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고등학교 2학년 박모(18ㆍ서울 성북구 길음동)양은 아침식사 후 등교 준비를 하던 중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마비 증상을 느껴 경희대한방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진단결과는 뜻밖에 중풍(뇌졸중). 박양의 가족들은 “고2 여학생에게 어떻게 이런 병이…”라며 어이없어 했다.
작년 11월 초등학교 2학년 김모(9ㆍ경기도 의정부시)양도 비슷한 증상으로 이 병원을 찾았다. 역시 중풍. 6주 간 입원치료 후 어느 정도 운신이 가능해진 김양은 의사로부터 향후 1년 간 재활치료를 받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할아버지나 할머니, 더 젊게 잡아도 중년 이후에나 생길 법한 중풍이 어린 학생들에게 발병한 것이다.
반대 현상도 있다. 지난 10월 중순 서울 강남구 신사동 서울알레르기클리닉에는 중년의 회사원 남모(45ㆍ서울 강남구 대치동)씨가 온몸에 울긋불긋 두드러기 증상이 나타나 내원했다. 병명은 아토피 피부염. 유아 시절 발병했다가 돌이 되거나 걸어서 땅을 밟으면 낫는다고 해서 태열(胎熱)이라고도 불리는 이 피부염이 중년 남성에게 나타난 것이다.
소아당뇨 6년새 3배 증가
질병에 ‘나이 파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전에 중년층 이상에서 발병하는 것으로 알려졌던 질환들이 젊은층, 청소년층에서 발생하는가 하면 어린이들의 질환에 걸리는 성인도 심심찮게 생기고 있다. 일반화 하지는 않았지만 ‘나이를 잊은’ 질병들의 무차별적 공격이 하나의 새로운 현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어린이 고혈압도 이같은 현상 중 하나다. 이 병은 식생활의 서구화로 인한 영양 과다섭취, 운동부족 등으로 비만아동이 증가하면서 나타나는 질환. 삼성서울병원에 따르면 어린이고혈압 환자는 작년에만 13명이 내원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 예로 작년 8월 8세 여자 어린이가 심한 두통, 기운이 없고 다리가 저리는 증상 때문에 병원을 찾았다. 여러가지 검사 결과 신장 정맥 협착증에 의한 심한 고혈압이었다.
이 병원 소아과 진동규 교수는 “어린이 고혈압은 유전보다는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정밀검사를 통해 원인을 교정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경우 합병증인 심혈관질환, 신장병, 당뇨, 뇌졸중 등 각종 성인병에 그대로 노출된다”고 말했다.
소아당뇨병은 어린이고혈압보다 흔한 편이지만 증가속도를 늦추지 않고 있다. 삼성서울병원에 따르면 이 병원을 찾은 소아당뇨환자는 1996년 32명에서 2002년 94명으로 3배 가량 늘었다. 전문가들은 “소아당뇨병은 병의 원인이 성인당뇨병과 다르고 병이 처음 시작하는 양식, 증상, 경과도 다르다”고 말한다.
중풍의 경우 경희대한방병원에 따르면 1980년대만 해도 45세 미만 환자의 발병률이 2% 미만이었다. 그러나 45세 미만 환자의 발병률은 1990년대 4.1%, 2000년대 5.4%대로 꾸준히 증가했다. 이들 중에는 어린 학생들도 예외가 아니라는 게 병원측 설명이다.
서울아산병원에 따르면 한 달 간 내원 중풍환자 80~100명 중 30대 이하가 5~10% 정도를 차지한다. 이 병원 신경과 권순억 교수는 “이같은 성인병은 흡연, 스트레스, 잘못된 식생활, 운동부족, 비만, 공해 등이 주요 원인으로 젊은 사람이라도 이같은 위험요인에 노출되거나 평소 건강관리를 소홀히 하면 결코 성인병의 안전지대일 수가 없다. 실제로 최근 성인병의 연소화(年少化)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말했다.
“아이쿠, 허리야~!”
지난 10월 갑작스러운 허리통증을 호소하며 삼성서울병원을 찾은 환자는 초등학교 5학년 강모(12ㆍ서울 강남구 일원동)군. 검사 결과 강군은 중년층 이상에서 흔한 단순 요통으로 진단됐다. 강군은 나쁜 자세로 장시간 컴퓨터 게임에 몰입하는 생활을 해 허리인대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요통도 더 이상 중년층 이상의 전유물로 파악할 수 없게 됐다. 작년 이 병원을 찾은 소아ㆍ청소년 요통환자는 700여명에 달했다.
이 병원 재활의학과 이강우 교수는 “소아ㆍ청소년 요통은 무리한 운동 등과 같이 허리 과다 사용이나 무거운 가방을 메는 경우, 장시간 컴퓨터게임 등 나쁜 자세 등으로 인해 발병하는 것으로 보이며 대처법은 성인요통에서와 같다”며 “12세에서 증가해 15세까지 약 36%가 경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개의 경우 통증이 심하지 않아 실제 병원을 찾는 환자는 2% 정도”라고 말했다.
대표적인 노인성 질환으로 꼽히는 난청은 요즘 젊은층에서도 드물지 않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듣는 워크맨과 MP3가 일반화한 이후 나타난 현상이다. 서울아산병원의 난청환자 분포를 살펴보면 44세 이하가 전체의 3%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병원 이비인후과 이광선 교수는 “미국의 한 연구기관이 지원자들에게 3시간 가량 카세트테이프 음악을 이어폰을 통해 들려준 결과 반수 이상이 일시적인 청력감퇴를 호소했다. 일상 대화는 60㏈ 정도인데 CD플레이어의 볼륨을 최대로 높였을 때 나오는 소리는 100㏈이 넘는다. 하루 8시간씩 80㏈ 이상 소음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경우 한 달 안에 청각에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취학 전 어린이가 ‘탈모’ 겪기도
어린이들에게 각종 스트레스성 질환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질병 연소화 현상의 한 단면이다. 탈모, 우울증, 스트레스성 두통, 스트레스성 복통 등이 이에 해당한다. 여기에는 어린 시절 부모와의 장시간 격리, 잦은 전학과 이사, 과도한 학원활동과 학업스트레스, 부모의 이혼 등 정신적 스트레스가 주요 원인인 것으로 알려졌다.
어린이 탈모의 경우 초등학생은 물론 취학 전 어린이들 사이에서도 발생, 충격을 주고 있다. 관련학계에서는 10년 전만 해도 미미한 수준이던 14세 이하 어린이 탈모 환자가 전체 탈모 환자의 15%대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우울증으로 정신과를 찾는 어린이도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주로 50대에서 발병한다고 해서 이름지어진 ‘오십견’의 발생연령도 40대 이하 젊은층으로 내려가고 있다. 삼성서울병원 오십견클리닉이 1995~2002년 이 곳을 찾은 환자 1817명을 조사한 결과 40대 이하 환자가 28.5%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30대 이하도 6.4%를 차지해 이제는 ‘삼십견’이라고까지 불린다. 이 클리닉 이강우 교수는 “젊은층에서 오십견이 증가하는 것은 컴퓨터 작업 등과 같은 반복동작의 급증 때문”이라고 말했다.
연소화뿐 아니라 질병의 고령화(高齡化) 현상도 함께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질환이 알레르기 질환의 일종인 아토피 피부염. 유아기에 발병하는 이 질환이 5년 전 성인에게서도 눈에 띄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울알레르기클리닉 노건웅 원장은 “하루 50~60명의 아토피 피부염 환자를 진료하는데 40대 이상이 20% 정도를 차지한다. 인스턴트식품, 식품첨가물 섭취가 크게 늘어난 게 주요 원인인 것으로 파악한다”고 말했다.
사춘기에 생겼다가 20대가 되면 없어진다고 해서 ‘청춘의 심벌’이라고 했던 여드름도 최근에는 성인에게서도 빈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0월 서울대병원 피부과 윤상웅 교수팀이 이 병원을 찾은 여드름 환자 106명을 조사한 결과 25세 이상이 무려 46%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드름이 ‘중장년의 심벌’로 등장한 것이다.
윤상웅 교수는 “청소년기의 여드름은 성호르몬의 영향이 크지만 성인의 경우 스트레스와 화장 습관 등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발병 대상도 청소년기에는 주로 남성이지만 성인의 경우 주로 여성”이라고 말했다.
홍역, 수두, 백일해, 풍진, 볼거리 등 어린이성 감염질환에 걸리는 성인들도 늘어나고 있다. 어린 시절 이들 질환에 대한 예방접종을 하지 않았거나, 했더라도 백신의 약효가 떨어진 경우 성인에게서 발병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 질환에 걸린 어린이들과의 접촉이 잦은 유치원 교사, 의사들도 걸리는 사례가 심심찮게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의사들은 “성인이 이들 질환에 걸릴 경우 어린이보다 합병증이 심해 더 위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