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 나의 힘/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시 읽기> 질투는 나의 힘/기형도
기형도 시인이 이야기하는 ‘질투’의 의미는 무엇일까? 질투는 타인에 대한 시기심이다. 타인이 갖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우리는 타인에게 질투를 느낀다. 그러니까 질투는 타자를 향한 욕망의 다른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시의 제목은 질투라는 욕망을 대하는 시인의 생각을 드러낸다. 시인은 질투를 이야기하기 위해 우선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다.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에 표현된 대로, 시인은 자신의 마음속에 스며든 수많은 욕망으로 하여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다. 구름 밑을 쏘다니는 개가 공중에서 머뭇거렸다는 역설에 주목해 보자. 질투란 게 원래 그런 것 아닌가. 발은 땅을 딛고 있는데, 생각-욕망은 공중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그러니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라는 시적 진술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땅을 딛고 있어야 할 존재가 공중에서 머뭇거리면 어떻게 될까? “살아오는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는 장면에 그 모습이 나와 있다. 언뜻 ‘공중’은 희망의 단서를 표출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 시에서 시인이 머뭇거리는 공중은 토대가 없는 이상의 공간에 불과하다. 살아온 날을 기록하는 존재는 어리석게도 이러한 ‘공중’에 얽매여 있다. 공중에 얽매여 있다는 것은 땅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라고 시인이 탄식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희망의 내용이 질투뿐이었다면 희망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질투는 타인을 향한 ‘질투’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시인이 꿈꾸는 희망의 내용은 타인의 욕망에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다. 자신이 꿈꾸는 세계가 나의 세계가 아니라, 타인의 세계라는 이 엄청난 깨달음이 시인을 또 다른 ‘질투’의 세계로 이끈다. 이런 점에서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시인의 선언은 그 자체로 아이러니하다. 질투가 나의 힘이 된다면 나의 세계는 사라져버린다. 시인이 이 점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그는 왜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제목을 시에 붙인 것일까?
시인은 시의 말미에 짧은 글을 남긴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그가 미친 듯이 찾아 헤맨 사랑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허공에 있는 사랑을 찾아 헤맨 것이 그의 사랑의 방식이었다면, 그가 찾는 사랑은 이미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는 이 세상에는 없는 사랑을 찾아 헤맸다. 미친 듯이 찾아 헤맨 결과가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이 사실 앞에서 시인은 경악한다.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점을 시인은 그러한 경악의 감정 속에서 깨닫는다. 질투는 스스로 사랑하지 않는 자의 감정이다. 그것은 허공에 집을 만들어 타인의 것에 ‘집착’하는 존재들을 유혹한다. 유혹을 당한 존재에게 허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것은 그에게 미친 듯이 찾아 헤맬 만한 세계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 이면에서 기형도는 질투에 빠진 자신을 본다. 질투에 빠져 자신의 마음속에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워 무언가를 끊임없이 기록하는 자신의 맨얼굴을 본다.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은 존재는 이렇게 질투밖에 남지 않은 자신의 삶과 직접적으로 대면한다. 내 마음의 텅 빈 자리를 가득 채운 것이 타인의 욕망이라는 놀라운 진실 앞에서 시인은 탄식을 하며 글을 쓴다.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시의 제목은 그러므로 역설적이다. 질투는 내 욕망의 기원을 알려주는 감정의 기호이다. 한편으로 질투는 욕망의 바깥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는 희망의 기호이기도 하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서나 깨닫게 될 이 진실을 시인이 지금 언어로 기록할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것은 그만큼 기형도의 시적 감각이 민감하다는 점을 에둘러 드러낸다. 그 누구보다도 예민한 감각으로 시인은 자기의 내면을 지배하는 질투의 감정을 묘사한다. 그것이 덧없는 걸 알면서도 그는 질투라는 감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질투가 없으면 시를,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일까? 기형도 시의 역설은 바로 질투에 대한 이러한 역설적 의미망 속에서 생성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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