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천하’150편을 끝마쳤고 맨 먼저 정태우(1982)'인종' 편 후기를 씁니다.
정태우가 벌써42살이 되었네요. 중대 학사를 거쳐 예술대학원 공연영상과
석사과정을 마쳤으니 연기자 프로필로는 완벽합니다. 안재모, 이민우와
더불어 서른이 되기 이전에 사극 만랩 찍은 3인방 중 한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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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이 되면서 손님이 조금 는 줄 알았고만 주말이라서 다들 야외로 나갔나
봐요. 오전 내내 당근 2개(바벨25000, 한국사10.000) 하고서 드라마에
몰빵했습니다. 12대 '인종'과 16대 '인조'반정을 여지껏 헤깔렸더라고요.
인종은 중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장경왕후 윤 씨인데 인종을 낳고 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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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으로 7일 만에 사망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문정왕후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게 되었으나, 문정왕후의 성격과 기질이 고약하여 인종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며 목숨이 위태로운 시달림을 받았다고 전합니다.
인종 비는 박용의 딸 인성왕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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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궐 밖의 재상가에서 자라다가 1520년 남
곤의 강력한 주청에 따라 관례보다 빠른 여섯 살에 세자에 책봉되어 궁으로
들어왔습니다. 세자 시절 반듯한 모습으로 신하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나,
야심이 큰 문정왕후와 정 난정 등에게 둘러싸여 불안한 세자 시절을 보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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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어요. 1520년(중종, 15) 세자에 책봉되고1544년 30세에 즉위하였으니
세자 생활만 25을 한 셈입니다. 그런 환경 때문인지 기이한 사건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세자가 먹다 남긴 음식을 아랫사람들이 먹었다가 식중독을
일으킨 게 두 번이며, ‘작서의 변’과 ‘목패 사건’이 터졌고, 그 여파로 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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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과 경빈 박 씨가 사약을 받았습니다. 두 사건을 계기로 김 안로가 집권
하자 세자의 지위가 얼마간은 안정될 수 있었으나 1534년 문정왕후가
아들을 낳자 위기감을 느낀 김 안로가 중전 폐위를 모의하다 발각되어 사사
되자 세자의 입지가 다시 불안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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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천성이 어질고 유학의 가르침에 충실한 사람이어서 복성군의 어린
딸과 두 여동생을 사면해달라는 애절한 상소를 올렸는가 하면, 동궁에 불이
났을 때는 남을 원망하기보다 자신을 책하는 글을 지었습니다. 호시탐탐 자신
의 자리를 노리는 계모 문정왕후를 지극한 효성으로 대했고, 나이 어린 이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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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경원대군을 우애로 대했습니다. 1544년 왕위에 올랐으나 중종의 줄 곡이
끝날 때 까지 5개월 동안 거의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아 급격히 쇠약해지고
병이 들었는데 이후 병세가 급속히 약화되었는데도 약을 극구 거부했답니다.
기묘사화로 폐지되었던 현량과를 복구하고 조광조 등을 신원해주었지만 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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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 제대로 정사를 살피지 못했는지 1545년 위독해지자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물러주고 재위 8개월 만에 경복궁에서 죽었습니다. 인종이 사망하고 문정왕후
의 소생인 명종이 즉위하였는데 이를 두고 야사에 의하면 인종이 문정왕후
에게 독살 당했다는 설이 전해집니다. 정실을 독살한 정 난정의 성정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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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독살설이 추측가능하다고 봅니다. 능은 고양에 위치하며 생전 그의 지극
했던 효심을 기리는 뜻으로 능호를 효릉이라고 지었답니다. '효릉'은 왕릉 보존이
잘 된 무덤이지만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젖소개량사업소를 거쳐야 한다는
것 같아요. 꽃 피는 춘삼월이 되었으니 '효릉'으로 봄 마중을 나갈 생각인데,
문을 개방했다는 건지, 수목원처럼 죽의 장막을 쳐놓았다는 건지 누구 아시나요?
20123.3.4.sat.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