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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 앞 훈련원에서 훈련 중인 대한제국 군인들.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병무는 이토의 지시에 따라 군대 해산을 주도했다. [사진가 권태균] |
일제는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해 내정 전권을 장악했다. 또한 통감에게 중앙의 각부 차관과 지방의 각 도 관리에 대한 임면권을 주어 일본인들이 정부의 주요 관직을 차지하게 되었다(차관 정치). 정미 7조약 강제 체결과 부수 비밀 각서에 따른 군대 해산으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의병 투쟁이 일어났다(정미의병). 일제는 1909년 기유각서를 체결해 대한제국의 사법권을 빼앗아 항일 세력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강화했다.고종 황제는 을사늑약을 끝까지 인준하지 않았다. 고종은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선언해 열강의 지원을 얻기 위한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고종은 1907년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던 네덜란드 헤이그에 이상설·이준·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해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했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문제 삼아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1907).
일제는 친일 단체인 일진회를 부추겨 합병 여론을 조성하고 1910년 6월에는 경찰권을 박탈했다. 그해 8월에는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 사이에 한국 병합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총독을 파견했다. 이로 인해 대한제국은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각에서는 일제 강점의 요인으로 고종이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고종이 국제 정세 이해에 미숙한 면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국권 피탈의 주된 원인은 일본의 대륙 진출 야심과 이에 대한 영·미의 이해관계의 부합에 있었다. 또한 일본의 대한제국 국권 침탈 과정을 근대로의 편입으로 보는 일부의 시각은 지양되어야 한다. 일제의 식민 지배로 한국이 근대화되었다고 하는 것은 일제의 침략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제의 대한제국 국권 침탈 과정은 일제 강점기 직전의 상황이기 때문에 한국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수능 한국사 시험에서는 각 조약의 성격과 내용에 대한 문제가 다수 출제되고 있다. 일제의 국권 침탈 과정에서 체결된 조약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총평=김취정 (고려대 강사·박사)
[핵심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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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
아관파천 이후 조선과 만주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 간의 대립이 점점 격화되었다.
러일전쟁의 전운이 감돌자 대한제국은 즉각 중립 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하였으며,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이후 제1차 한일협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1905년 7월 일본과 미국은 가쓰라·태프트밀약가쓰라·태프트밀약을 맺었다. 같은 해 8월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였다. 9월에는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하고, 국제사회로부터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승인받았다.
1905년 11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었다. 고종은 1907년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던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하였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문제 삼아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과 1909년 기유각서 체결 등을 거쳐 대한제국의 임면권과 사법권, 경찰권을 박탈하고 군대를 해산함으로써 일본의 침략에 군사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게 하였다. 1910년 8월 이완용 내각과 일본은 한일강제병합 조약을 체결하였다.
[예상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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