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실족사’로 볼 수 없는 10가지 의문점
장준하 평전/[1장] 풀리지 않는 의문사 반생의 위업 2008/10/04 08:00 김삼웅 필자는 사고 뒤 몇 차례 현장을 살펴보고 ‘실족사’에 강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하여, 이에 대한 글을 몇 곳에 썼다. 또 민주당에서 1993년 9월 <장준하선생 사인규명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할 때 조사위원들과 함께 현장에 가서 조사활동을 벌였다. 결론은 적어도 현장에서 실족사한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나는 그 의문점을 10가지로 정리했다.
장준하 개인의 생전의 업적도 업적이지만 암살사건과 같은 반문명적인 범죄행위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이 사건은 철저하게 재조사하여 진상이 규명되어야 한다. 먼저 사고 당시 당국에서 실족사로 단정한 데 대한 의문점부터 차례로 검토하여 보기로 한다.
첫째, 장준하가 추락했다는 사고지점은 경사 75도, 높이 14m 70cm의 가파른 암벽으로 젊은 등산가라도 마음대로 오르내리지 못하는 험준한 곳이다. 등산 코스가 아닐뿐더러 사람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는 낭떠러지이다. 아무런 등산장비도 갖추지 않은 장준하가 이런 곳을 하산코스로 택했다는 것 자체가 합리적이지 못하다. 저도 여러 차례 현장을 살펴보았지만 특히 암벽의 상층부에는 물이 배어 이끼가 끼어 있어 대단히 미끄럽게 보이는데,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 그런 곳을 택해 하산하고자 했다는 것은 상식 이하의 주장인 것이다.
둘째, 진짜로 이런 암벽에서 떨어졌다면 온몸이 크게 다쳤어야 하는데 전혀 외상이 없고, 다만 오른쪽 귀 뒤쪽에 약간의 함몰 부분만 발견된 점이다. 14m 높이의 암벽에서는 어지간한 물체를 던져도 산산조각이 날 터인데, 하물며 사람이 추락했는데도 멀쩡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필자의 확인으로도 추락했다는 바닥에는 뽀족한 돌이 바닥을 이루고 있어 실제로 돌맹이를 떨어뜨려보니 박살이 나는, 그런 험준한 곳이었다.
셋째, 장준하는 당일 커피 보온병을 갖고 등산하였는데 시신 옆에서 발견된 보온병은 깨지지 않은 채 말짱했다는 점이다. 14m의 높이는커녕 4m 높이에서 떨어뜨려도 보온병은 산산조각이 날 터인데 전혀 망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런 위험한 암벽을 굴러 떨어졌는 데도 옷은 단 한군데도 찢겨진 곳이 없었다.
넷째, 사고현장에서 추락을 목격했다는 유일한 증인인 김용환(金龍煥)의 정체에 대해서이다.
김씨는 장준하의 67년 6ㆍ8 국회의원 선거 때 선거운동원으로 잠시 관계를 맺은 바 있었을 뿐, 그 뒤 소식이 절연되었다가 사고 당일 갑작스레 모습을 나타낸 사람이다.
사고직후 김씨가 장준하의 시계를 차고 있었으며, 사고소식을 일행들에게 전한 사람도 그 사람이며, 경찰이 아닌 군부대에 일행인 김희로를 시켜 신고토록 한 것도 김씨다. 왜 장선생의 시계를 차고 있었느냐는 물음에 김용환은 자기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른 사람이 훔쳐갈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라고 궁색한 변명을 했다.
경험칙상, 사람이, 그것도 자신이 한 때 모셨던 분이 추락사를 당하였는데 그런 경황중에 도난을 염려해서 시계를 거두어 자신이 차고 있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가 어려운 대목이다. 더구나 이 의문의 사나이는 사건 후 한 때 행방이 묘연해져 인적사항이 전혀 밝혀지지 않아서 더욱 의혹을 사게 되었다.
당시 41세의 중학교사로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38번지에 거주하는 것처럼 경찰조사에서 진술했지만, 나중에 고인의 가족이나 친지, 언론기관 등에서 추적한 바에 따르면 그 주소에 그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전혀 없었다. 당시 41세의 김용환이란 인물은 전국 중학교 교사명단에도 없었음이 드러났다. 그는 사건 뒤 당진에서 고등학교 강사를 지냈다.
그렇다면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김용환씨의 정체가 의문투성임을 알 수 있다. 검찰조사 때 김씨는 사고 당일 등산길 버스안에서 장준하를 우연히 만난 것처럼 진술하고 있지만, 당시 호림(好林)산악회 김용덕 회장은 김씨가 사고 이틀 전인 8월 15일 전화를 걸어와 장준하가 약사봉 계곡의 등반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다섯째, 검찰이나 경찰이 유일한 목격자인 김용환을 대동하고 현장검증을 실시하지 않은 점이다. 가벼운 절도 사건만 발생해도 현장부터 살피는 것이 수사의 원칙인데, 사회 저명인사가 등산길에 의문의 죽음을 당해 많은 국민이 실족사에 의문을 품고 있는데도, 왜 현장검증을 실시하지 않았을까?
여섯째, 장준하의 시신을 염한 사람은 10년 경력을 가진 그 방면의 전문가인데, 결코 추락사한 것이 아니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장준하의 어깨 안쪽에 약간의 피멍이 보였는데, 이는 추락으로 생길 수 없으며, 어깨를 붙들려 억지로 끌려간 듯 하다는 설명이었다.
일곱째, 장준하의 시신을 검시한 사람은 의정부에서 개업한 심구복씨였는데, 부검 결과 장씨는 등산으로 다부진 체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결정적인 사인은 귀 뒤쪽의 후두부 함몰로 볼 수 있고, 추락사라는데 이상하게도 전신에 골절상이 하나도 없으며, 오른쪽 머리 귀 바로 뒷부분에 가로 2cm 세로 2cm 정도의 푹 꺼져들어간 상처는 쇠나 돌에 의한 충돌로 생겨난 상처이기 쉽다는 설명이었다.
여덟째, 김용환은 가족들이나 검찰조사에서 장준하가 소나무를 잡았다가 놓쳐서 추락사했다고 사고상황을 설명하고, 추락한 후 “소나무가 휘어진 상태로 있었다”고 했는데, 당시 그 소나무는 높이가 4~5m 정도여서 장씨가 설혹 잡았었더라도 밑등걸 부분일 터인데 그런 소나무가 결코 휘어질 수 없을 것이며, 휘어졌다 치더라도 곧 정상으로 돌아설 것인데 휘어진 상태였다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아홉째, 사고 당일 장준하의 아들에게 오후 1시 쯤에 신원불명의 남자로부터 “장선생이 산에 올라갔다가 떨어졌으니, 서울에서 사람들이 많이 와야 모셔갈 수 있을 것”이라는 전화를 건 사람의 정체이다. 등산 일행인 김희로의 연락을 받고 인근 군부대의 유지현 중위가 위생병 1명을 대동하고 사고현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 30분 경이며, 역시 일행인 김응식의 신고로 이동파출소의 이수근 순경이 현장에 도착한 것은 6시 경이었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누군가가 하산하여 장준하의 가족에게 전화를 걸었거나, 김희로ㆍ김응식 가운데 하나가 군ㆍ경에 신고할 때 전화를 한 것이 된다. 깊은 산중에서 갑자기 당한 사고로 일행이 대부분 겁에 질려서 단체행동을 하고, 하산도 단체로 한 관계로 개별적으로 하산하여 전화를 했을 까닭이 없다. 또 앞서 두 사람 역시 나중에 장준하 가족에게 전화로 사고소식을 알린 사실이 없음을 밝혔다.
마지막 의문점은, 사고 직후 김용환이 말한 ‘군인 2명’의 존재에 대해서이다. 등산 일행들의 설명에 따르면, 사고 당일 현장 주변에 도착한 시간이 낮 11시 반~12시 경이라 한다. 일행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사이 장준하 혼자 약사봉 계곡을 향해 올라갔다. 이때 김용환이 장준하가 없어진 것을 알고 방향을 물어 곧 뒤쫓아 갔다는 것.
그리고 역시 사고 후 김용환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약 10분쯤 후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데 군인 2명이 텐트를 치고 있어 장선생의 행방을 묻자 텐트 속에서 장씨가 나오더라는 것이다. 그들은 군인들과 함께 커피를 마신 후 장준하의 배낭을 자기가 메고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는 것이다.
사고 이후 아직까지 이들 ‘군인 2명’에 대한 조사나 참고인 진술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김용환 진술의 사실 여부를 가리기 어렵다. 사고신고를 경찰서 아닌 군부대에 먼저 한 것과 더불어 군인 2명의 존재, 실재했다면 이들의 정체와 역할이 밝혀져야만 진상규명에 도움이 될 것이다. (주석 6)
주석
6) 졸고, '의문의 장준하 ‘의문사’', <월간 정론(正論)>, 1989년 1월호, 김삼웅 편, <민족주의자의 죽음>, 259~261쪽, 학민사, 1993.
선생을 따르던 동지들이 맨손으로 돌비를 세우고 태극기 앞에서 선생의 뜻을 이어가기로 결의하다.
장준하 개인의 생전의 업적도 업적이지만 암살사건과 같은 반문명적인 범죄행위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이 사건은 철저하게 재조사하여 진상이 규명되어야 한다. 먼저 사고 당시 당국에서 실족사로 단정한 데 대한 의문점부터 차례로 검토하여 보기로 한다.
첫째, 장준하가 추락했다는 사고지점은 경사 75도, 높이 14m 70cm의 가파른 암벽으로 젊은 등산가라도 마음대로 오르내리지 못하는 험준한 곳이다. 등산 코스가 아닐뿐더러 사람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는 낭떠러지이다. 아무런 등산장비도 갖추지 않은 장준하가 이런 곳을 하산코스로 택했다는 것 자체가 합리적이지 못하다. 저도 여러 차례 현장을 살펴보았지만 특히 암벽의 상층부에는 물이 배어 이끼가 끼어 있어 대단히 미끄럽게 보이는데,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 그런 곳을 택해 하산하고자 했다는 것은 상식 이하의 주장인 것이다.
둘째, 진짜로 이런 암벽에서 떨어졌다면 온몸이 크게 다쳤어야 하는데 전혀 외상이 없고, 다만 오른쪽 귀 뒤쪽에 약간의 함몰 부분만 발견된 점이다. 14m 높이의 암벽에서는 어지간한 물체를 던져도 산산조각이 날 터인데, 하물며 사람이 추락했는데도 멀쩡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필자의 확인으로도 추락했다는 바닥에는 뽀족한 돌이 바닥을 이루고 있어 실제로 돌맹이를 떨어뜨려보니 박살이 나는, 그런 험준한 곳이었다.
셋째, 장준하는 당일 커피 보온병을 갖고 등산하였는데 시신 옆에서 발견된 보온병은 깨지지 않은 채 말짱했다는 점이다. 14m의 높이는커녕 4m 높이에서 떨어뜨려도 보온병은 산산조각이 날 터인데 전혀 망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런 위험한 암벽을 굴러 떨어졌는 데도 옷은 단 한군데도 찢겨진 곳이 없었다.
넷째, 사고현장에서 추락을 목격했다는 유일한 증인인 김용환(金龍煥)의 정체에 대해서이다.
김씨는 장준하의 67년 6ㆍ8 국회의원 선거 때 선거운동원으로 잠시 관계를 맺은 바 있었을 뿐, 그 뒤 소식이 절연되었다가 사고 당일 갑작스레 모습을 나타낸 사람이다.
사고직후 김씨가 장준하의 시계를 차고 있었으며, 사고소식을 일행들에게 전한 사람도 그 사람이며, 경찰이 아닌 군부대에 일행인 김희로를 시켜 신고토록 한 것도 김씨다. 왜 장선생의 시계를 차고 있었느냐는 물음에 김용환은 자기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른 사람이 훔쳐갈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라고 궁색한 변명을 했다.
경험칙상, 사람이, 그것도 자신이 한 때 모셨던 분이 추락사를 당하였는데 그런 경황중에 도난을 염려해서 시계를 거두어 자신이 차고 있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가 어려운 대목이다. 더구나 이 의문의 사나이는 사건 후 한 때 행방이 묘연해져 인적사항이 전혀 밝혀지지 않아서 더욱 의혹을 사게 되었다.
당시 41세의 중학교사로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38번지에 거주하는 것처럼 경찰조사에서 진술했지만, 나중에 고인의 가족이나 친지, 언론기관 등에서 추적한 바에 따르면 그 주소에 그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전혀 없었다. 당시 41세의 김용환이란 인물은 전국 중학교 교사명단에도 없었음이 드러났다. 그는 사건 뒤 당진에서 고등학교 강사를 지냈다.
그렇다면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김용환씨의 정체가 의문투성임을 알 수 있다. 검찰조사 때 김씨는 사고 당일 등산길 버스안에서 장준하를 우연히 만난 것처럼 진술하고 있지만, 당시 호림(好林)산악회 김용덕 회장은 김씨가 사고 이틀 전인 8월 15일 전화를 걸어와 장준하가 약사봉 계곡의 등반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다섯째, 검찰이나 경찰이 유일한 목격자인 김용환을 대동하고 현장검증을 실시하지 않은 점이다. 가벼운 절도 사건만 발생해도 현장부터 살피는 것이 수사의 원칙인데, 사회 저명인사가 등산길에 의문의 죽음을 당해 많은 국민이 실족사에 의문을 품고 있는데도, 왜 현장검증을 실시하지 않았을까?
여섯째, 장준하의 시신을 염한 사람은 10년 경력을 가진 그 방면의 전문가인데, 결코 추락사한 것이 아니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장준하의 어깨 안쪽에 약간의 피멍이 보였는데, 이는 추락으로 생길 수 없으며, 어깨를 붙들려 억지로 끌려간 듯 하다는 설명이었다.
일곱째, 장준하의 시신을 검시한 사람은 의정부에서 개업한 심구복씨였는데, 부검 결과 장씨는 등산으로 다부진 체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결정적인 사인은 귀 뒤쪽의 후두부 함몰로 볼 수 있고, 추락사라는데 이상하게도 전신에 골절상이 하나도 없으며, 오른쪽 머리 귀 바로 뒷부분에 가로 2cm 세로 2cm 정도의 푹 꺼져들어간 상처는 쇠나 돌에 의한 충돌로 생겨난 상처이기 쉽다는 설명이었다.
여덟째, 김용환은 가족들이나 검찰조사에서 장준하가 소나무를 잡았다가 놓쳐서 추락사했다고 사고상황을 설명하고, 추락한 후 “소나무가 휘어진 상태로 있었다”고 했는데, 당시 그 소나무는 높이가 4~5m 정도여서 장씨가 설혹 잡았었더라도 밑등걸 부분일 터인데 그런 소나무가 결코 휘어질 수 없을 것이며, 휘어졌다 치더라도 곧 정상으로 돌아설 것인데 휘어진 상태였다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아홉째, 사고 당일 장준하의 아들에게 오후 1시 쯤에 신원불명의 남자로부터 “장선생이 산에 올라갔다가 떨어졌으니, 서울에서 사람들이 많이 와야 모셔갈 수 있을 것”이라는 전화를 건 사람의 정체이다. 등산 일행인 김희로의 연락을 받고 인근 군부대의 유지현 중위가 위생병 1명을 대동하고 사고현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 30분 경이며, 역시 일행인 김응식의 신고로 이동파출소의 이수근 순경이 현장에 도착한 것은 6시 경이었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누군가가 하산하여 장준하의 가족에게 전화를 걸었거나, 김희로ㆍ김응식 가운데 하나가 군ㆍ경에 신고할 때 전화를 한 것이 된다. 깊은 산중에서 갑자기 당한 사고로 일행이 대부분 겁에 질려서 단체행동을 하고, 하산도 단체로 한 관계로 개별적으로 하산하여 전화를 했을 까닭이 없다. 또 앞서 두 사람 역시 나중에 장준하 가족에게 전화로 사고소식을 알린 사실이 없음을 밝혔다.
마지막 의문점은, 사고 직후 김용환이 말한 ‘군인 2명’의 존재에 대해서이다. 등산 일행들의 설명에 따르면, 사고 당일 현장 주변에 도착한 시간이 낮 11시 반~12시 경이라 한다. 일행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사이 장준하 혼자 약사봉 계곡을 향해 올라갔다. 이때 김용환이 장준하가 없어진 것을 알고 방향을 물어 곧 뒤쫓아 갔다는 것.
그리고 역시 사고 후 김용환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약 10분쯤 후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데 군인 2명이 텐트를 치고 있어 장선생의 행방을 묻자 텐트 속에서 장씨가 나오더라는 것이다. 그들은 군인들과 함께 커피를 마신 후 장준하의 배낭을 자기가 메고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는 것이다.
사고 이후 아직까지 이들 ‘군인 2명’에 대한 조사나 참고인 진술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김용환 진술의 사실 여부를 가리기 어렵다. 사고신고를 경찰서 아닌 군부대에 먼저 한 것과 더불어 군인 2명의 존재, 실재했다면 이들의 정체와 역할이 밝혀져야만 진상규명에 도움이 될 것이다. (주석 6)
주석
6) 졸고, '의문의 장준하 ‘의문사’', <월간 정론(正論)>, 1989년 1월호, 김삼웅 편, <민족주의자의 죽음>, 259~261쪽, 학민사,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