가 민주사회를 지배하고
마침내 1987년 6.29 민주화의 거센 물결에, 새로운 질서가 탄생되며
5 년제 단임 대통령의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는 발전을 거듭하며
1988년 마침내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국제사회에 개방되면서
산업화 시대를 성급히 마감하며, 새로운 정보화시대를 맞이한다.
우리는 그사이 묵묵히 어려운 교육계를 지키며 나라발전에 기여하고
I. M.F 라는 미증유의 금융대란을 겪으면서 어려운 사회현실 속에서
전국민 개 교육 시대를 열어가며 어느덧 40여 년의 시간을 보내고
2000년 전후해서 국민의 정부 하에서 교육개혁이라는 미명하에
평생을 바치고 가난에 시달려 가장으로 역할도 제대로 못하면서
정년 단축이라는 회오리에 밀려 서둘러 교육계를 떠났습니다.
나는 입학식과 졸업식 식순 팜프렛에 언제나 나의 좌우명으로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한다”를 이제는 접고,
나의 재직시의 좌우명으로 마음속에 새기면서 은퇴하였다.
그 후 우리는 매월 박봉에서 쪼개어 적립한 연금을 손에 들고 나와
이제는 지나온 질곡의 세대를 마무리하면서 조용히 지켜 봅니다.
이 땅은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영원하게 살아갈 터전이라는 생각에
오늘도 우리들은 산행을 하면서, 힘든 하루를 보내면서
그저 우리나라가 미래에도 잘되기를 바라고 기원합니다.
2013. 12. 15. 송산 김 한 종.
(사진: 1951년 1.4 후퇴 당시 정경)
(사진: 1960년 4월 민주 혁명 당시의 가두 투쟁 )
(사진: 1961년 5.16 당시의 박정희 소장과 박 종 규 중령의 모습)
(2)
퇴직 후 산행에 나서면서 재직 시에 시작한 백두 대간 산줄기를
매 2주, 4주 토요일 오후 10시에 광화문에서 출발하는 모임을 결성하여
2년 만에 진부령에서 감격의 막을 내리는 대역사를 이루었다.
동시에 세계여행과 등산에 나서 1990.1.11일부터 동남아 여행을 필두로
오늘 날까지, 60여회의 세계여행을 하여 그 흔적을 책으로 남기었으며
2003. 3월 1일 12시에 아프라카의 최고봉 킬리만자로의 정상(6895m)을
영일산악회 회원과 부부가 함께 정복하는 기쁨을 함께하였고,
백두 대간도 2차로 스마일 산악회 40여명과 더불어
2005~6년에 마침내 2번째로 백간 종주를 마치고,
진부령에서 다시 향로봉 까지의 군부대 관할지역 32km를 추가로 하면서
2회에 걸친 대 역사를 마치며, 1차는 대간을 하면서 주변의 유적을,
2차는 주로 야생화를 탐방하는 계기를 함께 하면서 우리 산하의
아름다운 구석구석을 탐방하고 문화의 향기도 즐겼으며,
그 동 안 함께한 사계절 산악회, 스마일 산악회 회원들과 추억을 만들고
“백두 대간을 가다”(233p)를 출판하여 나누어 드렸고,
재직시인 1978년부터 시작한 등산을 300회를 인터넷에 올려놓아
이를 고희를 맞이하면서 “한국명산 순례”<부록 해외명산 10선>을
추가 하여 영일 산악회 등 여러분의 후원으로 출판을 하였다.
(사진: 일선에서 물러난 후 6인의 산행-북한산 백운대 정상에서)
(1991년 중국 천자산 등산에서)
(사진: 1990년 태국 방콕에서 교감 연수단- 필자 후열 좌에서 4번째)
(사진: 1992.07.14 . 09:00 키나바루 정상에서<신들이 사는곳>- 영일 산우회)
(사진: 1997년 사제 등산에서)
(사진: 영일 산우회 100회 기념 등산 패)
(3)
하늘 아래 천당, 이어 분당이라는 데가 살기 좋다 하여
미국에서 귀국하려 한다는 아들 가족의 보금자리를 마련하면서
우리 부부는 분당으로 15번째의 이사를 하였지요
강남의 로데오 거리로 칭하는 청담동의 단독주택을 처분하여
오랫동안 유학 생활을 한 후 새로운 가족을 거느리고 귀국하는
즈문둥이 손자를 맞이하면서 우리 부부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
아파트를 마련하면서 우리 가족의 분당시대가 개막 되면서
우리는 오랫동안 살았던 서울을 떠나 아들은 서현, 우리는 야탑
영장산 자락에 자리잡고 매일 아침 6시에 기상하여 산행하며
중간에 운동시설에서 윗몸 일으키기, 역기 등을 하고 나서
분당 메모리럴 파크 앞가지 가면 휴식시설이 있어 거기에 모이고,
다시 맨손체조를 간단히 하고 되돌아 오면 아침 07:30분 전후
이렇게 하다가 어느 날 산길에서 전단지에 산수정 산악회를 보고
조심스레 8월부 터 참가하여 어느덧 6년의 세월이 흘러
6월 5일 부로 150회에 이르니 참 세월은 빠르다.
“Time flies like arrows”
그 동안 세계여행에도 박차를 가하여 총 60회를 나갔으니
이를 정리하여 Naver, Daum Blog 에 올린 것이 도화선이 되어
그 동안의 여행기록을 인터넷에 올려 논 것을 15개를 추려
“지구촌에 이런 곳도 있다네!”를 출판하여 세상에 내놓았고
분당으로 이사오면서 또 다시 문화재 탐방을 주로 하여
2009년 티벹 차마 고도, 인도, 네팔을 위시하여, 그리스 에게해 문명,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루투갈, 이어 발틱 3국, 코카서스 3국에 이르는
3책 6권의 세계 문화 대 탐방을 신문 방송 기자 연맹을 통해
사진을 중심으로 각각 350 P 이르는 자료를 편찬하였으며,
인터넷의 발달로 e 북이 보급되면서, 산문, 잡지,무가지 등이
출판계에서 점차 사라지며 이제는 스마트폰이 모든것을 대행하니
나의 문화유산 답사도 한동안 책으로 빛을 보지 못하다가
2014년에 5월에 비로서 "세계문화유산을 찾아서 1~2"란 책으로
그동안 발칸반도의 크로아티아, 스로베니아, 몬테네그로 등
아드리아해의 중세문화유산을 글과 사진에 담아 320P로 구성 1권으로,
중남미의 멕시코,과테말라 중심의 마야문명-데오티우아칸 체첸이사 등,
페루의 잉카문명- 마추픽추의 고산문명, 나스카 사막의 신비한 그림 등
정말 남미는 우리들의 오랫동안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었으나 2번의 탐사로
이번에 2년여 만에 세상에 나오니 이제는 글보다 인터넷으로
스마트폰이 모든것을 대치하는 세상에 책문화는 후퇴일로니,
참으로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하니 이제는 그대로 순응하여야하니,
이로서 나는 퇴직 후 14년간에 모두 11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아
재직 시에 못다한 우리 부부의 인생의 새로운 이정표를 이루었다.
이제 우리는 허허히 웃으며 퇴장할 날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말을 되새기며 오늘도 산에 오르면서,
올라 가면 반드시 내려와야 하는데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고
여러 회원들과 함께하고 있으니 이 미망을 깨워 주십시요.
감사합니다.
2014. 06.15 松山 김 한 종, 이 영 옥 드림
( 2000년 1차 백두대간 종주 후 진부령에서-필자 부부–좌측 상단)
( 사진: 2003.3.1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Kilimanjaro 정상에서)
(사진: 키리리만자로 등산시의 영일 산악회 일동)
(사진: 2005~6년 스마일산악회 2차 백두대간 종주 시-삽당령에서-필자 하 우측 4번
(사진: 1차 대간 후 “영원한 친구”모임으로 10년 후 안양 수리산에서)
(사진:2012.09.27 청풍호반 금월봉 앞에서- 산수정 산악회 회원)
(사진: 2010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
(사진: 2007년 이전에 출간된 책)
(사진: 2009 년 이후 분당에서 출간된 3책 6권)
(2014. 5월 출간된 4책 "세계문화유산을 찾아서 1~2)
(사진 :2001년 최초로 백두대간 완주후 간행된 책)
(사진:국내 300산 산행후 선정한 명산 수록-해외산 10선)
(사진: 지구촌 여행기 15선 모음)
(사진: 차마고도-1 , 인도,네팔-2의 표지)
(사진: 에게해 문명-그리스 고대문명-1, 영국,프랑스,스페인, 폴투갈-2)
(사진: 발틱 3국-1, 코카서스 3국-2)
(사진: 코카서스산을 배경으로)
(사진: 2014.04 -신간-세계문화유산을 찾아서 )
(사진: 세계문화유산을 찾아서 목차)
(사진: 2013.05.15 영장산에서 필자부부)
우선 사진으로 일생을 정리하여 보았읍니다.
첫댓글 고문님께서 걸어오신 길을 읽는 내내 가슴 뭉클하고,
조정래 작가의 장편 명작,,아리랑~태백산맥~한강 을 총 정리하며,한눈에 읽는 느낌이며.
김한종 고문님을 그 주인공으로 대입시켜 읽어 보았습니다.
많은 조정래 작가의 독자들이 한강 이후에 작품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으나,
아직 한국사의 글은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수많은 조정래 작자의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한강 이후의 주인공의 삶이 궁금 하거던,
송산 김한종 고문님의 블로그를 보라고,,,
고문님과 함께 할수 있어 감사드리고,
고문님이 계시는 산수정 산악회가 자랑 스럽습니다.
늘~건강 하시고,,,많은 가르침 받기를 앙망 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동안 파란만장의 살아온 세월을 간단히 정리 하여본 것인데
너무 큰데다 대입하시니 정말 부끄럽습니다.
마지막으로 내논 책 "세계문화 유산을 찾아서"을 간행하면서
간단하게 정리한 것입니다.
"젊은날의 초상"이라는 인생 유전기 잘 읽었습니다.
유년기서부터 지금의 이르기까지 고문님의 발자취가 고스란이
담겨 있는 글,우리나라 한국사를 보는듯 합니다.
그 힘들다는 백두대간을 사모님과 나란히 완주하시고,
"세계문화유산을 찾아서"란 책이 출간되기까지는 많은시간과 경비,
무엇보다 두 분의 열정으로 만들어지신게 아닌가 싶습니다.
두 분 늘 건강하시고,산수정과도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고문님께서 걸어오신 길~힘찬 박수로 대신합니다.
인생의 조그만 발자취를 살펴주시어 감사합니다.
중일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태어나 해방 정국에 초등학교를 다녔고,
6.25 동란기간에 소년기를 방황하였고, 4,19 민주 혁명에 청년기를 보내면서
5.16 군사정변을 맞이하였고, 어렵게 교육계에 들어가 평생을 함께하였고
2000년대에 교육계를 떠나면서 제 3의 인생을 살아왔으니.....
그동안의 국내외 등산, 여행도 어언 15년이 되어 모두 10권의 책으로 마무리를 하였읍니다.
이제 인생의 항로가 11:30분이 지나고 있으니 ......
국내에서 "우리문화유산 답사"를 마무리를 할 예정 이니.......
여러 회원님들의 도움으로 함께하여 감사할 따름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