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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성도의 생활이요 의무입니다. 기도를 중단하면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이 위축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곧 행동으로 일을 하십니다. 이것이 응답입니다.
한 가지 그리스도인이 무감각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기도가 계속되면서 틀에 매인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생활이 지속되면 기도의 폭이 좁아지면서 형식적인 기도가 되기 쉽습니다. 그 순간 기도자 자신의 자화상은 기도의 영성이 멈춰있음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우리예수님은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없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막9:29) 그러나 기도자 자신을 돌아보며 기도하데 기도할 때 기쁘고 기도의 지경이 넓어지는 성숙된 그리스도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숲속에서 움막을 쳐놓고 홀로 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식사하기 전과 잠자기 전에 꼭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릴 때 배운 기도만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루는 기도 할 때마다 유리병에 호두를 넣어서 기도하는 횟수를 세어보기로 하고 기도하는데 얼마나 기도 했을까요!~~~ 유리병을 바라보니 호두알이 여러 병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유리병이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그는 만족을 느꼈고 마음이 거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기도자는 꿈을 꾸는데 예수님이 나타나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호두 알로 가득 찬 병들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호두알 하나마다 한 번의 기도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기도자에게 그러면 망치를 가져다가 호두알 하나하나를 깨뜨려 보아라 기도자는 호두알을 깨뜨려 보니까 호두알 속에 알맹이가 하나도 없고 껍질만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기도는 이 호두처럼 다 비어있느니라. 너는 기도의 횟수와 말은 많이 했지만 마음은 항상 다른 곳에 있었느니라. 이 말을 듣고 기도자가 꿈에서 깨어났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기도자의 꿈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 기도생활을 돌아보게 합니다.
풍성한 이 가을 하나님이 참으로 기뻐하시는 기도를 배우고자 합니다. 그동안 우리의 전정성이 좀 부족하고 형식적이고 중언무언 할 수도 있었습니다. 어리석게도 기도할 때 호두 병에 호두를 넣고 기도 횟수를 헤아린 어느 기도자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풍성한 가을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오늘주신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사도바울이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부탁한 진정성 있는 기도를 배우고자 합니다.
바울은 먼저 예베소교회 성도들에게 기도내용을 먼저 가르쳐주기 전에 기도의 자세부터 말하고 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우리의 행동이 서 있든지 앉아 있든지 누워있든지 흔히 취할 수 있는 자세입니다. 그러나 무릎을 꿇는 것은 다릅니다. 철저한 항복을 말합니다. 사극 드라마에 가끔 나오지만 칼싸움을 하다가 진 사람이 칼을 맞아 쓰러집니다. 그리고 이긴 자 앞에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습니다. 싸움에서 졌기에 항복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먼저 무릎을 꿇은 것은 하나님 앞에 철저한 항복을 말합니다. 얼마 전 세례 받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셰례를 받았습니다. 이런 자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은 나는 부족합니다. 약합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능력 많으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주님 앞에 무릎 꿇고 나옵니다. 그런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합니다.
구약시대 기도의 모범을 보였던 엘리야 선지자를 보면 열왕기상 18:42......“ 아합이 먹고 마시고 올라 가니라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사이에 넣고” 기도의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가뭄으로 절망의 늪으로 빠진 나라를 위해 엘리야는 무릎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기도 할 때 반드시 무릎을 꿇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무릎을 꿇는 것은 절대 항복과 철저한 인내심을 하나님께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향해 무릎 꿇는 자세로 기도할 것을 먼저 부탁하고 이제 기도내용을 가르쳐 줍니다.
1. 속사람의 강건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16절.....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이런 진정성 있는 기도내용이 우리 주향성도 기도제목이 되면 좋겠습니다. 바울은 속사람이라고 기도 했는데 속사람은 내면에 있는 내 마음의 영혼을 말합니다. 그래서 속사람은 하나님의 영과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교제가 너무 친밀하고 정직 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아버지를 그냥 부르는 것이 아닌 진심이 담긴 부르짖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아버지를 불러도 속사람의 모습으로 불러야 합니다. 그래서 갈4:6....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나 속사람 반대 겉 사람은 어떠습니까? 겉모습 외모입니다. 겉치장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땅에 속한 사람입니다. 땅에서 잘되면 좋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육신만 잘되면 최고입니다. 그래서 잘 먹고 잘살고 잘입고 하면 만족합니다.
그런데 위대한 바울 같은 사도도 속사람과 겉사람에 대한 갈등으로 영적생활을 고민했던 부분이 있음을 로마교회에 정직하게 편지한 적이 있었습니다.
롬7:22-24...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처럼 속사람과 겉사람 이런 영적문제를 놓고 고민했다면 정말! 행복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습니다. 속사람과 겉사람은 오고가는 방향이 다르기에 바울의 말처럼 서로 끊임없이 투쟁합니다.
먼저 겉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예배드리고 성경 볼 시간이 어디에 있어? 열심히 일해 돈 많이 벌어야지.” 이렇게 자기 이야기를 할 때 속사람은 이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냐! 하나님은 예배하는 마음을 기뻐하시니까? 먼저 예배드리고 열심히 일하자.” 어떤 삶이 더 복된 삶인지는 잘 알잖아 결정하고 예배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기도하기를 속사람이 되도록 누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도록 기도했습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역사 하십니다.
겉사람과 속사람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는 바울 자신이였고 예배소 성도요 오늘 우리입니다.
그러나 오직 성령님의 능력으로 겉 사람이 속사람으로 회복됨을 믿습니다. 이 기도가 이 가을에 진정성으로 고백되시기를 바랍니다.
2.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기를 기도했습니다.
17절.....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셔야 합니다. 여기 계시다는 말은 거주하는 것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내 중심에 주님이 거하시도록 거처를 마련해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요14:20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하시도록 마음의 방을 준비해 놓으면 그때부터 그리스도께서 사랑 가운데 거하시고 마치 평안한 안락의자에 앉아계신 것처럼 안주하셔서 깊이 뿌리 내리고 견고해진 반석 같은 모습이 됩니다.
왜 그렇까요? 내 중심에 모시는 순간부터 주님이 내 주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때부터 나는 진정한 그리스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호박에 줄긋는다고 호박이 수박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반드시 진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한다고 해서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몇 대째 신앙집안 모태신앙인이라고 해서 진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심을 믿고 예수님은 나의 구주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이 계실 거처를 마련하는 단계까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 하지만 아직도 주님이 계셔야할 자리에 내가 앉아 있는 슬픈 나의 모습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정말!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 주님의 지배 속에 살기를 원한다면 내 생각...... 내 감정....... 내 의지....... 행동과 생활...... 매일 매일 주님이 주관하시도록 끊임없이 훈련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철떡 같이 장담했던 한 가지는 제가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땅 꺼지게 장담을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 다 흩어져 버렸습니까?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상황이 저들에게 보여질 때 베드로를 비롯해서 다 흩어져 버렸습니다.
제자들 자기 생각에 사로잡힌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나도 여기 있다가는 예수님처럼 죽을 수밖에 없구나 자기 생각이 예수님 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단계까지 불신앙이 되어버린 베드로의모습이 오는 나의 모습 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피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의 자리에 그대로 계셨습니다...... 정작 예수님 겉을 떠난 것은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으니까 내 중심 안에 주님 모시고 사는 것 갖지만 어떤 상황이 부닥쳐 예수님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올 때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서 밀어내겠습니까?
영적안목으로 나 자신을 보면 오늘도 육적인 것에 집착하고 몰입하면 그 순간 만큼은 안락의자에 앉아계신 주님은 없고 내가 그 의자에 앉아 주인 행세하는 모습이 곧 나일 수 있습니다.
윤석열정부가 지지율이 20% 떨어지는데 한 가지 잘한 일이 있어 칭찬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국가인권위원장을 잘 뽑으신 거예요 임명된 분은 안창호 장로님이십니다. 임명되기 전 인권위원회 국회의원들이 질의를 하는데 신앙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차별금지법이 잘못된 것을 소신껏 반대하신 거예요 그리고 질의자가 지구가 46억년이라고 진화론자들이 말하는데 창조론을 학교에서 동등하게 가르쳐야 한다면 지구가 30억년 몇 년이라고 주장하고 계십니까? 질의자가 질의하면서 후보자님 창조론에 대해 한 말씀하셔보세요 하니까 안창호 후보자님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말씀하시고 단호하게 진화론은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답변을 하시는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질의자 000 국회의원(고양 갑)누구인 줄 아십니까?.... 한국에서 지리학을 전공하고 미국에 건너가 유학을 했는데 목사가 되기 위해 MDIV 목회학석사 과정을 공부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한 기관에서 전도사로 사역했던 사람이예요 이런 분이 국회의원이예요
인권위원장은 장관급에 해당되는 자리인데 그 자리를 탐하거나 굽신거리지 않고 하나님말씀에 맞서는 대쪽같은 믿음을 보고 제가 박수를 보냈습니다. 내 안에 주님을 모신다면 이 정도의 신앙은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목사님이 인사청문회 안창호 장로님의 모습을 보고 전화를 드렸더니 장로님!~~목사님 기도해주십시오 그런 뒷이야기도 있습니다. 정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내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산다면 세상에 어쩐 풍파가 밀려와도 내 중심에 주님이 계시옵소서 지금 계시옵소서 바울의 간절한 부탁처럼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이 가을에 이런 기도가 내 입술에 고백되기를 바랍니다.
3. 지식에 넘치는 사랑과 하나님의 충만으로 채우도록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18-19절....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도 바울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지식만을 말하는 것처럼 비추어지지만 바울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17절 하반부 말씀에 보면 그리스도사랑이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진다고 했어요
신앙은 사랑의 뿌리를 내리는 과정입니다..... 뿌리를 내릴수록 신앙이 깊어집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알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알면 알수록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충만으로 채워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측정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하거나 측정할 수 없습니다. 부모의 사랑도 측정하기 어렵습니다. 너무 큽니다. 그런데 부모의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의 모방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비교급이 아닙니다. 무한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헤아릴 수 없는 사랑 앞에 무슨 말을 더 이상 이어가지를 못합니다.
금요일은 제가 전도사 때부터 시무했던 기리 교회 목사안수를 받고 시무했던 소랑교회 광주에서 부목사로 시무했던 광림교회 주향교회에 이르기까지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시무했던 교회마다 사랑 받은 흔적이 너무 커요 제가 무엇이 간데 이런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늘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며칠 전에도 교회이웃 상희를 기억하실 거예요 학교부식 납품업체 화정아버님과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저는 만나지를 못했는데 명절이라고 작은 선물을 가지고 오셨어요 그런데 지금 여기 가계에 살지 않아요 이 가계는 임대로 내주고 광산구 쪽 평동 공단에서 같은 업종으로 사업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먼거리에서 선물을 가지고 사택에 까지 오신 거예요 제가 무엇을 베풀고 사랑한 것도 없는데 그렇게 섬기시는 거예요 그냥 감동이 와서 다음날 감사 문자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만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오래도록 목회를 했지만 솔직히 제가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 그렇게 받으니 그냥 송구할 뿐이죠 결론은 주님의 사랑 너비와 높이와 깊이 측량 할 수 없는 그 사랑 때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앞에 무슨 사랑의 범위를 따질 수가 있을까요? 이 예수님의 사랑 그 넓이와 깊이가 너비 헤아릴 수 없는 충만으로 이 가을에 채워지도록 기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풍성한 가을의 기도 속 사람의 강건을 위해 기도하십시오...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 계시기를 기도하십시오....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채워지기를 기도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