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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을까요?
오늘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13)
‘자유를 위하여’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자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자유’ 하면, 마음대로 다 할 수 있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하든 그건 내 자유다’라고 말합니다.
사전에서도 자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
우리가 사용하는 자유라는 말의 의미가 이러하기에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도 그런 의미로 받아드리면 안됩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주님께서 주신 자유를 잘못 이해하여 ‘오해’하기도 했고, 그 자유를 잘못 사용해서 ‘오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유를 오해하므로 율법의 종이 되고자 하므로 ‘종의 멍에를 메지 마라’고 했습니다. 자유를 빼앗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도들이 자유를 떠나서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자유를 오해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으니 자유를 잘못 사용해서는 안될 것을 권면합니다.
은혜로 주신 성도의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며 자유해야 할까요?
1. 성도의 자유는 육체의 탐익을 위한 자유가 아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13)
그리스도의 은혜로 입은 자유를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육체는 우리 인간의 타락한 본성, 뒤틀린 아집을 말합니다.
그리고 ‘기회’라는 단어는 군사적인 용어입니다. 전투를 할 때에 유리한 진지를 확보하고서 호시탐탐 적의 상황을 살피다가 유리한 공격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두고 기회라고 했습니다. 복음으로 얻게 된 자유를 타락한 본성에 따라서 자기 탐익을 위해 공격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주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죄의 본성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이 통제되지 않으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서로 싸우다가 결국 같이 망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성도들이 마치 야생동물처럼 뽀쪽한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물어뜯으려고 말과 행동이 통제되지 않은 모습을 연상해 보십시오. 성도가 육체가 원하는 대로 자유를 사용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는 동물의 왕국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야생 동물원이 아닙니다. 주신 자유를 잘못 사용하면 함께 망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의 “조심하라”는 명령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만약에 어떤 두 사람이 서로 의견이 맞지를 않아 다투었다고 하십시다. 누가 먼저 손을 내밀면 되겠습니까? 한 살이라도 많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아래 사람입니까? 아니면 잘못이 많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잘못이 없는 사람입니까?
이도 저도 아닙니다. 성숙한 사람이 화해의 손을 내미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다 성숙하지 못할 경우에 어떻게 합니까? 영원히 머시기해서 계속 못본척하며 살아야 합니까? 그때에도 자신의 성숙치 못함을 인정하고서 좀더 성숙해지고 싶은 사람이 손을 내밀면 됩니다. 그 사람은 성숙해 지고, 결국은 웃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현대인의 성경 번역본에서는13절을 번역하기를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고 여러분의 자유를 남용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존 스투어트 밀이라는 철학자는 ‘자유론’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여기서 개인의 자유를 강하게 옹호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는 한, 개인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대다수의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는 소수의 자유를 무조건 제한되어도 될까요? 다른 말로 “공익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는 제한될 수 있는가?”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것 같습니다.
가령 지난 코로나 팬데믹 사태일 때에 이동의 자유가 제한되었습니다. 그리고 확진자의 이동 동선과 사생활이 공개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공익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나 인권이 유린당하는 것에 대하여서 국가 공권력 행사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심사숙고를 해야 할 어려운 과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는 자에게 주어진 자유에 대하여 분명한 행동 규범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
많은 교회에서 성도간의 교통과 정보 전달을 위해서 홈페이지를 운영했습니다. 교회를 알리고, 소통하는 데에 유익하기도 했지만 많은 폐해도 있었습니다. 교인들이 자유롭게 자기 의견을 밝히고 표현하다 보니 교회 공동체에 문제가 되고, 상처를 입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기는 자기 소견대로 자유롭게 표현해서 정의롭고, 속이 시원한 주장이라지만 다른 사람과 교회 공동체에 시험거리가 되고 상처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유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덕이 되는지, 타인과 공동체에 유익이 되는지를 생각하는 절제된 자유로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24에서 권면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24)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성숙하지 못한 내 자아를 다스리지 못해서, 내 욕망을 컨토롤하지 못해서, 나를 십자가에 못 박지 못하므로 비툴어진 나의 본성에 기회를 주었던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내 가까운 사람, 소중한 사람들이 얼마나 상처를 받고 힘들어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제는 갈 2:20 말씀을 이루어가야 하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성도의 자유는 사랑의 섬김이다.
성도에게 주어진 자유는 타락한 본성에 따라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는 자유가 아닙니다. 주변 사람에 대한 배려 없는 자기 만족만 추구하는 자유도 아닙니다. 이웃을 착취해도 되는 자유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13 후반절).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모름지기 사랑으로 서로가 다른 사람의 종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Neill이라는 신학자는 이 구절을 두고 설명했습니다.
“많은 종을 거느린 한 명의 주인이 되지 말고 도리어 많은 주인을 모시는 한 명의 가난한 종이 되라”
주님께서 주신 자유를 얻었는데 그 자유로 다시 종이 되라고 합니다. 자유를 가지고 있는데 다시 종이 되는 것, 어떻게 가능합니까?
“사랑으로”됩니다. 바울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역설적인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서로 종 노릇하는 삶은 사랑으로 실천되기 때문에 모순이 아니라 더 높은 삶의 기준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진짜 자유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자유를 가진 자로 사는 것은 역설적으로 종이 되어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자유는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역설적인 진리는 주님께서 먼저 보여주셨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고, 종이 되고 속죄양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말이 되지 않는 것을 말이 되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마음에 부어져서 그 사랑이 내 마음에 가득 넘쳐나면 나도 그 사랑으로 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서로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나의 이기심을 내려놓고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고, 오직 사랑으로, 우리는 나의 교만한 마음을 꺾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이 애를 먹이고 속을 썩여도 사랑하면 자녀를 위해 희생합니다. 남편을 사랑하면, 아내를 사랑하면 마음을 비우고 섬길 수 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면, 성도를 사랑하면 위해서 겸손하게 종노릇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나를 사랑하사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신 주님을 사랑하면 나에게 있는 자유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사랑이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합니다. 사랑은 우리를 괴롭히고 노엽게 하는 자들을 향해 오래 참는 것입니다. 사랑은 부드러운 마음을 품고 선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미쁘며, 신뢰할만 하며 믿음직하고 신실합니다.
그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이끄셨고, 그 사랑으로 오래 참으시고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놓으셨습니다. 결국은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키고, 은혜로 자유하는 자가 되어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게 주신 자유를 사용할 때에 어떻게 될까요?
3. 성도의 자유는 율법을 이루어 갑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14)
무슨 말씀입니까? 사도 바울은 성도가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면 온 율법을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은혜로 누리는 자유는 율법이 필요없다 거나 율법을 폐해도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누리는 자유로 서로 사랑하면 모든 율법을 이루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마22:37-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 두 계명이 십계명의 요약이요 모든 율법의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게 된 믿음을 떠나서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거짓 믿음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종의 멍에를 메지 마라’ 율법의 멍에에 메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율법의 멍에에 메인 사람은 신앙생활이나 교회생활이 재미가 없습니다. 율법에 메이면 어떻게 됩니까?
“야 또 일요일이야, 교회에 가야돼”
“내가 주일날에 교회에 안가면 저주를 받게 되고,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거야. 그래도 목사님 눈 도장이라도 받아야지”
재미가 없습니다. 예배 시간 전에 와서 기도하며 찬양하면서 예배를 준비하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그저 체면과 형식에 메입니다. 감사가 없습니다.
반면에 십자가의 구속과 그 은혜를 깨달으면 달라집니다.
“날 구원해 주신 그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까?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실까? 내가 어떻게 해야 내 마음과 정성을 전할 수 있을까”
감사가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고백이 나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실천됩니다. 율법을 이루어가는 자가 됩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해치고자 하겠습니까? 어찌 남의 배후자를 넘보겠습니까? 도적질하고 거짓 증거를 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자연스럽게 계명을 지키고 율법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침부터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실 때의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 적대적이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끼어듭니다. 그리고는 한 여인을 예수님 앞으로 끌고 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바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뭐라고 쓰십니다. 그런 후에 몸을 일으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낍니다. 그래서 어른부터 시작해서 젊은이까지 하나, 둘 씩 그 자리를 떠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그 여인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주변을 둘러보시고 여자에게 물으십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주여 없나이다”
이 여인은 자신의 죄로 인해 죽을 수도 있었던 위급하고 비참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은혜로 인해 건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죄로 묶여 있던 그녀에게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이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그리고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가서 무엇이든 네가 원하는 대로 하여라. 너는 이제 자유로우니 인생을 최대한 즐기도록 해라.”
예수님의 자비와 은혜가 가득한 이야기가 이렇게 마무리 되었나요?
죄를 범한 여인이 용서를 받고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 자기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
예수님은 그녀가 이전과 다른 삶을 살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자유를 오용하지 않도록 육체의 기회로 사용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주님이 부르신 목적에 맞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자유는 육체의 기회가 되어서 안되며 오직 사랑으로 섬기고, 그래서 율법을 완성하는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자유 사용법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사용하라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고 주님께서 먼저 자유를 사용하는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주님은 자신의 모든 권세를 내려놓으셨고 그 모든 능력을 육체의 기회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를 낮추어 사랑으로 종이 되셨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께서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셨고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기까지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면서 그 자유로 섬기는 자가 되라고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은 그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나의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이 어떠한지 점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자유를 부르심에 따라 오직 사랑으로 섬기는데 사용하시기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의 사랑 비췰 때에 293 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