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산유화」에서 찾아가는 노자의 도경(道經)
https://youtu.be/dahiCuAL95A?si=U-2aSiyNJzZ0zmdZ
항해(航海)하는 군함( 軍艦 )레이더
에 표적(標的)이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다-」하고 말한다.
TV 모니터도 영상(映像)이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않 보여-」라고 말한다.
「영상(映像)」만이 「있는」 것이 되고, 「모니터 화면(畵面)」은 「무시되고 없는」 것 - 텅 비어 있는 공허(空虛)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모니터 화면」이라는 막(幕)이 없으면 영상(映像)은 당연히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즉 「현상 - 유(有)」라는 존재가 있기 위해서는 「없는 (無)」것인 막(幕)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노자(老子) 도경(道經)의 1장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 名天地之始, 有, 名萬物之母, 故常無, 欲以觀其妙, 常有, 欲以觀其 ,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도를 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참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참 이름이 아니다. 무명은 천지의 시작이요, 유명은 만물의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상모로써
그 묘를 보려하고, 상유로써 그 요를 보려한다. 이 양자는 같은 근본에서 나왔으나 그 이름을 달리한다. 이것을 한 가지로 말할 때 현이라 한다. 현하고 현한데, 이는 중묘의 문이다.》
모든 삼라만상(森羅萬象)은 그 이름을 달려 존재한다.
그 「유명(有名)」- 이름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유명(有名)」이 있기 위해서는 그 바탕으로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에 그것을 이름 없는 것이라고 「무명(無名)」혹은 헛것(空)이라 칭하였다.
TV에서 보이는 영상(現象)들은 「유명(有名)」이 되고 모니터는 「무명(無名)」이 된다.
따라서 영상(映像)을 보고 그 막(幕)이 있음을 유추(類推)하듯 우주 자연도 「유(有)」를 보고「무(無)」 가 있음을 깨닫는 지혜(知慧)가 있어야 한다.
「유(有)에서 무(無)」로 둘의 관계(相關)와 얽힘이다.
수레「바퀴」를 보자.
바퀴 는 중심 축(軸)에서 나온「30 개의 바퀴 살」이 테투리를 바치고 있는데 그 바퀴 살 사이는 틈새-(空)-로 되어있다. 이 틈새를 바퀴 살로 채워 틈새를 모두 메꾸어 버리면 바퀴는 오히려 쓸모가 덜해진다.
「물병」을 보자.
이름을 보고는 그 생김새를 연상하겠지만 실제 물병의 쓸모는 그 생김새의 빈 곳 - 허공(虛空)에 물을 담는 것이다.
「유(有)」에서 그 근거와 쓸모가 되는 「무(無)」가 있음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오히려 보이는 「유(有)」보다 보이지 않는「무(無)」가 중요한 것이 된다.
도경(道經) 11장
三十輻共一 , 當其無, 有車之用, 선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삼십폭공일 당기무 유차지용 선식이위기 당기무 유기지용
※《十一. 三十輻共一 , 當其無, 有車之用, 선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유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삼십개의 바퀴살이 한 바퀴통에 꽂혀 있으나 그 바퀴통의 빈 것 때문에 수레의 효용이
있는 것이며, 찰흙을 빚어서 그릇을 만드나 그 가운데를 비게 해야 그릇으로서의 쓸모가 있으며, 문과 창을 뚫어서 방을 만드나 그 방안이 비어 있어야 방으로서의 쓸모가 있
다. 그러므로 유로써 이롭게 하는 것은, 무로써 그 용도를 다하기 때문이다.》
삼라만상의 존재(有)를 있는 바대로 받아들이는 자세(姿勢)를 「무위(無爲)라 하고,
그 존재(存在)를 인간의 의지(意志)로 변경시키는 것을 「유위(有爲)」라 하며,
소유(所有)하려는 「유위(有爲)」의 노력을 경계(警戒)했다.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인간은「저만치 혼자서-」피어 있는 산유화(山有花)를 관상(觀賞) -그냥 놔두고 즐기려하지 않는다.
「물망초(勿忘草)」의 연사(戀事)를 보듯 모두 자기 것으로 소유(所有)하려고 시도(試圖)를 꾀하는 것이다.
이「소유(所有)」의 욕심이 인간 세계 분란(紛亂)의 모든 원인(原
因)이 되는 것이다.
노자(老子)가 공자(孔子)를 질책(叱責)한 것은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주제에 세상을 구하겠다고 부질없이 헛된 발버둥을 치는 어리석음을 지적한 것이다.
먼저 무위(無爲)의 안목(眼目)으로 만상(萬象)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여기서 무위(無爲)라는 것은 방관(傍觀)이나 불로(不勞)가 아니다.
저 우주(宇宙)와 인간(人間)의 원리(原理)가 유(有)의 바탕으로 무(無)가 있음에 「유위(有爲)」를 꾀하기 전에 그 바탕인「무위(無爲)」의 철리(哲理)를 터득하라는 것이다.
그 근본을 알고 물꼬를 터야 그 물줄기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봄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쳐 몰랐어요
사시 장철 돋던 저 달은 「무위(無爲)의 마음에서 볼 적에는 「그리움」도 「설움」도 자아내지 않던 그냥 존재로의 대상(對象)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유위(有爲)」의 마음을 갖고 대하니「예전엔-」 미쳐 몰랐던 온갖 상념(想念)이 생기는 것이다.
소유(所有)의 「작위(作爲)」가 도로(徒勞)가 되어 그 본 바탕을 어지럽힌 것이다.
● 산 유 화 (山有花)
- 김 소월(素月) -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요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없이
꽃이 지네
■ 예전엔 미쳐 몰랐어요
- 김 소 월-
봄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쳐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은
예전엔 미쳐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 볼 줄을
예전엔 미쳐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줄을
예전엔 미쳐 몰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