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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포천시와 가평군의 경계에 위치한 운악산(雲岳山)'은 경기5악산(화악·운악·송악·관악·감악산) 중에서도 으뜸인 곳이다.
한북정맥의 여러 봉우리 중에서도 가장 험한 골산(骨山)으로 암릉미가 가장 빼어나 경기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불린다.
'솟구친 암봉들이 마치 구름을 뚫는 듯하다'고 해서 '운악(雲岳)'이란 이름이 붙었다.
북쪽에는 강씨봉과 국망봉이, 북동쪽에는 경기도 최고봉 화악산(1,468m)과 명지산(1,267m), 동쪽에는 매봉, 서쪽은 관모봉이 운악산의 이웃사촌뻘이다.
가평군에서는 운악산 망경대(望景臺)에서 내려다보는 조망을 ‘운악망경(雲岳望景)’이라 부르며 가평8경 중 제6경으로 삼고 있다.
천지가 열린 망경대에서 망경(望景)을 하노라면 협곡을 박차고 솟은 암봉들과 천길 벼랑의 소나무는 진경산수를 펼쳐놓은 듯 경이롭기 한량없다.
서봉에 이어 동봉에 서면 가평군과 포천시에서 세운 두 개의 정상석이 있다.
산이름도 다르고, 산 높이도 제멋대로로 지형도에 표시된 해발고도(935.5m)와 다르게(937.5m) 새겨져 있다.
아마도 두 지자체에서 자기들의 영역표시쯤으로 생각했나보다.
가평군 하판리에서 눈썹바위가 있는 청룡능선으로 올라 절고개에서 코끼리바위로 원점회귀하고 싶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포기했다.
동봉에선 하산코스를 두고 잠깐 고민하다 절고개 방향으로 발길을 돌려 남근바위 전망대와 코끼리바위를 경유 현등사에 닿았다.
현등사는 신라 법흥왕 때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대장경을 모시고 인도에서 온 승려 마라하미를 위해 지은 절이란다.
절문을 빠져나와 민영환바위와 삼충단, 그리고 무우,백련폭포를 지나며 주차장에 닿았다.
포천으로 올라 가평으로 내려온 셈이다.
산행코스: 운주사입구-홍폭전망대-계단-애기바위-서봉-망경대-동봉-남근석촬영소-코끼리바위-현등사-민영환바위-무우폭포-삼충단(안내소)-하판리주차장
GPX
7.24km를 4시간이 조금 넘게 걸었다.
고도표
9정맥과 한북정맥
산경표에 나오는 한북정맥은 백두대간이 남하하다 북한 원산 부근 분수령 식개산에서 서남 방향으로 한줄기를 내어 한강과 임진강의 수계를 가른다.
이 산줄기는 백암산, 쌍령, 벽력암산을 지나 휴전선을 넘어 군부대들이 점령하고 있는 삼천봉, 적근산 어깨 대성산을 지나 수피령부터 민간인들이
종주할 수 있는 산줄기가 열린다.
광덕산, 백운산, 국망봉, 운악산을 지나 포천에서 의정부를 잇는 축석령을 넘으면 이 땅의 수도 서울로 이어진다.
백두대간의 정기가 도봉, 삼각산(북한산) 솟구치고 노고산 지나 비산비야의 고양 땅을 누비다가, 그래도 아쉬운 듯 견달산, 고봉산을 빗고 한강 하구
장명산에서 그 흐름을 멈춘다. 도상거리 약 236km 산줄기로 그중 종주 가능한 산줄기는 수피령부터 약 160km의 산줄기가 될 것이다.
남한과 북한에 걸쳐있는 유일한 정맥인 셈이다.
운악산 자연휴양림에서 불과 50여m 더 진행하다 운주사입구에서 차를 멈춘다.
50여m 거리의 운주사로 진입해도 되고, 사진의 우측 임도로 바로 들어가도 나중에 만나게 된다.
운주사 절마당을 가로질러 빨간 화살표 방향으로 들어가면...
아까 그 임도와 만나게 된다.
등산로 표식을 따라...
널따란 등로를 따르면...
무지치폭포(면경대,홍폭,무지개폭포) 전망대인 팔각정자를 만난다.
홍폭(虹瀑) 안내판엔 궁예의 전설이 새겨져 있다.
폭포전망대의 이정표
폭포전망대인 팔각정자에 올라...
무지개폭포를 바라보다가...
살짝 당겨 보았지만 워낙 가뭄이 심해 물줄기는 바싹 말라 있었다.
무지개폭포의 안내판.
5분여 진행하자 무지치폭포(150m) 갈림길이 나오고...
다시 10여분을 넘게 된비알을 치고오르면 거대한 바위가 진을 치고있는 약수터 입구에서 때마침 출발하려던 여성회원들이 포즈를 잡는다.
전망대를 만난다.
거대한 바위는 비박꾼들의 쉼터이기도하여...
제법 공간이 넓직하고...
약수도 나오고 정자도 있어 하룻밤 숙박지로도 제격이다.
이 지점의 이정표를 지나...
신선대(암벽 전용등산로) 갈림길 이정표를 지나고...
용굴 갈림길도 지나지만 직접 찾아보진 않았고...
다시 마른 계곡 바위지대를 건너며...
대궐터에 닿는다.
짐금부터 약1,100년 전 태봉국 왕이던 궁예가 왕건에게 쫓겨 운악산으로 들어 왔지만 결국 무지치폭포 위에서 죽음을 맞았단다.
그 곳이 바로 대궐터인 이 지점.
좌측 치마 바위를 올려다 보며...
가파른 목계단을 오른다.
스테인 사다리도 밟고 오르면...
트이는 전망.
안내판.
기막힌 전망대 안내판엔 '사라키바위'라고 적혀있다. 무슨 일본어인가?
한 폭의 수묵화처럼 진경산수(眞景山水)를 펼친 듯한 절경은 가히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고 할 만하다.
사라키바위 아래로 눈길이 따라가다 좌측 운치있는 소나무 아래에서 눈길이 머문다. 사람의 얼굴을 닮은 듯해 옆으로 돌아 가까이 가보았다.
오똑한 콧날과 움푹 꺼진 눈매. 젊은 시절의 미남배우 '아란드롱'을 빼다 박았다.
애기봉 갈림길을 만나서, 우측 사면으로 바로가면 서봉이 300m, 직진으로 애기봉을 올랐다 가면 100m 더 걸린다는 말.
금방 한북정맥을 올라 이정표를 살핀다. 노채고개는 한북정맥의 원통산(566m) 직전의 고개.
애기봉은 애기바위가 있는 봉우리.
이곳 애기바위에서 50년 전 사망사고가 있었네.
왜 애기바위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
맞은 편 전망이 트인 곳으로 비켜서니 전방에 예사롭지 않은 바위가 진을 치고 있다.
살짝 당겨보니 깎아지른 암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천혜의 성벽을 이루고 있다.
전망대에 선 박치용 고문님.
아까 애기봉 0.1km지점에서 애기봉을 오르지 않고 사면을 돌아나오면 만나게 되는 갈림길.
서봉에 올랐더니 벌써 망경대(望景臺)를 다녀온 원로 산객님께서 포천시에서 세운 정상석을 카메라에 담고 계신다.
이 분은 여든이 넘은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산의 속살까지도 샅샅이 살필 정도로 열정이 대단하신 분이다.
서봉의 이정표. 망경대는 서봉에서 서쪽으로 불과 50여 미터 떨어진 도드라진 석대(石臺)로 전망이 아주 좋은 곳이다.
망경대로 갔더니 제법 넓은 석대위에 우리 한마음의 여성회원들이 머물고 있다.
천길 낭떠러지를 받치고 선 망경대 가장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더니 휘어도는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백호능선인감?
떠도는 구름따라 운악(雲岳)에 오른 것은 바로 이런 맛을 맛보기 위함일 것.
망경대를 지나 계속 내려가면 운악사를 지나 운악산자연휴양림을 내려가게 된다. 이정표엔 망경대와 서봉의 거리를 100m라고 표기해 놓았네.
서봉(935.5m)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이미 식사자리를 편 일행들 틈에 끼어 정상주(생탁)를 곁들인 점심을 들었다.
그리고 밟은 운악산 동봉.
포천시에선 운악산 동봉(937.5m)이라 새겨 놓았고...
맞은 편 가평군에서 세운 또다른 정상석엔 운악산 비로봉(毘盧峯 937.5m)이라 새겨져 있다.
포천시와 가평군에서 개구리 운동장만한 정상에서 제 구역에다 각각 세운 듯하다.
동봉 정상의 이정표. 청룡능선은 눈썹바위가 있는 능선을 말하고, 백호능선은 절고개에서 한북정맥을 딛고 올라선 827봉에서 남동으로 뻗은 능선이다.
기어코 원점회귀를 고집한 개금아제를 동봉에서 만나 절고개로 향한다. 싯사도 그른 채 일행들을 몽땅 절고개로 끌고가는 개금아제.
휴양림 방향의 포천시 대원사 갈림길을 지나고...
남근석 촬영장소인 데크전망대에 당도한다. 먼저 도착한 장수씨가 지팡이로 가리키며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다.
장수씨가 가리키는 곳으로 눈을 돌리니 우뚝우뚝한 바위들이 서 있어...
살짝 당겼더니 뭐가 남근석인지 도통 모를 일.
절고개에 닿았다. 직진은 한북정맥과 백호능선을 계속 이어가고, 좌로 90도 꺾어 내려가면 현등사 경유 하판리로 내려간다.
절고개의 이정표.
코끼리바위를 찾노라 827봉으로 잘못 올라가다가 빽하여 현등사로 내려간다.
절고개에서 내리막으로 불과 50여m 지점에서 길다란 코를 늘어뜨린 코끼리바위를 만난다.
코끼리바위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놓칠래야 놓칠 수 없어.
중간의 이정표.
돌길을 지나...
현등사 안내판을 따르면...
이정표도 알뜰히 방향을 지시하고...
흡사 독(甕)처럼 생긴 두 기의 부도(浮屠)를 만난다. 왼쪽에 있는 부도는 연륜이 더 오래돼 보이지만 아무런 글씨가 없어 주인이 누구인지 헤아릴 길이 없고...
다만 오른족에 있는 부도는 보봉당충현지탑(寶峯堂忠鉉之塔)이라 쓰여있다.
보봉당 충현 스님은 현등사에 주석하시며 1984년 극락전(極樂殿)과 보광전(普光殿), 관음전(觀音殿)을 개축한 스님이라고 한다.
현등사로 들어가면서 또 만나는 석등과 부도탑.
팔각형의 지대석 위에 2단의 8각형 기단을 두어 전체적으로 3단의 기단위에 둥근 탑신을 올려놓은 듯한 모습이다.
옥개석은 8모지붕으로 물매가 급하며 처마끝까지 반전없이 그대로 내려간다.
상륜부에는 하단의 돌로 노반과 복발을 만들었으며 보륜과 보주도 역시 하나의 돌이다.
함허당 부도는 문경 봉암사, 황해도 연봉사, 강화도 정수사에도 조성되어 있다.
부도 앞에는 세종의 왕사임을 알리는 작은 석등(1.2m)이 배치되어 있으며, 이러한 예는 고려말~조선초의 부도에서 찾을 수 있다.
전체형태가 평면적인 방형으로 되어있어 마치 조선시대에 유행한 장명등(長明燈)과 비슷하다.
석등몸체에도 글이 새겨져있다고 하나 마멸이 심해 확인할 수는 없다.
'함허당득통(涵虛堂得通)'이라고 음각돼 있다. 함허당(涵虛堂) 득통대사(得通大師 1376~1433)의 부도탑(경기도유형문화재 제199호)이다.
함허대사가 입적할 때가 1433년이고, 이로부터 멀지않은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이므로 이 부도는 조선초기 부동의 양식을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봉암사에서 입멸(入滅)한 뒤 세종대왕의 명을 받고 내려온 효령대군이 사리를 수습하여 탑을 세웠다.
현등사(懸燈寺는 신라 법흥왕 때 인도의 스님 마라하미가 불교를 전하러 신라로 오자 법흥왕이 이곳 운악산에 큰절을 짓도록 하여 세워진 사찰이다.
그 후 황폐해 있던 것을 고려 희종 때 보조국사가 재발견하여 다시 건물을 짓고 ‘현등사’라 이름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들은 조선 순조 30년(1830) 때 암구대사에 의해 새로 지어진 것들이다.
아직 불사가 진행 중인 듯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
정면에 영산보전(靈山寶殿)이 있고, 그 좌측으로 2층 목탑인 만월보전(滿月寶殿)이 있으며, 영산보전 뒤로 올라가면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다.
영산보전(靈山寶殿)
현등사 만월보전(滿月寶殿)은 높이 약 11m의 2층 목탑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1층이다.
만월보전은 약사여래를 주불로 모신 약사전(藥師殿)이다
낙관.
만월보전 당우엔 약사여래(藥師如來)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협시(脇侍:좌우에서 보좌함)로 봉안한다.
영산보전 좌측 뒤로 계단을 따라 오르면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어...
살짝 당겨 보았다. 적멸보궁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곳.
1644년 만들어진 '가평 현등사 범종'은 2012년에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 1793호로 지정되었다.
극락전과...
지장전을 살피며...
3층석탑인 듯, 5층석탑인 듯 알송달송한 탑 앞에 섰다.
이 탑은 보조국사의 3층석탑이라고 전하여지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또한 ‘3층석탑’이지만 원래는 5층석탑이었고, 현재는 2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없어진 상태라고도 하여 층수구분이 애매하다.
탑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基壇) 역시 2층이라는 의견이 있으나 위층에 해당하는 부분의 덮개돌이 지붕돌모양을 하고 있어서 이 부분은 기단보다는
탑신부(塔身部)의 1층에 더 적격일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 의견이 더욱 타당할 듯 하다.
그 옆에는 수백 살은 좋이 먹었을 향나무가 수백 년을 그렇게 지키고 섰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3호로 높이 3.7m인 고려시대의 석탑.
고려시대의 자유로운 조각기법을 보여주듯 특이한 모습으로 기단은 마치 사리탑에서 보던 모습과 거의 비슷하여 상·중·하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운데 돌에는 면마다 둥근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고, 이를 사이에 둔 위아래의 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겨넣었다.
탑신부의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힘차게 들려 있고, 밑면의 받침은 1·2층은 4단, 3층은 3단을 두어 변화를 주었다.
꼭대기에는 꽃과 구슬이 새겨진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안정감이 드는 작품으로, 특이한 모습의 기단부, 지붕돌의 부드러운 처마곡선 등 각 부분의 양식들이 고려시대 후기세 세운 것임을 잘 보여준다
현등사3층석탑 안내판.
현등사는 전통사찰 제46호 봉선사(奉先寺) 말사로서 향토유적 제4호이다.
보합태화루와 보광전을 돌아보며...
편액을 살펴보고...
낙관도 확인한다.
그리고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7호인 '현등사삼층지진탑(懸燈寺三層地鎭塔)'을 살펴본다.
고려 희종 때 승려 보조국사가 이 주위를 지나다가 석등에서 불빛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수백년 동안 폐허로 있었던 이 절터에 새로 절을 짓게 되었다.
이 때 터의 기를 진정시키고자 이 탑을 세워 두었다 한다.
이로 인해 ‘지진탑(地鎭塔)’이라는 이름이 생겨났으며, 승려의 이름을 따서 ‘보조국사탑’이라 부르기도 한다.
탑은 원래 3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기단(基壇)의 일부와 탑신(塔身)의 1층 몸돌이 없어져 본래의 모습을 잃고 있다.
바닥돌과 기단의 맨윗돌은 윗면에 경사가 흐르며 네 모서리 선이 뚜렷하다.
지붕돌과 몸돌이 교대로 올려진 탑신부는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받침을 두었는데 1·2층은 4단, 3층은 3단으로 불규칙하며,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서서히 위로 들리면서 느린 곡선을 그리고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1966∼75년 현등사 주지 소임을 맡다 환속한 전 주지 명의로 등록돼 있다가 현등사 소유로 바로 잡은 탑이다.
안내판
돌계단을 밟고 내려서면서 돌아보니...
운악산방(雲岳山房)이 보인다. 운악산방은 다실(茶室).
돌계단을 내려오니 이 계단이 '108번뇌'의 108계단이란다.
불이문에서 내려다보니 한 무리의 산객들이 냇가에서 탁족을 즐기고 있다.
불이문(不二門)을 나서서...
절길을 따라 조금 걸어 내려가니 좌측으로 비스듬한 각도의 너럭바위 민영환 바위가 있다.
음각된 글씨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바위 전체를 줌으로 당겨 보았더니...
너럭바위 상단에 글체가 보여 좌로 돌아 올라가 보았다.
구한말 궁내부대신이었던 민영환 선생이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이 바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걱정하던 곳으로 1906년 나세환 외 12인의 의지로
민영환(閔泳煥)이라는 글씨를 암각(巖刻)하였다.
이후 이 바위는 민영환 바위로 불리고 있다.
민영환 암각서(閔泳煥 岩刻書)
민영환 암각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다.
안내판.
운악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을 만나면...
무우폭포 안내판을 만나...
아래 계곡을 살펴 보지만 가뭄이 하도 심해 폭포와 소는 그저 졸졸졸 흐르는 작은 계곡처럼 보인다.
무우폭포(舞雩瀑布)는 안개처럼 뿌옇게 내리는 비를 뜻하기도 하고, 기우제를 지내는 제단을 말하기도 한다. * '무'는 춤출 무(舞),'우'는 기우제 우(雩).
백년폭포-
물은 바다가 집이어서 산을 내려가고
마음은 사랑이 집이어서 그대 향해 흐르네
산을 내려간 물은 이 골물 저 골물 만나
이정표 없이도 유장한 강물 되어 바다로 가고
사랑 또한 그와 같아서 이 맘 저 맘
다 모은 한맘으로만 그대에게 가 닿으리
물은 모든 웅덩이를 채운 후에야 흐름을
산에 와서야 아네, 폭포에 와서야 듣네
<이 종 성>
백호능선 갈림길을 만나고...
곧이어 청룡능선 눈썹바위 오름길도 살펴본다.
이 지점의 이정표.
현등사 일주문을 나서면서 편액을 살펴본다.
한북제일지장극락도장((漢北第一地藏極樂道場).
절문을 벗어나 돌아보면 운악산 현등사 한글체 편액 운허(耘虛) 스님(1892~1980)의 글씨란다.
삼충단(三忠壇) 비석을 차례로...
좌측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1833~1906)'선생은 을미의병운동의 선봉장으로 조약체결에 다시 의병을 봉기하여 왜구와 싸웠으며,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의 상소를 올렸으나 체포되어 대마도로 이송 되자, 단식으로 항거하다가 끝내 순국하였다.
중앙의 '산재 조병세(山齋 趙秉世, 1827~1905)'선생은 당시 의정대신(議政大臣)으로 경기도 가평에 머물다가 을사조약의 모효와 조약에 서명한 오적을
처단하고 국권을 회복해야는 상소를 올렸으나 왜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결고국중사민서(決告國中士民書)'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우측 '계정 민영환(桂庭 閔泳煥, 1861~1905)'선생은 당시 시종무관(侍從武官)으로 조약을 듣고 대한문 앞에서 조병세선생과 함께 석고대죄하며
국권회복의 상소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각국의 공사에 자신의 유서를 보내고 자결을 하였다.
삼충단(三忠壇) 기념비를 누인 모습이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체결로 자결을 택한 충신 3인(조병세, 최익현, 민영환)의 충절을 기리는 제단이다.
1910년에 만든 제단이지만 일제강점기에 없어진 것을 1989년 복원하였고, 2005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운악산 표석에 새겨진 詩.
운악산(雲岳山) 만경대(萬景臺)는 금강산(金剛山)을 노래하고
현등사(懸燈寺) 범종(梵鐘)소리 솔바람에 날리는데
백년소(百年沼) 무우폭포(舞雩瀑布)에 푸른 안개 오르네
운악산 현등사 안내판.
운악산 종합 안내도.
한때 매표소이던 곳은 개점 휴업상태로 남아있다.
조종천(朝宗川) 냇가에 내려서자 다리(운악교)위에 아치형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저 밑 주차장에 대형 버스가 주차돼 있는 게 보인다.
조종천의 운악교.
조종천(朝宗川)을 따라 가평군 서남쪽 대보리로 들어가는 국도변엔 조종암(朝宗巖)이 있다.
여기에는 명(明)나라 의종(毅宗)의 '사무사(思無邪)'어필이 새겨져 있고, 그뒤 선조의 친필인 '만절필동 재조번방(萬折必東 再造藩邦)'과 효종의 사문인
'일모도원 지통재심(日暮途遠 至痛在心)'이라는 글이 송시열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1824년 이항로가 유람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강물은 대부분 서쪽으로 흐르는데, 가평의 물은 동으로 흐르기 때문에 조종천이라 일컬었고, 조종천은 구비돌아 청평댐으로 흘러든다.
그리고 시동을 걸고 대기 중인 우리 버스로 올랐다. 우선 수도권을 빨리 벗어나야 하므로 뒷풀이는 휴게소에서 하기로 하였다.
이동 중 청평댐을 지난다.
운악산 정상석 뒷면에 적혀있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의 싯귀를 읇조린다.
운악산 깊은 계곡에(雲岳山深洞)
현등사 처음으로 지었네(懸燈寺始營)
노는 사람들 성(姓)을 말하지 않는데(遊人不道姓)
괴이한 새는 스스로 이름을 부르네(怪鳥自呼名)
용솟음 치는 흰기운 폭포수 장대하고(沸白天紳壯)
푸른 산 빗긴 섬에 지축이 기운듯(橫靑地軸傾)
은근히 호계에서 이별하니(慇懃虎溪別)
석양 속에 저문 산 밝아오네(西日晩山明).
<백사 이항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