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10)
교회는 오늘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의 교부 성 이냐시오 주교 학자를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는 전승에 따르면 사도 요한의 제자였다고 여겨지며 그는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가 세운 안티오키아 교회의 2대(혹은 3대) 주교로서 사목적 활동을 한 후, 110년에 로마에서 박해로 순교한 성인입니다. 특별히 성인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로마로 압송되어 가던 중에 교회공동체와 뽈리까르포 주교에게 쓴 7개의 서간은 성인의 신앙과 더불어 순교정신이 그대로 묻어난 교회의 훌륭한 유산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성인을 기억하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이번 주간 계속 듣게 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분노 섞인 저주의 말씀의 연속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콕 집어 다음과 같은 말로 비난을 넘어 저주의 말을 퍼부으며 공격하십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47.52)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이 같은 날선 비판의 모습이 사실 낯섦을 넘어 정도가 지나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다음의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들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루카 11,50)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의 입에서 나오는 이 같은 분노에 찬 저주의 말씀. 심지어 피의 저주, 대를 잇는 저주를 퍼붓는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은 평소 사랑의 예언자로 하느님 사랑의 완성을 이 세상에 직접 전하시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생경할 뿐입니다. 그리고 평소 사랑과 용서와 화해만을 이야기하던 예수님의 모습과는 언뜻 모순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와 같은 말씀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오늘 복음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보면, 이 분노의 말씀 안에 담긴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 곧 분노에 찬 저주의 말 그 안에 담겨져 있는 예수님의 애절하고 간절한 사랑의 마음이 오늘 말씀을 대하는 저의 마음에 크게 와 닿았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소중한 자녀가 바르지 못한 길로 들어서서 비행을 일삼는다면, 부모는 그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에 매를 들게 됩니다. 좋은 것만을 주기에도 한없이 모자란 부모의 크나큰 사랑에도 불구하고 매를 들 수밖에 없는 부모의 마음. 사랑하기 때문에, 오직 그 사랑의 마음으로, 마음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매를 드는 부모의 마음. 사랑의 매를 통해 옳지 못한 길에서 헤매고 있는 자신의 소중한 자녀를 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부모의 이 간절한 사랑의 마음. 오늘 복음의 말씀이 전하는 예수님의 마음은 바로 이 부모의 사랑의 마음인 것입니다.
오늘 제 1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온 몸으로 체험한 사도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확신에 차 말합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풀어주셨습니다.”(에페 1,7-8)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하나 뿐인 아들을 속죄의 제물로 삼아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 모든 것은 예수님을 통해 베풀어진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이며, 그 은총을 우리는 그저 믿음으로 얻게 된다는 사실, 이 같은 하느님의 무한한 관용과 넘치는 사랑을 온몸으로 체험한 바오로 사도는 죄인을 향한 하느님의 이 같은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또 자신의 삶을 어떻게까지 변화시켰는지 그 놀라움과 위대함을 온 삶으로 선포하고 선포합니다. 그렇게 이방인의 사도가 된 바오로는 자신의 변화된 삶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죄만을 일삼는 이들까지도 모두 포용하는 하느님의 사랑, 그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듣지 못하고 그 사랑을 선포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고착화된 행태에 예수님은 개탄을 금치 못하며 그러면서도 그들의 회개를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비난과 저주라는 극단적 처방을 써가면서까지 그들을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예수님의 필사적 몸부림.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오늘 화답송의 시편이 전하듯, 자애가 넘치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는 사랑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부르짖는 이들의 외침을 하느님은 절대 외면하시 않으시고 애원하는 이들의 기도를 좋으신 하느님은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 그러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내 삶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 오직 그것뿐입니다. 오늘 미사 본기도에 사제가 바치는 기도문의 내용에서와 같이 하느님과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율법의 근본이며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타인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그리고 오직 그 사랑으로 타인의 본질적인 특성과 개성은 파악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 사랑의 힘으로 그 사람의 잠재적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게 합니다. 오늘의 복음의 말씀을 통해 전해지는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이 같은 사랑의 힘으로 우리 개개인을 온전히 꿰뚫어 보시며 우리의 특성과 개성, 그리고 우리의 부족한 점까지 살펴보시고 우리가 부족한 바로 그것으로부터 어디로 가야할 지를 알려주며 우리가 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더해주시는 사랑의 모습입니다. 언뜻 이해하기 힘들고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이는 오늘 말씀의 예수님의 비난과 저주는 바로 그 속에 담긴 예수님의 이 사랑의 마음의 또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이 없이 행해지는 타인에 대한 모든 판단은 그저 비난이며 저주일 뿐입니다. 정의라는 명목으로 내 곁에 있는 형제를 판단하는 모든 말들은 그 안에 그 형제를 위한 사랑의 마음이 담겨져 있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정의의 칼로 행하는 횡포이며 폭력일 뿐인 것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나와 다른 사람을 변화토록 하는 근거이며, 그 사랑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느님의 곁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바로 말씀을 통해 그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계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지금 이 순간, 이웃 형제들과의 삶 안에서 사랑 없는 정의의 칼로 형제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우리의 입에 담겨지는 형제들에 대한 단정적 판단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아닌 것을 행하려 한다면 오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오직 사랑만이 믿을만하며, 오직 사랑만이 우리를 살게 하고 그 사랑이 우리 삶의 진정한 기쁨과 희망의 원천이 됩니다. 하느님이 보여주신 그 사랑, 예수님 안에서 드러난 그 사랑을 여러분의 삶 안에서 실천하시기를 그리하여 예수님이 주시는 사랑으로 여러분의 말과 행동과 생각으로 그 사랑을 담아내시기를, 또 그 사랑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실현토록 해주는 매개체가 되어주는 오늘 하루의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