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이동 시쟁이들 / 임보
우이동 시쟁이들 참 멍청해 그 좋은 부귀공명 꿈도 못 꾸고 저승도 시 없으면 못 갈 사람들
마당 한 귀퉁이에 연잎을 띄워 놓고 인수봉 손짓하며 소줏잔 권하는 황소보다 천진한 채희문 시인
산과 바다와 섬들을 품어다가 방 속에 가둬 놓고 혼자서 웃는 유유자적 만년 소년 이생진(李生珍) 시인
세이천(洗耳泉) 오른 길에 더덕밭 일궈 놓고 난초 아내 매화 아들 떼로 거느리고 화주(花酒)에 눈이 감긴 홍해리(洪海里) 시인
우이동 시쟁이들 참 기똥차 보리밥 풋나물에 그리 살아도 강산풍월 쌓아 놓고 크게들 놀아.
오체투지(五體投地)* / 임보
승려들은 마른 손뼉을 치면서 선답(禪答)을 재촉하고
중생들은 종일 전신을 던져 예불을 드린다
사원의 마루는 무릎에 닳아 골골이 패었는데
오늘도 불상은 입을 열 기미가 없다
* 오체투지 라마교에서 전신을 땅에 던져 부처님께 예불을 드리는 의식
조장(鳥葬) / 임보
티벳의 어느 사원에서는 깃발에 경(經)을 적어 바람에 날리고 있었는데,
경을 읽은 바람들이 하늘을 푸르게 푸르게 채우고 있었는데,
천의 독수리들도 떠난이의 살점을 뜯어 그렇게 하늘로 날아
바람과 함께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미나리꽝에 연꽃 둬 송이 / 임보
어떤 사람은
만경창파(萬頃蒼波) 호숫가에 어떤 사람은 심산유곡(深山幽谷) 기암(奇巖) 밑에 또 어떤 사람은 정든 고향 땅 언덕 위에
별장을 짓고 초당(草堂)을 세우고 자연과 더불어 멋스럽게 산다고 하네
나도 꿈은 있네 이 풍진(風塵) 떨치고 돌아가고 싶은 곳 높지 않은 산 넓지 않은 들 골짝도 아니고 강도 아닌 비산비야(非山非野) 비강비곡(非江非谷)
사람들이 보아도 탐내지 않는 곳 미나리꽝에 연꽃 둬 송이 오동나무 가지 위에 까치 둬 마리.
우리들이 새벽 서울을 탈출하는 것을
어떻게들 알았을까?
아침 7시쯤 조치원 들판을 지날 때 일찍 깬 미루나무들이 도열해 서서 번쩍 번쩍 손을 흔들어 보였다.
우리가 황간쯤 달렸을 때는 날짐승들도 이미 그 소식을 알고 연변의 숲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 축포처럼 하늘을 가르고 솟아 올랐다
그리고 정오쯤 드디어 충무의 고갯마루에 오르자 아, 바다가 치마를 풀고 달려오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우리들 우이동 시인 몇이 며칠 무인도로 탈출한다는 것을 어떻게들 미리 알았을까?
더운 바다 / 임보
부지섬 보리밭에서 바라다보면
바다는 다 벗은 채 누워만 있고 조금살 주는 물에 미친 갈매기 청과부 모래펄 타는 몸살에 둬 개의 더운 섬이 젖무덤처럼 바닷살 사이로 솟아오르네.
주문진 새벽 바다 / 임보
동해 바닷가에서
밤을 새워 술을 마셔 보았는가? 주문진 갯가 횟집 다락에서 밤을 세워 바다를 마셔 보았는가? 그대들의 체중으로 바다는 절반쯤 기울고 그대들의 내장에서도 새벽 파도가 일어나는 그 소리를 들어 보았는가? 그걸 아직 모르면 시 쓰는 주태백이 그대 친구 몇 놈 데불고 해당화 필 무렵 한번 해 보게 한 보름쯤은 그대 몸에서 파도 소리가 철석일 거야 바다 바람이 일렁일 거야.
술잔 속에 빛나는 별 / 임보
시를 찾는다
시인을 찾는다 거만하고 서럽고 멍청한 그런 시 그런 시인을
묵은 잡지의 퇴색한 활자 속에서 혹은 서점의 먼지 낀 서가 한 구석에서 숨도 못 쉬고 억눌려 고꾸라져 있는 그를 문득 만나면 잃어버린 혈육을 다시 찾은 듯 전율을 느낀다
그런 날 밤이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그를 안고 술을 마신다 그가 설령 천리 밖에 살지라도 그가 설령 이 세상을 이미 등졌을지라도 우리는 함께다
내 술잔 속에 빛나는 별 그는 그렇게 내게 와서 나를 삼키고 간다.
숙맥 / 임보
어느 시인은 수상을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100년 후쯤은 이 시대 시인의 순수성이 수상의 경력으로 측정되리라고 생각해서 순수의 편에 서고 싶은 욕망 때문에서 였다.
그런데 그가 실수한 것은 수상거부를 그의 경력으로 기록한 것이었다.
100년 후의 한 거머리 비평가가 그의 이 기록 속에서 순수를 잃은 그의 저의를 캐낼 줄을 그는 미처 생각지 못한 순수한 숙맥이었다.
시인학교 / 임보
삼복염천 해변시인학교에 가면 팔도 시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데
비행기를 타고 오는 시인 자가용을 몰고 오는 시인 버스에 실려 오는 시인 시를 쓰는 시인들도 천차만별이데
어떤 놈은 호텔에서 뒹굴고 어떤 놈은 여관에서 묵고 어떤 놈은 민박으로 지내고 어떤 놈은 교실 바닥 신세 시 쓰는 놈들도 천차만별이데
청산유수 언변둥이 묵묵부답 거만둥이 허장성세 허풍쟁이 의기소침 못난쟁이
바람둥이 새침둥이 술고래 담배고래 대가 중견 조무래기
시인들은 많아도 시인은 없다고 구천동에 숨어 사는 시쟁이 한 놈 소주잔에 투덜대다 되돌아가데.
이른 봄 / 임보
얼음이 풀리고 있네 봄이 왔나 보네
아내는 양지밭에 의자를 내놓고 늙은 시에미 까치집 머리를 다듬고
세 번 떨어진 둘째딸 짱구는 저 몸만큼 큰 책가방 메고 <수석(首席)> 독서실로 떠나네
통장이 큰놈 민방위훈련 통지서를 놓고 간 다음 집배원은 결혼청첩장 둬 개 데불고 오네
강아지는 마당 귀퉁이 일찍 녹은 땅을 열심히 파고 나는 다락에 누워 늙은 두보(杜甫)의 수척한 시들을 더듬어 읽네
봄은 왔는데 아직 봄 같지 않네.
일상 / 임보
며칠만에 한번씩 프라스틱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뒤꼍에 흩어져 있는 개똥을 치우고 친구가 이민을 가며 맡겨 놓은 늙은 감귤나무와 능소화 화분에 물을 주고 아침 식후 30분에 테노르민* 한 알 먹고 낮에는 여기 저기 쏘대며 머리 큰 애놈들 앞에 놓고 국어 작문 가르치다 답답하면 우주통합론도 좀 시부렁대보고 저녁 되면 얼큰한 된장국에 밥 말아 먹고 큰 활자들만 뽑아 석간을 읽다가 심심하면 TV 돌려가며 흘러간 노래도 들어보고 11시쯤 홀로 매실주 한 잔 훌쩍이다가 시들해진 아내 엉덩이도 더러 만져보고.
* 테노르민, 혈압강장제
세상 벗기 / 임보
노모(老母)가 팔십에 이르러 세상을 뒤엎네
오줌도 똥도 무서워 않고 자시는 음식 곁에 나란히 놓네
고승들이 평생을 걸어도 만지기 힘든 탈속(脫俗)을
염불도 모르는 저 어른 어떻게 깨쳤을까.
어느 여름 일기 / 임보
절름발이 검둥이가 수캉아지 다섯 마리를 낳고
백목련이 푸른 잎들 사이에 시절도 모르고 둬 송이 꽃을 뽑아 올리다 말았다
누가 낮술을 하자고 불러내지나 않을가 기다리다
왕유(王維)의 시를 둬 편 더듬거리며 읽었다
구름은 떼로들 몰려 북한산 골짜기를 부지런히 넘어가고
아이들은 종일 시시덕거리며 수영장을 오르내리고 있다
금방 터질 것 같은 예감의 세상은 아직 그대로 있다.
가을엔 / 임보
가을엔 목관악기도 살이 오르나 보다 지난여름 어느 긴 오후엔 폐부의 맨 아래 골짜기를 겨우 적시던 대금의 저 산조가 이 밤에는 목까지 가득 넘치며 출렁이는구나
가을엔 동산의 달도 더 붉게 익나 보다 지난봄 어느 저녁엔 뜰에 나서야 드디어 밝던 그대 이마 위의 작은 사마귀 이 밤에는 감은 내 눈 속에서도 오히려 부시도다
가을엔 무딘 내 코도 맑게 트이나 보다 내 유년의 마른 식탁 위에 빛나던 금빛 토하젓 그 향긋한 냄새 이 밤에는 천리 반생을 거슬러 어느덧 먼 남도 따스한 개울에 벌써 닿아 있구나 이 혀는-.
식구 / 임보
청운산장 오르는 중턱쯤에 <샘터>라는 곳이 있는데 우물가에 포장 한 간 치고 물과 바람이나 마시고 사는 한 노파가 있는데 그 집 볕 밝은 뜰엔(뜰도 산이지만) 사람으로 치면 열네댓쯤 먹어 뵈는 토종 황구(黃狗) 한 마리와 또 사람으로 치면 예닐곱쯤 먹어 뵈는 어리디 어린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볕을 쬐며 놀고 있는데 그 괴가 황구 꼬리를 물고 귀찮게 굴어도 그냥 눈만 껌벅이며 날아가는 산새들이나 쳐다보고 있는 전생에 어느 절간 청직이나 해 묵었던 놈 같기도 한 고런 능청스런 개가 한 마리 있는데 주인 노파가 도토리 자루를 지고 숲에서 내려오면 동자놈 제 스승 맞듯 반갑게 달려가는데 글쎄 이 자리가 한 십여 백 년 전엔 이 식구들 서로 얽혀 살던 무슨 절이나 하나 서 있던 그런 데나 아니었는지 내 생각도 이리 달아오른 걸 보면 나도 옛날 그 뜰을 자주 기웃거려 보던 한 그루 물푸레나무나 아니었는지.
아들아
바람이 오거든 날아라 아직 여린 날개이기는 하지만 주저하지 말고 활짝 펴서 힘차게 날아라 이 어미가 뿌리내린 거치른 땅을 미련없이 버리고 멀리 멀리 날아가거라 그러나 남풍에는 현혹되지 말라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부드럽고 따스하지만 너를 차가운 북쪽 산비탈로 몰아갈 것이다 북풍이 오거든 때를 잃지 말고 몸을 던져 바람의 고삐를 붙잡으라 비록 그 바람은 차고 거칠지라도 너를 먼 남쪽의 따뜻한 들판에 날라다 줄 것이다 아들아 살을 에이는 그 북풍이 오거든 말이다 어서 나를 떠나거라 네 날개가 시들어 무디어지기 전에 될수록 높이 솟구쳐 멀리 날아라 가노라면 너의 발 아래 강도 흐르고 호수도 고여 있을 것이다 그 강과 호수에 구름이 흐르고 숲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을 잘못 보아서는 안 된다 그 환상의 유혹에 고개를 돌리지 말고 멀리 멀리 날아라 너의 날개가 다 빠지고 너의 몸이 다 젖어 더 날을 수 없을 때 네 눈 앞에 햇볕 따스한 들판이 보이거든 그곳에 내려라 그러나 아들아 거칠은 숲들의 마을은 피하거라 지금은 외롭고 삭막할지라도 인적없는 조용한 들판 우리들의 키보다 낮은 들풀들이 모여 사는 조용한 마을을 찾으라 네가 처음 발붙이기에는 그래도 아직 그들의 인심이 괜찮을 것이다 아들아 네가 처음 발디딘 땅이 물기 어린 비옥한 흙이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러나 지금껏 비어있는 좋은 땅이 너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기대하지 말라 이미 자리잡고 있는 이웃들의 틈에 네가 비집고 들어가야 할 것이다 아들아 인내와 겸손으로 새로운 이웃들의 이해를 얻도록 해라 어떤 이웃은 너의 발등을 밟고, 너의 등을 밀어내고 너의 팔을 비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만 다 거치른 것은 아니어서 어떤 이웃은 폭풍이 올 때 그들의 품에 너를 감싸주기도 하고 사나운 벌레들이 접근해 올 때 독을 뿜어 그들을 내쫓기도 할 것이다 아들아 네 이웃이 내게 어떻게 대하든 너는 그들을 사랑하며 참고 견디어 튼튼한 뿌리를 내리도록 해라 어느 날 밤 봄비를 맞아 네 키가 나만큼 자라면 다음 날 아침 네 이웃들의 낮은 어깨 위에 우뚝 솟아오른 너의 모습을 볼 것이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바로 네 이웃에 네 또래의 민들레 아가씨가 방글거리며 웃고 있는 것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민들레 아가씨가 주위에 보이지 않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라 기다리노라면 내일 아침쯤 아니 언제쯤엔가는 너처럼 그렇게 날아서 네 곁에 내려앉을 것이다 그러거든 아들아 서로 사랑하여라 하늘의 별들이 으스러지도록 사랑하여라 그리하여 너도 어른이 되어 예쁜 민들레씨들을 가지게 되면 나처럼 그렇게 너도 일러주거라 북풍이 오면 어서 멀리 멀리 날아가라고 따뜻한 새 세상 찾아 멀리 멀리 날아가라고 이것이 생명의 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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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보 시집 < 날아가는 은빛 연못 > 1994
自序
어떤 영화에 등장한 한 엑스트라가 소녀에게 들려준 동화 얘기다.
옛날에 이 근처에 큰 연못이 있었단다. 철새들이 겨울이면 떼를 지어 날아와 놀다 갔지. 그런데 어느 한겨울 밤 너무도 추운 적이 있었구나. 그래서 잠자던 철새들의 발이 그만 연못에 다 얼어붙고 말았단다. 그 가엾은 새들이 어떻게 되었겠니? 다 얼어죽고 말았을 거라고? 그런데 말이야 그렇질 않았어. 다음날 아침 사람들은 놀랍게도 하늘로 날아가는 연못을 보았지. 새들이 발에 매달고 날아가는 은빛 푸른 연못을……
이 짧은 동화는 나에게 눈물을 글성이게 한다. 연못을 달고 창공을 날을 수 있다면 얼마나 멋스러운 일이겠는가.
1994년 봄 林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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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韻詩堂, 시를 찾아서 원문보기 글쓴이: 동산
첫댓글 일기를 열심히 써라는 말을 여기서 느낍니다.
잘 보았습니다.
늘 활기차고 행복한 시간 이어 가시길 바랍니다